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곧이어 등장하는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후의 AC를 읽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악과 거짓만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인 계열은 이미 라멕에서 끝난  같은데   뒤에 유용해 보이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는가?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소멸되었다는 것과  계열에서 모든 외적인 것까지 즉시 쓸모없어졌다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 예배와 교리의 외적 형식 가운데 후대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와 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후대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는 AC에서는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여러 외적 형식과 기능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용한 외적인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가인으로 시작된 교회적 상태가 다시 본래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의 내적 생명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 이후에 유용한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내적인 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뒤에도 외적인 지식과 기술, 형식은 한동안 남을 수 있고 오히려 크게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올바른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종말도 모든 외적 종교 활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생명인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더 이상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형식과 교리적 지식과 여러 유용한 외적 요소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4와 창5를 읽을 때에도 가인 계열은 악한 사람들,  계열은 선한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두 혈통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관심은 각각의 계보가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와 그 변화에 있습니다. 5의 계보 역시 언제까지나 동일하게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는 결국 쇠퇴하고 종말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홍수 역시 단순히 악한 가인 혈통은 멸망하고 선한  혈통은 살아남았다는 구조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맞지 않습니다. 노아는 단순한  계열의 착한 생존자라기보다 새로운 교회적 상태, 곧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거듭나는 영적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후속 AC 전체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깊이 부패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해와 진리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며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에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하시고, 후대의 교회와 인간 사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쓰임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따라서 이 심화가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는 종말 가운데서의 보존입니다. 내적 생명이 쇠퇴해도 모든 외적인 유용성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쇠퇴한 것 가운데서조차 후대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건져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만나면서 우리는 가인 계열이 다시 살아났구나라고 보기보다,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종말을 향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쓰임을 준비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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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습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과 두 번호 뒤인 AC.332에서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결국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가인의 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장하신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0에서 보존된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상태 자체가 아닙니다.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는 데 필요할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따라서 보존 강제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강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그 진리를 받아들여 선과 결합할 수도 있고, 계속 분리하고 왜곡하여 마침내 그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그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입니다. 가인에게는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지만, 그 상태가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여러 형태로 변질되면서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AC.330 AC.332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시지만 인간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수단은 마련하시되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라멕의 상태를 인류 전체의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AC.332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종말입니다. 라멕 안에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후속 AC 전체를 보면 주님의 섭리는 훨씬 더 긴 시야에서 움직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마침내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 새로운 영적 교회에서는 이전의 천적 인간과 달리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더 넓은 문맥에서 보면 AC.330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이라는 말은 가인 계열 하나의 미래만을 말하는 것으로 좁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의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한 특정 계열이 그 가능성을 잃어버려도 주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질서가 함께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가인의  라멕에서 신앙이 남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여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섭리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그 보존된 것을 끝까지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교회적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구원의 길 자체는 계속 보존하십니다. 어떤 교회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멕은 주님의 계획의 실패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 주어진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 거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반대로 이후 노아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은 인간의 실패보다 더 넓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한 계열에서 신앙마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갈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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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무엇을 믿는가 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 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 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 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 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 신앙을 버린 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 나는 신앙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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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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