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논의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AC.72까지가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예고하는 문턱이었다면, AC.73은 이제 그 영원한 삶 안에서도 ‘삶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깊어지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을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도 분명한 단계와 질서, 그리고 성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죽어있음’은 무엇보다도 ‘영적 무감각과 분리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 땅에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수 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영적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후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이 된 뒤에, 그다음 단계로 ‘천적 인간’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많은 신학적 전통에서는 영적 상태 자체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상태는 ‘중간 단계’입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신앙의 질서 안에 들어선 상태는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준비된 상태입니다.

 

천적인 상태란, 진리를 ‘아는 상태’를 넘어, 선을 ‘사는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이 주로 이해와 분별의 차원에 서 있다면,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상태에서는 진리가 앞서고 선이 그 뒤를 따르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선이 중심이 되고 진리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담깁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사후에 자동으로 주어지는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영적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천적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통해 먼저 길이 열리고, 그다음에야 사랑이 그 길을 따라 깊어집니다. 이는 창1에서 빛이 먼저 창조되고, 그다음에 생명이 질서 잡히는 구조와 정확히 상응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1을 다루면서, 그 동일한 구조가 사후 삶과 거듭남의 내적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AC.73이 단지 일반론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 해설하고 있는 본문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창2:1에서 말하는 ‘다 이루어졌다’는 상태는, 단순히 영적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다음 단계인 천적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졌음을 포함합니다. 즉, 창2는 영적 인간을 넘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과 창2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장은 주로 영적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다루고, 2장은 그 영적 상태 위에서 ‘천적 삶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다룹니다. AC.73은 바로 이 전환점을 독자에게 명확히 짚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부터 읽게 될 내용은 더 이상 단순한 분별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오해를 조용히 바로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곧바로 완성된 상태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후 삶 역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이 땅에서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가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도 달라집니다. 사후 세계는 보상과 처벌의 무대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삶이 계속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결국 AC.73은 아주 짧은 문장 안에서, 창조–거듭남–사후 삶이라는 세 층위를 하나로 겹쳐 놓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이 질서는, 태고교회의 구조이자, 개인의 거듭남의 구조이며, 사후 삶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서를 지금부터 창2를 통해 차분히, 그러나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 가려 합니다.

 

 

 

AC.72, 창2 앞,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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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인 이정표’와 같습니다.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내용들을 본문 한가운데에 넣지 않고 장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는 그 설명을 실제로 실행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단순한 예고가 아니라, ‘글의 구조가 이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장의 끝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에 대한 설명을 말씀 해설의 중심부에 끼워 넣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에 둡니다. 이는 사후 삶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끝은 결론이자 독자가 지금까지 읽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삶의 실제로 연결시키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뒤에야, 그 말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말해도 좋다는 허락’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전히 자신을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설명하겠다’라고 말하지 않고,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AC.67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후 삶에 대한 이 설명은 흥미로운 부록도, 개인적 체험담도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지금 이 위치에 놓이도록 허락된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다시 한번 정의합니다. 그는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수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다른 삶 안으로 옮겨지는 상태입니다.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단순히 ‘다음 세계’나 ‘저 세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차원임을 뜻합니다.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삶의 참된 자리로 들어간다는 뜻이 됩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의 기대를 조용히 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어떤 극적인 장면이나 공포스러운 심판 이야기를 예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즉, 과정과 질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에 이어질 설명들이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질서 있는 묘사’가 될 것임을 미리 알려줍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다시 보면, 이 글의 위치가 얼마나 정확한지 분명해집니다. AC.67에서는 ‘왜 내가 말할 수 있는가’를 밝혔고, AC.68에서는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인간은 본래 그렇게 창조되었다’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라는 핵심을 제시했으며, AC.71에서는 ‘이 모든 것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72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말합니다. ‘이제 실제로 그것을 말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AC.72는 내용보다도 ‘전환의 의미’가 더 큰 단락입니다. 이 글을 기점으로, 아르카나는 추상적 전제와 선언의 영역을 지나,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사후 삶의 묘사’로 들어갑니다. 독자는 더 이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그러한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짧은 글은 마치 문턱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준비였고, 여기서부터는 실제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문턱 앞에서 독자에게 묻지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알립니다. ‘이제 말할 것이다.’ 그 말이 어떤 삶의 이해를 요구하게 될지는, 다음 단락들에서 점점 분명해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spiritual(영적)에서 celestial(천적)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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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이런 증언을 말씀 본문 앞뒤에 넣는 이유'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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