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조금 낯설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Arcana Coelestia’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이해할 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두 층으로 구분합니다. 이 구분은 사람을 둘로 나눈다는 뜻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서로 다른 두 차원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가장 쉬운 설명부터 해보겠습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밖으로 드러내며 살아가는 부분입니다. 몸으로 행동하고, 말을 하고, 사회 속에서 역할을 하는 삶의 차원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가족과 대화하고, 음식을 먹고, 걷고, 일하는 모든 활동이 겉 사람의 영역입니다. 겉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선택하는지, 이런 것들이 모두 속 사람에 속합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을 해도, 속에서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남을 돕는 행동을 한다고 해보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싶어서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행동은 같지만 속 사람의 상태는 다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중심이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겉 사람은 표현이고, 속 사람은 그 표현의 근원입니다. 나무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가지와 잎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고,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의 생명은 가지가 아니라 뿌리에서 올라옵니다. 속 사람은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AC.3에서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을 말하는 이유는, 말씀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말씀에도 ‘’과 ‘’이 있다고 말합니다. 문자로 읽히는 성경의 이야기는 겉 사람에 해당하고, 그 안에 담긴 영적인 뜻은 속 사람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이 영혼 없이 살아 있을 수 없듯이, 말씀의 문자도 속뜻 없이 살아 있을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문자만의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다가도 마음속에서 ‘이건 옳지 않다’고 깨닫기도 합니다. 이런 내적 움직임이 바로 속 사람의 작용입니다. 겉 사람은 행동을 하고, 속 사람은 방향을 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속 사람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 구조가 아니라, 하늘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오직 겉 사람으로만 살게 된다면, 그는 외적인 것들만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열리면, 사람은 더 깊은 기준을 가지고 살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참된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 점에서 속 사람은 신앙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은 단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주님을 향해 열리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설명할 때 항상 속 사람의 변화를 말합니다. 겉 사람의 행동이 조금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속 사람이 새로운 방향을 갖게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초등학생에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나와 마음속의 내가 있어. 겉으로 보이는 나는 행동하는 나이고, 마음속의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옳은지 생각하는 나야. 하나님은 그 마음속의 나와 이야기하시고, 그 마음을 통해 우리를 바르게 이끌어 주셔.’ 이런 설명이면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속 사람이란 어떤 특별한 신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중심(inmost)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진짜로 옳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려 하는지가 모두 그곳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중심을 통해 사람이 주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이라는 표현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기도 하고, 동시에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듯이, 말씀에도 속뜻과 문자 의미, 곧 겉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구조는 서로 대응합니다. 사람이 속 사람으로 살아갈 때 말씀의 속뜻도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 서문, 'AC.1-3의 원리로 본 창1'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

bygrace.kr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구가 빛을 내는 것은 전구 자체에 빛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빛이 납니다. 전기가 끊기면 전구는 그대로 있지만 빛은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 그 자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전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사랑하지만,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심장을 뛰게 하지 않았고, 세포를 만들지 않았고, 처음 존재하게 된 이유도 스스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생각도 때로는 ‘떠오르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분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하지 않고,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마치 달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듯이,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달이 ‘빛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에서 오는 것처럼, 우리는 ‘내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근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초등학생에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전기 같은 분이셔. 우리가 움직이고 웃고 사랑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이 계속 힘을 주시기 때문이야.’ 만약 그 힘이 완전히 끊어진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생명을 만든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을 흘려보내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생명 그 자체’라고까지 표현한 이유는, 생명을 단순한 기능이나 에너지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단순히 숨 쉬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각하고 사랑하고 선택하는 능력, 곧 의지와 이해의 움직임까지 포함합니다. 우리가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생명 그 자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생명은 모두에게 흘러옵니다. 착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생명을 사랑과 선으로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합니다. 전기는 같은데, 전구가 깨끗하면 밝게 빛나고, 그을려 있으면 빛이 약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AC.2에서 이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는, 말씀의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살아 있는 이유를 ‘주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말씀 속에 주님을 향한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종이 위의 글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생명 그 자체이시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그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겉으로 보면 마른 알갱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심으면 자랍니다. 돌은 아무리 심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씨앗처럼 봅니다. 주님이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담고 있는 말씀은 사람 마음에 심어질 때 자라날 수 있습니다.

 

결국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철학적인 말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생각과 사랑과 행동도 참으로 살아 있게 됩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bygrace.kr

 

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Arcana Coel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Arcana Coelestia’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AC의 해석 방식이 과장처럼 느껴질 수 있고, 이해하면 오히려 그 일관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이 표현의 기본 뜻부터 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란 한 장, 한 이야기, 한 사건,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큰 흐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은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개별적으로’도 그 장 안에 있는 각각의 절, 각각의 표현, 심지어 한 단어까지도 그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큰 주제만이 주님과 천국과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표현 하나도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몸을 생각해 보면, 전체적으로 그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몸 전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에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부분이 생명과 단절된다면, 그 부분은 썩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도 이와 같다고 봅니다. 성경 전체가 주님을 가리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일 어떤 구절이나 단어가 주님과 무관하다면, 그것은 마치 생명과 분리된 조직처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을 통해 말씀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이 표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질서는 ‘부분과 전체가 동일한 원리를 공유한다’는 생각입니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반영되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의 질서 있는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입니다. 자연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나무의 전체 구조는 그 씨앗 안에 이미 잠재해 있고, 나뭇가지 하나의 형태 속에도 나무 전체의 패턴이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 역시 이런 구조를 가진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경의 해석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만일 창세기 1장이 거듭남을 말한다면, ‘빛이 있으라’는 구절만 거듭남을 의미하고 다른 표현은 단지 장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빛, 어둠, 물, 땅, 식물, 해와 달, 모든 단계와 표현이 거듭남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작은 점 하나까지도’라는 표현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말씀의 구조에 대한 확신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할까요? 그것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영적 의미가 있는 책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나 비유, 혹은 메시아 관련 구절만 영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나 족보, 율법 조항은 단순한 기록으로 여깁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태도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말씀은 어떤 부분은 신적이고, 어떤 부분은 인간적이라는 식으로 나눌 수 없으며, 전부가 신적, 곧 신성하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주님 중심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구절은 주님을 가리키고, 어떤 구절은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하나의 통일된 증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주님을 향한다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살아 있는 증언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생명은 특정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에 스며 있습니다.

 

이 표현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큰 방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선택과 일상에서는 전혀 다른 기준을 따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은 ‘전체적으로’만이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일치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삶의 큰 목표뿐 아니라 작은 판단과 태도 속에서도 같은 사랑과 진리가 작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구조는 곧 인간 삶의 구조를 반영합니다.

 

결국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의 뼈대입니다. 성경은 큰 줄거리만 거룩한 책이 아니라,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하늘의 질서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수천 쪽에 걸쳐 단어 하나하나를 해설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일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작업은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bygrace.kr

 

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