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5:28)

 

AC.527

 

여기서 ‘라멕(Lamech)이,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 너무나 일반적이고 흐릿하여 거의 없는 상태의 교회를 의미하며, 그 결과 황폐화된 교회를 뜻한다는 것은 앞 장인 창4에서 말한 내용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앞 장에 나오는 ‘라멕(Lamech) 역시 이곳의 의미와 거의 같은데, 곧 황폐화를 뜻합니다 (4:18, 19, 23, 24 참조). 또한 그를 낳은 자의 이름도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 ‘므드사엘(Methusael)이라 불리는데, 이름들이 의미하는 바도 서로 거의 같습니다. ‘므드사엘’과 ‘므두셀라(Methuselah)는 곧 죽어 가는 것을 의미하고, ‘라멕’은 파괴된 것을 의미합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a church wherein the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was so general and obscure as to be next to none, consequently a church vastated, appears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from what follows in the next verse. “Lamech” in the preceding chapter has nearly the same signification as in this, namely, vastation (concerning which see Gen. 4:18, 19, 23, 24); and he who begat him is also called by nearly the same name, “Methusael,” so that the things signified by the names are nearly the same. By “Methusael” and “Methuselah” is signified something that is about to die; and by “Lamech” what is destroyed.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8-19, 23-24)

 

 

해설

 

이 글은 라멕으로 대표되는 교회 상태가 왜 태고교회의 ‘’으로 규정되는지를 결정적으로 설명해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한 장 안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창세기 4장과 5장을 가로질러 동일한 이름들이 반복 사용되는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름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같은 종류의 영적 상태가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앞 장의 라멕과 여기의 라멕은 서로 다른 개인처럼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거의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곧 ‘황폐화’입니다. 여기서 황폐화란,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던 퍼셉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와 선은 기억 속에는 남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삶을 이끄는 내적 빛이 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황폐화가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이름 자체를 통해 보여 줍니다. ‘므드사엘’과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모두 ‘곧 죽게 될 것’, ‘소멸을 앞둔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이미 생명의 끝자락에 와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라멕의 교회는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가던 상태가 마침내 파괴에 이른 결과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는 ‘곧 죽을 상태’를, ‘라멕’은 ‘이미 파괴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끝을 향해 가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종말이 단절이 아니라, 단계적인 쇠퇴의 완결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오늘날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묵직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것은 외형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도 있고, 말씀이 있고, 제도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분별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내적 능력이 사라질 때, 그 교회는 이미 황폐화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라멕의 교회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황폐화는 심판 이전에 이미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갑작스러운 멸망이나 임의적 심판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상태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태고교회의 마지막이 단순한 실패나 타락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영적 역사에서 하나의 시대가 그 역할을 마치고 물러나는 장면임을 보게 됩니다. 퍼셉션의 시대는 여기서 끝났고, 이후의 인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AC.527은 라멕을 정죄하는 글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결을 정확히 짚어 주는 평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를 가지고 다음 절로 넘어가면, 노아의 등장이 훨씬 더 필연적이고도 의미 있게 다가오게 됩니다.

 

 

 

AC.526, 창5: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AC.526-527)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And Lamech lived a hundred eighty and ten years, and begat a son. (창5:28) AC.526 여기서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에서는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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