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innocence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증명됩니다. 무결함(integrity)innocence가 떠나자,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그것이 수치스럽게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표상들로부터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한 자들에게서 이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innocence의 성질에 따라 화관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들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That 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 signifies innocence is proved by what follows, for when integrity and innocence departed they were ashamed of their nakedness, and it appeared to them disgraceful, and they therefore hid themselves.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Especially is it evident from the innocent in heaven, who appear as naked infants decorated with garlands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ir innocence;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해설

 

AC.165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창2:25의 표현을 ‘결정적으로 innocence와 동일시’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념적 설명에 머물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상태의 변화’, 그리고 ‘영계의 실제 표상’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먼저, 성경 본문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innocenceintegrity가 떠난 이후, 동일한 ‘벌거벗음’이 갑자기 수치가 됩니다. 즉, 외형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벌거벗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벌거벗음을 감싸고 있던 innocence 사라졌을 때, 비로소 수치가 발생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은 죄책감 이전에, ‘자기의 own에 대한 자각이 깨어난 상태’입니다.

 

이 원리는 영들의 세계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확인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보이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벌거벗음이 수치의 표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은폐가 없는 상태’, 곧 innocence의 표상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방어와 자기 정당화가 필요한 상태에서는 결코 벌거벗을 수 없습니다. 벌거벗음은, 숨길 것이 없다는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천국의 순진한 자들이 ‘화관을 쓴 벌거벗은 유아’로 보인다는 묘사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상응 언어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미숙함이 아니라 완전한 신뢰입니다. 화관은 그 innocence의 질과 종류를 나타내며, 모든 innocence가 동일하지 않고,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반면, innocence가 덜한 자들이 입고 있는 ‘빛나는 옷’은 위선이나 가림이 아니라, ‘보호된 선과 진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옷이 있다는 것이 곧 열등함을 뜻하지는 않지만, 벌거벗음이 허락된 상태는 가장 깊은 innocence의 차원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선지자들이 본 천사들의 옷 입은 모습은 바로 이 질서에 속합니다.

 

이 단락은 창2의 마지막 장면을 완전히 정리해 줍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인간이 아직 자기의 own을 자기 생명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innocence가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65는 그 상태가 단지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 질서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임을 보여 주며, 곧이어 등장할 창3의 ‘부끄러움’과 ‘숨음’을 위한 대비를 완성합니다.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for when spirits wish to 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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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 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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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6, 창2:25,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6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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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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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C.164)

 

 

AC.164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가장 놀랍고도 위로가 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인간의 own이 본질적으로 evil and false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그 own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와 innocence own 자체를 본질적으로 없애 버린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as it were abolish it’, 곧 ‘마치 그것을 제거한 것처럼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기울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에 들어오면, 그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중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더 이상 방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식으로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의 evil을 단순 법적으로 ‘못 본 척’하는 것도 아니고, 표면만 덮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강한 생명이 들어와, 이전의 악한 proprium이 중심 권력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innocence가 왜 중요한지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단순 순진함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 근원으로 여기지 않을 때, 자기 proprium은 점점 절대 권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주님 사랑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사실 매우 실존적인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인간조차 자기 안에 여전히 own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만 두면 지옥으로 떨어질 존재라고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런데도 천사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유는, 자기 own이 완전히 annihilated(전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두 층위로 봅니다. 자기 자신만 보면 인간은 여전히 evil and false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influx 안에서 보면, 그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원래 인간성 삭제’가 아니라, 중심 통치권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proprium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용인하거나 덮는 것 이상’인지도 중요합니다. 단순 용인은 악을 그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단순 덮음은 외형만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사랑은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꿉니다. 악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인간 존재 중심과 delight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마치 잡초가 완전히 뽑히지 않았어도 건강한 나무가 자라면 더 이상 정원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164는 인간 구원을 단순 법적 선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제 생명 질서의 변화입니다.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인간 own 안으로 흘러들어와, 이전에는 악과 거짓 중심으로 움직이던 인간을 점점 다른 중심 아래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evil은 여전히 인간 안에 남아 있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는 마치 제거된 것처럼 힘을 잃게 됩니다.

 

 

 

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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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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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C.164)

 

여기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를 주입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것 간 무언가 충돌은 없나요? 그러니까 주입 전 먼저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

 

 

스베덴보리 전체를 보면, 바로 그 질문 때문에 그는 ‘influx’와 ‘freedom’을 수없이 함께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질문처럼, ‘주님이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주입하신다면, 인간 자유는 어디 있는가?’라는 문제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님은 인간 안으로 선을 ‘강제로 밀어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입(instilled)은 흔히 현대인이 상상하는 강제 프로그래밍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생명 제공에 가깝습니다. 주님은 항상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인간 안으로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자유는 ‘무영향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항상 천국과 지옥 양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완전히 중립 진공 상태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란, 그 두 흐름 사이에서 자기 것으로 느끼며,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체어리티와 innocence influx하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자기 proprium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유혹이 바로 거기서 일어납니다. 인간 안에는 ‘주님께 돌릴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인가’ 하는 긴장이 계속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 자유를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주님이 인간 안에 선을 irresistible하게 강제 주입하신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동 기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도, 신앙도, 체어리티도 더 이상 인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AC.164의 ‘체어리티와 innocence own 안에 주입된다’는 말도, 실제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제공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 원래 ugly하고 evil했던 proprium조차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proprium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해 독립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그 생명을 자기 삶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목사님 질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먼저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인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사실 인간 존재 전체가 이미 끊임없는 influx 안에 있습니다. 숨 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이미 모든 순간 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influx 자체보다 ‘수용 여부’입니다. 주님은 문을 두드리시지만, 억지로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적 innocence는 강제 순종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기쁨으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자유로운 천사들은 가장 독립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의 influx와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AC.16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흘려보내시지만, 인간 자유를 파괴하면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만, 그것은 진짜 인간 자신의 체어리티와 innocence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AC.164, 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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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심화 1, ‘막10:14-16’

AC.164.심화 1. ‘막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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