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번 영상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여러 부자들을 한데 묶어 ‘가진 부자’와 ‘나누는 부자’를 대비시키고, 재물은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축적하면 이름 없이 사라지지만, 삭개오와 아리마대 요셉처럼 자신의 소유를 이웃과 주님을 위해 사용하면 그 이름이 말씀 안에 남는다는 것이 영상의 중심 논지입니다. 이러한 권면은 사회적, 도덕적 차원에서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쌓아 두는 삶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삶이 복음에 더 가깝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누가복음의 부자 이야기는 단순히 돈을 가진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의 대비를 넘어,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한 더 깊은 영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재물’은 자연적 의미로는 돈과 소유를 뜻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곧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부요를 뜻합니다. 따라서 부자라고 해서 곧 악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선한 용도로 사용한다면 그 재물은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말씀 지식과 교리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자기 명예와 우월감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이웃을 깨우고 돕는 데 사용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선한 부자입니다. 반대로 성경 지식과 교리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의와 권위를 쌓는 데만 사용한다면, 그는 자연적으로 가난 여부와 상관없이 영적으로는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12의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풍성해지자 곡간을 더 크게 짓고, 자기 영혼에게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합니다. 영상에서는 이 부자의 문제를 나누지 않은 데서 찾습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깊은 문제는 그가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겼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내 곡식’, ‘내 곡간’, ‘내 물건’, ‘내 영혼’이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단지 재산의 독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돌리는 proprium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재물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을 때, 영적으로 곡간을 크게 짓는 자가 됩니다. 지식을 더 많이 쌓고, 교리를 더 많이 정리하며, 업적을 더 크게 만들지만,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과 자기 안전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6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단순히 부자는 지옥에 가고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부자’는 진리와 선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가난한 사람’은 그러한 지식이 부족하지만 그것을 진실하게 갈망하는 사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도 자기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나누어 주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조차 얻지 못한 나사로는 말씀의 참된 가르침을 갈망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의 자기중심적 교리와 권위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돈을 주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영적 양식을 이웃과 나누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나사로가 천국에 간 이유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믿음을 단지 입술이나 교리적 동의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하나이며,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것은 그가 단순히 가난했기 때문도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을 말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나타내는 내적 상태, 곧 선과 진리를 겸손히 갈망하는 상태가 천국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자가 음부에 간 것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사랑 속에서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선과 진리를 삶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후에는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18의 부자 관원은 겉으로는 매우 반듯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고 영생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중심 사랑을 건드리시자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보편 명령만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자기가 소유했다고 믿는 선과 진리를 자기 공로로 여기지 말고, 그것을 주님께 돌리며, 진리를 갈망하는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부자 관원의 문제는 재물 그 자체보다 재물에 붙들린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계명은 지켰지만, 그 계명을 통해 자기 의를 쌓고 있었으며,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중심을 내려놓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버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강한 비유입니다. 영상은 ‘바늘귀’를 예루살렘 성문 옆의 작은 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이 설명에 지나치게 의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핵심은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애써 통과한다는 자연적 장면보다, 자기 소유와 자기 공로에 붙들린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묻자 주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답하십니다. 구원은 인간이 재물을 조금 더 나누어 주어서 얻는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어 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삭개오는 앞선 세 부자들과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영상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변화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감동적인 해석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에서 ‘’은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다는 것은 주님이 그의 삶의 중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삭개오는 돈을 버린 사람이 되었다기보다, 돈을 사랑의 주인 자리에서 끌어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그는 ‘가난해진 부자’가 아니라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부자’입니다.

 

삭개오가 소유를 나눈 것은 구원을 사기 위한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결과로 그의 삶의 질서가 바뀐 것입니다. 먼저 주님이 그의 집에 들어오셨고, 그다음 재물의 쓰임이 달라졌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돈을 나누었다고 자동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기부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재산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람의 중심 사랑을 바꾸실 때, 재물은 자기 과시와 자기 안전의 수단에서 이웃을 위한 유용성의 수단으로 바뀝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외적 나눔만이 아니라, 그 나눔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리마대 요셉 역시 재물을 선한 용도에 사용한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시신을 위해 자기의 새 무덤을 내어 드렸습니다. 자연적 차원에서 보면 매우 귀하고 값비싼 소유를 주님께 드린 행위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무덤’은 단순한 죽음의 장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장사와 부활의 문맥에서는 이전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경계를 나타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의 마지막 지상 여정에 내어 드렸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소유와 능력과 지위를 주님의 신적 목적에 복종시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지만, 주님의 일을 섬기는 데 사용될 때 거룩한 쓰임 안으로 들어갑니다.

 

영상은 이름 없는 세 부자와 이름이 기록된 삭개오와 아리마대 요셉을 대비합니다. 이 대비는 설교적으로는 인상적이지만, 성경의 ‘이름’은 단순히 착한 부자는 이름이 기록되고 악한 부자는 이름이 지워진다는 식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사람의 본질과 성품, 곧 그가 어떤 사랑과 신앙을 가진 사람인가를 나타냅니다. 삭개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의 자연적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의미보다, 그의 변화된 영적 성품이 말씀의 표상 안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름 없는 부자는 개별 인물 한 사람이라기보다,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보편적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떡을 떼실 때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장면도 단순히 ‘나누면 예수님이 보인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 ‘’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떡을 떼어 주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선과 생명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떡을 떼실 때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사람이 단지 진리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삶으로 행할 때 비로소 주님을 참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눌 때 예수님이 보인다’는 말은 맞지만, 그 나눔은 단지 물질을 나누는 데 국한되지 않습니다. 용서, 진리, 위로, 시간, 섬김, 책임, 정직, 유용한 일을 나누는 모든 체어리티의 행위 안에서 주님은 나타나십니다.

 

영상 전체의 가장 큰 장점은 재물의 소유보다 쓰임을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재물의 선악은 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사용하는 방식에서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부유하더라도 재물을 유용한 일을 위해 사용하고, 그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며, 이웃의 삶을 살리는 데 쓴다면 재물은 선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하더라도 끊임없이 재물을 탐하고 부자를 미워하며, 자기중심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가난 자체가 사람을 천국에 가깝게 하지는 않습니다. 천국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재산의 액수로 나누지 않고,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쓰임을 행했는가에 따라 구별합니다.

 

다만 영상은 ‘나누는 행위’ 자체를 다소 직접적으로 구원과 연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선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선행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재산을 많이 나누어 주고도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도 그들을 지배하려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단지 무엇을 주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어떤 동기에서, 어떤 지혜로 주었는가를 포함합니다. 선은 진리와 결합되어야 하며, 사랑은 지혜로운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다섯 부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정리하면, 첫째 부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쌓아 둔 사람이고, 둘째 부자는 영적 양식을 갈망하는 이웃을 외면한 사람이며, 셋째 부자는 외적 계명은 지켰으나 자기 소유와 자기 공로를 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반면 삭개오는 주님을 마음의 집에 영접함으로써 재물의 질서를 바꾼 사람이고,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가장 귀한 소유를 주님의 목적에 내어 드린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재산을 보유했는가 처분했는가의 차이가 아니라, 재물과 지식과 능력의 주인을 누구로 인정했는가의 차이입니다.

 

이 영상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다듬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구원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으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선과 진리를 자기만을 위해 쌓아 두는가, 아니면 그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영적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핵심을 한마디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참된 나눔은 소유의 일부를 내어놓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사랑이 차지하던 마음의 자리를 주님과 이웃에게 내어 드리는 데서 완성됩니다.’

 

 

 

SY.13, ‘지구엔 3명뿐인데... 넌 누구냐? 가인의 아내의 정체’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영상은 창세기 4장에 나타나는 여러 ‘침묵’을 중심으로 매우 흥미로운 추론을 전개합니다. ‘가인의 아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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