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7.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거의 반드시 멈칫하는 부분입니다. ‘지식이 필요할 때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라는 말은 자칫 들으면 ‘그럼 나는 아무 역할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각은 인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협력 구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균형을 이해하면 오히려 인간의 역할이 더 분명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본 전제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두 층으로 봅니다. 하나는 ‘생명의 근원’, 다른 하나는 ‘생명의 수용과 사용’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수용자’입니다. 전기는 발전소가 만들지만, 실제로 방을 밝히는 건 전등인 것과 같습니다.

 

기억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사람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는 일은 분명히 인간의 활동입니다. 책을 읽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언제 어떻게 떠올리게 할지, 어떤 진리를 어떤 순간에 살아 움직이게 할지는 더 깊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어떤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순간 그 말씀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주님이 기억 속에서 필요한 것을 불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목사님은 이런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 책을 읽고 자료를 공부했는데, 막상 설교를 준비하는 순간 이전에 읽었던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떠오릅니다. 어떤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구절이 딱 맞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 속에서 기억이 질서 있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균형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지식을 배우고 쌓는 책임을 가지고 있고’, 주님은 ‘그 지식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일지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 창고를 질서 있게 사용하십니다. 둘 중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작용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처음 읽는 분들도 반감을 덜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력과 책임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기억도 없습니다. 읽지 않으면 떠오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을 쌓는 일은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진리와 선을 위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사용되도록 이끄시는 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바로 이 균형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이 마치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의 삶입니다.

 

사람은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여 진리가 되고 지혜가 되는지는 더 깊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열심히 배우고 기억을 쌓는 책임이 있고’, 주님은 ‘그 기억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배우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협력자’이고,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생명과 질서 속에서 이끄시는 근원’입니다. 바로 이 두 요소의 균형이 스베덴보리 인간 이해의 핵심입니다.

 

 

 

AC.27, 심화 2,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심화 2.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혹시 위 심화 1의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를 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와있다는 천사나 선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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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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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AC.25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거듭남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말이 단순히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정도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거듭남 과정에서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먼저 문자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갈대는 약한 식물입니다. 이미 상해 있는 갈대를 더 꺾어 버리면 완전히 부러집니다. 또 등불이 거의 꺼져 가는 상태에서 바람을 세게 불면 완전히 꺼집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겉뜻은 ‘이미 약해진 것을 더 파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갈대와 등불을 ‘사람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상응으로 봅니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이기 때문에 흔히 ‘약하고 흔들리는 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사람이 아직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상태입니다. 또 꺼져가는 등불은 ‘거의 사라질 듯한 선과 진리의 작은 불빛’을 의미합니다. 사람 안에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양심이나 선의 작은 흔적입니다.

 

이제 AC.25의 설명이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의 상태는 매우 불완전합니다. 생각 속에는 오류가 많고, 의지 속에는 욕정과 이기심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것들을 ‘즉시 다 제거해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존 삶 전체가 그 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오류나 욕정을 바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 선과 진리를 향하도록 굽히십니다’. 바로 이것을 AC.25에서 설명합니다.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약하고 불완전한 상태를 갑자기 부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아직 순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 같아서 믿을 수도 있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동기는 완전히 순수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그런 동기를 사용하여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굽히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 행동을 통해 점점 더 깊은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그 사람은 ‘이것이 옳기 때문에 정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처음의 불완전한 동기가 점차 더 좋은 방향으로 ‘변형, 즉 완전해지고 정화’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욕정(cupidities)도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욕정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은 그것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명예욕이 강한 사람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욕정이 점차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래서 AC.25는 인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변화시키실 때 ‘파괴 방식이 아니라 전환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즉 인간 안의 불완전한 요소들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리십니다.

 

이 점 때문에 이사야의 그 말씀이 매우 적절한 상징이 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면 끝입니다. 그러나 꺾지 않고 받쳐주면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면 완전히 어둠입니다. 그러나 보호하면 다시 밝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섭리 방식’입니다.

 

그래서 AC.25의 결론은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쉽습니다. 사람 안에는 오류도 있고 욕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당장 없애 버리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조금씩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돌리시며 사람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고치실 때 부수어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사용하여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신다.’

 

 

 

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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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scientifica’, 영어로 ‘memory-knowledges’라고 부른 것은 특별한 신비한 지식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사실 지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읽으면서 머릿속에 쌓아 두는 정보들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 쓰지만, 그 자체가 곧 삶의 성품이나 사랑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학교 공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 연도, 과학 공식, 지리 정보, 언어 단어, 직업 기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의학 지식을, 목수는 목공 기술을, 목회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기억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틀어 스베덴보리는 ‘memory-knowledge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식이 사람의 겉 사람(external man)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을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공부하고 배우면서 지식을 쌓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대부분 ‘겉 사람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 이야기, 사람의 삶, 여러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억 지식입니다. 마치 씨앗이 자라기 위해 흙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진리가 작용하려면 기억 지식이 바탕이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합시다.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 이야기, 복음서 이야기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억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느 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때 그 성경 지식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즉 기억 지식이 속 사람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을 종종 ‘재료’나 ‘도구’처럼 설명합니다. 목수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와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속 사람은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기억 지식은 그 자체가 영적 생명은 아니지만, ‘영적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기억 지식이 ‘선한 방향으로도, 잘못된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지식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남을 이기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이 ‘선한 사랑과 결합될 때’ 생깁니다.

 

초심자에게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고, 경험을 통해 얻는 ‘머릿속 정보 창고’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어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AC.24에서 주님이 ‘속 사람 안의 지식’과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구별하신다고 할 때의 뜻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이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삶과 사랑과 연결된 진리’가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겉 사람의 창고이고, 속 사람은 그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와 선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런 구별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글이 훨씬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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