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 역시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인데, 그의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그가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뜻일까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AC.99자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신앙을통하여그의이해와이성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안으로흘러드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집혀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의 근원은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흘러드는 실제 질서와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퍼셉션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웁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는데도,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내가배우고,내가생각하고,내가추론하여이해하게되었다’는 방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AC.99이 말하는 ‘뒤집힘’은 우선 이 질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과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 질서대로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잘못된사람’과 ‘올바른사람’, 또는 ‘낮은사람’과 ‘높은사람’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AC.99가 강조하는 차이는 주님의 유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앞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더 이상 거꾸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러한 것으로 퍼셉션됩니다.
따라서 ‘뒤집혀있다’는 표현 때문에 영적 인간의 신앙과 이성, 기억지식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99는 그것들 안에도 이미 주님께서 흘러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그 유입의 근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퍼셉션됩니다. 바로 이 회복된 생명의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흘러드는 사람을 스베덴보리는 ‘동쪽에덴에있는동산’이라 합니다. (AC.99심화1)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흙으로사람을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신 것이며,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사람이아니었다’고 합니다. 겉 사람도 분명 그 사람의 일부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먼저 이것은 그 사람이 이전까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4의 문법상 ‘이전에는사람이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앞의 ‘그의겉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로 창2:5의 ‘지면을경작할사람이없었다’는 말씀을 듭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인간이언제인간이되었는가?’가 아니라 ‘왜겉사람을아직사람이라고하지않는가?’에 있습니다.
그 답을 이해하려면 AC.90-93의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의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여기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겉 사람이라는 기능이나 기관이 처음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지칭하는 말보다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겉 사람은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 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아직 AC.94가 말하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에 따라 활동할 때 비로소 겉 사람도 살아 있는 인간적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겉 사람을 멸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AC.94의 마지막은 ‘그의겉사람도생명을얻게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과 외적인 삶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사람이아니었다’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됨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람 안의 어떤 것이 단지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해서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하나의 질서 안에서 활동할 때, 겉 사람까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2:5의 ‘지면을경작할사람이없었다’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면’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연결되고, 이제 그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형성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 어느 한 부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겉 사람과 실제 삶까지 생명 있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94심화1)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곧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심화1)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이것을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0-91에서 천적 인간에게도 겉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들의관목’과 ‘들의초목’, 곧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C.91의 표현 그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섬기려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AC.81은 영적 인간이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AC.84-87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 뒤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온다고 했습니다. AC.91은 이제 그 싸움이 인간 안에서는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저항과 싸움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며, 그 결과 겉 사람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즉 겉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그것을 바깥의 삶 가운데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은 겉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섬김’ 역시 인간의 몸과 감각, 이성, 기억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기능하게 됩니다. 겉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에서는 천적 인간이 겉으로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굴복당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 안의 바람 자체가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결국 AC.91의 ‘순종하고섬긴다’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안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아직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에 따라 활동합니다. 그때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은 겉 사람이 사라져 얻는 안식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놓임으로써 얻는 안식입니다. (AC.91심화1)
AC.90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겉 사람을 두고도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한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겉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 명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이 차이는 AC.89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와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 곧 ‘땅’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겉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AC.90에서 그 달라진 상태의 겉 사람을 ‘지면’과 ‘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 ‘지면’, ‘들’이라는 세 단어에 언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의미표를 만들라는 뜻은 아닙니다. AC.90이 직접 알려 주는 것은 현재의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힌 범위 안에서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지면’과 ‘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 줄까요?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제 그 ‘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산출됩니다. AC.90은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이라고 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받아 산출하는 영역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AC.91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자 거기에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됩니다. 따라서 ‘지면’과 ‘들’은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생명 있는 것을 산출하는 겉 사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지면’과 ‘들’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을 단순한 어휘 변화로 볼 수 없습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고, 그 결과 겉 사람도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겉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그곳에서 흘러오는 생명과 평온을 받아 열매 맺는 ‘지면’과 ‘들’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땅은언제나영적인간의겉사람이고,지면과들은언제나천적인간의겉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과 주제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90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이 문맥에서 겉 사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말씀의 표현도 ‘땅’에서 ‘지면’과 ‘들’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AC.90심화1)
레8:23-24는 제사장 위임식 가운데 가장 낯설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왜 하필 이 세 곳이며, 왜 모두 오른쪽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원전이 놀라울 만큼 구체적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60(출29:20)은 위임식 숫양의 피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 곳에 발라지는 것은 같은 신적 진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AC.10061(출29:20)은 오른쪽 귓부리를 해설합니다. 귀는 ‘지각’을 의미하며, 특히 오른쪽 귀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지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른쪽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에 피가 발라지는 것은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속에서 지각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다음은 오른손 엄지입니다. AC.10062(출29:20)는 엄지손가락이 선을 통한 진리의 능력,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가진 힘과 그로부터 생기는 이해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손은 능력과 행동을 나타내며, 엄지는 손의 힘을 대표하는 끝부분입니다. 귀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이제 이해와 능력, 그리고 행동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오른발 엄지입니다. AC.10063(출29:20)은 이것을 가장 바깥 천국에 해당하는 이해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머리와 그 기관들이 가장 안쪽 천국에, 몸과 손이 중간 천국에, 발이 가장 바깥 천국에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손·발은 단순한 세 신체 부위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전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것을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매우 실제적인 의미가 나타납니다. 진리는 먼저 귀로 ‘들려야’ 합니다. 그러나 들었다고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와 능력으로 내려와 손에서 행해져야 하고, 다시 가장 바깥 일상의 삶으로 내려와 발이 걷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안다’와 ‘말씀대로산다’ 사이에는 귀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는 것은 귀의 단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해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손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돈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운전하고, 일하고, 가족과 살아가는 일상의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발의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곳 모두 ‘오른쪽’이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오른쪽은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진리를 듣고 이해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레8의 피는 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손을 지나 발까지 내려갑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는 우리의 가장 안쪽 지각에서 시작하여 이해와 행동을 지나 가장 바깥 일상의 삶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겉 사람의 삶까지 질서 있게 할 때 거듭남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위임식의 본질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은 진리를 잘 듣는 사람만도 아니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만도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선에서 이해하며, 손으로 행하고, 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른쪽 귀와 손과 발에 같은 피가 발라진 것은 한 사람 전체가 신적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SWC.레8심화3)
레5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일을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실제 손상이 발생했다면 실제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를 마음의 상태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잘못했다는것을깨달았고하나님께용서를구했으니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질서에 실제 손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은 여전히 상대에게 없고, 거짓말로 훼손된 명예는 여전히 손상되어 있으며, 내가 회피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가능한 경우 그 손상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에서 속건제는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제사입니다. 회개가 진실한지는 감정의 강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많이 흘리고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크지 않아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다시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5의 속건제는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분의일을더하여’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해지는 오분의 일을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또는 조금을 의미하는 사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8(계9:5)은 레5:16을 비롯하여 율법에서 오분의 일을 더하도록 한 여러 경우를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이 ‘오분의일’이 ‘충분한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단순한 고대의 벌금제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잘못을 대충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태도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잘못에는반드시20퍼센트를더갚아야한다’는 식으로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의 핵심은 숫자를 현대의 계산식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가 최소한의 면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과했으니됐지’, ‘원금은돌려줬으니됐지’가 아니라 내가 일으킨 손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바로잡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손상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직접 사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는 진실을 선택하며, 과거에 해쳤던 종류의 이웃을 이제는 돕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과거 복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 안에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5에서 ‘자복’과 ‘보상’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복은 속의 인정이고 보상은 가능한 경우 그 인정이 겉의 삶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속 사람에서 ‘내가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이 겉 사람의 행동에서는 ‘그러므로내가바로잡겠습니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입니다.
레5의 속건제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용서를구한그일가운데아직내가바로잡을수있는것이남아있는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가능한 것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에서 시작된 회개가 ‘잘못을보상하되’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레5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SWC.레5심화2)
레위기를 펼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가 나타납니다.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마침내 제물을 불태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레위기 1장은 자칫 오래전에 폐지된 제사 규정을 기록한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희생제사의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있으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에 관한 것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은 단순히 짐승을 어떻게 잡고 불사를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고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회막에서모세를부르시고그에게말씀하여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첫 음성이 ‘부르심’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784(출27:20)는 ‘회막’이 주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입니다. 거듭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드려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소의 번제입니다. ‘그예물이소의번제이면흠없는수컷으로회막문에서여호와앞에기쁘게받으시도록드릴지니라.’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서로 다른 예배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별히 소 떼에 속한 동물들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하며, 수송아지는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노센스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AC.9391, 출24:5). 그러므로 번제는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나 감정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생활,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일상의 선택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의식적 접촉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이전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며, 머리는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AC.10023, 출29:10). 따라서 이 장면에는 인간 자신과 번제가 표상하는 예배 사이의 결합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나와 상관없는 짐승 하나가 대신 죽는 외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제가 표상하는 정결과 거룩하게 됨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가 등장합니다. ‘아론의자손제사장들은그피를가져다가회막문앞제단사방에뿌릴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고(AC.10046, 출29:16),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은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47, 출29:16).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막연히 착해지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히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며 살아갈 때 정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우리 안의 선과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게 하는 신적 진리의 표상입니다.
이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이 두 행위에도 분명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세한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AC.10057, 출29:18).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죽’이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의 것을 표상한다는 원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레1:6의 ‘가죽을벗기는행위’ 자체를 스베덴보리가 정확히 어떻게 적용하는지 충분한 직접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을뜨는것’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응은 현재로서는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상응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이므로, 확인되는 만큼만 읽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을것이요’에서는 다시 매우 분명한 길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AC.10049, 출29:17), 이어 정강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50, 출29:17). 인간의 가장 낮고 자연적인 부분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감각적 즐거움과 오류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물로씻는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악에서 돌이킬 때 자연적 인간도 점차 정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레위기 1장의 거듭남 이해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연적 인간을 없애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없애지 않으시고, 일상생활도 없애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도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씻으십니다. 거짓과 악에 물든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선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서 안에 두십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바르게 표현되도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있게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씻은 내장과 정강이는 버리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 번제로 드립니다. 여기서 번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전부’입니다. 머리만도 아니고, 좋은 부분만도 아니며, 속 사람만도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부분까지 씻긴 후에는 모두 제단의 불 위로 올라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이 주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냄새’는 주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1:9, 13, 17을 인용합니다(AC.925, 창8:21). 그러므로 번제의 마지막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간 전체가 정결해져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번제가 지향하는 내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기로운 것은 제물의 연기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것입니다(AC.925, 창8:21).
10절부터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이어집니다. 절차는 소의 번제와 매우 비슷하지만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소 떼의 동물들과 양 떼의 동물들을 구별하며, 전자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391). 이것은 번제가 인간의 겉 생활만이 아니라 속의 애정과 의도까지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겉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한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거듭남은 어느 한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의 번제에서 양과 염소의 번제, 다시 새의 번제로 이어지는 순서를 거듭남의 시간적인 ‘1단계,2단계,3단계’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및 예배 상태를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1의 배열 자체를 인간이 차례로 통과하는 세 단계라고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번제는 거듭나는 인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층위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층위가 결국 하나의 목적, 곧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다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짐승이 아니라 ‘산비둘기나집비둘기새끼’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가 번제를 드린 창8:20을 해설하면서 레1:3-17을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번제에 사용된 소와 어린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특별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큰 구별에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22, 창8:20). 또한 비둘기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신앙의 진리와 선, 특별히 신앙의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합니다(AC.870, 창8:8-9).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애정만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이해,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번제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이는화제라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니라’로 끝납니다. 소의 번제도, 양이나 염소의 번제도, 새의 번제도 마지막 목적지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선과 진리,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새의 번제에는 ‘모이주머니와그더러운것은제거하여제단동쪽재버리는곳에던지고’, ‘날개자리에서그몸을찢되아주찢지말고’라는 매우 특이한 규정도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절차는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부 규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된 원전만으로 ‘모이주머니는이것이다’, ‘날개자리에서찢는것은이것이다’, ‘아주찢지않는것은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상응에는 충실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는 멈출 줄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레위기 1장 전체를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피와 죽음과 불의 장면 뒤에서 하나의 놀라운 거듭남의 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과 그 예배가 결합합니다. 피, 곧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결합합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삶까지 진리의 물로 씻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함께 주님께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가 불 위에 놓입니다.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매우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정리합니다. 희생제사와 번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AC.10143, 출29:42). 그리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은 그것들을 삼가고 피하며 싫어하는 것이고,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하는 것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번제는 종교적 감정의 한 순간이나 ‘모든것을바치겠다’는 결단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삶 전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하나님께무엇을희생할것인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안에서아직진리의물로씻기지않은것은무엇인가?’, ‘내속사람과겉사람은서로하나가되어있는가?’, ‘내가알고있는진리는실제선한삶과결합하고있는가?’, ‘나의가장자연적이고일상적인삶까지주님의질서안으로들어오고있는가?’, 그리고 ‘내삶전체는사랑으로부터주님을예배하고있는가?’입니다.
번제와 희생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 외적 형식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외적 제사가 내적 예배와 분리되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AC.922). 그러므로 오늘날 동물의 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레위기 1장의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표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표상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실재, 곧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을 읽어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으시며, 그것들을 서로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의 가장 깊은 애정에서 가장 바깥의 일상생활까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인간의 예배는 더 이상 입술이나 의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라는 번제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SWC.레1해설)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이어떻게하나로서활동하는지,또는어떻게하나처럼보이는지는하나가다른하나안으로유입되는것을알지못하면알수없습니다.’여기서 처음으로‘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AC.161은 그 답을‘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AC.149에서는 인간의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오직 주님의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인간은‘생명의기관’이라고 했습니다.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내가생각하고느끼고행동한다고경험하는것은무엇인가?모든생명이주님으로부터온다면나의삶은어디에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AC.161이‘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아주 평범한‘행위’하나를 예로 듭니다.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체어리티의행위’또는‘신앙의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이들은 구별됩니다.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이부분은속사람이고이부분은겉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하나의 삶,하나의 의지,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이것이AC.161이 말하는‘하나로서활동하고하나처럼보이는’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곧 자기들의proprium안에서 살기를 원했고,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인간의proprium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신부와아내’라고까지 했으며,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나라는존재가점점없어지는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주님께서안에서움직이시고인간은밖에서수동적으로따라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천적·영적 생명과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내삶을내삶으로살아가지만,그생명의근원은나자신에게있지않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이것이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AC.161심화1)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아침까지항상타는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표상을행하는사람의내적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제대로기능하려면그것을행하는사람이반드시그의미를몰라야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표상이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모르면서어떻게그렇게철저하게지킬수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의미를몰랐기때문에오히려더좋은표상교회가될수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타는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반드시이런상태이고,등불이밤새타는것은반드시이런교회사적보존을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타는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심화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