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리(doctrine of faith)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12:28-35; 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 신앙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한 단어로 말하면 ‘체어리티’입니다.

 

첫 문장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풀어 설명하면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신앙의 교리’를 함께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여러 사실을 배우며, 그것을 이해하고, 서로 연결하여 교리로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교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그 답이 바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과 용서, 겸손과 정직에 관하여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그의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AC.344의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표현에는 거듭남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해 우리의 사랑과 의지,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시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거듭남의 수단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상징했습니다. AC.344는 그 흐름을 교리적으로 다시 설명하는 셈입니다. 신앙은 신앙으로 끝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고, 그 삶 안에서 체어리티가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 옆에 놓인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모든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중심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배우고, 주님에 관하여 배우고, 말씀과 계명, 그리고 천국에 관하여 배우는 것도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막12:28-35와 마22:34-39을 인용합니다. 두 본문 모두 모든 계명의 중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마22:37-40에서 주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한 것은 자신의 독자적인 윤리적 주장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사랑으로 모으신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고 해서 신앙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선의나 감정만으로는 참된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에게 무엇이 선인지 가르치고, 그 선으로 가는 길을 밝혀 줍니다. 다만 길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진리가 길이라면 체어리티의 삶은 그 길이 우리를 데려가야 할 곳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앤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떼어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가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벨은 바로 그 잃어버린 목적을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양 치는 자’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과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두 요소가 서로 갈라진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주어진 것인데,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자체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대단히 강합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 부족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해도 그것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데려가지 못한다면, 영적인 관점에서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가인의 ‘분리’를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비유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잘 사랑하며 살기 위해 ‘부부생활 준수 사항 20가지’를 만들었다고 해 봅시다. 처음에는 그 규칙이 사랑을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사라지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고, 당신은 16개밖에 지키지 않았다’는 계산만 남는다면, 규칙은 남아 있어도 그 규칙이 존재했던 목적은 사라진 것입니다. 규칙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규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정확한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사람을 자기 교리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 따라 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44는 ‘교리가 중요한가, 체어리티가 중요한가?’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는 무엇을 위해 중요한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답이 ‘체어리티’입니다.

 

이 점은 AC를 읽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등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놀랍고 귀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더 온유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이웃의 선을 더 바라게 하고, 주님께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 역시 목적지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4의 핵심은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가 아닙니다. 훨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억 지식(scientia)과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교리(doctrina)는 모두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람은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그의 삶의 성질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AC.344는 가인의 오류를 가장 근본적인 자리에서 드러냅니다. 가인은 신앙을 너무 귀하게 여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라는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참된 신앙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무엇을 믿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그 믿음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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