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4:11)

 

AC.379

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cursed) 선에서 돌아서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밝혔습니다(AC.245). 불의와 가증한 것들, 미움이 사람을 돌아서게 하여 오직 아래쪽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하며, 그리하여 지옥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추방되고 소멸될 일어납니다. 그때에는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사랑과 자비이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코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불과하며, 지옥의 무리들조차도 그러한 지식을 가질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선한 사람들을 교활하게 속이며 자신을 빛의 천사들인 것처럼 가장할 있습니다. 또한 가장 악한 설교자들이 때때로 경건과 같은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곤 하지만,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에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억 속에만 있는 신앙이나 거기에서 나온 생각만으로 어떤 유익이 있을 있다고 믿을 만큼 판단력이 약한 사람이 있을 있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말이나 동의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것이 의지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은 바로 의지입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이며, 사람이 의지하지 않는 생각이나 말은 실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의지로부터 자신의 성질과 성향을 얻습니다. 의지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한다면, 생각 안에는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악하게 산다면, 그는 악한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없으며, 그러므로 거기에는 신앙이 없습니다.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that to becursedis to be averse to good, has been already shown (n. 245). For iniquities and abominations, or hatreds, are what avert man, so that he looks downward only, that is,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thus to those which are of hell. This takes place when charity is banished and extinguished, for then the bond which connects the Lord with man is severed, since only charity, or love and mercy, are what conjoin us with him, and never faith without charity, for this is no faith, being mere knowledge, such as the infernal crew themselves may possess, and by which they can craftily deceive the good, and feign themselves angels of light; and as the most wicked preachers are sometimes wont to do, with a zeal like that of piety, although nothing is further from their hearts than that which proceeds from their lips. Can anyone be of judgment so weak as to believe that faith alone in the memory, or the thought thence derived, can be of any avail, when everybody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at no one esteems the words or assenting of another, no matter of what nature,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will or intention? It is this that makes them pleasing, and that conjoins one man with another. The will is the real man, and not the thought or speech which he does not will. A man acquires his nature and disposition from the will, because this affects him. But if anyone thinks what is good, the essence of faith, which is charity, is in the thought, because the will to do what is good is in it. But if he says that he thinks what is good, and yet lives wickedly, he cannot possibly will anything but what is evil, and there is therefore no faith.

 

해설

AC.379는 앞의 AC.378에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가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이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245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선에서 돌아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저주를 주님께서 가인에게 악을 내려 보내시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불의와 가증한 것들, 미움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선에서 돌아서고, 마침내 아래쪽, 곧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되며 지옥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등지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저주의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곧바로 밝힙니다. ‘체어리티가 추방되고 소멸될 입니다. 이 한 문장이 가인 이야기 전체를 다시 묶어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교리 하나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표현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어야 하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더 이상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mere knowledge’, 곧 단지 지식일 뿐입니다. 사람이 주님에 관한 많은 교리를 알고,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며, 신학적 논리를 능숙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지옥의 무리들조차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사랑하고 의지하여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기억과 이해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을 교활하게 속이고 자신을 빛의 천사들인 것처럼 가장할 있다는 대목도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합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 자체는 악한 의지에 의해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기 위해 진리를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지배하거나 속이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같은 진리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들리는 말만 보면 둘을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악한 설교자들도 때때로 경건해 보이는 열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특정 설교자들을 의심하고 판단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외적인 종교 언어와 내적인 의지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경고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379의 논증은 기억 속에만 있는 신앙으로 옮겨갑니다. 사람이 교리를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원에 어떤 효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느냐고 스베덴보리는 반문합니다.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예로 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그의 진정한 의지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말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이용하려 한다면 그 말은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이 서툴더라도 실제로 상대의 선을 원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일상적인 원리를 사람과 주님의 관계에도 적용합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에서 가장 강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나옵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이것은 생각과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의지와 이해는 인간 마음의 두 중요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지가 그의 생명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의지하지 않는 것을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앙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말과 생각은 아직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의지로부터 자신의 성질과 성향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대목을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어떤 악한 의지가 느껴지면 그것이 사람의 영원한 본질이다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 중인 인간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애정과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악한 충동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려 한다면, 그 싸움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실제 사람이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모든 충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자기 것으로 삼는 지배적인 의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남의 싸움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한다면, 생각 안에는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다고 합니다. 얼핏 읽으면 앞에서 생각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놓고 이제는 선한 생각 안에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유를 덧붙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즉 여기서 말하는 선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선에 관한 명제를 떠올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실제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의지와 분리된 지식이 아니라 의지에서 생명을 받은 생각이며, 따라서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willing what is good’, 선을 의도하는 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단순히 무엇이 참인지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유롭게 의도하며 행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신앙의 생각 안에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악하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은 실제로 악한 것 외에는 의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신앙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서도 한두 번의 실패나 거듭남 가운데 넘어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선을 진심으로 의도하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 수 있고, 다시 회개하여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번 문맥에서 문제 되는 것은 입과 생각으로는 선과 진리를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악을 사랑하고 악한 삶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 입술의 신앙은 그의 생명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신앙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79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보다 선행이 중요하다는 도덕적 교훈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해 행하는 외적인 선행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 안에 받아들여지고, 진리와 결합하여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그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믿을 것인가, 행할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진리가 의지와 안에서 사랑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결국 AC.379에서 가인의 저주가 왜 그렇게 심각한지가 드러납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적 덕목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주님을 결합시키는 결속을 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남을 수 있고, 심지어 매우 정교한 신학과 경건한 말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입술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고백되는가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의도하며 살아가게 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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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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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4:11)

 

AC.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입을 벌려(which hath opened its mouth)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아우의 피들을 손에서 받아들였은즉(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그것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해설

AC.378은 창4:11땅이 입을 벌려 손에서부터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7에서 은 사람 안에 자리 잡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고,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며 악과 거짓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78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도 외적인 토지가 가인을 저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킨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림으로써 생긴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서 돌아섰느냐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여 그에게서 돌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킨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를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저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스스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저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서는 것 자체가 저주의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인간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생명과 선이 흘러오는 질서에 등을 돌립니다. 햇빛은 계속 비치지만 사람이 스스로 등을 돌리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이 태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태양을 등진 상태에서 생긴 것처럼, 여기서 저주도 주님의 사랑이 반대로 변한 결과라기보다 가인의 분열이 가져온 영적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땅이 입을 벌렸다는 것은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땅이 입을 벌려 피를 받아들였다는 문자적 장면을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가르침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바로 앞에서 땅은 사람 안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 이 있습니다. 입은 말하고 가르치는 기능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분열이 단순히 내면에 잠재된 생각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로 표현되고 가르쳐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상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마음의 흔들림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원리가 교리로 형성되고 전달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점은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와 직접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을 거부했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결국 완전히 배척했습니다. 이제 그 상태가 땅이 입을 벌린다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즉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가르침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악과 거짓이 개인의 내적 상태에서 교리로 조직되고 가르쳐질 때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AC.377에서 사람이 그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형성된다고 한 설명과도 바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아우의 피들을 손에서 받아들였은즉은 그 이단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시 피들이 복수형으로 나타납니다. AC.374에서 이미 그 이유가 설명되었습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은 단지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추상적 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있어야 할 여러 선한 것들이 폭력을 당하고 소멸되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특히 손에서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AC.378 자체에서는 의 상응을 별도로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앞질러 자세히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전체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인의 분열과 이단이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결과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이라고 아주 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체어리티를 덜 중요하게 여긴 정도가 아니라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78의 세 표현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입니다. 그다음 땅이 입을 벌린다는 것은 그 분열이 이단적 교리가 되어 가르쳐지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땅이 아우의 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교리가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그것을 소멸시킨 결과입니다. 분열이 내면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삶과 교회의 사랑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단역시 오늘날 특정 교파를 정죄하는 말로 성급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이단이 무엇인지는 이미 문맥 안에서 분명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하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AC.378은 다른 사람의 교리를 이단이라고 판정하기 위한 도구이기 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게 합니다. 내가 붙드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결국 AC.378저주는 주님께서 가인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분열은 입을 벌려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으며, 마침내 아벨의 피들을 받아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시고 가인을 부르시지만, 가인의 교리는 점점 더 주님의 질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자기가 서 있는 땅 자체를 분열의 땅으로 만들지만,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은 선과 진리가 함께 자라나는 주님의 밭이 됩니다.

 

 

 

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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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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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0)

 

AC.377

여기서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field)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밭을 안에 가지고 있는 분열을 의미합니다. 사람 자신이 이며 또한 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에 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도 이라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 또는 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또는 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 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나쁜 생각이 들어오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 교리만 머리로 정확히 알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 안에는 무엇이 심어지고 있는가? 내가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붙드는 신앙의 진리는 실제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진리를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 원래 어떤 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주님께서 안에 심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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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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