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을 일으키는 바깥의 조건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의 괴로움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재물을 원하고, 원하는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조차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살피면서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을 단순히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서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는 고통의 현실을 밝히는 고성제, 그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인 ‘멸성제’(滅聖諦, nirodha-sacca)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소멸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갈애’(渴愛, taṇhā)란 감각적 즐거움과 존재의 지속, 또는 존재의 소멸을 갈망하는 목마름을 뜻하고, ‘집착’(執著, upādāna)은 그러한 대상을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불교가 말하는 소멸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나 활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애와 집착에 사로잡혀 고통을 반복하는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멸성제를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버리고 놓아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소멸한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입니다. 연기란 어떤 현상도 독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같은 경전집의 SN 12.2는 ‘무명’(無明, avijjā), 곧 고통과 그 원인 및 소멸의 길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조건이 이어져 고통이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그에 의존하던 조건들도 소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다시 존재하고 태어나는 과정도 멈추게 됩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열반’(涅槃, nibbāna)은 이러한 갈애와 무명,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열반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심리적 안정과 같지 않습니다. 또한 열반을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허무한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도 불교의 설명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열반을 조건 지어진 존재의 반복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으로 이해하며, 그 궁극적인 상태를 일반적인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면 갈애가 소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도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살아 있는 동안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 육체적 통증과 질병, 늙음과 죽음이 여전히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험을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과 결합하여 새로운 괴로움으로 증폭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36.6에 나오는 ‘화살의 비유’는 이 차이를 잘 설명합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할 때 정신적인 괴로움까지 더하여 마치 두 개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지만, 바르게 수행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거기에 새로운 집착과 정신적 고통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성제를 ‘깨달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사라진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군가가 심한 슬픔이나 불안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수행이 부족하다거나 집착이 많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책망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고통을 지속시키는 내적인 조건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의 감정과 욕망에 무조건 끌려다닐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을 바르게 살피고 다스리는 가운데 새로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자유를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만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고, 이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악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77–480번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들을 지배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중심적인 사랑이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의 성격이 그의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재물이나 명예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내면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랑하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앞세우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물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가 갈애의 소멸을 통하여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명한다면, 말씀은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힐 때 참된 자유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두 설명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 소멸과 말씀에서 말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곧바로 동일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83번에서 인간이 본래의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악을 선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시작되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과 싸워 이길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같은 저작 DP.100은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 안에서 악을 제거하시려면 인간이 먼저 겉 사람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해야 한다는 신적 섭리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속 사람’(internal man)은 인간의 영적 내면을, ‘겉 사람’(external man)은 자연적 삶과 외적인 생각 및 행동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또한 거듭남은 모든 욕망과 개성을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질서에 따라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하여 해탈을 설명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의 방향이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두 전통이 모두 인간의 내적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더라도 그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얻는 평안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평안은 같은 것입니까? 두 평안 사이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갈애의 소멸은 집착에 따른 불안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연결되지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평안은 주님과 결합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 안에 있게 되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악을 멀리하는 목적은 단순히 마음의 불편함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지배하던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역사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소극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일을 하며 정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과 활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적극적 사랑이나 자비도 없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 역시 자비와 이타적인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다른 중생의 해탈을 돕는 보살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양쪽의 차이는 한쪽에는 자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자비와 선의 궁극적인 근원 및 영원한 삶의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종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가족 간의 갈등이나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망 자체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의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머문다면, 종교는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돌아보게 하며, 원하는 것을 끝없이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말씀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최종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며, 고통의 소멸 자체를 경계해야 할 일로 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외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은 서로 분리된 두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삶에 함께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결국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멸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끊임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의 근본적인 조건이 소멸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성찰하고,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붙잡지 않도록 경계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멸성제를 모든 감정과 사랑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깨달은 사람에게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교의 열반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생명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단순히 어떤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진 상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버려야 하지만, 그 자리에 참된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멸성제가 인간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준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며 어떤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자유는 자기의 욕망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데서 시작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BU.006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의 소멸을 통하여 고통의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멸성제에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갈애의 소멸을 모든 의욕과 감정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열반을 단순한 무감각 또는 존재의 소멸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멸성제가 육체적 질병이나 외적인 불행의 완전한 제거를 약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해탈과 말씀의 거듭남 사이에 있는 자기중심적 욕망의 극복이라는 공통점을 인정하되,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와 천국의 평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5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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