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공’(artificer)은 지혜와 지성, 그리고 아는 게 많은 박식한 사람(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과 상응하며, 여기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과 상응합니다. 계시록에서처럼 말입니다.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계18:21, 22) With violence shall that great city Babylon be thrown down, and shall be found no more at all. And the voice of harpers, and musicians, and of pipers, and trumpeters, shall be heard no more at all in her; and no artificer, of whatsoever craft, shall be found any more in her. (Rev. 18:21–22)
여기 ‘거문고 타는 자’(Harpers)는 위에서처럼 진리와, ‘나팔 부는 자’(trumpeters)는 신앙의 선과, 그리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artificer of any craft)는, 그러니까 진리와 선에 관한 기억-지식과 각각 상응하는데요,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 of any 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사40:19, 20) The artificer melteth a graven image, and the smelter spreadeth it over with gold, and casteth silver chains; he seeketh unto him a wise artificer, to prepare a graven image that shall not be moved, (Isa. 40:19–20)
자신들을 위해 판타지로부터 거짓된 것, 곧 ‘우상’(graven image)을 위조하고, 그걸 가르쳐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지요. 예레미야에 보면,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 image”—and 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렘10:1, 8-9) At the same time as they are infatuated they grow foolish, the doctrine of vanities, it is but a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smelter; blue and raiment; they are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1, 8–9)
이 말씀이 상응하는 바는, 거짓을 가르치며, 말씀에서 적당한 구절들을 골라 수집하는 자인데요,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어떤 떠오르는 걸 그럴듯하게 위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일컫기를, ‘우상의 가르침’(doctrine of vanities), 그리고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work of the wise)이라 하는 것이지요. 고대에 등장하는 기술공(the artificer)이 바로 이런 자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우상, 즉 거짓을 만드는 자들로서, 그 만든 우상의 겉을, 금으로는 선을 짐짓 닮게 하고, 은으로는 그 외관이 진리처럼 보이게 하며, 그리고 청색, 자색 옷으로는, 누가 보아도 그런 자연적인 것들을 확실히 나타내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 of vanities,” and the “work of the wise.”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에서 스베덴보리는 ‘장인’(匠人, artificer)이라는 표현이 성경에서 단순한 기술자나 수공업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말씀에서 ‘장인’은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으며, 지식을 갖춘 사람, 곧 어떤 영역의 지식(sciens)을 다루는 사람을 표상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라는 말은, 자연적 선(구리)과 자연적 진리(쇠)에 관한 지식을 알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장인은 외적 재료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형성하는 지성적 주체를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묘사할 때, 음악가들과 함께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앞서 음악가들, 곧 ‘거문고 타는 자, 풍류하는 자, 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 자들’이 사라진다는 말은 진리와 선의 영적 표현이 끊어진 상태를 뜻하고, 그 뒤에 ‘세공업자’(artificer), 곧 장인이 사라진다는 말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장인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다루는 사람을 표상하며, 그 부재는 교회의 지적 토대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알립니다.
이사야 40장에서는 장인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장인은 지혜로운 장인으로 묘사되지만, 그 지혜는 환상과 상상(fantasy)에 기초한 지혜입니다. 그는 거짓된 것을 만들고(우상), 그것을 금과 은으로 입혀 선과 진리의 외양을 씌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자기 생각에서 나온 거짓을 가르치되, 말씀에서 일부 표현과 개념을 끌어와 그럴듯하게 꾸미는 행위로 해석합니다. 즉 장인은 언제나 긍정적 의미만 갖지 않으며,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레미야 10장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됩니다. ‘우상의 가르침’(doctrine of vanities)이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work of the wise)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교훈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의 요소들(은, 금, 청색, 옷감 등)을 선별적으로 취해 조합한 지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은은 진리의 외양, 금은 선의 외양, 청색과 의복은 자연적 질서와 합리성의 외관을 뜻합니다. 즉 이들은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처럼 보이도록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거짓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거짓은 더 위험합니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온 오류가 아니라, 지식을 잘못 사용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AC.424는 매우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장인’, 곧 지식인은 교회의 회복에도 쓰일 수 있고, 교회의 타락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내적 차원에 봉사하도록 가르치는 교사로 등장하지만, 같은 ‘장인’의 능력이 바벨론이나 우상 제작자에게서는 거짓을 정교화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차이는 능력에 있지 않고, 질서와 목적에 있습니다. 자연적 지식이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 아래에 놓일 때 그것은 교회를 세우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거짓을 미화하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AC.424에서 장인은 단순한 직업군이 아니라, 자연적 지성의 대표자입니다. 이 지성은 중립적이며, 위로부터 질서를 받으면 선을 만들고, 자기중심에 머물면 우상을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에 우상을 만들던 장인들이 바로 이런 잘못 사용된 지성의 표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의 외양을 갖춘 거짓을 만들었고,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교리로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AC.424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자연적 지식과 기술, 지성은 교회의 적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입니다. 두발가인처럼 내적 사랑과 신앙에 봉사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면, 장인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장인처럼 자기 사상과 환상을 절대화하면, 그는 거짓의 제작자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통해, 새 교회가 자연적 지성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로 교육하고 인도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모든 장인의 스승, 트레이너)라 합니다.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 야발과 유발 전에는 천적이고 영적인, 즉 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은 이들 야발과 유발의 때부터 나타났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조상’이라 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즉 외적인 것들은 두발가인 전에도 있었는데요, 그래서 두발가인한테는 ‘조상’이라 하지 않고,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즉 이들을 훈련시킨 트레이너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들 외적인 것들이 이제는 내적인 것들과 연결된 상태이지만 말입니다.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해설
AC.42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Tubal-Cain)이 왜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라 ‘교사’(instructor)로 불리는지를 통해, 새 교회가 형성되는 질서의 방향을 매우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명칭 차이가 아니라, 교회 내적 구조가 어떻게 처음 생겨나고, 그다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 주는 핵심 단서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이 ‘조상’으로 불린 이유를 상기시킵니다. 야발(천적 차원)과 유발(영적 차원)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적 차원—곧 사랑의 거룩함과 신앙의 영적 질서—이 처음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시점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둘에게는 ‘조상’이라는 칭호가 적합합니다. ‘조상’은 시간상의 최초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최초, 곧 이전에는 없던 것을 처음 낳은 근원적 시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발가인이 대표하는 자연적 차원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도덕, 기술, 질서, 사회적 유익—은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습니다. 가인의 계보 전체만 보아도, 도시는 세워졌고, 기술은 발달했으며, 사회 질서는 나름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 차원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내적 차원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차원은 ‘새로 태어날’ 필요가 없었고, 대신 새롭게 사용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발가인은 ‘조상’, 곧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로 불립니다. ‘교사’란, 무(無)에서 생명을 낳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른 목적과 질서로 이끄는 역할을 뜻합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새로 창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 봉사하도록 가르치고 단련합니다. 놋과 철을 다루는 장인의 교사라는 표현은, 자연적 차원이 내적 차원의 도구로 재정렬되었음을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드러냅니다. 교회의 회복은 결코 외적 삶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연적 삶—기술, 문화, 도덕, 제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용도를 바꾸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목적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되던 자연적 능력들이, 이제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구현하는 수단으로 재교육됩니다. 두발가인이 ‘교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순서입니다. AC.423은 교회의 참된 질서가 내적 → 외적임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신앙이 살아나야 하고(야발, 유발), 그 다음에 자연적 차원이 그 내적 질서에 맞추어 훈련되고 지도되어야 합니다(두발가인). 만일 이 순서가 뒤바뀌면, 자연적 차원은 다시 독자적으로 굴러가며, 가인의 길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AC.423은 새 교회가 어떻게 전인적 구조를 갖추는지를 명확히 보여 줍니다.
먼저 내적 차원은 아버지로서 새로 태어나고, 그다음 자연적 차원은 교사에 의해 그 방향을 바로잡습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란 자연적 삶을 무시하는 영적 도피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자연적 삶 전체를 내적 사랑과 신앙에 복종시키는 질서임을 분명히 합니다. 두발가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라는 사실 하나에, 교회 회복의 깊은 섭리적 구조가 응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