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고백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까? 동방정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본질’(ousia)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가를 가리키고, ‘위격’(hypostasis)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가리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시지만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이십니다. 그렇다고 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생명과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시며, 그 일치에는 어떠한 분열이나 대립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한 분의 신적 인격이시라는 뜻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의 차이를 넘어,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공통점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교부들의 신학적 논의를 통해 정교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고백함으로써 성자가 하나님보다 낮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했습니다.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신성과 영광을 명확하게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립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정교회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교회가 삼위일체를 인간의 추론으로 만들어 낸 철학적 공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성경과 예배, 그리고 살아 있는 신앙 경험에 근거한다고 설명합니다. 교부들이 본질과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개념 안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치와 성부·성자·성령의 구별을 동시에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는 세 신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아니며, 반대로 한 하나님이 단순히 세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신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세 위격은 실제로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이 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려면 동방정교회가 ‘위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격’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는 대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의식과 의지와 행동의 주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말하는 세 신적 위격을 이러한 인간적 개념으로 그대로 이해하면 세 하나님을 상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경쟁하거나 협의하여 결정을 내리는 세 신적 개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세 위격은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하시며, 성부께서 행하시는 신적 일에 성자와 성령께서 분리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세 위격의 구별을 단순히 창조와 구속과 성화라는 서로 다른 역할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 되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위격적 구별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낳으심’과 ‘발출’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부가 성자보다 먼저 존재하셨다거나,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하거나 비교하려면 먼저 이처럼 정교회 자신이 세 위격의 독립성과 하나님의 단일성을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선언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구별된 표현이 함께 나타납니다. 신6:4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심을 선포하며, 사45:5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도 막12:29에서 이 고백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한편 마3: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에는 세례받으시는 예수님과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성령,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28:19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며, 요14:16에서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들이 곧바로 ‘하나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라는 완성된 교리적 공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공식은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하고 해석하는 교회의 신학적 언어입니다. 따라서 신학적 분별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이름이 등장하는가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과연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신적 구별을 나타내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이해와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84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 위격이 영원부터 구별되어 존재하신다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참된 단일성을 인간의 생각 속에서 훼손한다고 봅니다. TCR.166-169에서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설명하면서,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이 한 사람을 이루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성부는 영혼에 해당하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영혼과 몸과 그 활동을 서로 구별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각각 독립적인 세 사람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신적으로 구별되지만 세 분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55에서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단순한 양태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은 일반적으로 한 하나님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설명하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단순한 역할이나 임시적인 가면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실제적인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삼위일체가 세 신적 인격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그의 견해가 동방정교회의 세 위격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구별을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세 신적 위격이 존재했다는 개념 자체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TCR.170-171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육신 이전부터 세 위격의 삼위일체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으심으로써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적 삼위일체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 안에 어떠한 구별이나 신적 역사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세 영원한 인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는 용어를 조정하여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두 신학 체계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출발점 자체에 관한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말씀하시고,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시는 장면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의 설명에서는 성육신하신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며, 지상 생애 동안 유전받은 인간적 상태를 통과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부께 기도하시는 모습은 본래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대화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화의 과정에 있는 인성과 그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 사이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4:10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며, 요14:9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요10:30에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성부와 성자의 일치가 단순히 뜻과 목적의 일치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의 실질적인 신적 일치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바로 이 구절들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과 상호 내재를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면서도, 두 위격의 구별을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특정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논쟁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말씀을 어떤 신론적 구조에서 이해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신앙과 예배의 실제적인 방향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 신자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간다는 전례적 구조 속에서 기도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예배합니다. 정교회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일치는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친교이며, 교회 역시 이러한 일치를 본받아 사랑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부름받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안에 분열이나 경쟁이 없으며, 참된 신앙은 사랑과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기도하고 예배할 때 마음속에 하나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독립된 세 신적 주체로 상상한다면, 입으로는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실제 생각 속에서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TCR.172-173에서 이러한 문제를 특별히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정교회 신자가 실제로 세 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는 바로 그러한 삼신론을 명시적으로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정교회 신자 개개인의 내면을 판정하는 말이 아니라, 세 영원한 위격이라는 교리적 구조가 인간의 하나님 관념에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신학적 비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부 하나님을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심판자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기며, 성령을 두 분 사이에서 인간에게 능력을 전달하는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상상한다면, 그의 하나님 이해에는 심각한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이 정교회의 공식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나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의 신적 사랑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실제 신앙생활에 자리 잡을 가능성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문제를 더욱 근본적으로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적 인간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서로 다른 사랑이나 상충하는 의지를 가진 세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생명 또한 동일한 신적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어떤 신적 인격의 자비를 얻어 다른 신적 인격의 진노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충만하게 나타난 신적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인간의 거듭남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단순히 신학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데 그친다면, 그 고백은 인간의 이해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그 사랑과 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도 사랑과 진리가 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섬기는 삶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이해와 의지가 점차 하나의 영적 생명으로 결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인간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하나님의 신적 삼위일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신적 생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치를 참되게 인정하는 신앙은 인간 안에서도 분열된 삶을 극복하고, 아는 진리와 행하는 선이 일치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추상적인 신학 논쟁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어떻게 살아 내는가 하는 실제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하나님의 분리될 수 없는 일치를 보존하려는 오랜 교회의 신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교회 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한 본질이시라는 고백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신적 인격에서도 한 분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세 영원한 위격의 일치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의 신적 일치로 이해합니다. 결국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완전한 일치를 함께 고백하지만, 그 일치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이러한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상대 전통의 진지한 신앙고백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이 증언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더욱 깊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그 질문의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세 분으로 나누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를 완전하게 드러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목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2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는 삼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일치와 세 위격의 실질적인 구별을 함께 보존하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일치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일치를 함께 인정하지만, 세 위격의 영원한 실재 여부와 신적 일치의 구조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세 신적 주체로 나누어 상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신앙과 예배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교리적 이해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되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나는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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