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26에서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진리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쇠가 ‘산산이부순다’, ‘짓부순다’는 표현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쇠의 강함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계시록의 ‘쇠지팡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살펴봅니다. 그 결론은 분명합니다. ‘쇠지팡이’는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입니다.
먼저 계2:26-27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어 그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며, 토기장이의 그릇처럼 그들을 깨뜨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쇠 지팡이는 강한 권세와 심판의 도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쇠가 진리를 나타내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쇠 지팡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계12:5에서도 쇠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는 장차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목양할 자라고 말합니다. 계2장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쇠 지팡이가 주어지고, 계12장에서는 남자아이가 쇠 지팡이로 목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구절을 나란히 인용하여 쇠 지팡이가 진리의 힘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여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남자아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확정하려면 계시록의 해당 구절에 관한 별도의 해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쇠 지팡이가 단순히 강한 권세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진리라는 사실은 어디에서 분명해집니까? 스베덴보리는 계19:11, 13, 15를 인용하여 이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에서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진실’이라 불리며,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십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고,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맥을 통해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말씀’이라는 이름과 ‘쇠지팡이’가 같은 분에 관한 묘사 안에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쇠 지팡이의 의미를 금속의 단단함만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쇠가 진리를 나타낸다는 앞선 설명과, 쇠 지팡이로 목양하시는 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함께 살핍니다. 그러므로 쇠 지팡이는 단순한 물리적 무기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 본문은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깁니다. 이는 쇠 지팡이의 의미를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말씀의 진리가 지닌 힘은 단순히 무언가를 부수는 힘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본문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한다고도 말합니다. 다만 AC.426은 그 목양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적 과정을 뜻하는지까지 자세히 풀이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의 진리가 다스림과 목양의 이미지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진리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힘을 인간의 주장이나 논쟁의 승리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계19장에서 쇠 지팡이로 목양하시는 분의 이름은 ‘하나님의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말에 그러한 힘이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국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AC.426의 논지를 완성합니다.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하고,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19장은 그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진리의 힘을 인간 자신의 강함에서 찾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에서 찾아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AC.426심화1)
이말씀과같은장의앞뒤에나오는내용에서천적·영적부요함을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또한각각의표현은물론언급된이름들까지도저마다고유한의미를지닙니다.주님의말씀은단순히문자적인말이아니라영적인말씀이기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여기서‘쇠’(iron)와‘놋’(brass)은자연적진리와선을뜻합니다.그것들이‘북방’(north)에서왔다고한것은감각적이고자연적인것을나타냅니다.자연적인것은영적·천적인것에비하면짙은어둠이빛에비하는것과같기때문입니다.곧‘북방’이‘남방’(south)에비하는것과같습니다.또는그늘이빛에비하는것과도같은데,여기서는‘어머니’(mother)인‘씰라’(Zillah)도이러한그늘을나타냅니다.‘재산’(substance)과‘보물’(treasures)이천적·영적부요함을뜻한다는사실도매우분명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여기서도‘쇠’가진리를뜻한다는사실이분명하게드러납니다.진리에는아무도저항할수없는힘이있으므로,힘은진리에속한다고말합니다.이러한이유로진리,곧신앙의진리를뜻하는쇠에관해‘산산이부순다’(breaksinpieces),‘짓부순다’(crushes)고말합니다.다니엘서에서도그러하며(단2:34, 40),계시록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inpieces” and “crushes”; asin Daniel (2:34, 40), and in John:
AC.426은 앞의 AC.425에서 밝힌 금속의 속뜻 가운데 특별히 ‘쇠’에 집중합니다. 앞 번호에서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스겔과 예레미야, 다니엘과 계시록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적 진리와 영적·천적 부요함의 관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 그리고 진리가 지닌 힘입니다.
먼저 겔27:12, 19는 두로의 무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스는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가져오고, 단과 야완과 므우살은 빛나는 쇠와 향료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뿐 아니라 같은 장의 앞뒤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앞의 AC.425에서도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두로의 무역품 가운데 등장하는 쇠 역시 단순한 금속을 넘어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석과 납, 향료, 각각의 지명에 대한 구체적인 속뜻까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각각의 표현뿐 아니라 이름들까지도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말씀은영적이며,단순히문자적인말이아니기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의 문자적 기록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은 문자적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특정한 단어나 이름 하나만 떼어 내어 의미를 정하기보다, 앞뒤 문맥과 함께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렘15:12-13에서는 쇠와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북방의쇠’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북방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천적인 것에 비하면 짙은 어둠이 빛에 비하는 것과 같으며, 북방이 남방에 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자연적 진리가 곧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밝음의 차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창4장의 씰라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인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1에서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씰라의 의미를 북방과 그늘의 이미지에 연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천적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적인 차원에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근거로 씰라 자체가 악이나 거짓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재산’과 ‘보물’은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의 문자적 말씀에서는 죄로 인해 재산과 보물이 노략물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재산과 보물이 단순한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천적·영적 부요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그 부요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상실되는지까지 상세히 풀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쇠와 놋, 북방, 재산과 보물의 의미를 함께 살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겔4:3에서는 에스겔이 쇠판을 가져다가 자신과 성읍 사이에 쇠벽으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쇠가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으므로 힘은 진리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이번 번호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쇠가 어떤 차원의 진리를 나타내는지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왜 쇠가 진리를 나타내는지, 특히 진리의 힘이 말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단2:34, 40을 언급합니다. 다니엘의 신상 환상에서 쇠는 부수고 깨뜨리는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표현을 진리의 힘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다니엘의 네 나라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손대지 않은 돌과 쇠와 진흙이 섞인 발이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다니엘의 환상 전체를 풀이하는 데 있지 않고, 쇠에 ‘부수고깨뜨리는’ 힘이 부여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계2:26-27과 계12:5에서는 ‘쇠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진리가 지닌 힘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인용한 영어 본문이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긴다는 사실입니다. 쇠 지팡이는 문자적으로 강한 통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만,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히는 속뜻은 진리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토기장이의그릇’이나 계12장의 ‘남자아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번 번호에서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계19:11, 13, 15는 앞의 철장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진실’이라 불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며,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 ‘쇠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라는 사실이 설명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마지막 인용은 단순히 쇠가 강하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주님의 말씀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26의 핵심은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하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로의 무역은 자연적 진리가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 안에 등장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북방의 쇠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쇠벽과 다니엘의 쇠는 진리의 힘을 드러내며,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그 힘이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발가인이 다루는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AC.426해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명절이 끝난 뒤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명절때문에이혼하는부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부부 관계의 균열이 명절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명절은 ‘원인이라기보다촉매제’입니다. 시댁과 처가,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설거지, 육아, 용돈, 제사, 친척들의 질문과 비교가 며칠 안에 집중되면서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관계의 질서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영상은 그 수많은 갈등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우리는정말한팀인가?’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켜면 영상에서 말하는 ‘한팀’이라는 표현이 훨씬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그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minds)이 하나를 향하여 결합되어 가는 데서 찾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으로 한집에 사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서로의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두 사람의 삶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는 ‘하나가되고자하는의지’가 있습니다(CL.215). 성경의 ‘둘이한몸이될지니라’(창2:24)는 말씀 역시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결합의 질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지영 씨를 무너뜨린 것은 정말 전 몇 장이나 설거지가 아닙니다. 영상에서도 정확히 그 점을 짚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은 여러 해 견뎠지만 남편이 ‘우리엄마가틀린말했어? 네가조금만더노력하면되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웠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결혼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우리’가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요구했던 것은 남편이 어머니와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나는하나의새로운삶을이루고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원가족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배우자에게 그 질서에 적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외적으로는 결혼했지만 내적인 관계의 중심은 아직 이동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2장의 말씀이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므로남자가부모를떠나그의아내와합하여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창2:24). 이 말씀에서 ‘부모를떠난다’는 것을 부모를 버리거나 효도를 중단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도 결혼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 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새로운 가장 가까운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와의 결혼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랑들의 ‘질서’가 뒤바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특히 예리한 대목이 바로 ‘내부모는내가챙긴다’는 제안입니다. ‘아들이효도하고싶은데며느리가일을하고, 딸이효도하고싶은데사위가비용을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good)은 단지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서 선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들어 있는 사랑과 목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내가효자가되고싶은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의 노동과 시간과 감정을 당연한 자원처럼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외형은 ‘효도’이지만 그 안에는 자기 사랑(proprium)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집은원래그래’, ‘며느리라면이정도는해야지’, ‘사위가그정도도못하나’라는 말에는 전통이라는 이름을 입은 proprium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렌즈를 반대쪽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댁을 비판하기 위한 렌즈도, 며느리나 사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렌즈도 아닙니다. 배우자가 언제나 ‘내편’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잘못 이해하면 또 하나의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내배우자니까내가옳든그르든내편이어야해’라는 요구는 결혼애가 아닙니다. 참된 결혼적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의 자기성을 강화해 주는 동맹이 아니라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잘못했으면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우자가 잘못했으면 배우자의 잘못 역시 사랑 가운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내편’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조건나를편드는사람’이 아니라 ‘나와함께선과진리를향해서는사람’으로 한 단계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부당한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우리엄마원래그래. 네가참아’라고 말하는 것은 배우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당신어머니가저런말을했으니이제다시는만나지마’라고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반드시 올바른 질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건강한 반응은 영상이 제안한 것처럼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그문제는우리가알아서할게’라고 경계를 세우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체어리티(charity)에 가깝습니다. 체어리티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질서를 세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과 배우자 사랑은 본래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를더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각각의 사랑을 어느 자리에 놓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질서의 나라입니다. 높은 사랑이 낮은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면서도 배우자와 함께 형성한 새로운 가정의 경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세워진 결혼 관계 안에서 부모를 사랑할 때 그 효도 역시 더 자유롭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희생시켜 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부모와 배우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열매를 남깁니다.
영상에서 명절의 또 다른 특징은 평소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돈이 들고, 교통이 막히고, 아이가 울고, 부모가 압박하고, 배우자가 예민해지면 평소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지배욕과 인정 욕구가 밖으로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명절은 단순히 피해야 할 스트레스 기간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시험(temptation)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아내가우리부모에게이것밖에못하지?’, ‘왜남편은우리친정에서는저렇게무뚝뚝하지?’, ‘왜내가손해봐야하지?’ 하는 감정들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제목인 ‘존버의경제학’도 이 렌즈 아래에서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에서 무조건 오래 버티는 것이 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 역시 결혼의 깊은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느냐, 떠나느냐’라는 이분법보다 ‘이관계안에서무엇이거듭나고있는가?’입니다. 일곱 번의 명절 동안 한 사람이 계속 참고 다른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음이 반드시 거듭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참음이 사랑에서 나온 인내가 아니라 두려움과 체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갈등을 계기로 남편과 아내가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서로의 고통을 듣고 관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면, 바로 그 갈등이 거듭남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은 매우 좋습니다. ‘오늘뭐불편한거없었어?’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상당히 깊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당신마음안에서무슨일이있었는지나는알고싶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소유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존중하며 알려고 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다만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오늘내가당신을힘들게한것은없었어?’입니다. 첫 질문이 상대의 고통을 듣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벽에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결혼의 최종 목적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벽한 배우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며 각자 자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중심에 배우자만 놓으면 결국 서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참된 중심은 주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서로에게 흘려보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행복의 제도가 아니라 거듭남의 매우 깊은 학교가 됩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proprium이 가장 많이 드러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관계입니다.
결국 이 영상이 묻는 ‘우리는정말한팀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팀’이라는 것은 배우자가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부모와 싸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서로를 희생시키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로잡으며, 각자의 proprium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대신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내부모’, ‘네부모’, ‘내돈’, ‘네시간’, ‘내희생’을 넘어 조금씩 ‘우리’가 되어 갈 때, 창세기의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은 결혼식 날 읽고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명절은 어쩌면 결혼을 무너뜨리는 날이라기보다 결혼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시댁도 처가도, 전도 설거지도, 용돈도 방문 순서도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나는배우자를사랑하는가, 아니면배우자를통해내뜻을이루려하는가?’, ‘나는부모를공경하는가, 아니면부모의기대를충족시키기위해배우자를사용하고있는가?’, ‘배우자가힘들다고말할때나는그의고통을듣는가, 아니면즉시나도힘들었다며자기변호를시작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은 불편하지만 정직한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발견한 것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자기 안에 악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그것을 발견하고 돌이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명절에 싸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싸움 이후입니다. ‘누가옳았는가?’만 묻는 대신 ‘이번일을통해주님께서내안의무엇을보여주셨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 명절의 갈등조차 결혼을 파괴하는 사건에서 두 사람을 조금 더 하나로 만들어 가는 거듭남의 재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상을 통해 ‘스베덴보리의렌즈’가 한 번 더 비추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