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 더 나아가 일곱 번째 상태까지 제시한 뒤, 매우 현실적이고도 냉정한 평가를 덧붙입니다. 그는 거듭남의 질서가 보편적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모든 단계를 실제로 통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남의 초입에 머물며, 일부만이 중간 단계로 나아가고, 극히 소수만이 깊은 단계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영적 삶에 대한 이상화나 낙관을 경계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였지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상태에만 머문다는 말은,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말하고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실제 삶의 중심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이는 비난이 아니라, 영적 현실에 대한 관찰입니다.

 

두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들은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어느 정도 구별하기 시작하지만, 그 구별이 삶 전체에 미칠 만큼 깊어지지는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이는 회개, 내적 빛, 살아 있는 신앙의 단계로 갈수록 더 큰 인내와 진실한 내적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들은 외적 신앙 활동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실제 삶에서의 선택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few)는 말은, 신앙과 사랑이 실제로 하나가 되어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줍니다. 이 단계에서는 영적 즐거움과 자연적 즐거움 사이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며, 사랑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지속적인 내적 전환이 요구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지점에서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덧붙여 언급하는 일곱 번째 상태는 안식의 상태, 곧 천적 상태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고 말합니다. 이는 절망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천적 상태가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극히 드문 깊은 결합의 열매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인내심 있게 인간을 인도하시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기도 합니다.

 

이 글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균형 감각을 줍니다. 한편으로는 거듭남의 목표가 분명히 제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영적 성취에 이르러야 한다는 압박은 제거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설 수 있는 자리에서 인도하시며, 첫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조차도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주님의 자비는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AC.13은 거듭남의 교리를 인간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조용한 경고로도 읽을 수 있어요. 누가 더 높은 단계에 있는지를 가늠하려 들기보다, 주님이 각 사람을 어떤 질서 속에서 인도하고 계신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까지 왔는가를 따지기보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주님께 속한 것을 선택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거대한 영적 구조를 제시한 뒤, 그것을 인간의 현실 속에 다시 내려놓습니다. 거듭남은 위대한 이상이지만, 동시에 매우 개별적이고 점진적인 여정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적 상태로 억지로 끌어올리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유와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조금씩 심으시는 분이십니다. AC.13은 그 점을 차분하게,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개요 마무리 글입니다.

 

 

 

AC.14, 창1, ''주님'이라는 호칭' (AC.6-15)

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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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여섯 번째 상태' (AC.6-15)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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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산 영(living soul)짐승(beast)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이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을 확증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즉, 말과 행위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이 신앙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인도되고 형성된 사랑임을 뜻합니다. 먼저 진리가 빛으로 들어오고, 그 진리 안에서 사랑이 불붙으며, 그 둘이 함께 작동, 즉 움직일 때 비로소 참된 영적 삶이 형성됩니다. 이 점은 감정 중심의 신앙이나, 행위 중심의 도덕과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에요.

 

이 상태에서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산 영’은 더 이상 생기 없는 선이나 잠재적 생명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을 뜻합니다. 그리고 ‘짐승’은 낮고 거친 본능을 뜻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선한 애정들이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감정과 욕망 자체가 이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하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외형적인 모방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즉 함께 움직이는 구조’를 뜻합니다. 주님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이듯, 사람 안에서도 말과 행위,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는 형상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먼저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양식이 되는 것이지요. 이건 정말 중요한 변화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부터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연적 생명은 여전히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사람은 아직 세상에 살고 있고,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즐거움과 필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영적 즐거움과 자연적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삶의 중심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전 단계들에서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영적 전투입니다.

 

이 싸움은 주님이 허용하시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로 들어갈 때, 사람은 비로소 ‘천적 인간’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계산이나 갈등 속에서 선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AC.12는 거듭남의 거의 완성 단계에 해당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하고, 말과 행위는 하나가 되며, 영적 생명은 실제 양식을 얻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 속에서도 사랑이 점점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 상태는 모든 사람이 쉽게 도달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창세기 1장이 제시하는 거듭남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상태는 ‘형상’의 회복이며, 인간이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 다시 세워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3, 창1, '오늘날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6-15)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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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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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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