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5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 복종과 자유로운 사랑
해설
이슬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슬람’(Islam)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복종한다는 의미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무슬림’(Muslim)은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꾸란 2:112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있다고 가르치며, 4:125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선을 행하며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는 삶을 높이 평가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단순히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생각 없이 굴복하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궁극적인 주인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며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며, 모든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려는 신앙의 방향 자체는 옳습니다. 다만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복종이 인간의 자유와 사랑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복종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외적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과 경건도 포함됩니다. 예배와 금식, 구제와 순례 같은 종교적 실천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인 표현이며, 이러한 행위의 가치는 그것을 수행하는 의도와도 관련됩니다. 특히 꾸란 2:256에는 종교에 강제가 없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 구절의 구체적인 적용 범위에 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종교적 복종을 외부의 물리적 강제와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슬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 자발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영적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오직 두려움과 강압으로만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종교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과 그 의무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인간은 어떤 명령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순종할 수도 있고, 벌이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위처럼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의도는 서로 다릅니다. 바로 이 차이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검토 대상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적 섭리(神的攝理, Divine Providence)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유(自由, freedom)는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뜻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외부에서 강제로 조종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같은 저작 129항에서는 종교에 관한 믿음과 사랑이 외적 강제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강요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내면의 신앙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再生, regeneration)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주님은 그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순종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43항에서 자유에는 지옥적 자유(infernal freedom)와 천국적 자유(heavenly freedom)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악의 지배를 받는 속박입니다. 반면 선을 사랑하여 선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은 참된 자유입니다. 이 가르침은 요8:34에서 주님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분노와 탐욕, 지배욕과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행동한다면, 겉으로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악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계명을 따르기 위해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갑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순종과 영적 자유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할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이러한 구별은 순종의 동기(動機, motive)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렵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악에서 돌아서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141–143항에서 자유는 사랑과 의지에서 비롯되며,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자유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143항에서는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은 인간의 생명 안에 남지만, 강제로 받아들인 것은 그렇게 남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명을 지키는 행위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계명에 담긴 선을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정직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점차 정직 자체를 사랑하고, 처음에는 명령 때문에 이웃을 돕던 사람이 마침내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의 순종은 외적 의무에서 내적 사랑으로 깊어진 것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슬람의 복종 개념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평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됩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을 절대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정직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복종의 가치를 외적 명령의 이행만으로 판단하거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신앙의 완성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문제가 이슬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목회자의 명령이나 교회의 관습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질문과 분별을 불순종으로 여기며, 두려움을 이용해 신앙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외적 강제는 참된 거듭남의 원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의 내적 생명으로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평가할 때에도 중요한 것은 그 복종이 단순한 외적 의무에 머무는가, 아니면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 남아 있는 더 근본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누구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인간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14:15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참된 사랑은 계명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으며, 계명에 대한 참된 순종 역시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랑의 자유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순종의 완성은 단순히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굴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 선을 자신의 삶에서 기꺼이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라는 고백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순종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묻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명령을 지키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외적으로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영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의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복종시키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선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선을 실천할 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더욱 깊은 결합(結合, conjunction)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철저히 복종하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며, 그 순종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은 자유로운 사랑을 파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IS.005 해설)
요약
이슬람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복종을 진실한 의도와 선행에 연결하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외적 의무의 이행이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복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실천할 때 거듭납니다. 또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는 그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복종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복종을 강제나 외적 형식으로 환원하는 이해가 문제입니다. 참된 순종은 주님을 향한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IS.004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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