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으로 의미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reason)이며, 넷째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으로서, 이것들은 겉 사람에 속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0-14)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에덴동산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을 통해,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삶 전체로 확장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AC.77이 동산 자체를 지성의 형상으로 제시했다면, AC.78은 그 지성이 정체된 공간이 아니라, ‘흘러나가고 분화되는 생명’임을 밝힙니다. 지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강으로 표현됩니다.

 

지혜가 동산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지혜가 지성의 중심이자 출발점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근원은 사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앙 안에 머무를 때, 지혜는 자연스럽게 솟아납니다. 이 점에서 지혜는 획득물이 아니라 ‘유출물’입니다.

 

이 강은 하나로 시작하지만, 곧 네 갈래로 나뉩니다. 이는 지혜가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만 작동하지 않고, 인간의 내적, 외적 삶 전반으로 ‘질서 있게 분화’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네 강을 임의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한 위계와 방향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먼저 속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오고, 그다음에 겉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옵니다. 이는 지혜의 흐름이 항상 안에서 밖으로 나아간다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이 ‘선과 진리’라는 설명은 매우 압축적이면서도 깊습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 곧 천적 상태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선은 의지의 선이며, 진리는 이해의 진리입니다. 이 둘이 하나로 흐를 때, 지혜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첫째 강이라는 사실은, ‘모든 지혜의 기초가 선과 진리의 결합’임을 뜻합니다.

 

둘째 강은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knowledge [cognitio])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해입니다. 첫째 강이 결합 자체라면, 둘째 강은 그 결합에 대한 ‘자각과 인식’입니다. 이 두 강은 모두 속 사람에 속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지혜는 먼저 그의 내적 삶에서 형성되고, 그곳에서 충분히 질서 잡힙니다.

 

이제 셋째와 넷째 강에서 흐름은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성은 지혜를 외적 삶 속에서 분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은 주인을 자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에서 흘러온 지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셋째 자리에 놓입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입니다. 이는 경험, 학습, 언어, 문화 속에 축적된 모든 외적 지식입니다. 이것 역시 지혜의 흐름 안에 포함되지만, 가장 바깥 자리에 놓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은 중심이 아니라, ‘마지막에 도달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 역시 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네 강의 구조는 인간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여 줍니다. 속 사람의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이성과 기억-지식이 따라옵니다. 이 순서가 유지될 때, 인간의 삶은 통합됩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뒤집히면, 곧바로 혼란이 시작됩니다. 기억-지식이나 이성이 중심이 되면, 지혜는 더 이상 위에서 흘러오지 않고, 아래에서 만들어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의 끝에서 다시 한번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구조 전체를 묶는 결론입니다. 네 강이 아무리 다양해 보여도, 그 근원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근원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AC.78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어떤 강들이 흐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강들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선과 진리에서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아니면 기억-지식과 이성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의미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덴의 강들을 통해, 인간 지성의 가장 건강한 질서를 조용히 제시합니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네 종류 나무의 속뜻' (8-9절)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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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다음으로 그의 지성은 동방의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들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들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knowledge [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8, 9)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본격적으로 ‘천적 인간의 내적 풍경’을 펼쳐 보이는 지점입니다. AC.76에서 생명의 근원이 주님으로부터 ‘불어넣어짐’으로 주어진 뒤, AC.77에서는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지성의 형태로 어떻게 펼쳐지는가’가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성을 추상적 사고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의 ‘동산’으로 그립니다. 이는 지성이 구조이기 이전에 ‘살아 있는 환경’임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이 ‘동쪽에 있다’는 표현은 우연한 방향 지시가 아닙니다. 동쪽은 언제나 주님과 사랑이 있는 방향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율적 사고의 영역이 아니라, ‘사랑을 향해 열려 있는 인식의 공간’입니다. 그의 지성은 중립적이거나 냉정한 판단의 장이 아니라, 사랑의 빛 안에서 작동하는 이해입니다.

 

이 동산 안에 있는 나무들은 지성의 내용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지식이나 개념으로 불리지 않고, ‘퍼셉션(perception)으로 불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상태로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천적 인간은 진리를 논증으로 파악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보듯이 압니다. 그래서 그의 지성은 축적된 정보의 창고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들이 자라는 동산입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설명은, 진리가 이 사람에게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대상’임을 보여 줍니다. 그는 진리를 보기 싫어서 억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그의 눈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는 진리가 이미 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차갑고 딱딱하지만, 선 안에 있는 진리는 보기에도 즐겁습니다.

 

한편,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을 뜻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천적 인간은 선을 단지 옳다고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으로 살아갑니다’. 선은 그에게 외적 규범이 아니라, 내적 양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을 행하면서도 피곤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음식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동산의 중심에 있는 두 나무를 짚습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천적 인간의 중심이며, 그의 모든 인식과 행위는 이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사랑이 지성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지성은 사랑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랑을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knowledge [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지식의 차원에 머무는 진리’를 뜻합니다. 신앙은 필요하지만,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생명나무를 보좌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건강하지만, 신앙이 사랑을 대신하려 할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 대비는 곧 창세기 3장에서 드러날 긴장, 곧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천적 지성의 핵심 구조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중심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 진리는 아름답고, 선은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중심이 바뀌면, 같은 나무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됩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창세기 2장은 아직 어떤 갈등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질서 안에 있고, 조화롭습니다. 에덴의 동산은 분열되지 않은 지성의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이상화, 즉 이상적으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지성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그림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조용히 드러냅니다.

 

AC.77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글이면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지성은 지금 어떤 동산인가, 그 중심에는 어떤 나무가 서 있는가 하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신앙이 중심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랑이 중심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78, 창2:1-17 개요, '네 강' (10-14절)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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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주님의 ‘불어넣으심’(breathing)으로 오는 생명(삶)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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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치료 거부’,장기 기증’,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어떤 조언을 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번에 묶어 주셨습니다. ‘연명 치료 거부’, ‘장기 기증’, ‘무빈소 장례’는 모두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불안을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내려놓게 합니다.’

 

아래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이런 제도를 언급했는가?’라는 1차 질문을 넘어서, ‘그가 영계, 죽음, 몸, 장례를 바라보는 일관된 원리’에 따라 각각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연명 치료 거부에 대하여

 

생명은 기계적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전이’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이 몸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 생명은 심장, 호흡, 기계적 기능에 있지 않다

* 생명은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 있다

* 육체는 영이 머무는 동안만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의식도 없고, 내적 삶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오직 기계적 연장만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그것을 ‘신앙적 의무’로 무한히 연장해야 할 이유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식의 연장을 ‘자연 질서에 대한 집착’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생명이 이미 영의 차원에서 떠나려 하고 있는데, 육체만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은 신적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일 수 있다

 

즉, ‘연명 치료 거부는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자연스럽게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장기 기증에 대하여

 

몸은 영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맡겨진 도구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사후의 사람은 이 땅의 육체와는 아무런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다

 

영계에서의 몸은 ‘전혀 다른 영적 몸’’이며, 지상의 심장, 간, 각막, 피부와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749-1756)에서 말하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개념을 빌리면,

 

* 육체는 ‘상응물’이지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영의 상태이며, 사랑의 질(, quality)이다

 

따라서 ‘사후에 육체 일부가 남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쓰이는 몸은 그 사람의 사랑이 마지막까지 자연계에 남긴 흔적이다

 

장기 기증은

 

*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 부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 오히려 ‘이웃 사랑의 자연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죽은 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스베덴보리는 장례 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 그는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난다

* 그리고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로 인도된다

 

즉, ‘빈소에 누워 있는 육체는 이미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습니다.

 

*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 ‘남은 자들의 정서와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 과도한 형식

* 체면을 위한 장례

* 슬픔을 연출하는 절차

 

이런 것들은 필수가 아닙니다.

 

무빈소 장례’는 충분히 스베덴보리적 정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장소에 묶이지 않고, 추모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각자가 마음에서 주님 앞에 고인을 맡기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영적인 의미는 충만합니다.

 

 

4.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연명 치료 거부 → ‘영의 자유를 존중하라

* 장기 기증 → ‘육체를 사랑의 마지막 도구로 내어주라

* 무빈소 장례 → ‘죽은 이를 땅에 붙잡아 두지 말라

 

이 모든 판단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이 선택이 죽음을 부정하려는 집착인가, 아니면 생명의 연속을 신뢰하는 태도인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진짜 신앙은 죽음 이후를 아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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