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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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09(D1)-주일예배(2547, 눅19,37-44),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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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주님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37-44)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표상(representatives)과 표의(significatives)로서 존재하셨다. 그것은 주님 스스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최초의 것이면서 동시에 마지막의 것이 되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게 해서 최초의 것으로부터 마지막의 것들을 다스리고, 또한 그것들을 (쓸모에 따라) 배치시키기 위함이었다. (계시록해설 405:24, 이순철 역) The Lord when in the world was in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in order that He might be in the ultimate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at the same time in their firsts, and thus might rule and dispose ultimates from firsts, and thus all intermediates from firsts through ultimates;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are in ultimates. (AE.405d:24)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맞은편 마을에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일과 제자들이 나귀의 등에 옷을 깔아 그 위에 주님을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 37절과 3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찬송했다고 합니다. 여기, 주님이 하신 일이란, 첫째,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열어주신 일입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주님의 제자들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푸는 것’으로 묘사했지요. ‘나귀 새끼’의 속뜻은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두 번째 일은, 새 교회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나아가서는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의 속뜻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고, ‘나귀 새끼’는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리고 ‘제자들의 옷’은 그보다 높은 영적 진리인 이웃 사랑의 진리를, 끝으로 ‘그 위에 앉으신 주님’은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진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진리를 뜻합니다.

 

마지막 때 새 교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 같은 일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선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주의 이름’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을 뜻하는데, 매일 같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이웃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 말씀의 문자 안에 감춰진 내적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진리의 힘으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제자들이 예수를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양하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회의 지식인들이었지만 속뜻으로는 외적인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를 뜻합니다. 그들을 위선자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보면서도 끝내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며 예수를 찬송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신성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주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선생’은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을 선생으로 부른 것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걸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주님을 인정하면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이런 설명도 있는데요, 당시 유대가 처한 정치적 상황으로 본 설명입니다.

 

당시 유대 전체는 로마 식민지요, 또 그 가운데 예루살렘은 대왕 헤롯의 세 아들 중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있던 곳으로, 로마는 그 당시 지중해 연안 거의 모든 문명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정복지의 거의 모든 문화, 종교를 존중,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로마가 파송, 혹은 세운 속주의 장들이 그 재임 중 한 번이라도 자기가 맡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대로 직위해제 되는 원칙이 있어, 특히 반란이 잦은 유대 땅은 분봉왕들이나 로마 총독이나 늘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이때가 마침 유월절 시즌으로 당시 전 세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기간이어서 더더욱 정치적으로 민감한 분위기였다. 특히 안티파스의 경우, 즉위하던 해 바로 반란이 터져 큰 문제가 되었으나, 로마에서는 즉위하던 원년에 일어난 일임을 감안, 한번은 봐주기로 하였던 터라 이 기간 그는 더더욱 전전긍긍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며 무리 지어 다니고 있으니... 그래서 특히 이런 정치적 상황에 훤했던 바리새인들이 아연실색하며 주님께 그런 조언을 한 것이라는...

 

그럴듯하지요? 우리가 말씀을 영적으로 풀 때, 사람들은 이렇게도 풀고, 오히려 이런 풀이가 더 그럴듯하게 와닿으며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에, 혹시 사람들의 호응과 반응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설교자, 목회자라면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신, 구약성경을 저런 식으로 풀어 시리즈로 낸 저 저자는 저런 관점의 책들로 많이 유명해졌고,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 초청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이 지상 배경 및 당시 정치, 경제 등 국제 정세, 그리고 등장인물과 장소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적 존재이며, 천국은 내적 상태의 나라라 말씀도 그 안에 담긴 속뜻, 즉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말씀에 불어넣으신 천국의 비밀)만 보인다고 합니다. 하여... 주님을 가르치며, 천국에 대한 올바른 소개와 인도의 책임이 있는 설교자, 목회자로서 저는 무슨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의 길을 걸을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몸 안에 머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에, 무조건 영적이고 내적이기만 하는 건 무리가 있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풀되 필요하면, 저런 설명도 곁들이는 균형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다만 제 역량이 많이 부족하여 그런 설교 준비에 많이 미흡한 게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자, 그럼 계속해서, 주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돌들’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새 교회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새 교회가 참된 진리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진리 스스로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천국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거듭남과 시험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당시 정황상 바리새인들의 저런 조언과 충고도 나름 일리 있어 보임에도 불구,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저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런 상황에서 나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붙들어 주심을 간구합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말씀에서 ‘(, city)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지만 여기 ‘예루살렘 성’은 타락한 유대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성을 보고 우셨을까요? 교회 안에 신앙과 사랑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황폐해지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시는 것’은 무너져 가는 교회에 대한 연민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성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이 오시기 직전 천국에는 고요함이나 평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세력이 팽창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지상의 교회에도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더 이상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억류된 것처럼 영적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인류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천국과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 팽창해 천국의 일부를 오염시킬 때도 그냥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도 지옥을 당신의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영계에서 지옥의 세력이 커진 것은 지상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대신해 인간의 몸을 입고 지옥과 싸워 이겨 그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많은 개신교인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그런 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면서 마뜩잖아합니다. 이런 태도가 시작되면 바로 마음의 창, 내면이 닫혀 천국의 입류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뭔가 반감이 시작될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이 주님께 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 평가는 주님께 맡기시고 쿨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반응하듯 말이지요.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런 태도가 안전한 태도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높이 앉아 인간에게만 지옥을 이기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즉 인성을 입으시고, 직접 지옥과 싸워 이기심으로써 거듭나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 시험의 난이도는 사랑의 대상 수에 비례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와 두 사람을 사랑할 때, 가족 전체, 직장 전체, 교회 전체 등등, 그러니 인류 전체를 품고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대적하고자 지옥 전체가 달려드니 그 난이도, 그 지독, 그 혹독함이 어땠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그런 시험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의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의 주님의 나라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지옥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선과 진리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의 교회가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표상되는 유대교회와 모든 타락한 교회들을 향해,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 교회를 통해 참된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적어 희귀할 정도입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세속의 입장과 지위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그들의 교회는 진리가 주는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릇된 교회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토둔(土屯, 고대 전쟁 시 함락하고자 하는 성 높이만큼 흙을 쌓아 공격하는 공성법 중 하나)을 쌓는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성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벽’은 보통 교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타락한 교회들의 그릇된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식’은 유대교회 같은 외적인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아름다운 예배당과 경건한 의식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땅에 메어쳐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 교회에 진정한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심판의 날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유대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이교도들, 그러니까 로마에 의해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예배의 표상이었던 희생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또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인 제자들과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열어주신 내적 진리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심판 날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주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래 그랬습니다. 애굽에 살 때부터 여호와의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과 애굽의 기병들이 홍해의 깊은 바닷속에 잠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광야로 나와서는 매일 같이 주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그들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은 모세가 잠시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노래하고 춤을 췄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마음속에 다른 신을 품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우상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매일 버려야 하겠습니다. 뜻대로 잘 안될 때는 주님께 고하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버릴 때 시험이 점점 줄어들고, 시험이 오더라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로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2022-05-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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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D1)-주일예배(2546, 눅19,28-36), '주가 쓰시겠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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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의 속뜻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28-36)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212:6, 이순철 역) By the disciples putting their garments on the ass and her colt was represented that truths in the whole complex were submitted to the Lord as the highest judge and king; (AC.9212:6, 출22:26)

 

 

※ 아래 에피소드는 설교 원본의 에피소드인데 오늘 설교 도입부로 적절해 보여 그대로 사용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목사님과 함께 교회 담벼락과 보도블럭 사이의 땅에다 회양목을 100주 정도 사다 심었습니다. 봄이 되니 돌들 사이로 잡초가 올라오고 행인들이 담배꽁초도 버리고 해서 미관상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나무를 심기 전에 땅을 팠는데 그 아래 건축 폐기물들이 잔뜩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건축 공사를 할 때 시공하는 사람들이 시멘트나 벽돌 조각 같은 것들을 거기 묻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어낸 건축 폐기물이며 오염된 흙이 폐기물 처리용 마대 자루로 20부대가 넘게 나왔습니다.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며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주님은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진리가 있는, 진리를 동반한 선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선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리는 목적에 맞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은 향기가 나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 혼자서 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어떻게 내적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므로, 속뜻으로는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에 비해 감람산은 하나님의 사랑, 또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산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이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 안으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사랑이 있는 진리, 사랑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그러므로 죽은 진리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는 진리는 사람의 의지를 움직여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 둘을 부르셨습니다. 내적으로, 즉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이라고 한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배우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신 제자 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편’은 한글 성경 표현이고, 영어로는 ‘against’라고 되어 있는데, ‘against’라는 말은 주님을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을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으므로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외적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과 경건한 예배 의식 같은, 예배의 외적인 것, 외향적인, 외모를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그에 반해 내적인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 즉 진리에 따른 삶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맞은편 마을은 예배의 내적인 것은 없고, 외적인 것만 있는 교회를 뜻하고, 그러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교회입니다.

 

※ 현실적으로 이렇게 완전 100% 외적이기만 한 교회는 없습니다. 논지를 또렷이 하기 위해 이런 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 새끼의 속뜻은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자연적 진리(natural truth)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포함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의 문자적 의미나 세상 지식을 새 교회에서는 ‘기억 지식(knowledge of memory)이라고 부르는데, 본문에서는 그런 지식을 ‘나귀 새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할 뿐 삶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 합리성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빛이 차단되고, 그리하여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맞은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란, 외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지식이 주님에 의해 내적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용하지 않는 진리를 주님께서 걷어 들여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적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후에 심판받을 때, 주님께서 악한 사람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아 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오늘 본문 앞 본문인데요, 거기서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19:26)

 

라고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말씀의 지식을 빼앗긴 외적 교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읽어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외적 교회는 점점 진리에 대해 무지해지고, 내적인 교회는 점점 더 지혜로워집니다.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매인 것을 푸는데 그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속에 감춰진 내적 의미가 외적 교회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에 의해 매여 있는 나귀가 풀리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의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나귀의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교회들이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내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가지고만 있고 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모두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 진리를 쓰는 사람이라야 진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웠습니다. ‘천국의 비밀’ 9212:6항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겉옷(garment)은 내적 교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뜻하고, 나귀 새끼는 진리가 감춰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귀 위에 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가장 높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보다 더 높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섬겨야 하고, 영적 의미는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의미(celestial meaning)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라면, 천적 의미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지식과 모든 걸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애정들은 단절되면 안 되고, 서로 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것은 옷이나 장식처럼 남에게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일까요? 첫째는, 악을 멀리하되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로 악을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해선 안 되고, 언제나 진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일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주님께 물어가면서 일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정성이 담기고, 주님의 질서가 담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이든 모든 일 가운데 나귀 위에 자기의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겸손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각자의 삶을 향기 나는 삶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 위에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아멘

 

2022-04-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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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6(D1)-주일예배(2545, 눅19,12-24), '열 므나 비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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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므나 비유의 속뜻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눅19:12-24)

 

 

진리를 기억 속에만 가지고 있고, 삶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모두 빼앗겨 버리지만, 그러나 기억과 삶 안에 모두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혜가 영원히 늘어난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은화 한 므나를 가지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열 므나 남긴 사람에게 준다고 말한다. (계시록 해설)

 

 

오늘 본문은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과제를 내어 주신 다음, 심판 때에 과제를 충실히 이행한 착한 종은 천국으로 보내시고, 그렇지 않은 악한 종은 지옥에 던지신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에게 심판받을 때, 악한 종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면 그 사람 마음은 어떨까요? 버나드 쇼(아일랜드, 192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묘비명에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난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적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후회를 할까요, 아니면 이를 갈며 주님께 대들까요?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목적은 세상 사는 동안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익혀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어느 귀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종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떠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12절과 13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여기서 귀인은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귀인의 종 열 명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10)이란 수는 모든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종들에게 은화 열 므나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 참고로, 므나는 주님 당시 사용되던 은으로 된 화폐인데, 100 드라크마에 해당하며, 당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함께 품꾼들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고 하니, 한 므나는 백 일치 품삯으로 작은 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월 300 일용직의 경우, 대략 천 정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이런 므나의 그 속뜻은 말씀을 통해 배우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인이 종 열 명에게 열 므나를 나눠줬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은화를 가지고 장사를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삶에 적용하여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우는 대로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선과 진리가 늘어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즉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장사꾼이 재물을 모으듯 선과 진리가 점점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할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들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선과 진리의 지식을 불려 나가는 것이 바로 종들이 주인의 돈으로 장사를 해 이문을 남기는 것입니다.

 

주인이 한참 후에 돌아와 종들이 어떻게 장사를 하였는지 보고자 하여 종들을 불렀습니다. 첫 번째 종이 주인에게 나아와 보고합니다.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겼고, 두 번째 종도 다섯 배를 남겼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벌어질까요? 그 이유는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967번 글 2번 항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능력에 따라 거듭난다(but each according to his capacity and his state;)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시기에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각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며, 그에 따라 믿음과 사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열 배 이문을 남긴 종은 다섯 배 남긴 종에 비해 영적 능력이 우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의지가 약할까, 왜 다른 사람보다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할까 하면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겁니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고,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과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문을 남겨 주님께 돌려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을, 그리고 다섯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십니다.

 

※ 이건 차별이 아닌 오히려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열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열 배,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다섯 배, 즉 각자의 입장에서는 100%,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에게 열 배로 부으시면 그 사람한테는 오히려 큰 고통이 됩니다. 내면이 안 열려 오히려 천국 질서가 뒤집힌 사람에게 그가 원한다고 천국 문턱에라도 들어가 보게 하는 순간, 그는 마치 불 위에 놓인 마른오징어처럼 온몸이 뒤틀리며, 죽을 것만 같은 상태가 되어 그만 후닥닥 원래 있던 지옥으로 도망치듯 뛰어내리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건 천국 내에서도, 즉 일층천에서 이층천, 이층천에서 삼층천을 희망하는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천사마다 자기 내면이 열린 곳에 있는 것이 천국이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서 고을(city)은 ‘남은 자(remains, 한글 번역 시 음역 그대로 ‘리메인스’로 표기)라고 하는, 선과 진리의 의식이 있는, 속 사람 속 깊은 내면을 뜻합니다. 따라서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건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란, 사람이 아주 어릴 때, 주님께서 속 사람 깊은 곳에 심어놓으신 선과 진리의 의식,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애정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어린아이의 영 속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다가 아이에게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유입이 멈춥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신념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 때, 다시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를 멀리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한테는 리메인스가 파괴되어 점점 고갈이 됩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리메인스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으며,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이 리메인스가 없으면 악과 거짓에 저항할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많아진다는 건 개인의 영적 상태가 점점 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명하시는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 역시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걸 뜻합니다. 10이란 수가 리메인스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십일조를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의미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물이 늘어날 때, 리메인스 또한 그만큼 늘어나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건 내 걸 가지고 주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오늘 본문의 종들처럼 여러 배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며, 그때 리메인스라고 하는 주님의 생명이 각자의 내면에 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한번 악을 멀리하고, 한번 선을 행할 때마다 내면에 리메인스가 쌓이고, 그리하여 점차 거듭나기 좋은 상태로 바뀐다는 걸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종이 와서 주님께 고했습니다.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명에 따라 장사를 하지 않고, 돈을 수건으로 싸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엄한 사람이라 심지 않아도 거두시는 분으로 생각했다고 변명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두는 건 선과 진리의 지식을 기억 속에만 넣어두고 행하지는 않는 걸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오직 믿음’, 즉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워 행위, 즉 삶의 실천을 소홀히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 여기서부터는 설교 원본을 수정, 제가 조금 보충하였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라는 에베소서 구절을 댑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본 것입니다. 모든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도 그 출발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은 자기를 사랑해서이기 때문이지요. 위 에베소서 구절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즉 바울은 에베소서 및 그 근방 교회들에게 자기를 사랑해서 선행을 하고, 그걸 근거로 자기 구원의 공로로 여기는,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선행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1-3)

 

참고로, 거듭나는 세 종류의 사람 중에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영적 인간은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후자인 천적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덤으로 얻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사람인데, 이 사람은 이런 일, 곧 주님과 영생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그냥 선하고 착하기만 했던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교리에 충성, 정작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삶’은 소홀히 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개신교인들의 모습은 마치 주인이 엄격한 사람이라 장사를 하다 돈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돈을 수건에 싸두었다고 하는 오늘 본문, 세 번째 종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종의 말을 듣고 주인이 말합니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말씀에는 진리를 배워 머리에만 쌓아두는 것을 재물을 수건에 싸서 보관하거나 땅에 묻어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장사하는 것, 또는 은행에 맡겨 이식(利殖, 이자에 이자가 붙어 재물이 늘어가는 것)을 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종에게 악한 종이라고 꾸짖으시며,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관련, 이사야에서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젖은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고, 값없이 사서 먹으라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진리와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행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주님을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을 행할 때는 즐겁게, 마치 자원하여, 그러니까 자기가 원해서, 하고 싶어서 하듯 하면서도, 하고 나서는 그 모든 공을 오직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곁에 서 있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세상 살 때 진리를 많이 안다 자랑하면서도 정작 행하지는 않았던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가면 가지고 있던 진리를 모두 빼앗기고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열심히 진리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기왕에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 말고도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얻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는 사람은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기고, 상대적으로 진리가 많은 사람은 넘치도록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진리를 안다고 모두 구원받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종들에게 은화 한 므나씩을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새 교회인이라면 누구나 진리에 따라 살기를 원하고 매일 같이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영적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꼭 열 므나를 남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닿는 대로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고, 대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한 므나를 여러 배로 만들어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도 구원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님이 워낙 엄격하셔서 인위적인 어떤 선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고,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떤 생각일까요? 본문 14절에는 그것에 대해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님을, 또는 진리를 왕으로 섬기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둔 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자기 생각이 충돌할 때, 언제나 진리는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진리와 선이 늘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는지, 아니면 주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아닌지 항상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아멘

 

2022-04-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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