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h)이라는 교회는 태고교회와 아주 흡사했었다

 

3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484

(Seth)이라는 교회는 태고교회와 아주 흡사했었다는 사실은 이 교회에 대하여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 하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모양’이라는 말은 신앙과, ‘형상’이라는 말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이 교회가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관하여 태고교회와 같지 않았다는 사실은, 방금 앞서 말씀드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신 말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AC.476), 이 말씀은 여섯째 날 상태에 있는 영적 인간이라는 의미인데요, 여섯째 날 상태에 있는 영적 인간, 즉 사랑이 주 원리라기보다는 여전히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상태가 바로 이 사람의 모양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Posted by bygracetistory
,

’,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매우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는데, 그중 첫 번째, 제일의 교회를 사람이라 하였다. 이들 교회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 시절 교회들 간의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였다.

 

3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483

다음과 같은 이름들, 곧, ‘’,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매우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는데, 그중 첫 번째, 제일의 교회를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들 교회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 시절 교회들 간의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쯤에서 퍼셉션에 관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천국 그 어디에서든 천국을 다스리는 건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 말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퍼셉션은 어느 두 커뮤니티도 유사한 퍼셉션을 누리고 있지 않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며, 도저히 설명 불가한 것인데요, 그 이유는 천국에 존재하는 퍼셉션들은 (Genus) 종(, Species)으로 분류되며, 속만으로도 셀 수가 없는데, 그 각각의 속에 속하는 종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AC.1383-1400, 1504-1520)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셀 수 없이 많은 속이 존재하고, 그 각 속에 딸린 종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며, 더욱이 개별 종 안에서도 셀 수 없는 다양함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은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해 오늘날 세상이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미미한지, 미미하다 못해 거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퍼셉션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며, 만일 들어도 무슨 그런 것이 존재하느냐 하며 안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의 천적 나라를 표현했습니다. 퍼셉션의 일반적, 구체적 아주 미세한 차이들에서조차 말이지요. 하지만 오늘날은 퍼셉션의 본성에 관해 가장 대충으로도 전혀 알려진 바 없기 때문에, 이들 교회들의 퍼셉션 그 속과 종 어떤 경우에 대해서도 그저 어둡고 이상하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 시절 그들은 가족, 가문 및 민족들로 구분되었으며, 결혼도 가족과 가문 내에서만 했습니다. 퍼셉션의 속, 종의 보존 및 종족 고유특성의 대물림처럼 부모를 통한 정확한 대물림을 위해서였지요. 이런 이유로, 과거 태고교회였던 사람들은 지금도 천국에서 함께 지냅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Posted by bygracetistory
,

(, the years), 몇 세를 살고(the numbers of years)의 속뜻, 본 장부터 십이 장까지는 겉뜻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고, 대신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들이 들어있다.

 

3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482

본 장에 나오는 ‘(, the years)와 ‘몇 세를 살고(the numbers of years)의 속뜻이 무엇인지가 지금까지는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겉뜻에 머무르시는 분들은 세속적, 즉 시간과 관련된 년 수들로 생각하시겠습니다만, 본 장부터 십이 장까지는 겉뜻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고, 대신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이름들뿐 아니라(AC.470) 숫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숫자 삼(3, three)과 칠(7, seven)이 있는데요, 이 숫자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이 숫자들은 시간이나 다른 것들이 포함하거나 표현하는 상태들과 관련,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숫자들은 가장 짧은 시간 간격들에서도 가장 긴 시간 간격들과 같은 걸 의미합니다.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듯 가장 작은 것들은 가장 큰 것에 속하기 때문인데, 전체가 부분들에서,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들에서 제대로 나올 수 있으려면 반드시 닮음(a likeness)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사16:14)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Isa. 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사21:16)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Isa. 21:16)

 

이 본문들에 나오는 기간들은 가장 작은 간격들과 가장 큰 간격들 둘 다를 의미합니다. 하박국에서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합3:2)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Hab. 3:2)

 

수년 내에(the midst of the years)는 주님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보다 작은 간격들의 경우, 사람이 거듭나고 있을 때처럼 모든 주님의 오심(every coming of the Lord)을 의미하며, 보다 큰 간격들의 경우는 주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 ‘구속할 해(the year of the redeemed)라 하신 경우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그래서 사탄이 결박되어 있었던 천 년(계20:2, 7)과 첫째 부활 관련 천 년(계20:4-6) 역시 결코 천 년(1,000년)이 아닌, 그들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AC.23), ‘’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곤 하며, ‘’ 또한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년 수, 햇수로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장에 나오는 시간들 역시 상태들을 포함함이 틀림없습니다. 모든 개 교회는 선천적, 후천적 재능 차이에 따라 퍼셉션(perception)의 상태가 나머지 교회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20:4-6)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