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7

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과, (field)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필요한 만큼은 예외입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은 신앙의 본성 또는 본질 자체로부터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형제 관계는 에서와 야곱으로 표상되었으며,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그들의 다툼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38:28-30),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and that afield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손에 매었더니 29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손에 홍색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38:28-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48:13-14)로도 표상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48:13-14)

 

경우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에서도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1절의 가인처럼 사람(man)이라 하고, 체어리티는 19:2, 13:14 다른 곳들에서처럼 형제(brother) 합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Faith is called aman,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brother,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것이며 (19:2)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14)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형제의 언약(the covenant of brethren)이라 합니다(1:9).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1:9)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곱과 에서가 상징하는 것도 가인과 아벨이 상징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야곱 역시 자기 에서를 밀어내려 했는데, 이는 호세아에서도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에서로 표상된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에서 나타납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멍에를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는 같은 의미로, 이방인의 교회, 교회는 에서로 표상되고 유대교회는 야곱으로 표상됩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교회, 초대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도 주님께서는 형제라 하십니다(8:21).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8:21)

 

듣는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행하는 사람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사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시기 때문입니다(7:24, 26).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해설

AC.367은 직전 AC.366에서 아벨을 거듭 가인의 아우’, 형제라고 부른 이유를 말씀 전체의 표상을 통해 확증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지만,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서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형제라는 표현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형제 관계가 가인과 아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반복된다고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장자권을 둘러싸고 다툽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얻으려 하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대신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가족 간의 재산이나 상속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때문에 AC.367은 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도 누가 먼저 태어나며 누가 장자의 위치와 축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가족 계보에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주도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장자의 자리에 있으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이끄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이야기를 통해 표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여 체어리티가 먼저 생기고 그다음 신앙이 생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람이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선이며, 신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체어리티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선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과 주도권은 단순히 무엇이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났는가?보다 무엇이 궁극적으로 다른 것에 생명을 주고 그것을 이끄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67은 바로 앞 AC.365의 설명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불꽃에, 신앙을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꽃의 열이 없는 겨울의 과 같아집니다. 빛은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AC.367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의 다툼도 결국 이와 같은 질서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인과 아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호12:2-3을 인용하여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야곱이 영원히 에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마침내 그 멍에를 자기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신앙이 먼저 앞에 서고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결국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이방인의 교회, 교회’, 야곱을 유대교회와 연결합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이방인들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하는 경우가 있고, 유대교회는 진리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맡아 보존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나오며,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형제라 불렀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교회의 참된 형제 관계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하거나 같은 교리 문장을 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설명이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8:21).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듣는 을 신앙과, ‘행하는 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신앙의 공로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63에서 이미 보았듯이 참된 행함은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어 의지와 삶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AC.361AC.365에서 보았듯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에 서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가인은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AC.367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형제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위에 서려 하는가?많은 진리를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자기 형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형제라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AC.367의 중심입니다.

 

 

 

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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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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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읽으면 두 가지 질문이 동시에 생깁니다. 첫째, 영계에도 자연계처럼 하루라는 시간이 있는 것일까요? 둘째, 죽음이 삶의 연속이라면 왜 즉시라고 하지 않고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고 했을까요?

 

먼저 AC.70 자체가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계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거의 하루가 정확히 몇 시간을 뜻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오랜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하고, 곧이어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하루를 곧바로 자연계의 정확한 24시간으로 고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반대로 실제 시간은 전혀 아니며 오직 하나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단정하는 것도 이 지점에서는 이릅니다. AC.70은 이제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첫 번호입니다. 실제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뒤이어 나오는 기록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여기서 소생될 라는 첫 문장을 함께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죽은 뒤에도 산다고만 하지 않고, 사람이 소생될 때의 상태를 이제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아무런 과정도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 때문에 인간의 삶이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는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70이 독자에게 먼저 보여 주는 것은 과정이 있으면서도 연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적어도 한 가지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뒤 인간이 오랫동안 무의식적인 공백 속에 머물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다른 삶은 육체의 죽음에 매우 가까이 이어져 있습니다. 이 점이 AC.70의 문맥에서 거의 하루라는 표현이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영계의 시간 자체가 자연계의 시간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AC.70 한 번호만으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실제로 영계의 상태와 삶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충분히 읽은 뒤 다루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영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명제부터 앞세우면 오히려 독자는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하루라고 했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연계와 똑같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도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0에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를 읽을 때는 아직 시계부터 꺼낼 필요도 없고, 곧바로 모든 시간을 상태의 상응으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생명의 소멸이 아니며, 다른 삶은 그 죽음 뒤에 긴 공백을 두고 시작되는 별개의 생명도 아닙니다.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소생의 과정이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은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큰 질서 안에 있습니다. (AC.70 심화 1)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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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내용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뜻인가?

 

먼저 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첫째 스타일 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 그러한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 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은 역사가 아니고 아브람 이후부터만 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 AC.66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실제 개인이 아니었다’, ‘노아 홍수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결론을 AC.66 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1부터 모든 내용은 아브람 이후와 똑같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스베덴보리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 노아, 홍수, 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 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은 표상적 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 용어상 전승된 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 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 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빛과 궁창과 물, 식물과 광명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 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 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 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지금까지 왜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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