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6
‘여섯째날’(sixthday)이된영적인간이천적인간이되기시작할때,곧여기서처음다루고있는이상태가‘안식일의저녁’(eveofthesabbath)입니다.이것은유대교회에서저녁부터안식일을거룩하게지키는것으로표상되었습니다.천적인간은‘아침’(morning)이며,이에대해서는곧이어말할것입니다. When the spiritual man,who has become the“sixthday,”is beginning to be celestial,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it is the“eveofthesabbath,”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morning”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준비일이요안식일이거의되었더라(눅23:54)
해설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할때’, 그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 자체는 ‘아침’이라고 예고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전환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앞 AC.83에서도 이 전환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여섯째 날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그때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것이되기시작한다’고 했습니다. AC.86의 표현도 똑같이 ‘천적인간이되기시작할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저녁’은 바로 이 변화가 시작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저녁’을 곧바로 어둠이나 타락이나 악의 상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1해설에서 저녁과 아침이 여러 상태의 변화를 나타냈더라도, AC.86은 이번 저녁의 의미를 직접 규정합니다. 그것은 이미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번 문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전환의 저녁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어떤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뜻을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맥과 상태의 연속성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86에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안식일의저녁’이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밝혀 줍니다.
이 ‘저녁’은 아직 완전한 ‘아침’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여섯째 날에 도달했고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었지만,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천적 질서가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녁은 이전 상태의 끝과 다음 상태의 시작이 맞닿는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시간적으로 정확한 중간 단계처럼 지나치게 도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몇 시간이나 몇 단계 동안 ‘저녁상태’에 있다가 어느 순간 ‘아침상태’로 넘어간다는 심리적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씀의 표현을 통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변화하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안식일을거룩하게지키는것’으로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하루 계산법 자체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유대교회의 안식일 준수라는 외적 제도가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저녁은 천적 안식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AC.85에서 말한 유대교회의 표상적 성격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섯 날의 수고와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싸움과 평화를 표상했듯,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도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안식일 규례에도 하나의 영적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안식이 갑자기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싸움과 수고를 지나 안식으로 들어가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의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깊어지기 시작할 때 이미 안식일의 ‘저녁’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86은 AC.84-85의 안식 개념을 조금 더 세밀하게 해 줍니다.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친 상태라고 했고, AC.85에서는 그 안식이 주님의 뜻이 사람 자신의 뜻이 된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86은 그런 상태가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되기시작하는’ 전환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실제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진리가 가르치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양심 때문에 악과 싸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듭남을 이루어 가시는 동안, 이전에는 의무로 행하던 선을 점차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행하게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변화는 이런 식으로 깊어집니다.
그 변화의 시작을 AC.86의 표현을 빌리면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천적 인간의 충만한 ‘아침’은 아니지만, 이미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싸움에서 안식으로, 신앙이 앞서는 질서에서 사랑이 주된 질서로, 양심의 결박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의 자유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적용은 어디까지나 AC.81-86의 흐름을 종합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AC.86자체는 매우 간결하게 ‘영적인간이천적인간이되기시작하는상태=안식일의저녁’, ‘천적인간=아침’이라는 두 관계만을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지나치게 많은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저녁’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특정 관계, 신앙의 특정 단계, proprium의 특정 상태 등으로 더 세분하여 확정할 근거는 이번 문장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설명만 붙드는 편이 안전합니다. 저녁은 천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상태이고, 아침은 천적 인간입니다.
마지막 문장 ‘천적인간은아침이며,이에대해서는곧이어말할것입니다’는 다음 해설을 위한 예고입니다. 그러므로 AC.86자체에서 ‘아침’의 모든 의미를 미리 풀 필요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개요와 상세 해설의 질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AC.86의 짧은 문장 안에는 앞 번호들의 흐름이 매우 압축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날은 영적 인간이고,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안식일의 저녁이며, 완성된 천적 인간은 아침입니다.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변화가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변화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녁에서아침으로’라는 말씀이 단순한 자연적 시간의 반복을 넘어 인간의 영적 상태의 변화를 담을 수 있음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문맥마다 본문이 주는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입니다.
결국 AC.86의 ‘안식일의저녁’은 아직 싸움 속에 머무르는 여섯째 날과 이미 완성된 천적 안식의 아침 사이에 놓인 살아 있는 전환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으로 깊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완성될 때 천적 인간은 ‘아침’이 됩니다. (AC.86)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5
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이며,따라서일곱째날이거룩하게구별되어안식일이라불렸다는것은지금까지밝혀지지않았던아르카나입니다.이는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입니다.이러한무지로인해사람들은영적인간과천적인간사이에큰차이가있음에도불구하고,둘을같은것으로여겨왔습니다.그차이는AC.81에서볼수있습니다.일곱째날에관하여,그리고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또는‘안식일’(sabbath)이라는것에관하여말하자면,이는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라는사실로부터분명합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는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seventhday,”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and called the sabbath,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as may be seen in n.81.As regards the seventh day,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seventhday”or“sabbath,”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and therefore he says:
이말씀은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심을함축합니다.하늘과땅에있는주님의나라는주님으로말미암아안식일,곧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불립니다.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and the sabbath itself.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from him,a sabbath,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다루고있는태고교회는그뒤를이은모든교회보다더욱주님의안식일이었습니다.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며,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입니다.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입니다.그에앞서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있습니다.이러한것들은유대교회에서수고하는날들과안식일인일곱째날로표상되었습니다.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같은것이법궤가나아갈때와쉴때에도표상되었습니다.광야에서법궤가나아간것은싸움과시험을표상하였고,법궤가쉰것은평화의상태를표상하였습니다.그러므로법궤가떠날때모세가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here treated of,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and by the seventh day,which was the sabbath;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and when it rested,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and therefore,when it set forward,Moses said:
천적인간의본성은이와같아서그는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desire)이됩니다.이리하여그는내적인평화와행복을누리는데,이것이여기서는‘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으로표현되며,동시에외적인평온과기쁨을누리는데,이것은‘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으로의미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which is his“desire.”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which is signified by “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
해설
AC.85는 앞의 AC.84에서 제시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아르카나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부터 말합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AC.81을 가리킵니다.
이 연결은 중요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는 사람이며,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고 악과 거짓을 멸시하는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AC.83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85는 이 모든 설명을 ‘안식일’이라는 하나의 표상 안에 모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을 안식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것은 그 사람에게서 독립적으로 어떤 높은 영적 상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의 근원이신 주님의 형상이 그 사람 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막2:28의 ‘인자는안식일에도주인이니라’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그자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참된 인간성의 원형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이 ‘사람’이며 ‘안식일’인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곧 ‘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의 의미가 단순히 노동을 멈추는 것에서 크게 확장됩니다. 안식은 주님의 나라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평화입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한 휴식의 표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다음에는 이 안식의 원리가 교회와 개인에게 차례로 적용됩니다. 먼저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가 그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주님의 안식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의미는 태고교회라는 과거의 한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의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82의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82에서는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그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도 동일하게 안식일이라는 표상이 주님에게서 주님의 나라로, 교회로, 그리고 한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천적 질서가 이루어질 때 그 사람도 안식일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곧 주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이라고 분명히 제한합니다. 주님은 안식일 그 자체이시고, 거듭난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원형과 형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식에 앞서는 것이 ‘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입니다. 이것은 AC.84에서 말한 여섯 날 동안의 ‘주님의일’과 연결됩니다. 거듭남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악과 거짓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선과 진리의 질서로 이끄시는 과정은 싸움과 시험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싸움은 안식을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영적 질서가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매우 넓은 원리로 밝힙니다. ‘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제도는 외적인 생활 규정에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안식을 표상했습니다.
이어지는 법궤의 예도 같은 구조를 보여 줍니다. 법궤가 광야에서 나아가는 것은 싸움과 시험을 표상하고, 법궤가 쉬는 것은 평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법궤가 떠날 때 모세는 ‘여호와여일어나사주의대적들을흩으시고’라고 말하고, 법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이스라엘종족들에게로돌아오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아감’과 ‘쉼’의 대비입니다. 나아감에는 대적과 싸움이 있고, 쉼에는 주님의 임재와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관계를 또 다른 성경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광야의 여정이 싸움과 시험이라면 법궤의 쉼은 그 싸움 뒤에 오는 평화입니다.
민10:33에서 법궤가 ‘그들의쉴곳을찾기위하여’ 앞서 갔다는 표현도 이 때문에 인용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을 끝없는 싸움 속에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며, 그 목적은 주님 안에서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AC.85의 가장 깊은 설명은 [3]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13-14를 인용하여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사야는 안식일에 ‘네길로행하지아니하며네오락을구하지아니하며’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AC.85에서 안식의 가장 중요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근원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자기중심적 뜻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주님의 뜻이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되는 명령으로 남지 않고 ‘그의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1의 천적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며,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도록 외부에서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과 그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가장 깊은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강제와 안식의 차이입니다. 외부에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면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사랑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신도 원하게 되면, 순종과 자유가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는다’는 말을 인간의 의지 자체가 제거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이 의지가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가 주님의 선과 결합되어 새롭게 질서를 얻습니다. 본문도 주님의 뜻이 ‘그의뜻’이 된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뜻에서 주님과 결합된 뜻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AC.79-80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되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고, AC.80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5에서는 행동과 의지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을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AC.79의 ‘소유’, AC.80의 ‘앎’, AC.85의 ‘뜻과행동’은 서로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지 않으며, 자기 뜻을 궁극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의 생명은 점점 더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 안에 놓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의 ‘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을 내적인 평화와 행복으로, ‘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을 외적인 평온과 기쁨으로 풀이합니다. 즉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는 천적 상태에는 내적 평화와 외적 평온이 함께 따릅니다.
이것은 평화를 단순히 외부 환경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먼저 내적인 것입니다.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서로 충돌하고, 악과 선이 계속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상태가 그쳤기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질서가 외적인 삶에도 평온과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천적 인간에게 자연계의 고난이나 불편, 질병이나 손실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85가 말하는 안식과 평화는 우선 영적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외적 형편이 언제나 평탄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입니다.
AC.85를 이렇게 읽으면 안식일의 속뜻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하지않는날’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여섯 날 동안에는 싸움과 수고가 있지만 일곱째 날에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싸움이 안식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외적 준수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자체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도록 제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표상이 가리키는 내적 실재입니다. 외적인 안식일은 인간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내적 안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번 번호는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는 데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안식은 인간 안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심리적 평온이 아닙니다. 주님이 안식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안식이며, 주님의 형상이 된 천적 인간도 안식일이 됩니다.
따라서 안식의 중심은 결국 주님입니다. 주님 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과 AC.85의 안식은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얻는 평온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뜻이 물러가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의 뜻이 됨으로써 오는 평화입니다.
이 점에서 AC.85는 안식과 자유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 뜻을 포기하면 자유를 잃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적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뜻과 악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인간은 실제로 종이지만, 주님의 선을 사랑하여 그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AC.81에서 시작된 ‘죽은사람,영적인간,천적인간’의 차이가 여기까지 오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죽은 사람은 외적인 결박에 의해 억제되고, 영적 인간은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며,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여 자유롭게 행합니다. AC.85는 그 천적 자유의 내면을 ‘주님의선하신뜻이그의뜻이되는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안식은 단순히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생명의 상태입니다. 싸움이 사라진 자리를 공백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와 행복이 채웁니다.
결국 AC.85의 흐름은 하나입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입니다. 주님의 천적 교회도 안식일이며, 거듭난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도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이 됩니다.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과 시험이 있지만,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될 때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립니다.
따라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달력의 일곱째 날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거듭남의 일을 이루셔서, 사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뜻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안식이며,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주님의 안식일입니다. (AC.85)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창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절,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창2 여는 글들 및 개요 글들 포함, 67번부터 다루겠습니다. 여기 ‘여는 글들’은 아래 71번 글을 참고하세요.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2:1-3)
이 본문을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의 상태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최근 개신교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 오랜만에 참 익숙하지만, 그러나 무척 낯설었던 시간을 가졌는데요, 참 익숙했던 건, 제가 개신교에서 50대 후반까지 머물렀었기 때문이고, 또 무척 낯설었던 건 예배와 설교 전반에 아르카나, 즉 ‘속의 언어’가 아닌, 세상 언어, 곧 ‘겉의 언어’가 많이 섞인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아르카나를 처음 접하던 초창기처럼 무슨 반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요, 스베덴보리가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경인 루터교회를 출석했던 거나 주님이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을 찾으셨던 것처럼, 저 역시 전심으로 그 예배에 참여, 함께 손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두 세계의 언어가 섞인 예배였지만, 속으로 실시간 통역을 하면서 ‘아, 이걸 이렇게, 저걸 저렇게 표현한 거구나!’ 하면서 드렸습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 역시 우리의 일상 일거수일투족 중 그렇겠구나 싶었습니다.
이 아르카나 순도 8, 90%의 예배는 지상에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100%는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어쩌면 주님이 훗날을 위해 미리 우리 교회를 통해 이것저것 테스트를 진행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겉’과 ‘속’은 같이 갑니다. ‘속’은 ‘겉’이라는 그릇에 담기며, ‘겉’이라는 옷을 입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동안 자연적 인간과 영적, 천적 인간 역시 같이 갑니다. 우리의 영적,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자연적 인간’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쉽진 않으시겠지만, 항상 이 ‘균형’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