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4

말씀에서 잉태(conception)아들들을 낳는 것(birth of sons)은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잉태는 마음의 생각과 의도(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호세아서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in the Word, are taken in a spiritual sense—“conception” for the 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 and “sons” for truths—is evident from Hosea: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9:11, 12) As for Ephraim, their glory shall fly away like a bird, from the birth, and from the womb, and from the conception; though they shall have brought up their sons, yet will I bereave them, that they be not man; yea, woe also to them when I depart from them (Hos. 9:11–12),

 

여기서 에브라임은 지성적인 사람, 곧 진리를 이해하는 이해력을 의미하며, ‘아들들은 진리들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어리석게 된 지성적인 사람, 곧 에브라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Ephraim” signifies the intelligent, or the understanding of truth; and “sons,” truths themselves. It is likewise said elsewhere concerning Ephraim, or one who is intelligent, who has become foolish: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3:13)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n unwise son, for at the time he will not stand in the breach of the womb of sons (Hos. 13:13).

 

또한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in Isaiah: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23:4, 5) Blush, O Zidon, for the sea hath spoken, the fortress of the sea, saying, I have not travailed, nor brought forth, nor have I brought up young men, nor caused girls to grow up; as at the report concerning Egypt, they shall bring forth according to the report of Tyre (Isa. 23:4–5),

 

여기 시돈은 신앙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들을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으로 말미암아 파괴하여 영적으로 메마르게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where “Zidon” means those who have been in the knowledges of faith, but have destroyed them by memory-knowledges, and so have become barren.

 

[2] 다시 같은 예언서에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하는데, 여기에서도 아들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Again in the same prophet, treating of regeneration, and where likewise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by “sons”: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66:7-9) Before she travailed she bringeth forth; and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th heard such a thing? Who hath seen such things? 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 and shall I not cause to bring forth? saith Jehovah; shall I cause to bring forth, and close up? saith thy God (Isa. 66:7–9).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으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과 진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그것들을 아들들이라고 부르십니다. Goods and truths, being conceived and born of the heavenly marriage, are therefore called “sons” by the Lord in Matthew: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Matt. 13:37–38).

 

또한 주님께서는 구원하는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도 부르십니다 (8:39). 이는 앞에서 (AC.255) 말한 것처럼, ‘(seed)는 신앙을 의미하므로,에서 나온 아들들은 신앙의 선과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nd 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 he calls “sons of Abraham” (John 8:39); for “seed” (as stated n. 255) denotes faith, wherefore “sons,” which are of the “seed,” are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8:39)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친히 자체이시므로,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곧 교회의 신앙 자체를 의미합니다. Hence also the Lord, as being himself the “seed,”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faith of the churc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설명한 ‘잉태’와 ‘아들들’의 의미가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영적 언어임을 여러 본문을 통해 입증합니다. AC.261에서는 ‘잉태는 모든 생각이며, 아들들은 진리들이다’라고 정의하였고, AC.263에서는 그 잉태와 출산이 영적 전쟁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AC.264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그 정의가 성경 전체의 상응 구조와 일치함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잉태’를 ‘마음의 생각과 의도(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생각’은 단순한 지적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숙고하며, 그것이 삶의 방향으로 형성되어 가는 내적 과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따라서 잉태는 영적 생명이 아직 밖으로 나타나기 전, 사람의 내면에서 조용히 이루어지는 형성의 과정입니다.

 

반면 ‘아들들’은 그 생각이 열매를 맺어 나타난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아들’은 거의 일관되게 진리를 상징하며, ‘’은 선에 대한 애정이나 교회의 애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진리가 실제로 사람의 삶 속에 확립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육체적인 출산을 비유로 하여, 영적 생명이 생각에서 삶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에브라임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브라임’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곧 이해력(intellectual understanding)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이해력이 타락하면, 아무리 ‘잉태’와 ‘출산’이 언급되어도 실제 진리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출산에서도, 태에서도, 잉태에서도 영광이 떠난다’는 말씀은 이해력이 진리를 잃어버린 상태를 뜻하며, ‘아들들을 빼앗긴다’는 것은 진리 자체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의 ‘시돈’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시돈은 원래 신앙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기억 지식으로만 다루다가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해산하지도 않았고, 낳지도 않았다’는 것은 진리가 전혀 태어나지 못하는 영적 불임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갖는 것과 진리를 실제로 낳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가르칩니다.

 

반대로 사66은 거듭남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리가 태어나고, 새로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산고가 오기 전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참된 영적 출산은 언제나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약을 인용하여 구약의 상징이 주님 안에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천국의 아들들’,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혈통을 의미하지 않고, 신앙에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진리의 근원이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가 신앙을 의미하므로, 그 씨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신앙의 선과 진리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영적 출생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신 이유까지 연결합니다. 여기서 그는 ‘인자’를 단순히 인간이 되신 분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시며, 교회의 모든 신앙의 근원이시므로, ‘인자’는 교회의 신앙을 대표하는 이름이 됩니다. 이는 곧 모든 참된 진리는 주님에게서 잉태되고, 주님에게서 태어나며, 주님 안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AC.264는 ‘잉태’와 ‘출산’, ‘아들들’이라는 상징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언어임을 입증하는 글입니다. 잉태는 진리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생각과 의도로 형성되는 과정이며, 출산은 그 진리가 삶 속에 실제로 나타나는 과정이고, 아들들은 그렇게 태어난 진리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영적 출생은 천적 결합, 결혼에서 비롯되며,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창3:16은 육체적인 임신과 출산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진리를 형성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 생명의 신비를 계시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심화

 

1. ‘9:11-12

 

 

AC.264, 심화 1, ‘호9:11-12’

AC.264.심화 1. ‘호9:11-12’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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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3:13

 

 

AC.264, 심화 2, ‘호13:13’

AC.264.심화 2. ‘호13: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호13:13)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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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3:4-5

 

 

AC.264, 심화 3, ‘사23:4-5’

AC.264.심화 3. ‘사23:4-5’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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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6:7-9

 

 

AC.264, 심화 4, ‘사66:7-9’

AC.264.심화 4. ‘사66:7-9’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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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3:37-38

 

 

AC.264, 심화 5, ‘마13:37-38’

AC.264.심화 5. ‘마13:37-38’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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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39

 

 

AC.264, 심화 6, ‘요8:39’

AC.264.심화 6. ‘요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요8:39)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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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5, 창3:16, ‘남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5‘남편’으로 옮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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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3, 창3:16,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3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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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3

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면,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면, 악한 영들은 강력하게 공격을 시작하고, 이때 함께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 싸움이 임신 및 해산 관련, 내가 네 고통을 크게 더하겠다는 말씀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는 생각들과 진리의 생겨남에 관한 것을 의미합니다. When therefore the sensuous part averts itself or curses itself, the consequence is that evil spirits begin to fight powerfully,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and therefore this combat is described by the words,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that is, as to the thoughts and productions of trut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앞 절에서 설명한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는 말씀이 왜 영적 전쟁을 의미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사람이 타락한 이후 영적 세계에서는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 악한 영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반대로 천사들은 사람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더욱 힘쓰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양측의 작용이 사람 안에서 경험되는 영적 유혹과 내적 갈등입니다.

 

여기서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는 사람의 가장 바깥 의식, 곧 오감을 통하여 세상과 접촉하는 자연적 차원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259에서 뱀이 공격하는 대상이 바로 이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감각 자체는 주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각이 주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독립하여 스스로 진리와 선을 판단하려 할 때입니다. 이것이 ‘감각 파트가 스스로 돌아선다(averts itself)는 말의 의미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저주를 받는다(curses itself)는 표현을 매우 신중하게 사용합니다. 원문은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감각 파트가 스스로 주님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즉, 저주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을 끊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3에서 반복되어 온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그 결과 영계에서는 즉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과 거짓을 더욱 자극하며, 힘껏 공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사람을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천사들은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는 리메인스를 통하여 선한 생각과 선한 애정을 일깨우며, 사람이 완전히 악에 넘어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호합니다. 따라서 영적 유혹은 악한 영과 천사가 서로 대등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람을 지키시는 가운데 악을 허용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를 영적 전쟁으로 해석합니다. 이 고통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악한 영들의 영향과 천사들의 보호가 사람 안에서 동시에 작용할 때 경험하는 내적 긴장과 불안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주님 편에 서려 할수록 자기 사랑은 더욱 저항하고, 그 저항 속에서 유혹과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의 ‘고통’입니다.

 

이어지는 ‘잉태와 아들들을 낳는 것’도 앞 절 설명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잉태’는 새로운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이며, ‘아들들을 낳는 것’은 그 생각이 실제 진리의 삶으로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타락 이후에는 결코 평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진리가 생각 속에 자리 잡으려 할 때마다 악은 그것을 방해하려 하고,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려 할 때마다 자기 사랑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반드시 영적 싸움을 통과하여야만 사람의 것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AC.261AC.263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AC.261이 ‘고통’, ‘잉태’, ‘아들’의 영적 의미를 정의하였다면, AC.263은 왜 그런 고통이 생기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원인은 주님께서 고통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 안에서 악한 영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천사들도 더욱 애써 사람을 보호하게 되므로, 사람은 두 세계의 영향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AC.263은 창3:16의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는 말씀이 영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유혹의 과정을 묘사한 것임을 밝히는 글입니다. 사람이 감각적 차원에서 주님에게서 돌아설 때 악한 영들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고, 천사들은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통하여 더욱 힘써 보호합니다. 그 결과 사람 안에서는 새로운 진리가 생각 속에 잉태되고, 삶 속에 태어나는 과정 전체가 영적 싸움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 고통은 형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허락하시는 영적 전투의 모습이며, 그 싸움의 끝에는 언제나 주님의 보호와 승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AC.264, 창3:16, ‘임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4말씀에서 ‘잉태’(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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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2, 창3:16, ‘여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2‘여자’(woman)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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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2

여자(woman)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전에 여자로 뜻하였던 그 proprium(own)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지금 다루고 있는 대상이, 이미 타락하여 왜곡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e church is signified by the “woman” has been previously shown, but here the church perverted by 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signified by the “woman,” because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 is now treated of.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자’라는 동일한 상징이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상태의 교회를 나타낼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는 앞에서 이미 ‘여자’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상징은 언제나 고정된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여기의 ‘여자’는 교회 일반이 아니라, 자기 고유 proprium이 들어와 본래의 순수함을 잃기 시작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왜곡된 교회(the church perverte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악한 교회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곡되었다(perverted)는 것은 본래의 질서가 점차 비틀어지고 방향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을 중심으로 살던 교회가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같은 진리를 가지고도 그것을 바라보는 중심이 달라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원인이 바로 ‘proprium(own)입니다. 본래 사람은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오는 것처럼 느끼지만,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proprium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점차 자신이 선하고, 자신이 지혜롭고,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기중심성이 모든 영적 왜곡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 글은 창3의 시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지금 다루고 있는 대상은 이미 타락하여 왜곡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3은 태고교회가 완전히 끝난 이후의 고대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태고교회의 계보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미 그들의 내적 상태는 본래의 순수함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AC.261에서 보았던 내적 질서의 변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후손(posterity)이라는 표현도 단순한 혈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후손을 흔히 같은 교회의 영적 계승자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후손이란 태고교회의 전통과 계시를 이어받았지만, 그 정신과 생명을 점차 잃어버린 사람들을 뜻합니다. 외형상으로는 같은 교회에 속해 있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다른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타락을 매우 점진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퍼셉션이 약해지고, 이어 자기 proprium이 커지며, 그 결과 진리의 이해가 왜곡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랑과 지혜의 질서 자체가 무너져 홍수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창3은 완전한 타락의 결과를 기록한 장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시작되고 점차 심화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장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의 외형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말씀도 있고, 예배도 있으며, 신앙고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주님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가는 순간, 교회는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변화가 항상 자기 proprium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AC.262는 창3에 나오는 ‘여자’가 더 이상 창2의 순수한 태고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글입니다. 여기의 ‘여자’는 자기 proprium을 사랑함으로써 본래의 질서를 잃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아니라, 여전히 태고교회의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적 쇠퇴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후 창4와 창5, 그리고 홍수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질 교회의 점진적인 타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AC.263, 창3:16,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3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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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1,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AC.261-26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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