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9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참된 목적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신앙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 명예나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며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모든 활동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높은 목적 아래 놓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절대적인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찬양과 예배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더 크게 만드시는 분이십니까? 만일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행복과 자유, 사랑과 기쁨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을 다시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광을 인간의 찬양과 인정으로 더욱 높아지는 신적 명예처럼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본성과 창조의 목적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가장 깊은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기쁨이 처음부터 함께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답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도구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과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고전10:31에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며, 롬11:36에서는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인간의 삶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갇혀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창조 목적으로 강조하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 자체를 곧바로 오류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가르침을 실제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광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광이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충분히 구별하지 않으면 중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인간 사회의 명예와 영광을 떠올립니다. 왕은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권력자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게 하며,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경험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면, 하나님께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많을수록, 예배가 더욱 화려할수록, 더 큰 교회와 더 많은 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도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 인간의 인정이나 찬양이 부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도 완전하셨으며,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의 충만함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명예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예배와 찬양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찬양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찬양과 감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이해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채워 드리는 존재가 되지만, 뒤의 이해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DLW.47에서 사랑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그와 결합하며, 그 존재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사랑뿐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적 사랑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한다면, 자칫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신적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만함을 더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사랑하시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며, 그 존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43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의 본질이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원하며, 자신의 것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목적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한 신적 사랑을 다른 존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창조 목적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27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이며, 인간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공간이나,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존재들이 모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끝없이 선언하는 장소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이루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처음부터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다가 사후에 천국에 들어간 존재들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국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창조 목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마련하시며, 그가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영원한 천국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임으로써 주님과 상호적인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복종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생명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5922에서 ‘영광’이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진리, 곧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은 그 신적 진리를 받아들인 천사들의 지혜와 이해, 그리고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관계됩니다. 여기서 영광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칭찬함으로써 외부에서 더해지는 명예가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천국과 인간에게 나타나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 현실입니다. 요1:14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광을 주님 안에 나타난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또한 마5:16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찬양하는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의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자신의 이익보다 선한 것을 선택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배와 찬양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배를 통해 삶의 중심이 주님께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찬양의 횟수나 열정, 외적인 규모가 곧바로 하나님께 돌려 드린 영광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22-227에서 천국의 예배와 설교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예배가 진리의 가르침과 사랑의 삶에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천국의 참된 예배는 예배 장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천사들이 살아가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 전체와 관계됩니다. 이는 지상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찬양과 경건한 기도로 예배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가족을 무시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외적인 예배가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삶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의 참된 목적은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여 그 진리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쓰임’(use)의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쓰임을 통해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241은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관계를 목적과 원인과 결과에 비유합니다. 사랑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지혜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길을 밝히고, 쓰임은 사랑과 지혜가 실제로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활동을 종교적인 형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고, 직장인이 정직하게 일하며, 교사가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의료인이 환자를 성실하게 보살피며, 이웃이 서로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서도 주님의 선과 진리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이 곧 참된 영적 쓰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직업과 활동을 통해서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이웃의 유익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위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기쁨으로 행할 때, 그 삶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드러내는 쓰임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정직하고 선한 삶의 자리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지나치게 외적인 성과와 연결하면 신앙생활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크게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좋은 성적을 얻고, 교회가 성장하며,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때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감사하는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성공 자체를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하면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오랫동안 돌봄의 부담을 감당하는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세상에서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외적인 규모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가능한 선한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일을 통해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가족과 이웃을 돌보며 깊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이러한 삶의 가치는 세상의 명예와 인정을 기준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라는 부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와 양심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나 공동체가 자신들의 사업이나 계획을 하나님의 영광과 직접 연결하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취급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나 특정한 사역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할수록,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과 부당한 요구가 정당화될 위험도 커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DP.71-99에서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잃고 강제로 복종하는 것을 참된 영적 결합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로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억압하고,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며, 자신의 권위와 목적을 절대화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명예와 권력, 공동체의 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비롯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살피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이 질문에서 우리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대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두 표현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참되게 이해할수록 인간이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을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선한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신적 진리는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자기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일시적인 만족과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기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기뻐하며, 천국의 삶은 그러한 사랑이 공동체 전체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참된 행복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까?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신교의 신앙고백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원한 기쁨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부터 완전한 사랑과 지혜이시며, 인간의 찬양과 인정에 의해 더 완전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결국 참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였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사랑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삶은 서로 다른 두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가며 그 삶 자체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삶의 의미입니다. (PR.009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나 영광을 더욱 크게 만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47과 ‘참된 기독교’ TCR.43에 따르면 신적 사랑의 본질은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결합하며, 자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신적 섭리’ DP.27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과 주님과의 영원한 삶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천국의 비밀’ AC.5922에서 영광은 가장 높은 의미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키며, 천국에서는 그 진리를 받아들인 존재들의 지혜와 체어리티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단순히 찬양과 예배의 양을 늘리거나 외적인 성과를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그 사랑이 이웃의 행복을 위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참된 창조 목적을 이루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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