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해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하며,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사용되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이 명제는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근원과 교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묻게 합니다.

 

먼저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 형태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847항은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에 따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4항과 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늘날 천주교의 입장은 모든 비가톨릭 신자를 무조건 배제하는 단순한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 점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천주교가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구원을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구원이 특정한 역사적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행4:12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에서 ‘주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한 역사적 교회 제도와의 관계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의 제도적 경계에 종속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숫자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느 나라와 시대에 태어날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할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인간이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에 종속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복음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마련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인간의 종교적 환경에 의하여 차단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 섭리는 HH.328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의 사람들을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비유는 교회의 독점적인 구원 권한을 주장하기 어렵게 합니다. 심장과 폐는 몸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몸의 다른 기관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진 교회에 특별한 영적 빛을 주셨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배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인류 전체를 섬기는 쓰임을 담당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영적 특권은 곧 영적 책임이 됩니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 빛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사람들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자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려는 태도 역시 경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의 내면에 실제로 어떤 사랑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진리에 대한 이해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과 결합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또한 HH.321–325항은 기독교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며,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특정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영원한 배제를 뜻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후의 가르침이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의 방향을 무조건 뒤집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선을 향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명칭만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르침은 결국 어느 종교를 믿든 선하게만 살면 모두 천국에 간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친절이나 자선활동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삶의 성향이며, 실제적인 행동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의 방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 밝은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죽은 뒤에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구원 섭리는 보편적이지만 인간의 자유와 삶의 책임까지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있으며,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한 신앙이 실제적인 삶과 결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인류 전체에 걸쳐 존재하며, 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천주교가 교회의 성사적 질서와 역사적 연속성을 구원론 안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구원의 근원을 소유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거룩한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은 참된 교회 안에 있으므로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정통교회에 속해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므로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참된 교리를 알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모두 같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신의 종교적 지식이나 소속에 대한 확신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이 받은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밖에 있다는 이유로 그의 구원을 부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교회 안에서 배운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살아 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첫 번째 책임은 다른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를 통하여 더욱 깊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말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영적인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동일시하고, 그 제도와의 관계를 구원의 보편적인 조건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교회가 지닌 영적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는 구원의 경로보다 깊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와 교회생활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진리를 배운 사람은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책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권위를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의 빛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SL.RC.002 해설)

 

요약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에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공식 교리가 비가톨릭 신자들의 구원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으며, 자기 잘못 없이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교회는 특정한 역사적 조직의 경계보다 넓으며,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귀중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역할을 특정한 제도의 구원적 필요성이나 독점적 지위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선과 진리의 생명을 이루시고 그 사람을 당신과 결합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원은 교회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의 참된 목적은 인간을 그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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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영접기도’만큼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기도는 흔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설명한 뒤 상대방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겠느냐고 묻고, 상대방이 동의하면 정해진 기도문을 한 문장씩 따라 하도록 인도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전도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축하하며, 때로는 그날의 날짜를 기록해 두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자체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본래 주님께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기도가 어느새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정한 기도문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까요?

 

먼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는 영접기도, 곧 ‘죄인의 기도’(Sinner's Prayer)는 초대교회부터 동일한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와 신앙고백의 전통은 초기 기독교부터 존재했지만,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하고 일정한 기도문을 따라 하도록 하는 방식은 근대 부흥운동과 복음전도 문화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부흥집회와 20세기 대중전도 활동을 거치면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모든 개신교 교단이 영접기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개신교 신학자와 목회자도 기도문을 따라 하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하려는 것은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라기보다, 특정한 전도 방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신자들의 의식 속에 사실상 구원의 필수 절차처럼 자리 잡은 현상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0, 31절에서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합니다. 로마서 10장 9, 10절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문장으로 영접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 주님을 향한 고백과 삶의 변화를 가르치지만, 구원을 특정한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따라 말하는 행위에 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조건을 인간이 덧붙이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살펴볼 본문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강도입니다. 그는 전도자의 안내를 받아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고, 교회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정해진 기도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 죽기 직전 몇 마디 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구원이 자동으로 확정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강도의 내면을 아셨지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강도의 짧은 고백 안에 어떤 참된 회개와 신뢰가 있었는지 그 깊이를 완전히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핵심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구원 공식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절차에 갇히지 않으시며, 그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더 깊은 차원에서 조명합니다. 그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고 설명하며(TCR.337),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시작이며,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는 것은 그 시작을 밝히는 과정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배운 진리가 인간의 생명과 결합되는 과정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머지와 완전히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따라 말한 사실 자체가 참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실제 의지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아직 기독교 언어와 기도 형식을 배우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앙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을 통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스베덴보리의 회개론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는 TCR.510–511에서 회개를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는 첫 번째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16–519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죄책감이나 종교적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도는 결코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은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정해진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입술의 고백과 생명의 회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한 번도 드리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이 전통적인 배타적 구원 이해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고,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신성, 그러니까 신적인 것을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거나, 주님을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는다면 그 역시 주님에 의해 구원받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특정 종교에 속했는지, 특정 기도문을 사용했는지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섭리는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지역, 종교적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역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접기도가 무의식 속에서 교리화될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가 정해 놓은 절차를 통과해야만 작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아직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거나,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한다면, 이미 구원을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보다 인간의 종교적 형식에 더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마련한 형식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아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구원을 판단할 때 단지 영접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외적인 한 가지 사실로 축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영접기도를 없애야 한다거나 전도 현장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진지하게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도록 돕는 것은 얼마든지 유익합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면, 목회자가 함께 기도문을 만들어 주거나 한 문장씩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기도가 끝난 뒤 ‘이제 영접기도를 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이제 주님께 마음을 열었으니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해 갑시다’라고 권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기도라는 사건을 구원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후자는 기도를 거듭남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전도와 목회의 목적은 사람에게 어떤 종교적 절차를 완료했다는 안도감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기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일은 분명히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행위가 하나의 필수적인 종교 형식으로 절대화될 때, 우리는 그 형식이 본래 가리키던 실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입술에서 특정한 기도문이 한 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삶이 실제로 그분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이해의 수준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남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영접기도를 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지금도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내 입술의 기도가 내 의지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내가 고백한 주님께서 실제로 내 삶의 주님이 되어 가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기도문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성경적 절차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그 구원은 믿음과 회개, 체어리티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실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문을 사용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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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해설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을 넘어서는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생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이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그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가톨릭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종교단체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맡기신 구원의 수단들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연속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외적 일치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특정 교단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문제를 넘어, 교회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표현은 ‘존속한다’(subsistit in)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실재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말이 가톨릭교회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하며, 세례받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실제적이지만 불완전한 친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36–848항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실제 주장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신앙과 성사, 교회적 질서가 가톨릭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마16:18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에서 베드로는 신앙, 특히 주님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AE, 1759) AE.206과 ‘계시록 풀이’(Apocalypse Revealed, AR, 1766) AR.768에서 그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와 반석의 의미를 인간 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영적 지배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권능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지위 자체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님에 관한 진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실을 근거로 주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영적 권위가 특정한 인간 직위에 독점적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해석과는 구별됩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주님의 교회를 훨씬 넓은 시야로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말씀을 직접 접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HH.328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 곧 신성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며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 특별한 영적 역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며, 그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교회 이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하며,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진리인지를 가르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고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교회의 참된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아직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이해에 일정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외적 교리 체계와 제도적 연속성 자체에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결합하여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을 보존하시고,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며, 예배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말씀을 필사하고 보존한 사람들, 신앙을 가르친 사람들, 이웃을 섬기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본 사람들의 수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실제적인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공동체적인 예배와 교육과 봉사를 위하여 일정한 질서와 직무를 갖추는 것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질서를 교회의 영적 생명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의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의 지도자이든, 그들의 직무는 사람들을 자기 권위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그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형식일 뿐, 그 생명이 온전히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인 모습이 보잘것없더라도 주님의 진리와 사랑이 살아 있다면 그곳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사도적 계승을 보존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영적인 우월감의 근거로 삼을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 진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자기 사랑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어느 공동체가 더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그 생명 안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인간에게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주장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교회에 질서와 직무가 필요하며, 신앙의 가르침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일치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재하는 장소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교회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삶 안에서 실제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회가 참된 교리를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교회의 제도적 경계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님의 교회에 속한 영적 생명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거룩한 수단이지만,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독점하는 소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15:5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가지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13:35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역사 안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질서를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질서를 통하여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곳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들의 사랑과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자랑하는 역사적 이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SL.RC.001 해설)

 

요약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는 교회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께 속하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교회 질서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실재를 사도적 계승과 교황과의 일치라는 특정한 역사적·제도적 구조 안에 독점적으로 위치시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가진 교회의 특별한 영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의 역사와 제도를 존중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외적인 질서를 참된 교회의 영적 본질과 동일시하거나 그 본질을 특정한 제도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결국 교회의 참됨은 역사적 계승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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