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 수도원 운동의 자기소개와 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 후반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가?’보다 ‘ 일을 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주님의 질서 아래 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 다른 전통에는 있을 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 세상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떠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 안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 지켜 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게 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 성경만 깊이 파보자’, ‘오직 예수 공부만 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 만큼 새로운 성경 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 대신 청빈, 음란 대신 거룩, 배교 대신 오직 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 대한 내적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 대신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 대신 오직 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 방문했다’, ‘내가 수도원을 세웠다’, ‘내가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학교를 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 모든 일을 누가 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셨으며, 나는 쓰임을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 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나는 얼마나 그분 앞에서 비워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 예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보다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 ‘욕망을 억누르는 ’보다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보다 ‘자기 대신 주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이야기’ (20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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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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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3

기름(fat) 천적인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여러 종류의 기름으로 표상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간을 덮는 기름 또는 간에 붙은 꺼풀,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과 내장 위의 기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29:13, 22; 3:3-4, 14; 4:8-9, 19, 26, 31, 35; 8:16, 25)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위에 있는 꺼풀과 콩팥과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 너는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위의 꺼풀과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29:13, 22)

 

3그는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3:3-4, 14)

 

8 속죄 제물이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같이 내어 제단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8-9, 19, 26, 31, 35)

 

16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8:16, 25)

 

그러므로 이것들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이라 했습니다. (3:14, 16)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은 짐승의 어떤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것을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하였습니다. (3:17; 7:23, 25)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7:23, 25)

 

이유는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 천적인 것들과 체어리티의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fat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Isa. 55: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복으로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Jer. 31:14)

 

여기서 기름진 문자 그대로의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영적 선을 뜻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시편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Ps. 36:89)

 

여기서 살진 (fatness)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ves)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복락의 강물(river of deliciousnesses) (light)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fatnessand thefountain of lives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river of deliciousnesses,andlight,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Ps. 63:5)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름진 (fat)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lips of songs)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같은 이유로 땅의 처음 것인 열매들도 기름(fat)이라고 합니다. (18:12) where in like mannerfatdenotes the celestial, andlips of songsthe spiritual.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소산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8:12)

 

[3]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읊은 노래에서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Deut. 32:14)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없습니다. 속뜻이 없다면 소의 엉긴 (butter of kine), 양의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fat of lambs), 숫양과 염소의 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 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 콩팥의 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 (blood of the grape)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butter of kine,themilk of sheep,thefat of lambs,thefat of rams and goats,thesons of Bashan,thefat of the kidneys of wheat,and theblood of the grape,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 천적인 자체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29장과 레3, 4,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 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55:2에서는 기름진 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기름진 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는 AC.353 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63:5에서도 기름진 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떼의 처음 것과 기름진 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 엉긴 젖은 이것’, ‘양의 젖은 저것’, ‘바산의 숫양은 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 것들의 헤아릴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 사랑’, ‘ =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 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 없다면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 콩팥의 기름이나 포도의 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 떼의 처음 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 좋은 것을 만들어 주님께 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 속한 모든 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

 

 

 

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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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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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경험한 ‘손님 대접의 영성’을 소개하면서, ‘주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도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수도자의 극단적인 금욕이나 기이한 일화보다 ‘타인을 향하여 열리는 ’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토스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는 ‘마리아의 정원’, 여성 출입 금지의 기원, 황후의 방문 등에 관한 여러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방정교회의 오랜 수도 전통과 신심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승의 신성함이나 기적성 자체가 영적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장소가 천 년 이상 보존되었고, 수많은 성물과 고문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수도자가 그곳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만하지만, 그것이 곧 그 장소 자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사람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만큼만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정원’이라는 전승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의 ‘손님 대접’ 이야기가 오히려 이번 영상의 영적 중심에 가깝습니다. 가뭄과 흉년 때문에 수도원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부족해지자 수도사들은 방문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방문객이 찾아와 ‘ 가지를 잊지 말라. 주는 것과 받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을 믿으라’는 취지의 말을 남깁니다. 이후 수도원은 다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것이 이비론 수도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삶은 근본적으로 ‘받아서 주는 ’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기 위해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서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은 단순한 자선의 격언보다 훨씬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받음’과 ‘’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흘려보내는 가운데 다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주의점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남에게 하나를 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을 주신다’는 식의 보상 원리로 이해하면 금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납니다. 주는 행위가 더 큰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겉으로는 체어리티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기 사랑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으실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부터가 주님에게서 것이므로 필요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가 더 깊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것도 반드시 돈이나 재산의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볼 수 있는 눈, 더 깊은 평안과 지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훨씬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 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수도원의 말도 문자 그대로 어떤 신비한 법칙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식탁을 열고,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이라면, 체어리티는 받은 선을 이웃에게 유용하게 흘려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잘 행해질 때 ‘use’, 곧 쓰임의 한 형태가 됩니다.

 

영상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읽으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먼저 달려나가 맞이하고,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합니다. 속뜻에서 더 깊은 의미들이 있겠지만, 겉으로도 이 장면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대접하고, 나중에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상대가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대했습니다.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가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 사랑하는 ’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라 필요한 쓰임을 행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이라는 장소를 넘어 우리 일상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식탁 하나를 여는 것이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능력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생활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멀리 떨어졌는가?’보다 ‘얼마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 년 된 박물관도, 아토스의 신비로운 전승도, 여성의 출입이 제한된 독특한 수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림이 닥쳤을 때 닫으려 했던 ‘창고를 다시 여는 장면’입니다. 수도원의 거룩함이 박물관 속 오래된 성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내어주는 한 조각의 빵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성물은 과거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살아 있게 합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스베덴보리는 ‘주는 ’ 자체도 분별 없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실제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살피는 사랑입니다.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강화하는 도움 역시 참된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와 나눔에는 사랑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아토스의 웅장한 역사와 희귀한 보물들을 한참 이야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가장 빛나는 보물은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더 깊게 바꾸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았음을 잊지 말고, 받은 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내기를 잊지 말라.’ 그렇게 읽는 순간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환대 이야기는 특정 수도원의 미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비추는 말이 됩니다.

 

결국 참된 수도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적 고요가 내적 고요를 도울 수 있고, 외적 청빈이 자기 사랑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으며, 수도원의 규율과 전통이 영적 훈련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것으로 가두지 않고, 삶의 쓰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받은 것은 것이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도록 받은 것입니다.’ 그 흐름이 막히지 않는 곳,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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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1,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의 티혼 수도사, 금욕과 거듭남’ (2020010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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