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9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 초월성과 계시, 이해와 신앙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理解, understanding)를 초월하시는 분이지만, 인간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뜻을 계시(啓示, revelation)하신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므로,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에서 ‘와흐이’(wahy)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예언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계시를 가리키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꾸란 42:51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시거나, 가림막 뒤에서 말씀하시거나, 사자를 보내 자신의 뜻을 전달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6:44는 예언자에게 계시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숙고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계시 이해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려 주신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한 분이시지만, 인간이 진리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슬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꾸란 47:24는 사람들이 꾸란을 깊이 숙고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며, 3:7은 경전 안에 의미가 분명한 구절들과 해석이 쉽지 않은 구절들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구절에서 해석이 어려운 내용의 궁극적인 의미를 하나님만 아시는지,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도 일정하게 알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문장 구조와 해석 전통에 따른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꾸란이 모든 계시를 인간의 이해 밖에 있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슬람 신학에는 이성(理性, reason)과 계시의 관계를 깊이 연구한 전통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무타질라파(Mu'tazila)는 신적 정의와 인간의 책임을 이해하는 데 이성의 역할을 크게 강조했으며, 아슈아리파(Ash'ariyya)는 계시의 권위를 중시하면서도 신학적 논증을 활용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을 ‘이해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종교’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이 어디까지 권위를 가지며, 계시와 이성적 판단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는 이슬람 내부에서도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47–348항에서 참된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고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신앙(信仰, faith)은 인간의 이해를 정지시키고 어떤 명제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상태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의 이해 안으로 들어와야 하며,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실천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해는 단순히 정보를 기억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의 중요한 기능이며, 의지(意志, will)와 결합할 때 영적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말을 외적으로 반복할 수 있지만, 그러한 반복만으로 그 말이 자신의 내적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여전히 지식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신앙은 이해와 사랑, 진리와 선, 앎과 삶이 서로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한한 신적 본질을 인간의 유한한 사고 속에 완전히 담아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자신의 능력으로 신적 무한성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계시하시고, 그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71–172항은 주님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인간을 자신의 이해와 판단을 잃어버린 수동적인 존재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진리를 제시하시고, 인간이 그것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신적 계시는 인간의 이성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가 참된 빛을 받아 올바르게 기능하도록 하는 근거입니다. 신앙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자만도 아니며,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생각 자체를 포기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겸손하게 배우고, 자신이 이해한 만큼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는 계시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슬람에서 꾸란은 하나님이 무함마드에게 전달하신 최종적인 계시이며, 무함마드는 그 계시를 받은 예언자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말씀(Word)이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록을 넘어, 그 안에 신적 진리가 담겨 있으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 172항은 주님이 말씀 자체이시므로 말씀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주님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요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선언하며, 14절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의 충만함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달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계시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보다, 어떤 계시를 신적 말씀으로 인정하며 그 계시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다만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꾸란과 성경이 동일한 방식으로 기록되었거나 동일한 영적 구조를 지닌다고 전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속뜻에 관한 가르침을 꾸란 전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계시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지적 능력만으로 모든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Sacred Scripture, SS, 1763) 26항에서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간 자신의 지성만으로 탐구하려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와 관련되므로,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진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을 임의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이해를 사용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자신의 지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해 자체가 아니라, 모든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자기중심적인 지성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신학적 지식을 소유하더라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만으로 말씀을 해석한다면, 그 지식은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신중하게 검토하며, 진리를 알게 된 만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은 이해와 신앙을 함께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영적 이해에는 합리적인 분별뿐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실제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는 고백에 담긴 진리와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므로 인간이 그분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려 주시며, 인간은 그 계시를 진지하게 배우고 숙고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을 이유로 계시된 내용에 관한 합리적 질문을 금지하거나, 종교적 권위자의 해석을 인간이 분별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이러한 위험은 이슬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사용하여 성경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질문을 막거나, 목회자의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자유를 약화시키는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슬람의 계시관과 스베덴보리의 계시관 사이에 남아 있는 근본적인 차이는 성육신하신 주님과 성경의 신적 성격에 대한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서 진리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참된 신앙의 길로 제시합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무지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교리를 만났을 때 말씀을 더욱 살피고 진리를 구하기보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질문을 중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자신이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영적 지식을 얻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이해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신앙은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성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진리 앞에서는 성실하게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계시의 목적은 인간을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앞에 무조건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을 알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이 문항이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분인가, 없는 분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도록 허락하신 진리를 얼마나 성실하게 배우고 있으며, 그 진리를 얼마나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IS.009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꾸란 역시 인간에게 계시를 숙고하도록 요구하므로, 이슬람의 계시 신앙을 맹목적 복종이나 이성의 부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무한한 신적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주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이해하고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계시의 중심은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말씀의 진리는 그분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초월성과 계시에 관한 고백 자체는 참되지만,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와 주님의 신성에 관한 이해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해를 포기하는 것도, 자신의 지성을 절대화하는 것도 아니라,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사랑과 선행으로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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