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4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 - 고성제의 통찰과 거듭남을 향한 주님의 섭리

 

해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아무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고통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들고, 젊은 사람도 늙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고, 어렵게 얻은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인간의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특히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곧 고통의 현실과 원인,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 번째인 ‘고성제’(苦聖諦, dukkha ariyasacca)는 인간의 삶이 고통과 불만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고’(苦, dukkha)는 단순히 육체적인 통증이나 정신적인 슬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경험조차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조건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불교가 인생을 고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기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의지하고 붙잡으려는 세상의 행복이 왜 끝내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고성제를 설명하면서 태어남과 늙음, 병듦과 죽음,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을 ‘오취온’(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ā), 곧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무더기가 고통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여기서 다섯 무더기란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色)과 느낌인 수(受), 지각인 상(想), 의지적 형성 작용인 행(行), 의식인 식(識)을 가리킵니다. 불교는 이러한 요소들이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변하며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들을 영원한 자기 자신이나 변하지 않는 행복의 근거로 붙잡을 때 고통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상윳따 니까야’ 38.14는 고통을 직접적인 괴로움,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 조건 지어진 존재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괴로움이라는 세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병이나 상실처럼 직접 경험하는 고통이고, 둘째는 행복했던 상태가 변하거나 사라지는 데서 오는 불만족이며, 셋째는 당장 괴롭지 않더라도 조건에 의존하는 존재 자체가 궁극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고성제는 삶의 불행한 사건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통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와 경험의 구조를 살피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흔히 현재의 어려움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건강을 회복하면, 자녀가 잘되면, 원하는 것을 이루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이 생기고, 한때 커다란 기쁨을 주었던 일이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일상이 되기도 합니다. 불교가 강조하는 ‘무상’(無常, anicca), 곧 조건에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인간 경험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세상의 기쁨이 반드시 악하거나 무가치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만족을 얻으려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도 귀 기울일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 건강과 인간관계만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을 완전히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교의 고성제와 기독교의 인간관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조건 지어진 존재의 특성과 그것에 대한 집착을 분석하지만,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창조된 존재로서 자신의 생명과 행복의 근원을 어디에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제기합니다. 세상의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참된 생명과 행복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동일한 주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도 세상에서 환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가 고통을 발생시키는 조건과 집착의 구조를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면, 말씀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762번에서 영적 시험과 자연적 고난을 구별합니다. 영적 시험은 단순히 몸이 아프거나 불행한 사건을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선과 진리를 둘러싸고 악과 거짓이 대립하는 내적인 싸움입니다. 반면 질병이나 불행, 자연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슬픔과 불안은 그 자체로 영적 시험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고난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약화시키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보내신 훈련이라고 설명하거나, 고통의 크기를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와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거듭나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1692에서 영적 시험이 어떻게 인간의 거듭남에 쓰임이 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시험을 통하여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약해지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양심이 더욱 굳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험 자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서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선과 진리의 편에 서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거듭남이 가능해집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란 인간이 단순히 고난을 견디거나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변화하여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통의 의미를 판단할 때에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다만 이 설명을 모든 고난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의 질병이나 무고한 사람의 피해, 전쟁과 재난으로 인한 고통을 그 사람의 영적 결함이나 성장의 필요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과 고통을 선 자체로 여기시는 데 있지 않고, 악이 허용되는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의 고통 이해와 새 교회의 교리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두 전통 모두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적 만족만으로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인간이 더욱 깊은 불안과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교할 만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고통은 ‘갈애’(渴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 집착과 조건 지어진 존재의 특성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되며, 그 궁극적인 해결은 갈애의 소멸과 ‘해탈’(解脫, vimutti), 곧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기독교의 천국을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이 모두 충족되는 장소로 이해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단순히 고통을 없애려 하는가, 행복을 얻으려 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고통의 속박으로 이해하며, 무엇을 자유와 행복의 완성으로 보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87–394번에서 천국의 삶이 이웃을 위한 쓰임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영원한 안락함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각자의 쓰임을 통하여 실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쓰임’(use)이란 단순한 노동이나 활동량을 뜻하지 않고, 사랑이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목적과 행위를 가리킵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만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에서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나누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고통을 이해하는 문제 역시 결국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불교의 고성제가 변하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면, 말씀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여 사랑과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기쁨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 건강과 물질적 안정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한 질서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유익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사랑하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현실을 깊이 통찰한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고성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비관주의가 아니라, 조건에 의존하는 존재와 경험이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집착과 자기중심성을 돌아보고, 물질과 쾌락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귀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와 말씀에서 밝히는 인간의 거듭남은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는 고통의 발생과 소멸을 연기와 갈애의 관계에서 설명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랑과 의지가 새롭게 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또한 모든 고통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니며, 어떤 고난도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천국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부정하지도, 고통 자체를 신성하게 만들지도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과 이웃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불교의 고성제가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일 수 있는지를 일깨운다면, 말씀은 그 행복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이미 그 생명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BU.004 해설)

 

요약

인생에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는 불교의 고성제는 인간의 유한성과 변화, 집착의 문제를 깊이 통찰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세상의 행복을 영원한 것으로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를 모든 삶이 불행하다는 비관주의로 이해하거나, 불교의 해탈을 단순한 무감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로 신성하거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며, 영적 시험과 자연적 고난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악과 고통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거듭남과 천국의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참된 행복의 근원은 고통의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실현하는 삶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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