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4-5, 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Verses 4, 5,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 4, 5절 속뜻
주님 신앙을 주님의 퍼셉션과 계시가 아닌, 감각과 자아, 세상 학문과 배움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 사람 기준으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고, 이후 자기 맘대로 살아가려 할 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감각과 지식, 곧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준 삼아 신앙에 관한 것을 헤아릴 경우, 분명히 말하지만, 오히려 신앙에 관한 게 잘못되었다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은 만일 그들이 그런 짓, 곧 스스로를 기준 삼아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스스로를 인도하려 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대신 오직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있습니다. 앞선 구절들에는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졌음에도 그들, 곧 그 당시 교회는 자신들의 상태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걸 지각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반면, 이 구절들에는 막 시작된 의심, 곧 자신들이 볼 땐, 이들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인데, 합법적이지가 않다(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자신들의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봤을 땐, 자신들이 그동안 선대로부터 들어온 것들, 곧 주님과 천국,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 교리들이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더 눈이 멀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우리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 교리 중심으로만 살아왔구나. 실제 세상 지식과 감각 경험은 전혀 다른데...’ 하는, 그리고 결국 이런 식의 자기 사랑,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깊어지면서(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그들은 ‘이 정도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기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게 자기 사랑의 본질인데요, 이는 주님 따르는 건 꺼리고, 대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to be self-guided) 걸 더 선호하며, 믿음 관련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컨설팅하기 위해 혼자 알아서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 이 글 번역은 특별히 쉽지가 않아 여러 날 걸렸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풀어 번역했습니다.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 이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믿음(a stronger belief)을 가진 걸까요? 그러나 사실은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그들에게 단지 질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하며,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스스로를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 믿으며, 주님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좀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어떤 최고의 존재(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가 만물을 다스리지만,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 일들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입증할 때 사용하는 원리들(the principles)이 있는데요, 그들은 맘만 먹으면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남에게 신(神, gods)처럼, 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their own) 가운데 없는 게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다고, 다만 자신들의 본성 전부를 잃게 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고 대답들을 할 겁니다.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And yet who are more blind?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 조금이라도 영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후 자기 영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에게 맨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정작 그가 자기 영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며, 관심조차 없고, 그저 철저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만 하다면, 이 사람에겐 가장 시급한 질문이 바로 이 영, 다른 말로는 그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자연 상태로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얼른 주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새로운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건 일종의 환상(a fantasy)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conscience)이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 속 산물로서, 천민들(賤民, the vulgar)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할 겁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 곧 종교 마니아들 간 사용하는 일종의 무슨 싸인 같은 거라고 할 겁니다.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 스베덴보리 시절인 1750년대 유럽의 영적 분위기가 이랬나 봅니다. 이 하나하나의 사례가 모두 스베덴보리가 직접 겪었던 사례이지 싶은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비롯, 거의 모든 기독교가 외적(外的, external) 사고, 즉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데,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겉’에 있습니다. 내적(內的, internal) 사고, 즉 ‘속’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말해도 거의 이해를 못 합니다.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open eyes)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gods)입니다.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것의 출발점 삼으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이성질(理性, reason)을 하는데요,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the serpents)인 것입니다만,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건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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