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다 모르는 상황이므로, 먼저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어떠함을 간략히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어 있는 사람,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겉으로는 살아있으나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상태인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그것을 숭배(adore)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사랑에서라기보다 신앙의 원리에서 인정하며, 그의 행위 역시 주로 그 신앙에서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고 또한 퍼셉션으로 알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행위 또한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influence)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regard), 그러니까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목적이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일 뿐이며, 그는 영원한 생명(, life)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고, 그로 인해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인해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어 있는 사람은 싸움, 그러니까 영적 전투 중에 있을 때 거의 항상 패하며, 싸움이 없을 때에도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여 그는 종이 됩니다. 그를 묶는 사슬은 외적인 것들로서, 곧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과 재산, 이익, 그리고 명성을 잃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아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항상 승리하며, 그를 붙드는 사슬은 내적인 것으로서, 양심의 사슬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슬이 있는데, 그것들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로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의 해설 가운데서도, 가장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징을 풀지 않고, 은유를 쓰지 않으며, 곧바로 사람의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A dead man),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입니다. 이는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가 아니라,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를 질서 있게 드러내기 위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설명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미 이 시대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영적 인간’조차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상 ‘죽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설명이 아니라, ‘인식의 눈을 열기 위한 조정’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구분은 ‘무엇을 참과 선으로 인정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과 선으로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악의 의도가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유용한 것만을 실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숭배’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여기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의 출발점은 ‘사랑’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믿고, 그래서 그것을 따릅니다. 그의 행위는 신앙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단계이지만, 여전히 중간 단계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 둘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을 보듯이 압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이 없습니다. 믿음이 사랑을 앞서지 않고,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두 번째 구분은 ‘삶을 움직이는 목적’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목적은 오직 현세적 삶에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 역시 개념으로는 알 수 있지만, 삶의 중심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목적이 분명히 바뀝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그로 인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목적의 최종점이 여전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목적 자체가 주님입니다. 그는 결과를 위해 주님을 향하지 않고,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곧 주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은 그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세 번째 구분은 가장 실제적이고도 날카롭습니다. ‘싸움과 자유’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항상 패합니다. 설령 외적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를 붙잡는 것은 법, 처벌, 손해, 체면 같은 외적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것에 매여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유혹과 갈등을 겪지만, 싸움 끝에 승리합니다. 그를 붙잡는 사슬은 더 이상 외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내적인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책임을 집니다.

 

천적 인간은 여기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섭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이 다가오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멸시합니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이미 중심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자’라 불립니다.

 

겉으로 보면, 천적 인간은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에게도 사슬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입니다. 그것은 법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는 선을 떠올리기 때문에 악을 의도하지 않고, 진리를 보기 때문에 거짓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질서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AC.81은 그래서 창세기 2장의 모든 내용을 하나의 인간 이해로 묶어 줍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금지 명령, 안식일은 모두 ‘천적 인간’이라는 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서로 다른 얼굴들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신화 속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향하도록 창조된 상태’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느 상태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판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길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AC.80, 창2:1-17 개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16-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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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치료 거부’,장기 기증’,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어떤 조언을 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번에 묶어 주셨습니다. ‘연명 치료 거부’, ‘장기 기증’, ‘무빈소 장례’는 모두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불안을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내려놓게 합니다.’

 

아래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이런 제도를 언급했는가?’라는 1차 질문을 넘어서, ‘그가 영계, 죽음, 몸, 장례를 바라보는 일관된 원리’에 따라 각각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연명 치료 거부에 대하여

 

생명은 기계적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전이’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이 몸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 생명은 심장, 호흡, 기계적 기능에 있지 않다

* 생명은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 있다

* 육체는 영이 머무는 동안만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의식도 없고, 내적 삶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오직 기계적 연장만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그것을 ‘신앙적 의무’로 무한히 연장해야 할 이유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식의 연장을 ‘자연 질서에 대한 집착’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생명이 이미 영의 차원에서 떠나려 하고 있는데, 육체만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은 신적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일 수 있다

 

즉, ‘연명 치료 거부는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자연스럽게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장기 기증에 대하여

 

몸은 영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맡겨진 도구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사후의 사람은 이 땅의 육체와는 아무런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다

 

영계에서의 몸은 ‘전혀 다른 영적 몸’’이며, 지상의 심장, 간, 각막, 피부와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749-1756)에서 말하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개념을 빌리면,

 

* 육체는 ‘상응물’이지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영의 상태이며, 사랑의 질(, quality)이다

 

따라서 ‘사후에 육체 일부가 남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쓰이는 몸은 그 사람의 사랑이 마지막까지 자연계에 남긴 흔적이다

 

장기 기증은

 

*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 부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 오히려 ‘이웃 사랑의 자연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죽은 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스베덴보리는 장례 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 그는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난다

* 그리고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로 인도된다

 

즉, ‘빈소에 누워 있는 육체는 이미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습니다.

 

*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 ‘남은 자들의 정서와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 과도한 형식

* 체면을 위한 장례

* 슬픔을 연출하는 절차

 

이런 것들은 필수가 아닙니다.

 

무빈소 장례’는 충분히 스베덴보리적 정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장소에 묶이지 않고, 추모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각자가 마음에서 주님 앞에 고인을 맡기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영적인 의미는 충만합니다.

 

 

4.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연명 치료 거부 → ‘영의 자유를 존중하라

* 장기 기증 → ‘육체를 사랑의 마지막 도구로 내어주라

* 무빈소 장례 → ‘죽은 이를 땅에 붙잡아 두지 말라

 

이 모든 판단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이 선택이 죽음을 부정하려는 집착인가, 아니면 생명의 연속을 신뢰하는 태도인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진짜 신앙은 죽음 이후를 아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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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9)

 

AC.531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는 말씀이, 왜곡되었던 것을 회복하게 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또한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수고(work)는 진리를 인식하는 일이 수고(labor)와 고통(distress) 없이는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은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라멕(Lamech), 곧 황폐화된 교회(the vastated church)의 상태가 묘사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는 자기 것(their own)에서 진리를 찾고 선을 행해야 할 때, 거기에는 ‘수고롭게 일하는(work and labor of the hands)이 따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인데, 거기서는 거짓과 악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다(Jehovah cursing)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서 AC.245에서 보았습니다. ‘위로하다(to comfort)라는 말은 ‘아들(the son), 곧 노아와 관련되며, 이것은 새로운 거듭남(a new regeneration), 곧 고대교회라고 하는 새 교회(a new church)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 즉 ‘노아(Noah)는 쉼(rest)을 의미하고, 쉼에서 오는 위로(comfort)를 의미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에 대해 일곱째 날에 주님께서 쉬셨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AC.84-88 참조) That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will also appear,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 following pages. By “work”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what is true except with labor and distress. By 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do nothing good. Thus is described “Lamech,” that is, the vastated church. There is “work and labor of the hands” when,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men must seek out what is true and do what is good. That which comes of this is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at is, nothing comes of it but what is false and evil. (But what is signified by “Jehovah cursing,” may be seen above, n. 245.) To “comfort” has reference to the “son,” or Noah, whereby is signified a new regeneration, thus a new church, which is the ancient church. By this church, or “Noah,” is therefore likewise signified rest, and comfort that comes from rest, just as it was sai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t was the seventh day, in which the Lord rested. (See n. 84–88.)

 

 

해설

 

이 글은 라멕으로 대표되는 황폐화된 교회의 상태와, 노아로 대표되는 새 교회의 도래를 가장 구체적으로 대비시키는 설명입니다. 앞서 ‘위로’라는 표현이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 아니라 교리를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수고와 고통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work)는 단순한 노력이나 성실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가 더 이상 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외적 사고와 추론을 통해 겨우 접근해야 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진리가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그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안다는 일 자체가 짐이 되고, 마음의 고통을 동반하게 됩니다.

 

손의 고됨(the toil of the hands)이라는 표현은 선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알기 어려워진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불가능하다는 말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쓰임새가 더 이상 내적 생명에서 나오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억지로 만들어 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선은 오래 지속되지도 못하고, 결국 왜곡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땅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뜻하고, 저주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결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 지식과 자기 의지에서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려 할 때, 그 결과는 거짓과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라멕, 곧 황폐화된 교회의 실상입니다.

 

이 지점에서 ‘위로(comfort)가 등장합니다. 이 위로는 라멕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the son), 곧 노아에게서 옵니다. 이는 황폐화된 교회가 스스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남으로써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새로운 거듭남, 새로운 교회라고 부릅니다.

 

노아로 대표되는 고대교회는 퍼셉션을 회복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교리를 통해 질서를 회복합니다. 이 교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멈추고,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교리는 억압이 아니라 위로가 됩니다. 더 이상 수고와 손의 고됨으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노아가 ‘(rest)과 연결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 쉼은 퍼셉션 안에서의 완전한 일치와 생명을 뜻했습니다. 고대교회에서의 쉼은 그와 같은 차원의 쉼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쉼입니다. 이것이 교리에서 오는 위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우리는 라멕의 상태처럼, 자기 힘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 할 때 깊은 피로를 느낍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식, 곧 교리를 통해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쉼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이 쉼은 모든 문제가 사라져서 오는 쉼이 아니라, 방향이 바로잡혀서 오는 쉼입니다.

 

그래서 AC.531은 황폐화와 회복, 수고와 위로, 자기 자신과 주님의 질서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노아 이야기 전체의 신학적 중심을 다시 한번 분명히 세워 줍니다.

 

 

 

AC.532, 창5:30-31,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32-533)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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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0, 창5:29, ‘이름, 교회, 교리’, 그리고 ‘리메인스’(remains)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9) AC.530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들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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