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6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시다’ - 성령은 또 한 분의 하나님인가,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역사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십니다.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며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근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령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며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죄를 책망하시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직접 역사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사실이, 반드시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일까요? 성령의 역사가 인격적이라는 사실과 성령이 독립적으로 구별되는 신적 위격이라는 주장은 과연 같은 의미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신성과 그분이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모든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세 번째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신적 능력과 역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령의 존재와 활동을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신성과 인격적 활동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 근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성령론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령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후 서방 기독교 전통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3항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지니신 세 위격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위격’(person)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신이나 세 개의 개별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을 지니며, 하나의 신적 뜻과 능력 안에서 역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성령론을 단순히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으로 소개한다면 그 신학의 실제 내용을 왜곡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원부터 구별되는 세 신적 위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자들의 실제 사고 안에서는 세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기독교가 의도적으로 세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영원한 세 위격의 구별이 필요한가를 검토하는 일입니다.
성령을 구별되는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성경적 근거는 요14장부터 16장에 나타나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요14:16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요14:26에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요16:13에서는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스스로 말씀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행13:2에서는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자신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해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엡4:30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전통적인 성령론은 이러한 본문들이 성령의 인격성과 성부 및 성자와의 구별을 보여 준다고 이해합니다. 실제로 성령께서 가르치고 말씀하시며 인도하신다는 표현들은 성령을 단순한 비인격적 에너지나 추상적인 힘으로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곧바로 성령이 주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위격이라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지는 별도의 신학적 질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과 영이 활동의 주체처럼 묘사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격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별도의 신적 위격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구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46항에서 성령이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이며, 이것이 바로 주님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발출하는 신성’(Divine Proceeding)이란 주님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실체가 아닙니다. 한 분 주님에게서 나와 인간과 천국에 작용하는 신적 생명과 진리의 역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 그리고 그에게서 나타나는 활동에 비유합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이 있고 그 사람에게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지만, 그것들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분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와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성, 그리고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을 인간의 구성 요소로 환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하나의 신적 생명 안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DL.46-54에서 성령이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이라는 가르침을 성경의 여러 표현과 연결하여 설명하며, 특히 성령을 주님의 신적 생명과 신적 진리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에서 성령은 주님과 구별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신성이 인간에게 실제로 다가오고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39항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신적 삼위일체가 계신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 구주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이며 신적 능력과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 표현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적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지혜와 진리 자체를 가리키며, 신적 능력은 그 진리가 실제로 역사할 수 있는 신적 힘을 뜻하고, 신적 역사는 그 힘이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 성화와 구원에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신성이 아니라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의 여러 측면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단순히 어떤 힘이나 영향력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주님과 분리된 비인격적인 자연 에너지나 우주적 생명력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인격적이시고 살아 계신 한 분 주님 자신이며,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가 성령으로 표현되는 신적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성령의 별도 위격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성령의 신성과 인격적인 역사까지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모든 신적 활동을 바로 주님 자신의 활동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보혜사 약속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14:16에서 주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말씀하셨지만, 이어 요14:18에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자신이 그들에게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요14:26에서는 성령께서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시고, 요16:14-15에서는 성령께서 주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본문들을 성령이 주님과 분리된 또 하나의 신적 존재라는 증거로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부활과 영화를 완성하신 뒤 자신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통해 제자들에게 함께하신다는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주의 교리’ 51항은 특히 진리의 성령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본문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구별되는 위격적 관계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한 분 주님 안에서 신적 생명이 발출하고 전달되는 관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해석은 동일한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성령의 정체와 신적 삼위일체의 구조를 서로 다르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성경의 특정 표현 하나만으로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성경 전체에서 한 분 하나님과 주님의 신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일관되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실제로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 142-145항에서 성령의 신적 능력과 역사가 일반적으로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을 이루며, 그에 따라 새롭게 함과 생명 주심, 성화와 칭의, 악에서의 정화와 죄 사함, 마침내 구원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특별한 영적 체험을 일으키거나 종교적인 감동을 주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본질적인 역사는 인간의 이해를 진리로 밝히고, 의지를 선으로 변화시키며,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그것을 버리려고 노력하며, 이웃을 미워하던 마음에서 돌아서고, 주님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성령의 신적 역사와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그 변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말은 주님과 구별되는 별도의 신적 존재가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능력을 통하여 그 사람의 생명을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성령의 은사와 영적 체험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강렬한 감정이나 방언, 예언, 신유, 특별한 영적 감동과 연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개신교 전통이 그러한 체험을 동일하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특별한 현상과 지나치게 결부하면, 사람의 실제 사랑과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신적 역사가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새로운 생명을 이루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이 없더라도 자신의 악을 살피고 정직하게 살아가며 이웃을 위해 선한 쓰임을 행하려는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진리가 실제로 생명과 결합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극적으로 드러나는가가 아니라, 그 능력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실제로 어떤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특별해 보이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더욱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성령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역사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성령을 인간의 의식이나 양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능력이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비롯되는 이기적인 욕망과 잘못된 판단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거나 마음에 특별한 평화가 찾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99항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존중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을 제거하거나 의지를 강제로 움직이시는 방식으로 거듭남을 이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멀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때에도 강렬한 느낌이나 특별한 현상보다 그 생각이 주님의 말씀과 조화되는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끄는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를 깊어지게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인간의 도덕적 판단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통해 그 역사의 방향을 살피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전통적인 개신교 신자는 성부께 기도하고, 성자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성령께서 자신을 도우시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거나,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실제로 세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통 삼위일체 신앙은 분명히 한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안에는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신뢰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떨어진 존재들처럼 마음속에 그리기보다, 모든 신적 충만함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바로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2:9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은 주님과 별개의 신적 인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아니라, 한 분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를 우리 안에 부어 주시고 우리의 이해와 의지를 새롭게 하시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실제로 함께하시는 역사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십니까? 전통적인 개신교는 그렇다고 고백하며, 이러한 가르침에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적인 역사,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인간 안에서 실제로 활동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진리를 보존하면서도 성령을 영원부터 구별되어 존재하는 세 번째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성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 신성에서 비롯된 신적 인성이고,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능력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분의 역사를 단순한 자연적 힘으로 낮추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밝히고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모든 역사가 바로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 외에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신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실제로 나에게 하시는 일은 무엇이며, 그 역사를 통해 나는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내 이해를 밝히고 내 의지를 새롭게 하시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과연 누구이신가?’를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능력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가르치고 새롭게 하시고 마침내 자신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성령의 신성과 발출, 그리고 성령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PR.006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세 번째 신적 위격으로 고백하며, 성령께서 가르치고 인도하시며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성령의 신성과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별도의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의 교리’ DL.46-54와 ‘참된 기독교’ TCR.139-145에 따르면 성령은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통해 나타나는 신적 능력과 역사입니다. 성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고,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성이며, 성령은 그 신성과 인성으로부터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는 신성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격적 활동을 인정하는 것과 성령을 별도의 영원한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령의 역사는 추상적인 에너지나 단순한 종교적 감동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새롭게 하며 악을 멀리하도록 인도하시는 실제적인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령의 역사는 특별한 체험이나 신비로운 현상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주님의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실제 삶에서 체어리티와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가를 통해 살펴야 합니다. 성령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거듭남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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