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a 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하늘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AC.100, 창2:8, 사51:3으로 본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a 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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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a garden)은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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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Emanuel Swedenborg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키는 상태’를 가리키는 깊은 영적 개념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이후에 의도적으로 거슬러 악한 삶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무지나 실수, 연약함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알고도’, 그리고 ‘내적으로 접촉하고도’ 그것을 배반하는 데 있습니다. 즉 진리와 악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되는 것이 profanation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늘과 지옥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은 질서 있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profanation은 이 둘을 한 사람 안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 내면이 분열되고 찢기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죄는 회개로 분리될 수 있지만, profanation은 결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profanation을 중심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 있었으나, 점차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서 내면의 진리와 외적 삶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홍수’는 단순한 자연 사건이 아니라, 이런 혼합이 극에 달해 ‘광적인 욕망과 확신’이 사람을 덮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profanation의 집단적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profanation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깊은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의지와 결합시킨 뒤, 그것을 배반하는 경우입니다. 이해 차원에서만 인정했던 진리를 나중에 떠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깊습니다. 왜냐하면 의지와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사람의 중심과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주지 않으시고, 때로는 진리를 잊게 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알고도 모독하는 것보다 덜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악의 혼합을 막으려는 자비의 관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알고 따르면서도 배반함으로써 깊은 profanation의 예로 제시됩니다. 반면 베드로는 연약함으로 부인했지만, 내면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회복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바벨탑은 신적 진리를 자기 영광과 권세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종교적 profanation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profanation에 빠진 사람은 사후에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고통받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지옥의 고통과는 다른, 내적 분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님의 자비가 끝까지 작용하여 가능한 한 이런 상태를 막으신다고 강조합니다.

 

profanation 교리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며, 삶과 결합된 진리는 거룩합니다. 그것을 자기 사랑의 도구로 삼지 않을 때, 진리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면 내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거룩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겸손히 받고 삶으로 지켜야 한다는 점이 profanation 교리의 핵심입니다.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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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7,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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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7)

 

AC.2803

 

신적 진리는 아들이며, 신적 선은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489, 491, 533, 1147, 2633 참조). 그리고 아버지는 선을 의미합니다. 또한 진리의 잉태와 출생이 선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진리는 다른 어떤 근원으로부터도 존재할 수 없고 나타날 수 없습니다 (existere). 이는 여러 차례 보인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아들이 신적 진리이고, ‘아버지가 신적 선인 까닭은, 신적 본질과 인성의 결합, 그리고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곧 선과 진리의 신적 혼인,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천적 혼인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곧 주님 안에는 무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오직 모든 선과 진리의 있음나타남(esse et existere), 곧 선 자체와 진리 자체라는 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 자체가 아버지이며, 진리 자체가 아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 있으므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That Divine truth is the “son,” and Divine good the “fa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on” as being truth (see n. 489, 491, 533, 1147, 2633); and of a “father” as being good; and also from the conception and birth of truth, which is from good. Truth cannot be and come forth [existere] from any other source than good, as has been shown many times. That the “son” here is Divine truth, and the “father” Divine good, is because the union of the Divine essence with the human, and of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is the Divine marriage of good with truth, and of truth with good, from which comes the heavenly marriage; for in Jehovah or the Lord there is nothing but what is infinite; and because infinite, it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except that it is the being and the coming forth [esse et existere] of all good and truth, or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Good itself is the “father,” and truth itself is the “son.” But because as before said there is a Divine marriage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the father is in the son, and the son is in the father,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0, 11) Jesus saith unto Philip,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10–11).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10:36, 38) Jesus said to the Jews, Though ye believe not me, believe the works; that ye may know and believe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John 10:36, 38).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9, 10, 21) I pray for them; for all mine are thine, and thine are mine; and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John 17:9, 10, 21).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1, 3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1)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if God be glorified in him, God sha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Father, glorify thy son, that thy son also may glorify thee (John 13:31–32; 17:1).

 

[2] 이로부터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어떠한지(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알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상호적이고 교호적인(mutual and alternate) 결합, 다시 말해 서로 안에 거하는(reciprocal) 결합입니다. 이 결합이 바로 신적 혼인(the Divine marriage)이라 불리는 것이며, 이로부터 천적 혼인(the heavenly marriage)이 내려오는데, 이것이 곧 하늘에서의 주님의 나라 자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From this may be seen 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namely, that it is mutual and alternate, or reciprocal; which union is that which is called the Divine marriage, from which descends the heavenly marriage, which is the Lord’s kingdom itself in the heavens —thus spoken of in John: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0) In that day ye sha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e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17:21-23, 26) I pray for them,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I in them and thou in me; that the love wherewith thou hast loved me may be in them, and I in them (John 17:21–23, 26).

 

이 천적 혼인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혼인이라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2508, 2618, 2728–2729 이하 참조). That this heavenly marriage is that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n. 2508, 2618, 2728–2729 and following numbers).

 

[3] 그리고 신적 선은 신적 진리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고, 신적 진리 또한 신적 선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으며, 둘은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있으므로, 신적 혼인은 영원부터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nd because Divine good cannot be and come forth without Divine truth, nor Divine truth without Divine good, but the one in the other mutually and reciprocally, it is therefore manifest that the Divine marriage was from eternity; that is, the son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the son,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7:5, 24) And now O Father, glorify thou me with thy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John 17:5, 24).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은 또한 시간 안에서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 태어나 영화롭게 된 것이 바로 그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고, 곧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여러 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But the Divine human which was born from eternity was also born in time; and what was born in time, and glorified, is the same. Hence it is that the Lord so often said that he was going to the Father who sent him; that is, that he was returning to the Father. And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3,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the Word is Divine truth itself),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3, 14; see also John 3:13; 6:6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3)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62)

 

 

해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 기독론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 신적 선’, ‘아들 = 신적 진리’라는 상응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신적 선은 ‘있음(esse)이고, 신적 진리는 그 있음이 드러난 ‘나타남(existere)입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형상을 입고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고, 진리는 사랑이 스스로를 표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선에서 태어나며, 선 없이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결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인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삼위에 대한 전통적 오해가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위격을 세 존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본질과 표현’, ‘사랑과 그 사랑의 지혜’, ‘선과 진리’라는 구분을 합니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구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다르지만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선과 진리는 서로를 전제로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알게 하기를 원하고, 진리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친밀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호 내재, 곧 존재의 상호 침투를 말합니다.

 

이 상호 내재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혼인’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고, 진리가 선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본질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는 생명을 가집니다. 진리가 선 안에 있을 때, 선은 질서와 방향을 가집니다. 만약 선만 있고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 충동이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면 그것은 차갑고 죽은 지식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하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진리 자체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신적 혼인이 영원부터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라는 말씀은, 시간 이전에 이미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완전한 결합이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시간 안에서 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신적 진리입니다. 성육신은 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던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된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던 선이 인간적 형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인성이 단순한 피조적 육체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영원한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이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영화롭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완전한 신성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장소 이동이 아니라, 인성의 완전한 신성화, 곧 나타남이 본질과 완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교리는 단지 기독론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신적 혼인에서 하늘의 혼인이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인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되,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려 하나, 무엇이 참된지 모르면 그것은 왜곡됩니다. 거듭남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진리가 의지 속으로 내려와 사랑이 되고, 사랑이 다시 진리를 통해 질서를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적 혼인’이며,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히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지혜로 드러나며, 그 지혜는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곧 신적 진리이며, 그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인간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적 사랑을 만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설교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과 결합시킬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는 곧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씀은 신비적 표현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생기는 실제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AC.2803은 삼위 이해, 성육신 이해, 하늘의 구조, 인간 거듭남의 원리를 하나로 묶는 핵심 단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입니다. 그 완전한 결합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결합이 우리 안에서 모형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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