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2

 

눈이 밝아져(eyes opened)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유사한 표현들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발람은 환상들을 본 결과,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합니다 (24:3).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또한 요나단은 꿀을 맛본 후, 그것이 악한 일임을 내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눈이 밝아졌다(eyes saw)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삼상14:29).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eyes)은 자주 이해(understanding)를 뜻하며,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은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eyes)은 이해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have eyes to see, and see not) (12:2)라고 말합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12:2)

 

이사야서의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라는 말씀 역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눈멀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모세는 백성에게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and ears to hear (Deut. 29:4),

 

고 말하는데,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를, ‘(eyes)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실 것(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42:7)이라 하며,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29:18)라고 말합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해설

 

이 본문은 AC.211의 ‘interior dictate’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단순한 추측이나 상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말씀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응의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합니다. 창3:7의 ‘눈이 밝아져’를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에서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 이해(understanding)’라는 상응입니다. 자연계에서 눈이 빛을 받아 사물을 보듯이, 영적 차원에서는 이해가 진리의 빛을 받아 사물을 분별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지고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발람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꿀을 먹은 뒤 실제로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아지고 상황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예들을 통해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새로운 초능력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뱀이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 같은 지혜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의 인식입니다.

 

특히 AC.212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 밝아져’와 ‘interior dictate’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딕테이트란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가 빛을 받아 어떤 사실을 즉시 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 요나단, 다윗, 모세, 이사야, 에스겔의 본문들을 모두 가져와 ‘’이 이해를 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결국 AC.21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3:7에서 ‘눈이 밝아져’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아직 남아 있던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눈 밝아짐은 영광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자각의 눈 밝아짐이며, 승리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상실의 눈 밝아짐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말씀 전체에서 ‘’이라는 표현을 읽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눈은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의 눈을 밝히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212는 단순한 어휘 해설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는 상응적 해석의 한 모범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24:3

 

 

AC.212, 심화 1, ‘민24:3’

AC.212.심화 1. ‘민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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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AC.212, 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AC.212.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영어로는 ‘눈이 열린’을 한역(韓譯)에서는 왜 ‘눈을 감은’으로 번역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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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상14:29

 

 

AC.212, 심화 3, ‘삼상14:29’

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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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3:3

 

 

AC.212, 심화 4, ‘시13:3’

AC.212.심화 4. ‘시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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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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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2

 

 

AC.212, 심화 6, ‘겔12:2’

AC.212.심화 6.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 구절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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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10

 

 

AC.212, 심화 7, ‘사6:10’

AC.212.심화 7. ‘사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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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AC.212, 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AC.212.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AC.212 심화 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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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9:4

 

 

AC.212, 심화 9, ‘신29:4’

AC.212.심화 9.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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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42:7

 

 

AC.212, 심화 10, ‘사42:7’

AC.212.심화 10.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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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9:18

 

 

AC.212, 심화 11, ‘사29:18’

AC.212.심화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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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검색이 없던 시절

 

 

AC.212, 심화 12, ‘검색’이 없던 시절

AC.212.심화 12. ‘검색’이 없던 시절 스마트폰, PC가 없어 ‘검색’이라는 걸 할 수 없었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어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목사님 같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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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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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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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심화

 

1. ‘interior dictate

 

interior dictate’는 직역하면 내적 지시’, ‘내면의 지시’, ‘내적인 일깨움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interior’는 단순히 마음속(inner)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차원의 속 사람에 속한’, ‘내적인’, ‘영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dictate’는 누군가가 말을 받아 적게 하는 받아쓰기(dictation)의 어원이지만, 스베덴보리 문맥에서는 안에서 알려 주는 작용’, ‘내적으로 지시하는 것’, ‘직접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AC.211에서의 interior dictate’는 어떤 음성이 귀에 들리는 현상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양심의 가책과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남아 있던 지각(perception)의 흔적이 작용하여, 자신들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내적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당신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듣기 전부터 이미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안에서 분명히 아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interior dictate’는 이런 종류의 직접적인 내적 인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AC.211에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interior dictate’, 곧 내적 지시에 의해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번역으로는 내적 지시’가 가장 무난하고 정확해 보입니다. 다만 해설에서는 내면의 소리’, ‘내적 일깨움’, ‘마음 깊은 곳에서의 자각’, ‘설명 없이도 즉시 알게 되는 내적 인식 등의 표현을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interior dictate’는 소리라기보다 지각이며, 음성이라기보다 직접적인 내적 앎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놓고 보면, 이 표현은 특히 태고교회의 특징과 잘 어울립니다.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논증과 추론을 통해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interior dictate’란 누군가의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곧바로 알게 되는 내적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211 interior dictate’는 내적 지시’이면서 동시에 지각의 마지막 흔적’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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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 즉 아직 조금 남아 있는 퍼셉션에 의해 자신들이 벗은 줄(naked), 곧 이전처럼 더 이상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37절의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씀을 해설하는 대목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구절을 ‘지식을 얻게 되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그에게 ‘눈이 밝아짐’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에 대한 자각입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 딕테이트(an interior dictate)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AC.193에서도 타락 이후 사람들 안에 아직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이 남아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완전히 무감각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들어갔는지를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남아 있는 내적 빛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눈이 밝아져’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떨어졌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니라 순수함을 잃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눈 밝아짐은 승리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상실의 눈 밝아짐입니다.

 

또한 여기서 ‘벗은(naked)은 단순히 옷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순진무구함과 주님에 대한 신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own이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 그 보호가 벗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AC.211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 줍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 그들 안에는 여전히 자신들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내적 빛, 퍼셉션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빛은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게 된 것은 자신들의 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우리 자신의 영적 경험과도 닿아 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아프고 부끄럽고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바로 그 자각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완전히 어두워진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1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참된 상태를 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벗은’은 그들이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고, 자기 own과 악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음을 인정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 장면은 타락의 한가운데에서조차 주님께서 완전히 꺼뜨리지 않으신 마지막 내적 빛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심화

 

1. ‘interior dictate

 

 

AC.211, 심화 1, ‘interior dictate’

AC.211.심화 1. ‘interior dictate’ ‘interior dictate’는 직역하면 ‘내적 지시’, ‘내면의 지시’, ‘내적인 일깨움’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interior’는 단순히 마음속(inner)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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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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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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