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위에 기름을 붓고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고운 가루 움큼과 기름과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4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5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6조각으로 나누고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7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8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9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1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너는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소제를 삼되 15 위에 기름을 붓고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16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2)

 

해설

레위기 1장이 피 흘리는 동물의 번제였다면 레위기 2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피도 없고 짐승의 죽음도 없습니다. 대신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등장하고, 화덕과 철판과 냄비에서 음식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두 장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1의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보여 주었다면, 2의 소제는 그 사랑이 진리와 결합하여 인간의 삶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예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제는 먹을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단순한 곡물 제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주님께 드려지는 삶의 예배를 표상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전 가운데 하나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18: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소제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고 유향을 더하여 드리는 제사였다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레위기 2장 전체가 소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다루는 장이라고 직접 언급합니다. 따라서 레2를 읽을 때 우리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각각 따로 떨어진 상징으로 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소제가 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재료는 고운 가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AC.9995, 29:2). 그냥 진리가 아니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에서 비롯되며, 진리는 선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머릿속에 저장된 교리 지식이나 성경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그 선을 표현하고 섬기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고운 가루 위에 반드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기름은 사랑의 선,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AC.10136(29:40)은 고운 가루와 기름이 결합된 것을 천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진리가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여기에 다시 유향이 놓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5:8)은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진정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유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 곧 체어리티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레2 첫 두 절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갑니다. 소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예배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소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운 가루에는 기름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에게 무정하다면 아직 소제의 질서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에서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 사랑으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그 가운데 고운 가루 움큼과 기름과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여기서 움큼도 의미 없는 양의 규정이 아닙니다. AC.2177은 손이나 손바닥이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움큼은 힘을 의미하며, 소제에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 또는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소제의 일부를 한 움큼 취하여 불사르는 것은 인간이 가진 선과 진리가 사랑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본문은 기념물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잊으셨다가 그 연기를 맡고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제 전체 가운데 주님께 드려지는 부분이 제단의 불 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불은 사랑을, 향기로운 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제 역시 결국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과 결합하며,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고, 다시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소제 전체를 불사르지는 않습니다.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1의 번제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번제는 전부를 불살랐지만 소제는 일부만 제단 위에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습니다. AC.2177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응답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먹는 입니다.

 

그러므로 소제에는 주님께 드림인간이 받아 삶으로 삼음이라는 두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면서 선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삶으로 받아들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이 순환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4절부터는 소제를 만드는 방법이 다양해집니다. 화덕에 굽기도 하고, 철판에 부치기도 하며, 냄비에서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기름을 섞고 어떤 것은 기름을 바르며, 어떤 것은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서로 다른 소제의 조리법까지도 각각 천국의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실제로 AC.10137(29:40)은 화덕, 철판, 냄비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소제를 직접 언급하며, 소제의 모든 세부 규정 안에 신적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된 직접 원전만으로 화덕·철판·냄비 각각을 레2의 문맥에서 세밀하게 구별하여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와 준비 방식은 달라도 고운 가루와 기름이라는 중심 구조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거듭남의 삶이 똑같은 외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각 사람의 환경과 쓰임, 성품과 삶의 형편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 안에서 변하지 않는 중심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어떤 모습의 소제든 고운 가루와 기름이 있어야 하듯, 참된 영적 삶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그 선을 표현하는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11절에서는 매우 강한 금지 명령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누룩뿐 아니라 꿀까지 금지한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누룩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꿀은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거의 직접 해설합니다. AC.10137은 소제에 누룩과 꿀을 넣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 꿀은 세상 사랑의 즐거움이 많이 섞여 있는 외적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천국의 선과 진리에 섞이면 그것들을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꿀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꿀이 자연적 선의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거룩한 예배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이유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인정받는 즐거움과 성공의 만족, 자기 의가 주는 기쁨, 세상적인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선행과 예배처럼 보여도 그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룩과 꿀은 금하면서 모든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레2의 가장 아름다운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AC.9207(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예물에 소금을 넣는 것은 모든 예배 안에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약의 소금이라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레2 전체의 중심을 다시 밝혀 줍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참된 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참된 선은 진리를 통해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를 분별하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둘이 서로를 향하는 갈망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예배의 모든 것 안에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려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부터는 이삭의 소제가 등장합니다. 첫 이삭을 볶고 찧어서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드립니다. 말씀에서 처음 익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과 진리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와 깊이 관계합니다. AC.9300(23:19)은 첫 열매를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주님께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첫 이삭을 드리는 행위에는 이것은 내가 만들어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것입니다라는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소제는 인간의 공로와 정반대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내가 알았다고 생각하기 쉽고, 선한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진리도, 그 선을 행할 능력도, 그 선을 사랑하게 된 마음도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제 레위기 2장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매우 아름다운 흐름이 나타납니다. 고운 가루가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집니다. 사랑의 선입니다. 유향이 놓입니다.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 곧 체어리티입니다. 한 움큼이 사랑의 불 위에 올라가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어 인간의 삶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악에서 나오는 거짓인 누룩은 제거되고,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인 꿀도 제단의 불에 섞이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것에 소금이 들어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언약의 소금입니다. 그리고 첫 이삭을 드리면서 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레1과 레2는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1나의 전부가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드려지는가?를 묻는다면, 2는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사랑의 기름과 섞여 있는가?’,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유향으로 나타나는가?’, ‘ 예배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누룩과 꿀이 섞여 있지 않은가?’, ‘ 안의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갈망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소제는 피 없는 제사이지만 결코 가벼운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매일의 삶에 매우 가까운 제사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 품는 사랑, 이웃에게 행하는 선, 일상의 수고와 쓰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누구의 것으로 인정하는가가 소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운 가루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실제 삶이 되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의 소제가 되고, 삶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SWC.2 해설)

 

심화

1.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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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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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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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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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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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 심화

3.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의 번제에서도 나오고 양이나 염소의 번제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제물을 어차피 모두 불태울 것이라면 왜 굳이 내장과 정강이를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요? 위생을 위한 절차라고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가 이 부분에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49(29:17)는 ‘내장을 씻는 ’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속 사람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자연적 삶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낮은 것들은 자연계와 감각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자극과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감각의 즐거움과 오류가 쉽게 들어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어 AC.10050(29:17)은 ‘정강이’를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생각이나 종교적 감정만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에 있는 자연적인 삶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변화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기도할 때 감동을 받으면 자신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장과 정강이까지 씻으라’고 합니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바깥의 것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과 정강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 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 돈을 사용하는 방식, 가족에게 보이는 태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 오래 굳어진 습관, 자기 이익이 걸렸을 때 내리는 선택,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는 마음, 몸의 감각적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생활과 별개라고 생각하기 쉬운 바로 이런 영역이 자연적 인간의 실제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물로’ 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씻는 의식이 내적 정결을 표상하며, 물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AC.9088, 40:31).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삶을 씻는 물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되는 교리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비추어 ‘이것은 악이다’, ‘이것은 피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이다’라고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해 씻긴다는 것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이라고 알게 된 것을 실제로 피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임을 아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원한을 내려놓기 위해 싸우는 것도 다릅니다.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것과 불편한 이웃을 실제로 선하게 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에 내려와 행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씻음’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장과 정강이를 없애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몸, 감각, 일, 재산, 인간관계, 취미와 일상생활 자체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연적 인간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정결하게 하셔서 속 사람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씻긴 내장과 정강이는 마침내 다른 부분들과 함께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이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가장 낮고 바깥에 있어서 더럽혀지기 쉬웠던 것들이 진리의 물로 씻긴 후에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번제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신앙과 일상의 거리는 오히려 좁아집니다. 교회에 있을 때의 나와 집에 있을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고, 기도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며, 말씀을 읽을 때의 나와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속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가장 바깥의 말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으라’는 짧은 규례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낮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진리로 씻어 당신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부분까지 사랑의 불 위에 놓일 때 비로소 번제는 ‘전부’가 됩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C.1 심화 3)

 

 

 

SW.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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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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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린다는 모습이 주님의 죽음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구약의 희생제사를 ‘죄인이 받아야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사건의 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번제는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도 희생제사와 번제의 최고 의미가 주님께 관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 예수 그리스도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매우 깊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가?’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776(22:2)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해설하면서 ‘번제로 드리는 ’이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입니다.

 

따라서 번제의 최고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성부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시고 성자께서 죄인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모든 세력과 싸우시고 시험을 이기시며,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과 영화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벌대속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성부는 진노하여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고 성자는 그 진노를 대신 받아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분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붙잡고 있던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신적 위격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의 지불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감당하신 마지막 시험과 승리의 절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십자가의 관계도 훨씬 깊어집니다. 번제물 전체가 불 위에 드려지는 모습은 단지 ‘누군가 대신 죽는다’는 한 장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에 결합시키시는 영화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번제와 희생제사의 세세한 의식들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AC.10057, 29: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영화와 우리의 거듭남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신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납니다.

 

그래서 희생제사와 번제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점차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셨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시험을 통과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 자체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다만 그 ‘우리를 위하여’를 ‘우리가 받아야 형벌의 정확한 양을 대신 받으셨다’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옥과 싸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험을 이기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를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희생당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화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서도 거듭남이라는 또 하나의 번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하셨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번제와 십자가를 함께 바라볼 때 드러나는 더 깊은 연결입니다. (SWC.1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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