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0, AC.39-41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Verse 20,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 20절 속뜻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신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한 그는 죽은 상태이지만, ‘아닙니다.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습니다’ 고백하면서 그는 살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전자는 식물, 후자는 동물로 표현되었습니다. ‘수중생물’(the creeping thing)로 표현된 겉 사람의 기억-지식, ‘’(fowl)로 표현된 속 사람의 합리와 지성 모두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 생물이 됩니다. ‘생물’(the living soul)은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켜져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first begins to live). 지금까지는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한데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man of himself is dead)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인데요,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 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the tender grass)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곧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animate)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40.‘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the memory-knowledge)을, ‘새들’(birds)은 보통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수중 생물’이나 ‘물고기’(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가 기억-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계속해서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 즉 일반적으로 새로운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 곧 거듭난 사람(a regenerate person)을 묘사하십니다. 모든 거듭난 사람(who is regenerate)은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 인간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납니다 ^^

 

[3]‘새’(birds)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에서 In Ezekiel:

 

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 새로운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wild beast)은 정말 들짐승을, ‘새’(bird)도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to make a new covenant)하시기 때문입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41.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제법 메인으로 보일지라도 천사들이 볼 때는 무슨 딱딱한 뼈나 까만 덩어리로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볼 수 있도록 재현될 때는 휴먼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human and living) 나타납니다.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된 사실은, 천사 같은 영(an angelic spirit)의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지극히 사소한 생각까지도 살아 있는 상태(alive)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조각들 안에도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생물’(the living soul)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기는 것’(creeps)이라 한 것입니다. 이들 진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나 깊은 비밀들임에도 살짝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에 ‘생물’(the living soul), ‘스스로 움직이는 것’(the thing moving itself)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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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18-19, AC.38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Verses 18-19,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 18, 19절 속뜻

 

주님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큰 광명체를 두시고, 선과 악, 빛과 어둠을 환히 비추게 하셨습니다. 다시 저녁 상태, 아침 상태가 되면서 더욱 우상향, 네 번째 단계를 지나고 있습니다.

 

 

38. ‘낮’(day)으로는 선(good)을, ‘밤’(night)으로는 악을 의미하게 하시고, 그래서 선(goods)은 낮의 일, 악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아래 주님의 말씀처럼 ‘빛’(light)으로는 진리를, ‘어둠’(darkness)으로는 거짓을 의미하십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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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1(D1)-주일예배(2506, 눅13,6-9),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pdf
0.36MB
성찬.pdf
0.13MB
2023-10-01(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1V5lp3sR7E4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6-9)

 

 

나무에 속한 모든 것은 진리를 뜻하지만, 열매는 다양한 선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선의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다. 마태복음 7장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라고 말한다. (참된 기독교 106)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세상의 재앙이나 환난은 어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면 그 여파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지만, 반대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하고, 질병과 환난과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8절 이하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 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21:18-20)

 

말씀에는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요, 첫째, 주님께서 과연 그 정도로 허기를 느끼시거나 예민하셨을까 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주님이 허기를 채우려 하셨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 왜 하필이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신 데 왜 무화과나무를 그토록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보여 주신 모든 기적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 곧 속뜻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시장하시다 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리적인 욕구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주님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문제로는 그렇게 힘들어하시지 않으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믿음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그 마음이 주님이 느끼시는 배고픔이며 허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바로 다가가 열매가 열렸는지를 살펴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의 열매는 신앙인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기까지 했을까요?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자연적인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세 가지 단계의 천국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선에도 세 가지 단계의 선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인데,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진리를 믿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영적인 선(spiritual good)은 진리와 선을 사랑하되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천적 선(celestial good)입니다. 천적인 선은 주님을 위해 또는 선 그 자체를 위해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이렇게 자연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천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나 사람을 보실 때 그에게 어떤 선이 있는가를 먼저 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살펴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안타깝게도 열매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인 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선도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세상의 재물과 지위만을 탐했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인 의미에만 매달릴 뿐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해 마태복음 13장 15절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4-15)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의 경우는 말씀의 내적인 것을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고난 특성상 그들은 진리를 알면 오히려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대교회 사람들의 영적 성향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겉으로만 신성할 뿐 내적으로는 전혀 신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스스로 영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보니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합니다. 포도원이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선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에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포도원의 주인이신 주님이 당신의 뜰에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것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적 선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겠습니까? 누구나 처음에는 나만 구원을 받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일을 할 때도 공정하게 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인이 삼 년을 기다려도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배우기만 할 뿐 전혀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나 포도원지기는 모두 주님을 나타내는데,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냅니다. 즉 포도원 주인은 말씀 또는 진리로서의 주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하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주님이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주인은 또 삼 년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삼 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우리를 위해 기다리실 수 있을까요? 주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때리고, 침을 뱉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기다린 삼 년이요,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주님의 그런 마음을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두루 파고 거름을 준다는 것은 주님께서 진리로 가르치고 설득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설득하실까요? 먼저 나무 주변을 두루 파십니다. 두루 판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쓸 만한 진리와 선이 있는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주입하시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을 통해 대화하듯 천천히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 거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거름은 인분과 같이 더러운 것인데 그것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628번 글의 2항을 보면 천국의 천사들은 지옥에서 오는 악한 기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 냄새는 인분이나 시체가 썩는 냄새같이 아주 역겹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역한 냄새를 지옥의 영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거짓이나 악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악과 거짓들의 역한 냄새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거름을 주신다는 것은 주께서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이전의 악과 거짓의 음습한 기운과 역겨운 냄새를 느끼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몸에 밴 악습과 거짓된 신념들을 혐오하게 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가르쳐 열매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찍어내신다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참된기독교’ 106번 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출애굽기 21장에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종은 여섯 해까지만 주인을 섬기고 일곱 해가 되면 자유인이 되어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신앙인들은 진리를 위한 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여섯 해는 거듭남을 위한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동적인 신앙과 능동적인 신앙은 어떻게 다를까요? 수동적인 신앙은 진리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신앙입니다. 그에 비해 능동적인 신앙은 진리를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신앙이며, 그러므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자발적으로 진리에 따라 사는 그런 신앙입니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과 뜻을 맞추고, 그들의 행동을 참아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 진리의 명령이니까 용서하고 참는다면 그것은 수동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능동적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고 매 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8:34-36)

 

아멘

 

 

원본

2020-10-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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