창세기 이야기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저희가 곧 첫 손주 볼 날이 다가와 며느리 배가 남산만 하고, 배에 손 대고 안수 기도하는 일들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잠깐, 이 ‘안수’의 의미를 말씀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
개역개정 성경으로는, 이 ‘안수’라는 키워드가 처음 나오는 데가 아래와 같습니다.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출29:10)
복음서에는 주님의 이 안수, 곧 손을 통한 접촉으로 병을 낫게 하시고, 고치신 기록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가령,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마9: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8:25)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7:33-35)
등, 이 외(外)에도 참 많지만 략(略)하고...
이 안수와 같은 ‘접촉’의 행위, 표현은 사실은 천국의 어떤 것에 대한 표상(表象)인데요, 그것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리’, 곧 ‘생명이 같으면 함께 결합, 교류, 교통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안수를 해도 왜 누구는 병고침을 비롯, 기도가 응답되는 반면, 누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이는 사실, 저의 오랜 의문점이었는데요, 이 천국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이런 비밀을 깨닫게 되었지요 ^^
안수 받는 자의 속 사람이 천국과 같은 심성, 천국과 같은 생명, 곧 주님의 선(the Divine good)과 공명(共鳴)할 수 있는 속 사람이어야 천국의 모든 것, 곧 주님의 생명과 능력, 권능이 그의 안에 흘러들어가 그를 고치며,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의 심성, 우리의 생명, 특히 기도 받는 며느리와 아들의 속 사람이 주님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 이 두 사람,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몸’이라 여겨지므로, 주의 종들의 모든 안수 통해 주님의 생명과 능력, 하늘의 권능이 아이 부모를 통해 아이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본문 시작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24번에서 26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창조 둘째 날입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아래는 위 본문말씀에 대한 아케이나이며, 중간중간 저의 설명을 덧댔음을 밝힙니다.
창조 첫째 날, 곧 거듭남 첫 번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으로 표현된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가 ‘낮’ 안에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을 낳으시고, 빛을 처음으로 주십니다.
‘낮’은 주님께 속한 것을,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은 리메인스(remains)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창1:5)
이 빛은 곧 주님이시며, 선 자체, 진리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어떤 구별을 두시는데요, 그 결과,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들(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들(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사이에 일종의 구별이 생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반면, 겉 사람 안에는 오직 사람으로,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반면, 겉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세상으로 말미암은 지식입니다. 특히,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은, ‘학습을 통해 머릿속에 저장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속 사람을 ‘궁창’(穹蒼, an expanse)으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로,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로 각각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 같은 게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속 사람 같은 내면세계는커녕, 오히려 겉 사람의 본성과 퀄리티 같은 거에 더 익숙해져 있지요. 그는 생각하기를, ‘속 사람, 겉 사람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합니다. 그 자신 이미 감각적이고 세속적인(bodily and worldly) 일에 푹 잠겨 있으므로, 속 사람 같은 내면의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이어서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십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말이지요.
이렇게 주님은 사람의 거듭남 그 초기 단계 때,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전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제 다음으로 관찰하게 되는 사실은, 먼저 속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선과 진리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미련함, 어리석음, 연약함과 그에 따른 오류 같은 것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선과 진리의 일들로 구부려지는 신비,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까지, ‘땅’에서 ‘하늘’까지 주님의 섭리 아래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 중 신비입니다.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통구와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또 주의 오심을 드러내어 말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오류나 틀린 생각을 바로잡으시지도, 재산이나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방향을 구부러지게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녁’, ‘아침’, ‘날’의 의미는 앞서 5절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오늘 중요한 메시지는, 사람의 거듭남 초기 단계 때, 이제 빛을 받은 단계에서 사람은 전에 안 하던 말과 행동, 곧 기특한 언행을 시작하는데, 그런데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안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 자기를 대견하게, 대단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찌 보면 좀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지요. 교회 안에도, 주위에도 제법 많습니다. 우리는, 아니 저는 전에는 그런 걸 바로 지적하고, 훈계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을 보니 주님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중 그런 단계가 있음을 감안하시고, 잠자코 다음 단계로 그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포함, 교인이나 주위 다른 분들의 그런 미성숙한 모습을 주님이 우리를 품으시는 것처럼 품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가 아직 미성숙할지라도 그의 안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속 사람,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음을 기억하고, 그의 겉 모습과 함께 동시에 영의 눈도 켜져서 그의 속 사람 또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거듭되는 넘어짐과 악습에 다시 발담그는 그런 연약함에도 불구, 주님이 나를 받으심 기억하시고, ‘아마 내일도, 모레도 나는 어쩌면 또 넘어지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나는 조금 더 성장한 상태에서 그러고 있을꺼야. 비록 계속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겠지만, 어제의 저녁과 아침이 아닌, 좀더 나아진, 좀더 위를 향해 나아간 중에 맞이하는 저녁과 아침일꺼야!’라고, 자신을 향해 긍정하는 그런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정도로 둘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을 주님,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환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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