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르침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에게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아들이 태어나며,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자연적인 출생의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존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 아니며,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나셨거나 성부보다 열등한 하나님이시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자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생은 시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영원한 관계를 뜻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성자의 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보존하려는 동방정교회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영원히 태어난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부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별개의 신적 위격이라는 주장은 반드시 같은 뜻입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전통적 삼위일체 신학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동방정교회의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당시 아리우스(Arius)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신 분이 아니며, 성부에 의해 존재하게 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성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일 수는 있어도, 성부와 동일한 의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는 이러한 주장을 배격하고,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창조되신 분이 아니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중요한 용어가 ‘동일 본질’(homoousios)입니다. 이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자를 모든 시대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 빛에서 나온 빛, 참하나님에게서 나신 참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표현들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기원하신다는 점과 그분 역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함께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영원한 출생’(eternal generation)은 성자가 만들어지셨다는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신성이 둘로 나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는 신적 본질에서 완전히 동일하시며, 구별되는 것은 성부께서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 나시는 분이시라는 위격적 관계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의 이 교리를 성자가 성부보다 낮은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교회가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진리를 거꾸로 해석하는 일이 됩니다.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8장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언제나 함께 존재하시므로 성부는 계셨지만 성자는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성부가 처음에는 성부가 아니셨다가 나중에 성자를 낳으심으로써 성부가 되셨다면, 하나님 안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므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는 일도 시작이나 끝이 없는 영원한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과 빛의 관계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불이 타오를 때 빛이 함께 나타나듯, 성부와 성자는 시간적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계시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비유가 하나님의 신비 전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불과 빛은 피조된 현상이지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창조되지 않은 신적 실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시는 방식 자체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인정합니다. 결국 정교회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내적 생명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가능한 한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가장 먼저 살펴볼 본문은 요1:1-3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만물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어 요1:14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말씀을 통해 성자께서 성육신 이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셨으며,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고 이해합니다. 히1:3에서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체의 형상으로 설명하는 말씀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요5:26에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는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지만, ‘영원한 출생’이라는 후대의 신학적 공식 자체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말씀의 영원성과 그 말씀을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정교회는 두 내용을 하나의 진리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분별하려면 성경이 무엇을 직접 말씀하는지, 그리고 각 신학 전통이 그 말씀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는지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19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전제를 정면으로 검토합니다. 그는 영원부터 계신 성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주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존재하신 하나님 자신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하나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성자라고 가르칩니다. 즉, ‘영원부터 계신 주님’과 ‘영원부터 별개의 위격으로 존재하는 성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단순히 성부와 성자라는 명칭의 사용 시기를 다르게 정하자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창조 이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구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DL.19-20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신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영원부터 따로 존재하던 성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한 별개의 신적 위격이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라 불리는 인성의 근원이 바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눅1:35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므로 태어날 거룩한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성자에 관한 중요한 성경적 증거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92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보내실 때 취하신 인성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의 근원은 피조된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신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실제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을 생기 있게 하시는 가장 내적인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인성은 여느 인간의 인성과 동일한 출발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마침내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성자의 탄생은 신적 존재 하나가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성육신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영원부터 계신 성자는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성부와 구별된 영원한 성자 위격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 이전에 존재하셨던 ‘말씀’(Logos)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두 전통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요1:1의 말씀이 곧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 성자이시며, 이 성자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성육신은 영원한 성자 위격이 인간 본성을 취하신 사건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 TCR.85-88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적 선과 분리되지 않은 신적 진리로서 세상에 내려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진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지혜이며,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신적 진리가 하나님과 분리된 또 다른 인격으로 존재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영원부터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신적 진리가 인간 세계에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뜻이며, 그 과정에서 신적 선이 분리되거나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정교회는 영원한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위격으로 이해하고, 스베덴보리는 영원한 말씀을 한 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 모두 말씀이 영원하며 신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말씀이 영원부터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는가 하는 질문에는 서로 다른 대답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피해야 할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에게 특별한 능력을 받은 인간으로 이해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주님의 신적 인성을 피조된 인간의 본성이 신성과 외적으로 결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이루셨으며, 부활하신 뒤에는 인성에 관해서도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동방정교회의 성육신 교리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정교회는 영원한 성자 위격이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함께 가지시며,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으면서 한 위격 안에 결합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영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양쪽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고백하지만, 그 신성이 인성과 결합하는 구조와 영화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자 이해를 인간 예수를 신으로 높인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며,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를 예수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도 안 됩니다. 양쪽의 차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어떤 방식으로 계시며 자신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성자를 낳으셨다면 그 이전에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신적 친교가 창조 이전부터 완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심 자체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이 나타난 뒤에야 시작된 것이 아니며, 세상의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께 사랑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영원부터 두 신적 인격 사이의 관계를 전제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신적 인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계셨으며, 창조는 그 사랑이 피조물에게 전달되고 피조물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신적 목적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세 위격의 상호 관계보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서 이해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의 표현을 달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어떤 구조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는 영원하신 성자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 신자의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보다 열등한 신적 중개자가 아니라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자 신앙을 성부와 성자라는 두 신을 섬기는 신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정교회는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을 고백하며, 모든 신적 예배가 하나의 신적 생명을 향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인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한 분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영원부터 계신 성부와 영원부터 계신 성자를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주체로 상상하면서 그 두 존재를 하나의 하나님으로 결합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분 안에 계신 성부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도 주님과 별도로 활동하는 독립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기도의 중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어떻게 구별하여 부를 것인가보다,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관념을 갖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교리적 지식이 곧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교리적 이해를 다른 교회 신자들을 판단하고 멸시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 역시 주님의 사랑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1763) SS.92에서 잘못된 교리 자체만으로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되며, 악한 삶과 진리를 파괴하도록 확증한 거짓이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종교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에게 전해진 모든 교리의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더 밝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자들의 내적 신앙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실제로 충돌하는 부분을 마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되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교리적 차이를 명확하게 밝히되 상대방 안에 있는 선과 진리까지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참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낮은 존재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교회의 신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 안에는 주님의 참된 신성과 영원성을 지키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성부와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성자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여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셨고, 그리하여 인성에 관해서도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참된 신성은 영원한 별개의 위격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과 그분의 영화된 신적 인성의 완전한 일치에서 이해됩니다. 요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과 요14:9의 주님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는 선언은 이러한 관점에서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늘 어딘가에 계신 성부와 그분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성자를 각각 상상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바로 그분이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따라야 할 한 분 주님이심을 깨닫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교리의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는 거듭남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O.004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성자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영원성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영원부터 계셨다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을 구별합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성자는 그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된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와 성육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신성과 신적 인성이 완전하게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받은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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