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목사님,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결혼이 깨진 이야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중심은 강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질서’, ‘서로 다른 애정의 우선순위’, 그리고 결혼 전에 반드시 드러나야 할 내면의 불일치가 드러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원고의 마지막에서 당사자도 결국 ‘그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제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표현은 이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보는 것보다 훨씬 본질에 가까이 갑니다.
먼저 남자에게 실제 개 물림의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진돗개에게 물려 응급실에 갔고 흉터까지 남았으며, 지금도 작은 개를 보아도 몸이 먼저 굳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아지를 싫어하는 편협한 남자’라고 단순하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공포는 머리로 ‘이 개는 나를 물지 않는다’고 이해한다고 해서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털, 침대, 식탁 주변의 동물 등에 대한 위생적 거부감도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반려견과 한집에서 살 수 없다’는 그의 결론 자체는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조건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 자기 애정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몽이는 단순한 취미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나 5년 동안 함께 살았고, 여성은 몽이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경험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결혼하기 위해 여덟 살 된 몽이를 친정으로 보내라는 요구는 그녀에게 ‘강아지를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단순한 생활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의존해 살아온 존재에 대한 책임을 중간에서 내려놓을 수 있느냐는 양심의 문제가 됩니다. 특히 원고에는 몽이가 분리불안이 있고 노령기에 접어들어 환경 변화가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수의사의 설명까지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몽이를 계속 돌보기로 한 선택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애정’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삶의 질서가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생각과 말은 바뀔 수 있지만 깊은 애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강아지를 키울 것이냐 말 것이냐’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두 사람의 애정 구조가 몽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남자는 결혼하면 부부와 앞으로 태어날 자녀를 중심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고, 여성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 가족으로 들어온 몽이를 그 가정 안에서도 계속 책임지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남자가 한 말 가운데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너는 강아지를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야.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는 그게 맞는 거고. 근데 나는 자식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필요해.’ 표현에는 다소 거친 면이 있지만, 여기에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면 안 되는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에서 사랑은 무조건 강하기만 하면 선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 배우자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애정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 위치에서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반려동물을 깊이 사랑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을 돌보고, 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자신에게 의존하는 생명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은 오히려 체어리티의 아름다운 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대쪽 질문도 필요합니다. ‘가족이다’라는 말이 곧 ‘인간 가족과 완전히 같은 위치이다’라는 뜻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고의 여성 자신도 이 문제 앞에서는 솔직합니다. ‘몽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는 날과 아이 어린이집 행사 날이 겹쳤을 때 저는 어느 쪽을 먼저 챙겼을까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이 대목이 이 영상에서 가장 성숙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버리라는 남자 대 가족을 지키려는 여자’라는 단순한 구도였지만, 여기서 여성은 자기 사랑의 질서까지 돌아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이 중요합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그 사랑은 제자리에 놓여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려동물을 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을 더욱 온전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동물을 동물로서 지극히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면서도, 배우자를 배우자로 사랑하고 자녀를 자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모두 ‘누가 1순위인가?’라는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지만, 서로 다른 관계의 고유한 질서를 없애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남자의 모든 말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거른다’는 인터넷식 표현을 가져온 것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앞에서 그가 말한 트라우마, 위생 문제, 결혼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는 모두 자기 경험에서 나온 진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순간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강아지 키우는 여자’라는 유형으로 묶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람을 그의 실제 성품과 삶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범주를 통해 보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외적 유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반려견을 키운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배우자 사랑이나 모성애, 체어리티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친구들의 반응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남자는 강아지가 아니어도 결혼하고 나서 다른 이유로 또 트집 잡아. 손절해’라는 반응 역시 남자를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합니다. 한쪽 인터넷에서는 ‘강아지 키우는 여자를 거르라’ 하고, 다른 쪽 친구들은 ‘그런 남자는 손절하라’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양쪽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보지 않고 ‘한 유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런 식의 외적 분류보다 훨씬 안쪽으로 들어가 ‘그 말과 선택을 움직인 애정은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은 여성이 몽이의 존재를 결혼 이야기가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악의적인 은폐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혼 상대에게 몽이가 자신의 삶에서 이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면, 사실은 훨씬 일찍 알려야 했습니다. 반려동물뿐 아니라 종교, 자녀 계획, 부모 부양, 재정, 거주지처럼 결혼 후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문제는 ‘나중에 상대가 이해해 주겠지’ 하고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8개월 뒤가 아니라 처음 몇 번의 만남에서 드러났다면 두 사람 모두 훨씬 덜 상처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별을 실패라고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 전에 드러났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여성이 몽이를 친정에 보내고 결혼했다면 남편을 볼 때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몽이를 보냈다’는 원망이 생길 수도 있었고, 반대로 몽이를 데리고 결혼했다면 남편은 털 하나, 짖는 소리 하나, 병원 방문 하나에도 ‘내가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는데’라는 불만을 쌓았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생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훨씬 깊은 애정의 충돌이 있기 때문에 결혼 후에는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정한 결혼의 이상은 단순히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점점 하나의 선과 진리를 향하면서 마음과 삶이 결합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에는 ‘우리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만큼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질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함께 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몽이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뜻이라기보다, 몽이가 아니었다면 한동안 보이지 않았을 두 사람의 깊은 차이를 드러내 주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 ‘5년을 같이 산 강아지와 8개월 만난 결혼 상대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도 사실 조금 다르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강아지냐 남자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나에게 맡겨져 의존하며 살아온 생명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 배우자와 이루어 갈 결혼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질서 있게 세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 질서 자체에 두 사람이 합의할 수 없다면 어느 한쪽이 악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의 중요한 토대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결혼 상대로 거르는 것이 합리적인가, 편견인가?’라는 질문에도 같은 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동물과 함께 사는 생활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그런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결혼 조건입니다. 그러나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남편을 2순위로 두고 모성애도 부족하다’고 일반화한다면 그것은 편견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반려동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는 냉정하고 이기적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한 장면은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마지막에 여성이 ‘그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제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데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몽이를 지켰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몽이를 어떤 질서 안에서 사랑할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는 이 중요한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릴 것인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사랑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각각 제자리에 둘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이별은 단지 ‘강아지 때문에 놓친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 직전에 두 사람이 서로의 깊은 애정 구조를 발견한 사건입니다. 아픈 발견이었지만, 결혼한 뒤에 발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 사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일이기 이전에, 두 사람의 사랑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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