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또한 1절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고 한 것으로부터도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어지는 것들은 교회의 것이든 이단들의 것이든 이와 유사한 잉태와 출생들입니다. 그들은 이것들로 하나의 계보를 이루었는데, 이는 이러한 것들도 서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That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 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 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 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 whether of the church, or of heresies, 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 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AC.400은 AC.399에서 제시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속뜻을 확증하면서,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는 가족사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이어지는 잉태와 출생과 계보가 교회와 이단들의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 근거로 스베덴보리는 창4:1로 다시 돌아갑니다. 거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리와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어떤 상태에서 가인이 산출되었고, 이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에서 다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영적 계보입니다.
여기서 ‘잉태’와 ‘출생’을 구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번호 자체는 둘의 세부 상응을 따로 정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영적 원리가 안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다시 어떤 교리나 상태로 드러나는 과정을 ‘잉태와 출생’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보에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히 시간적으로 다음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보다, 앞의 상태에서 뒤의 상태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것이든 이단들의 것이든’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잉태와 출생이라는 상응이 악한 것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선하고 참된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는 것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된 원리에서 새로운 분열과 이단이 생겨나는 것도 같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상응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잉태되고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출생은 언제나 이것 하나를 뜻한다’는 식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주제와 계열을 보아야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계속 파생되고 있으므로 그 잉태와 출생은 분열과 이단의 발생을 나타냅니다. 다른 계보에서는 같은 출생의 언어가 새로운 교회의 발생이나 선하고 참된 것의 전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 때문에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계보는 이름들의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고, 뒤의 것은 다시 그다음 것을 낳는 인과적·영적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보를 읽을 때 각각의 이름을 서로 고립시켜 해석하기보다, ‘앞의 상태에서 무엇이 나왔으며 그것이 다시 무엇을 낳았는가?’라는 흐름을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도 다시 의미가 생깁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나오고, 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 곧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AC.400은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이단적 원리가 형성되면 그것은 다시 새로운 결론과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들이 다시 다른 것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인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많이 생겼다는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원리 안에 이미 여러 후속 결론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 전개되면서 점차 여러 형태의 분리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 그 최초의 원리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최초의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뒤에는 신앙의 본질, 선한 삶의 중요성, 이웃 사랑의 위치, 교리와 삶의 관계 등에 관한 여러 후속적인 왜곡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여러 교리적 분리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교리적 차이를 곧바로 ‘가인의 이단 계보’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진리를 체어리티와 분리하거나, 아는 것을 사는 것보다 높이 두거나, 교리적 옳음을 이웃 사랑보다 앞세우는 원리가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의 이단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난다’는 말을 모든 교리적 발전이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잉태하고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와 쓰임을 낳는다면 그것 역시 영적 출생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무언가를 낳는다’는 데 있지 않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98과도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C.399-400은 바로 그 뒤집힌 질서가 이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중심이 되면, 자기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교리적 결론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93-398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의 인류가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보존된 신앙은 인간의 자유 안에 놓입니다. 그것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후자의 전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00은 앞으로 이어질 가인의 족보를 읽는 하나의 안내문과 같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을 단순히 여러 사람의 세대로만 읽지 않고, 서로 관련된 교회적·교리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은 앞의 영적 상태가 뒤의 상태를 산출했다는 것이며, 그 연속적인 산출이 하나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결국 AC.400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하나의 강력한 원리를 남깁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가 단지 한 가지 교리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리가 계속 새로운 생각과 판단과 교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받아들여져 서로 결합될 때에도 거기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열매들이 계속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잉태와 출생의 처음에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가 자리 잡고 있느냐입니다. (AC.400 해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