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8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 불교의 중도와 선과 진리의 신적 질서

 

해설

사람은 흔히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는 욕망과 즐거움을 철저히 억제해야 거룩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는 삶도,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와 기쁨을 모두 부정하는 삶도 온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불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는 길을 제시합니다. 중도는 흔히 양쪽의 극단을 피하고 적당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태도로 이해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단순한 절충이나 타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고’(苦, dukkha), 곧 고통과 근본적인 불만족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른 수행과 지혜의 길입니다. 역사적 석가모니의 수행을 전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그가 왕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경험한 뒤 출가하여 극심한 고행을 했으나, 어느 쪽에서도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제시된 중도는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넘어서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참된 행복을 얻으려면 욕망에 끌려가거나 육체를 학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다스리는 길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이러한 중도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경전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는 길과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고행의 길을 모두 피해야 할 극단으로 제시하고, 부처가 깨달은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라고 밝힙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인 정견, 바른 의도인 정사유, 바른 말인 정어, 바른 행동인 정업, 바른 생계인 정명, 바른 노력인 정정진,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 바른 집중인 정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말, 행동과 생활, 마음의 훈련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의 목적은 그저 지나친 행동을 삼가고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애’(渴愛, taṇhā), 곧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열반’(涅槃, nibbāna)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열반은 갈애와 무명이 소멸하여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중도는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절제하라는 생활의 지혜를 넘어,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행의 질서입니다. 때로는 매우 엄격한 계율과 지속적인 수행이 요구되기도 하므로, 중도를 언제나 편안하고 쉬운 길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 12.15에 수록된 ‘가전연경’(迦旃延經, Kaccānagotta Sutta)은 세계를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견해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라는 두 극단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부처는 이 양극단을 떠나 모든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연기는 존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난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 대승불교의 ‘중관’(中觀, Madhyamaka) 사상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 사상가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24장 18게송에서 연기와 ‘공’(空, śūnyatā), 곧 모든 현상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도와 연결합니다. 이는 현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존재를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로 붙잡는 견해를 비판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초기불교의 수행적 중도와 대승불교의 철학적 중도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어느 한쪽의 견해에 집착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를 이해할 때에는 쾌락과 고행 사이의 수행적 중도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서는 철학적 중도를 함께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기독교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인 삶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하지도 않고,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필요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1번에서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이 없다면 생각과 행동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삶은 욕망과 사랑을 모두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직업에 충실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보다 앞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중도는 지나친 욕망과 고행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와 새 교회의 신적 질서를 단순히 같은 원리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는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과 지혜의 길인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며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삶의 질서가 바로잡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밝힌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원리는 이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진리를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양쪽의 의견을 적당히 절충하거나 모든 갈등을 피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악이라면 분명하게 악을 멀리해야 하고, 어떤 일이 이웃에게 유익하다면 그 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같은 저작 Life.21–22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의 기준은 언제나 두 극단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적당한 중간을 선택할 수 없고, 선과 악을 조금씩 섞는다고 해서 참된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의 중도 역시 진리와 오류를 절반씩 섞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 모두 무분별한 절충을 경계할 수 있지만, 불교는 바른 견해와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나는 길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야 할 것은 인간이 무엇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중관사상은 어떤 현상도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의 통찰을 강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창조된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한한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4번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가 아니며, 자신이 가진 사랑과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불교가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독립적인 생명 소유라는 착각을 경계하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설명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공은 연기에 따라 성립하는 현상들의 자성 없음을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전제하고 모든 피조물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독립적인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자아적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절대화하면서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에서 참된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도를 둘러싼 두 전통의 비교는 단순한 생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요구를 들어주거나, 반대로 자녀를 바르게 키운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정죄하거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잘못된 행동을 아무런 분별 없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필요한 것은 양쪽의 행동을 산술적으로 절반씩 섞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참으로 유익하며, 어떤 행동이 선과 진리의 질서에 부합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중도는 극단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의 견해와 행동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리 없는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며, 진리 역시 사랑 없는 정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 47번에서 사랑의 본질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결합하는 데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는 사랑은 자기만족에 머물 위험이 있고, 상대방의 삶을 세워 주려는 목적 없이 행사하는 진리의 판단 역시 자기 우월감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단호하게 악을 거절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중간 선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작용하는 삶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중도를 기독교의 사랑과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두 가르침이 동일한 교리를 전한다는 결론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그 의미를 단순한 절충이나 적당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과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을 넘어 팔정도에 따라 ‘해탈’(解脫, vimutti)을 추구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의 의미를 밝히는 길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며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결론은 옳지 않습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인간의 편의에 따라 절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중도가 인간을 속박하는 극단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해야 하며 어떤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단을 피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희석해서도 안 되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하나를 이룰 때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존중하면서도, 말씀의 빛에서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참된 영적 질서입니다. (BU.008 해설)

 

요약

불교의 중도는 극단을 피하여 적당한 중간을 선택하라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는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넘어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바른 삶과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를 모든 진리와 오류의 절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참된 영적 삶은 선과 악을 적당히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중도에 담긴 집착 극복과 바른 삶의 통찰을 인정하되, 모든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시며,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삶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임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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