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0.심화

 

3. 열매(2:16-17)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인데요, 분명 영어 표현은 tree of the garden’,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 하여 우리말 번역인 열매는 없습니다. 한글 개역개정은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아주 예리하게 보신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어 성경의 ‘tree’를 우리말 개역개정이 ‘열매’로 옮긴 것은 원문을 틀리게 번역했다기보다, 히브리어 본문 안에 이미 포함된 표현 구조, 곧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관용적 결합을 한국어에서 더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한 번역 선택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창2:16-17에는 실제로 ‘나무’와 ‘열매’가 함께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16은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을 수 있다’라는 구조인데, 여기서 ‘먹는다’는 동사와 결합될 때, 히브리어에서는 ‘나무’가 사실상 ‘그 나무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2:17에서도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문자 그대로는 ‘나무를 먹는다’가 아니라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즉, 원문 자체가 이미 ‘나무 = 그 나무의 열매를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 특히 전통적인 번역들은 이 구조를 비교적 직역에 가깝게 유지해서 ‘tree of the garden’,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영어에서도 실제 이해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영어는 이런 표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라고 하면 문자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커서 어색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열매’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개역개정의 번역은 ‘의역’에 가까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원문 구조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독자가 오해 없이 의미를 이해하도록 ‘먹는 대상이 열매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 한국어 번역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을 취합니다.

 

그렇다면 AC의 관점에서는 이 차이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나무(tree)와 ‘열매(fruit)가 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나무’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나 인식 전체를, ‘열매’는 그것에서 나오는 삶의 결과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은 내적으로 보면 ‘그 사랑과 인식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열매를 먹는다’는 표현은 ‘그것에서 나온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어 번역이 유지하는 ‘tree’ 중심 표현은 상징 구조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점이 있고, 한국어 번역의 ‘열매’ 표현은 실제 행위의 측면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강조점이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리하면, 개역개정이 ‘열매’를 넣은 것은 원문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을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풀어낸 번역입니다. 그리고 AC를 읽으실 때는 이 둘을 함께 보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겉으로는 ‘열매를 먹는다’이지만, 속뜻으로는 ‘그 나무, 곧 어떤 사랑과 인식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까지 함께 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AC.80, 심화 4, ‘번역가들’

AC.80.심화 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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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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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외적 경험의 세계이고, 기억 지식은 그 경험을 축적한 정보의 창고입니다. 이것들은 본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는 치명적이 됩니다.’를 읽을 때, 주님 말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19:24)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이 부분 역시 매우 정확한 방향의 통찰입니다. AC.80에서 말하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한다’는 상태와, 주님의 말씀 마19:24의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은, 겉으로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원리를 가리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맥락을 보면, ‘감각적인 것들(sensualia)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가장 바깥층의 인식이며, ‘기억 지식(scientifica)은 그 감각 경험이 축적된 이해의 저장고입니다. 이 둘은 인간 삶에 필수적이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위에서 아래로 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위에 올라서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보이는 것, 증명되는 것, 축적된 지식’만으로 신앙의 신비를 재단하려 하면, 결국 보이지 않는 것, 곧 영적 실재를 닫아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치명적’인 지점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자’ 말씀을 보면, 여기서의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보면, ‘부자’는 자기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상태’, 곧 지식, 경험, 판단력,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신앙 문제에 있어서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판단할 수 있다’는 상태가 강할수록, 그 사람은 오히려 더 닫히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감각과 기억 지식에 의지하는 상태’와 정확히 겹칩니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표현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자기 충만한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낙타가 짐을 잔뜩 싣고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지식과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영적 세계의 문, 곧 ‘겸손과 수용의 상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국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두 내용을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본래 ‘도구’인데, 그것을 ‘주인’으로 삼는 순간 사람은 영적 진리에 대해 닫히게 되고,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부자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감각과 지식을 사용하되,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선을 먼저 사랑함으로써 진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비워진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 하나를 덧붙이자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며, 신앙을 위한 기초입니다. 다만 그 질서가 중요합니다. 지식이 ‘아래에서 위로 섬길 때’는 길을 열어 주지만, ‘위에 올라가 판단할 때’는 길을 막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그 아는 것이 어떤 자리에서 작용하느냐’입니다.

 

목사님께서 떠올리신 이 연결은 결국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됩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은 들어갈 수 없고, 비워진 사람만이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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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AC.80.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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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7)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이 두 말씀은 매우 깊은 차원에서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AC.80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지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본다’는 표현은, 단순히 사고를 생략한다는 뜻이 아니라, ‘선이 곧 진리로 보이는 상태’, 곧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마5:37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 역시 바로 그 동일한 상태를 요구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태의 인간은 먼저 ‘이게 맞나?’를 따져 묻고, 논리와 비교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이것은 이해가 주도하는 상태이며, 영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그보다 더 깊은 상태에 있어서,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선한지에 대해 ‘본다’고 표현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직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맞는지 틀린지 따져야 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선한 것은 곧 옳은 것이고, 옳은 것은 곧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 상태의 단순성과 일치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직 분열된 상태에 있을 때는, 말이 길어지고 설명이 많아지며, 맹세나 강조가 필요해집니다. 그러나 내적 상태가 정직하고 단순할수록, 말은 짧아지고 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상태에서 바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말을 길게 하지 말라는 윤리적 권면이 아니라, ‘내적 분열에서 나오는 복잡함’을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AC.80의 천적 인간과 주님의 이 말씀은 같은 축 위에 있습니다. 하나는 교리적으로 설명한 것이고, 하나는 삶의 언어로 직접 주신 말씀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을 보기 때문에 옳음을 아는 사람’이고, 주님은 그 상태를 ‘단순하고 일치된 말’로 나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이 연결을 떠올리신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복잡해지는가, 아니면 단순해지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처음에는 복잡해지지만, 결국은 다시 단순해집니다. 다만 그 단순함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단순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과한 뒤의 ‘일치된 단순함’입니다.

 

그래서 이 두 말씀을 함께 묶어 정리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을 보기 때문에 옳음을 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말은 ‘옳다, 아니라’처럼 단순하고 분명해진다. 이것이 바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된 상태, 곧 주님 안에서의 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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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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