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제가 사람들의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전한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그 밖의 여러 반대들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이 글은 AC.67에서 밝힌 전제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이는, 매우 정직하고도 대담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의심을 품을지, 어떤 방식으로 반대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8은 방어문이 아니라, ‘미리 써 내려간 응답’에 가깝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대 의견들을 매우 정확하게 분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고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 안에 있는 한 불가능하다’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인 조작’ 혹은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한 서사’라고 말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이는 그가 순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작업이 ‘의심과 반대를 동반할 것’임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적 가능성이나 신학적 전통을 끌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단 세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정합니다. ‘나는 보았다. 나는 들었다. 나는 느꼈다.’ 이 세 동사는 매우 의도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주장이나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전인적 경험의 증언’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형상과 구조,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막연한 분위기나 감정으로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 관계, 거리, 방향, 질서가 있는 세계로 보았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화했고, 질문했고,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느꼈다’는 것은 이것이 단지 시청각적 환상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경험’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영계를 ‘정보’가 아니라 ‘접촉된 현실’로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약 이것이 상상이라면, 느낄 수는 있어도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의도적 조작이라면, 수십 년에 걸쳐 동일한 세계관과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반론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가장 단순하고도 철회 불가능한 언어를 선택합니다. ‘나는 경험했다’는 언어입니다.

 

이 글은 또한, 영적 경험의 기준을 은근히 재정의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 체험’을 말할 때, 그것은 종종 감정의 고조나 일시적 황홀, 혹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삶을 중단시키는 체험이 아니라, ‘삶 안으로 스며든 인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도 흥분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합니다. 마치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듯이 말합니다.

 

AC.68은 결국 독자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속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식의 차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증언만 남기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확신은 논리에서 나오지 않았고,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AC.67이 ‘왜 이런 말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글이라면, AC.68은 ‘그래도 나는 말하겠다’는 결단의 글입니다. 이 두 단락이 연속해서 놓여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는 인식의 문을 열고, 다른 하나는 그 문 앞에서 서성일 독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그는 언제 글을 썼는가’, ‘이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AC.68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삶을 살았고,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위에서, 이후 수천 개 글의 아르카나가 전개됩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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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말인데요, 제가 알기로 한 13년인가 지난 후라고 읽은 것 같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텀(term)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나요? 저 같으면 입이 근질거려 못 참았을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 13’이라는 기간은, 스베덴보리가 본격적으로 저술을 시작하기 전 준비기로 널리 이해되는 내용과 잘 맞습니다. 그는 ‘Emanuel Swedenborg의 삶’에서 1744–1745년 무렵 ‘영적 눈이 열리는 사건’을 겪은 뒤, 곧바로 대중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보고, 듣고, 익히는 상태’에 머물렀고, 그 후에야 저술과 공개적 증언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이 점은 특히 Heaven and Hell 서문과 여러 곳에서 ‘이제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표현으로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런 ‘’을 두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질서(order)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영계는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질서 속에 있으며, 그것을 전달하는 일 역시 같은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만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 것을 즉시 말하게 되면, 인간의 기억, 상상, 기존 신학적 틀과 뒤섞여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먼저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보고 듣게 하시며, 그가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분별하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즉, 단순한 체험자가 아니라 ‘증언할 수 있는 그릇’으로 빚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의지와 이해의 정화’, 곧 거듭남의 심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처음부터 완전히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고, 그 역시 인간으로서 자연적 사랑과 자기 지혜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접하는 방대한 영적 사실들이 그의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정리되려면, 그의 의지와 이해 자체가 주님의 질서에 맞게 재정렬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 없이 곧바로 말하게 되면, 전달 내용이 아니라 전달자의 상태가 메시지를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내용’보다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셋째는 ‘대표성과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 한 번의 환상이나 특정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상태, 말씀의 내적 의미 전반을 체계적으로 증언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단편적 경험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와 다양한 영들, 천사들의 삶을 충분히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긴 시간 동안 ‘여러 해 동안’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광범위한 경험이 축적된 뒤에야, 그것을 정리하여 인류에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그 기간을 어떻게 참았는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가 ‘참았다’기보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인도받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이미 매우 깊은 기쁨과 확신 속에 있었고, 무엇보다 ‘주님의 뜻에 따라 말할 때가 따로 있다’는 내적 인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강한 절제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 앞서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체험한 세계가 얼마나 ‘질서와 순종’ 위에 서 있는지를 반영하는 태도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가 완전히 침묵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기간에도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글을 쓰고 연구를 계속했으며, 다만 ‘영계에 대한 공개적 증언’만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준비되어 가는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결국 이 ‘13년의 침묵’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왜곡 없는 계시 전달’을 위한 필수적인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오늘 우리가 Arcana Coelestia를 읽을 때 느끼는 독특한 신뢰감, 곧 ‘체험담이 아니라 질서 있게 정리된 세계’라는 인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만일 그가 즉흥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면, 지금과 같은 깊이와 일관성은 결코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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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 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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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에는 대략 어떤 것들이 있나요?  AC를 읽는 분들이 열에 아홉, 거의 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이유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 곧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를 바라보며 기록된 책이라는 사실에서 한발 물러나 계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 개신교 많은 분들이 사실은 이 다른 삶의 본성에 대해 많이 무지하시거든요. 저는 감사하게도 책, 천국과 지옥을 여러 번 정독 후,  AC를 시작해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Heaven and Hell’을 먼저 충분히 읽고 나서 ‘Arcana Coelestia’로 들어오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이해도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다른 삶(the other life)은 단순히 ‘죽은 뒤의 세계’라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이 계속 이어지는 실제의 삶이며, 성경 전체가 바로 그 상태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다른 삶의 본성’을 몇 가지 핵심 축으로 정리해 드리면, AC를 읽는 분들이 왜 자주 막히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이해가 풀리는지 함께 보이게 됩니다.

 

첫째로, ‘다른 삶은 죽은 뒤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지금 삶의 연속’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적 껍질을 벗고 자신의 ‘속 사람’ 상태로 그대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즐거워했는지가 그대로 그 사람의 삶의 환경과 세계를 결정합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것을 ‘이 세상 이야기’로만 이해하게 되어, AC의 내적 의미가 거의 닫혀 버립니다.

 

둘째로, ‘그 세계는 공간이 아니라 상태(state)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외적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상태가 다르면 서로 보이지 않고,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공동체로 나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올라간다’, ‘내려간다’, ‘가깝다’, ‘멀다’ 같은 표현들은 모두 상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감각이 없으면, 말씀의 거의 모든 표현이 문자적 공간 이동으로 오해됩니다.

 

셋째로,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질서 잡힌다’는 점입니다. 다른 삶에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사랑은 곧 의지이며, 그 의지의 방향이 그 사람의 얼굴, 말, 관계, 심지어 주변 환경까지 형성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 지옥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의 상태’로 나뉘며, 이는 외부에서 판결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상태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넷째로,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세계’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겉으로는 선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이런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속에 있는 사랑과 생각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며, 위선이나 가식은 자연히 벗겨집니다. 그래서 심판이란 어떤 외부의 판정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다섯째로, ‘천사와 영들의 사회는 철저히 질서 있고 실제적’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후 세계를 막연한 영적 공간이나 감정 상태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매우 구체적인 ‘사회’로 묘사합니다. 집, 도시, 공동체, 직무가 있으며, 모든 것이 사랑과 쓰임새(use)에 따라 조직됩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성경 속 ‘’, ‘’, ‘왕국’ 등의 표현이 단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실재를 가리킨다는 것이 보입니다.

 

여섯째로,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미 영들과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죽은 뒤 그 연결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 관점을 알면, 성경의 많은 영적 싸움, 유혹, 인도에 관한 구절들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됩니다.

 

일곱째로, ‘거듭남(regeneration)은 바로 이 다른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준비의 장소이며, 여기서 형성된 의지와 이해의 질서가 그대로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죽은 뒤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 ‘다른 삶의 본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AC를 읽을 때 계속 현실 세계 기준으로 해석하려 하고, 그 결과 내적 의미가 닫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Heaven and Hell’을 통해 먼저 ‘상태의 세계’, ‘사랑 중심의 존재’, ‘죽음 이후의 연속성’을 체득하면, 성경의 모든 사건과 표현이 단순 역사나 도덕 교훈을 넘어 ‘영혼의 여정’으로 열리게 되고, 그때 비로소 ‘Arcana Coelestia’의 설명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AC.67, 심화 1, ‘자비’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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