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1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 유일신 신앙과 신적 일체성

 

해설

이슬람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고백은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의 숫자가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의존하지만 그분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적 유일성의 교리를 ‘타우히드’(tawhid)라고 합니다. 꾸란 112:1-4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누구를 낳지도 않으셨고,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동등한 존재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슬람은 이를 근거로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도 궁극적인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신성은 나뉘거나 여러 신에게 분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라’(Allah)라는 이름 자체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라는 아랍어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알라를 믿고, 기독교는 전혀 다른 이름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식의 구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두 종교의 하나님 이해가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면서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을 거부합니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신6:4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선언하며, 사45:5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9항에서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한 분이시라는 인식이 인간의 영혼에 신적으로 유입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9항에서는 이슬람 신자들도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을 단순히 기독교 밖의 잘못된 주장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특정 종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과 그분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스베덴보리 역시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 이해를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P, 1764) 54–60항에서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독립된 세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 실제 생각 속에는 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의식은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과 일정 부분 만납니다. 그러나 두 입장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슬람은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을 거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셨으며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칩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고,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성이며,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입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슬람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친밀함, 자비와 영적 교제를 강조하므로, 그 신앙을 단순히 멀리 계신 절대자에 대한 복종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다가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요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과 별개의 신적 존재가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상 생애의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에는 분명한 진리가 있으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신학적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참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은 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인성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요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요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신적 일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주의 교리’ DP.60 역시 하나님과 인간이 주님 안에서 둘이 아니라 한 인격을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신학적 한계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한계를 분별하는 것과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구원을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18–328항에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 TCR.832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인정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의를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이슬람 신자들의 천국에 관하여 직접 언급합니다. 물론 그 설명에서도 주님에 대한 인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돕고, 악을 피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무슬림을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를 고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교리의 진위는 분별하되, 개별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은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첫 번째 문항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다른 세 신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이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유일신 신앙은 하나님의 숫자를 하나라고 고백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한 분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에 담긴 진리는 존중해야 하지만, 신적 일체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성육신하신 주님을 아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가 아니라, ‘내가 믿고 예배하는 그 한 분 하나님은 누구시며, 나는 그분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IS.001 해설)

 

요약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한 분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부·성자·성령은 그분 안에 있는 신적 삼위입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육신과 주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교리적 한계를 지닙니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차이를 이유로 이슬람 신자 개인의 내적 신앙이나 구원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IS.002 ‘알라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신적 아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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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7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 - 믿음과 선한 삶은 비교할 대상인가, 하나의 영적 생명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말은 매우 익숙한 신앙 표현입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거나 ‘구원은 착한 행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여러 차례 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성취나 선행을 근거로 구원의 자격을 얻을 수 없으며,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신자는 믿음과 선한 삶을 마치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문제이고, 착하게 사는 일은 그보다 중요성이 낮은 도덕적인 문제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해치고 자신의 악을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람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비교하면서, 전자는 구원받았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쉽게 판단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단순히 믿음과 선행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며, 선하게 산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서로 경쟁하는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참된 믿음과 참된 선이 결합하여 하나의 영적 생명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믿음과 선행에 관한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엡2:8-9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롬3:28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성취를 구원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개신교가 참된 믿음과 선한 삶을 서로 분리하여 가르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 2항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로 설명하며, 제16장 3항은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같은 장 7항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행위도 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일 수 있고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할 수 있지만, 신앙의 근원과 목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영적으로 부족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예수님만 믿으면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선행을 설명할 때, 믿음은 구원에 직접 관계되지만 선행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검토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우선순위의 설정 자체입니다. 참된 믿음과 참된 선한 삶이 본래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구원에서 더 중요하다고 비교하는 방식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믿는 일이 구원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요3:16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14: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근원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일이 실제 삶과 분리되어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7:21에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요15:12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마25:31-46의 양과 염소에 관한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며, 병든 사람과 옥에 갇힌 사람을 돌아보는 삶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물론 이러한 본문들만으로 믿음과 행위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이 그분을 향한 신앙고백과 무관한 외적인 선행만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실제적인 사랑과 선한 삶이 없는 신앙고백만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DL, 1763) DL.1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의 본질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도덕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형성되며, 그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다고 고백하는가와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행하는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DL.2에서는 사람이 말씀을 읽으면서 종교가 실제 삶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며, DL.9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참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중요한 원리를 밝힙니다. 이 두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데 있지만, 그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선한 삶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이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그 선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 실제로 살아가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착하게 사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질문은 본래 하나를 이루어야 할 두 가지를 분리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자신의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도록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336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이 믿음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두고 논의했다고 전하면서, 믿음의 진리는 시간적으로 먼저이지만 체어리티의 선은 목적에서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무엇이 옳은지 먼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와 믿음은 시간적으로 앞섭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갖거나 올바른 교리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전과 집을 짓는 일, 정원을 가꾸는 일, 밭을 경작하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성전을 지을 때 기초를 놓고 벽을 세우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지만, 그 모든 작업의 목적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밭을 경작할 때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열매를 얻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믿음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영적 생명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시간적으로 먼저라고 해서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며, 체어리티가 목적에서 먼저라고 해서 주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불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TCR.355-361에서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면 어느 것도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362-367에서는 주님과 체어리티와 믿음이 인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단순히 서로 협력하는 두 가지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진리와 관계되고, 체어리티는 선과 관계되며, 진리와 선은 인간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결합하여 하나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에게는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이웃을 속이거나 해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기심과 거짓을 멀리하며,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려 노력한다면 그 진리는 그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별도로 보관해 놓았다가 어느 하나를 구원의 조건으로 선택하는 두 가지 요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진리와 선이 서로 결합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이 선한 삶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말은 참된 믿음의 목적과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살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과 영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정직하게 행동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법을 준수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 명예를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을 돕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외적으로 유익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만하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이 반드시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DL.9-17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실제로 선한 행위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그 근원과 목적을 살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선행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 거래와 공정한 판단,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동은 사회에 실제로 유익하며, 그 유익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러한 행위가 영적으로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는 그 행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살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말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는 외적인 도덕성을 구원의 독립적인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참된 영적 선은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악을 멀리하고 그 선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생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 참된 체어리티에 해당하는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TCR.373-377에서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TCR.374에서는 체어리티를 선을 의도하는 것으로, 선행을 그러한 선한 의도에서 실제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별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사랑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또한 TCR.375-376에서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가능한 경우 실제 행위로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의 생각 안에만 머무르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선행의 숫자를 늘릴수록 영적으로 더 높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TCR.422는 참된 체어리티를 자신이 맡은 직무와 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정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공직자는 공정하게 판단하고, 상인은 정직하게 거래하며, 일하는 사람은 속임수 없이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목회자는 말씀의 진리를 가르쳐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체어리티의 중요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삶은 특별한 종교 활동이나 자선사업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며,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유익한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일과 착하게 사는 일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교회 안의 신앙 활동과 교회 밖의 도덕적인 행동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실제 신앙생활에서 흔히 나타나는 하나의 모순을 돌아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교회의 중요한 교리에 동의하며, 예배와 기도에도 열심히 참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터에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고, 가족에게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므로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자신의 직업에서 정직하게 행동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양심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두 사람을 비교할 때 우리는 흔히 ‘착한 불신자보다 믿는 죄인이 구원에 더 가깝다’는 식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와 같은 단순한 비교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두 번째 사람의 선한 행동이 어떤 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지 우리는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신앙고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의지가 선과 결합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기독교 신앙고백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적 소속이나 교리적 확신을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얼마나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착한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감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구원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처한 종교적 환경 안에서 어떻게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교회 밖에 태어난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어떤 사람이 기독교의 말씀과 주님에 관한 지식을 접하지 못한 것이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환경 안에서 신성을 인정하고 내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주님만이 모든 구원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주님의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는 기독교 밖의 사람도 자신의 양심과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선을 받아들이며, 사후에 주님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모든 선한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을 명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을 정죄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지만, 그 주님의 자비와 섭리는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적 경계보다 넓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주님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보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며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자신의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도 더욱 분명하게 갖게 됩니다. 눅12:48에서 주님께서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많이 요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약1:22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일은 단순히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신앙적 표지를 획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알려 주신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따라 악을 멀리하며 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진리의 지식이 크다면, 그만큼 자신의 사랑과 행동을 돌아보아야 할 이유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의 의미 역시 달라집니다. 복음 전도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특정한 신앙고백을 하게 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수를 늘리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실제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일상적인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법을 지키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삶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참된 선한 삶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외적으로 올바른지뿐 아니라,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거래하는 이유가 단지 적발되어 처벌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면, 그는 외적으로는 정직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이익을 위해 속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 주님의 말씀에 반하는 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누구도 자신을 감시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행동하려 한다면 그의 정직은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 내면의 동기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살필 때 외적인 행동에 만족하지 않고,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주님의 진리 앞에 비추어 보는 일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는 데 있지 않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이웃을 위한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이 오히려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스베덴보리가 선한 삶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착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앞의 오류를 반대 방향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과 분리된 인간 자신의 선행이 구원을 만들어 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TCR.336에서 설명하듯 믿음의 진리는 인간이 선을 알고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는 일도 충분히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TCR.373-377에 따르면 체어리티와 믿음은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여기서 선한 행위는 믿음에 덧붙여지는 공로가 아니며, 믿음도 선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종교적인 명분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그 믿음과 결합한 체어리티가 의지 안에서 선을 사랑하게 하며, 그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선한 삶은 구원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믿음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분리되면 자신의 영적 방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는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 그리고 실제 삶 안에서 서로 결합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천국을 어떤 곳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이고, 착하게 사는 것은 천국에 들어간 뒤 받을 상급과 관계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특정한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외적으로 들어가는 장소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인 천사들의 생명과 질서가 이루는 세계입니다. ‘천국과 지옥’ HH.528-535에서는 천국에 이르는 삶이 세상을 떠나 특별한 종교 활동에만 몰두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자신의 직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영적인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HH.470-484에서는 사후의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삶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 천국의 사랑과 전혀 맞지 않더라도 어떤 신앙고백을 했다는 이유로 천국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고, 그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천국의 생명을 지니게 되는 일과 관계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을 믿는 일과 선하게 사는 일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천국에 들어간 뒤의 보상을 나누는 두 가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 생명이 실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선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합니까? 이 말에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의 도덕적 성취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믿음과 선한 삶을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처럼 생각하고, 믿음의 고백이 실제적인 사랑과 선한 삶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의 진리가 시간적으로 먼저이지만 체어리티의 선은 목적에서 먼저이며,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착하게 보이는 행동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선을 구별하면서, 외적인 선행만으로 인간의 영적 상태를 단정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고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내면이 이미 선과 결합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한가, 착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내 의지와 행동 안에서 선한 생명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로 이웃에게 실제로 유익한 일을 행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선한 삶을 대신하지 않으며, 참된 선한 삶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결합하여 실제로 선한 삶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결국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선행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인간 안에서 하나의 영적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믿음과 선한 삶,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구원의 의미입니다. (PR.007 해설)

 

요약

 

‘착하게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고백에는 구원이 인간의 도덕적 공로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선한 삶을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믿음의 고백이 실제적인 사랑과 선한 삶을 대신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전통적인 개신교의 공식 교리 역시 참된 믿음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DL, 1763) DL.1-2에서 종교의 본질이 삶에 있으며 그 생명은 선을 행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DL.9-17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336에서는 믿음의 진리가 시간적으로 먼저이지만 체어리티의 선은 목적에서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TCR.355-367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TCR.373-377은 이 둘이 실제 선한 행위 안에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TCR.422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와 일상적인 관계에서 공정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참된 체어리티의 중요한 표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착하게 보이는 행동이 언제나 영적인 선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 행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동시에 기독교 신앙고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에서 제외할 수도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은 교회 밖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보편적인 자비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지만, 그분의 구원은 단순한 신앙적 소속이나 교리적 고백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참된 믿음과 참된 선한 삶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결합하여 하나의 영적 생명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주님을 참되게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악에서 돌아서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제로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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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7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사제에게 있는가, 오직 주님께 있는가?

 

해설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및 교회와 화해하기 위하여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사제는 고백을 듣고 필요한 권고와 보속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경을 선언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성사적 과정을 통하여 신자가 실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듣는 일과 주님께서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사죄의 선언이 이루어진 순간 인간의 내적 악도 제거되는 것일까요? 사제에게 고백하는 행위는 참된 회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죄 사함의 통로이기도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죄의 용서를 주님에 의한 실제적 거듭남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사제의 직무를 존중하면서도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죄를 고백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회개, 사죄 선언과 실제적 죄의 용서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422–1424항은 고해성사를 회개와 참회, 고백과 용서, 화해의 성사로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회의 친교를 손상시켰을 때 이 성사를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441항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명시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직무를 맡기셨으며, 그 직무가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1461항은 사제가 성품성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가르치며, 1466항은 고해 사제가 하나님의 용서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용서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사제가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없애는 제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이해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제는 그 용서를 성사적으로 전달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사제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소유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이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행사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런 회개 없이 자동으로 용서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8항은 참회자의 통회와 고백, 보속,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통한 사죄를 고해성사의 중요한 요소로 설명합니다. 특히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이 지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가 대죄의 용서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성사적 고백을 하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456항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기억해 낸 중대한 죄들을 사제에게 고백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고해성사에는 죄의 인정과 진정한 뉘우침,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이 함께 포함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제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절차를 죄의 용서를 얻는 통상적인 성사적 통로로 규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를 하나의 성사 안에서 연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각각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사제의 사죄권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은 요20:22-23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16:18-19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 마18:18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세도 교회의 화해와 사죄 직무에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죄의 용서와 교회의 책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후대에 발전한 개별 고백 및 성사적 사죄 제도가 모든 세부 내용에서 동일한 것인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7항 역시 교회 역사에서 참회의 구체적인 방식이 달라졌으며, 오늘날과 같은 사제와 신자 사이의 개별적인 고백 방식이 오랜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고해성사의 모든 절차가 요20에 직접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사도적 직무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이러한 제도가 발전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말씀을 인간에게 독립적인 죄 사함의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믿음과 진리입니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는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9410항입니다. 그는 마16:18-19와 마18:18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을 표상하며 천국 열쇠는 진리에서 비롯되는 권능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은 어떤 인간이 자신의 지위에 따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하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AC.9410:2–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기 권한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에 들이거나 천국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어 4절에서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 하나를 풀어 줄 수 없으며, 죄가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거듭남을 통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제의 사죄권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다만 이 본문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자신에게 주님 고유의 구원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권능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논점은 천주교가 인정하는 사제의 종속적인 성사적 권한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유일한 죄 사함의 권능 사이에 어떤 신학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의 실제적인 제거는 사제의 직무나 선언 자체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39항이 매우 중요한 답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의 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교회의 성직자에게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고백하고 사죄를 받아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내는 것이 해롭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자신을 성찰하고 날마다 저지르는 악을 돌아보는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연적 고백’(natural confession)이라고 부르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 고백’(spiritual confession)과 구별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든 행위를 무가치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죄를 받는 행위가 양심의 안정을 돕는 유익한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TCR.567:7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실천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자기 성찰조차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을 스베덴보리가 가톨릭의 성사적 사죄권 전체를 승인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의 자연적·목회적 유익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분명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528–531과 538–539항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회개의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막연하게 인정하거나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먼저 자신을 성찰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악을 이길 힘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탐욕과 거짓말, 분노와 교만을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된 회개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TCR.538항은 죄의 고백을 구주이신 주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539항은 자기 성찰 후에 주님께 악을 물리칠 능력과 선을 행할 마음을 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이미 인간의 죄를 알고 계시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여 알려 드릴 필요가 없으며,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제거됩니다. 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순히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그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과정입니다. 사제 앞에서의 고백이 이러한 성찰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 고백 자체가 내적인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는 AC.9444–9449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저지른 죄가 그 사람의 생명에 뿌리내려 있으므로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지 않는 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AC.9445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하거나 진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AC.944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고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것이 죄의 용서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AC.9449는 죄가 용서된 상태의 표지로 하나님을 하나님 때문에 예배하고, 이웃을 이웃 때문에 섬기며, 악을 피하고 미워하는 삶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단순히 어떤 선언에 따라 인간의 법적 상태가 바뀌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역사와 관계됩니다. 물론 천주교도 사죄 이후의 회개와 성화를 중요하게 가르치므로, 이 차이를 천주교는 삶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스베덴보리만 삶의 변화를 강조한다는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회개의 필요성 자체보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에 어떠한 영적 효력을 부여하며 그것을 주님의 실제적인 죄 사함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의 고백이 실제 목회 현장에서 어떤 쓰임을 지녀야 하는가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혼자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에게 죄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양심의 깨달음과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피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진정한 회개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하거나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받는 일과,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사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죄를 성찰하도록 도우며 회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로 인간의 내적인 악을 없애거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죄경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악한 성향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가 여전히 자신의 약함과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회개가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반복해서 돌아보고 다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적 지도자의 참된 역할은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실제적인 회개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성사의 참된 가치를 판단하려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5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인 중재자가 아들의 죄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이 죄를 고백하기 전부터 그의 모든 내적인 상태를 알고 계시며, 그가 악에서 벗어나 선의 삶으로 돌아오기를 언제나 원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죄의 고백은 주님의 마음을 설득하여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용서를 얻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 악에서 돌이키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사제나 목회자,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회개의 과정에서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스베덴보리 역시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가 양심의 부담을 덜어 주는 자연적인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모든 경우에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뉘우침과 화해라는 중요한 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익과 사제의 성사적 사죄권에 관한 신학적 주장 사이의 차이입니다. 참된 죄의 용서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그분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갈 때 실제적인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결국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고백과 회개의 궁극적인 목적은 용서를 선언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이 실제로 새롭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07 해설)

 

요약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뉘우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화해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고해성사를 단순히 사제에게 죄를 말하면 자동으로 용서받는 절차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된 통회와 고백, 보속과 사죄를 함께 강조하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사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9410:2–4에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가 인간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9444–9449에서는 죄의 용서가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과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는 실제적인 거듭남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를 모두 부정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539에서는 양심의 짐을 덜기 위하여 교회의 성직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가 해롭지 않으며, 자기 성찰의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이를 자연적 고백으로 구별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고백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TCR.567:7 역시 가톨릭 신자들의 자기 성찰과 고백 관행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회개를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거나 성직자의 조언과 위로를 받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을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어떠한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제의 권한을 주님에게서 받은 종속적인 직무로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죄의 실제적인 제거가 오직 주님에 의한 회개와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고백 청취와 사죄가 목회적인 유익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죄의 용서를 성사적으로 성립시키는 권능이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고백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그 악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며,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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