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92
싸움이 그칠 때, 곧 탐욕과 거짓으로 인한 불안이 그칠 때 겉 사람에게 임하는 평화의 평온이 어떤 것인지는 평화의 상태를 아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너무나 기쁨에 넘쳐서 모든 기쁨에 대한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때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납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AC.92는 앞의 AC.90-91에서 말한 ‘평화의 평온’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합니다. AC.91에서는 영적 인간일 때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른다고 했습니다. AC.92는 이제 그 평온이 단순히 갈등이나 시험이 사라진 소극적인 정적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탐욕과 거짓으로 인한 불안’이라고 합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의 탐욕과 거짓에 부딪힐 때 인간 안에 싸움이 생깁니다. 따라서 싸움이 그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더 이상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탐욕과 거짓이 지배력을 잃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질서에 순종하게 됨으로써, 이전에 인간을 흔들던 영적 불안이 그치는 것입니다. AC.91의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설명이 AC.92에서는 ‘탐욕과 거짓으로 인한 불안이 그친다’는 말로 더욱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평화의 상태가 얼마나 기쁜지는 실제로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기쁨은 ‘모든 기쁨에 대한 관념을 뛰어넘는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즐거움의 양을 극대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즐거움은 흔히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서 생기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회복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인간의 외적인 삶에까지 흘러드는 데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 환경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서 생기는 기쁨보다 훨씬 내적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없듯이, 천적 인간의 평온도 시험과 갈등이 없어진 빈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싸움이 있던 자리를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 채웁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겉 사람에게까지 흘러들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AC.91에서 비와 안개가 마치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한 까닭도 여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단순한 고요함이 아니라 생명이며, 그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시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마지막 문장에 나타납니다.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그때 태어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인간의 자기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던 것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가 겉 사람에게 생명을 흘려보내고, 그 생명으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의 진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교리적 지식이 아니며, 사랑의 선 역시 외적으로 수행한 선행의 목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진리와 선입니다.
이것은 AC.91의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평화에서 나오는 평온이 천적 영적 기원을 가진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산출한다고 했고, 여기서는 같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상태에서는 이성, 기억지식,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새로운 질서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느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할 때와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생명을 받아 그 안에서 사용될 때, 같은 진리와 지식도 전혀 다른 상태에 놓입니다.
결국 AC.92가 말하는 ‘평화의 평온’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생명을 낳는 상태입니다. 싸움이 그쳤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없어졌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흘러들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속 사람 안에만 머물지 않고 겉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거기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을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AC.90의 ‘비’, AC.91의 ‘안개와 평온’, AC.92의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주님의 안식은 정지나 무활동이 아니라, 싸움이 그친 인간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더욱 평화롭게 흘러들어 선과 진리를 낳는 상태입니다. (AC.92)
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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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기 시작할 때, 싸움은 그치고 평온이 온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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