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교리의 왜곡과,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가지 주의해야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또한 교회의 이단들과 분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없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 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 그들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하여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AC.200, 203) 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 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 인간은 이와 같으며, 시편에서도 표상을 통하여 이와 같이 묘사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을 으로, 천적 인간을 왕의 아들 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sun) 사랑을, (moon) 신앙을, 산들(mountains) 작은 산들(hills) 태고교회를, 대대로(generation of generations)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until there be no moon)라고 것은 신앙이 사랑이 것이기 때문입니다. (30:26에서 말한 것도 참조) By thesunis signified love; by themoon,” faith; bymountainsandhills,” the most ancient church; bygeneration of generations,”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until there be no moonis said because faith shall be love. (See also what is said in Isaiah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3] 태고교회와 교리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이로부터 태고 시대에 사람들이 신앙을 따로 고백하여 그것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교리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를 왜곡한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거나 신앙만을 따로 고백한 사람들을 당시에 가인(Cain)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 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 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참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그들은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 따로 말하고 고백하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 신앙의 하나 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를 사랑으로, ‘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작은 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이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30:26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 에노스는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 먼저 오는 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 사랑이 생긴 다음에야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 믿었는가?만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신앙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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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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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2:1, 3, 5, 7 인용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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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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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심화

1.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another man [homo]’,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는 새로운 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  하나의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 초기의 속뜻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의 외적 형체를 가진 존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며,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은 영적인 의미에서 더욱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표현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와 에노스의 상태가 대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그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지면서 교회적 생명도 무너졌고, 그 분리는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 자체의 변질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이며, 이제 AC.336에서는 그렇게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에노스를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면서 하나의 교회적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만 따로 존재하거나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온전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에노스라는 개인에게 붙여진 별명이 아닙니다. AC.336은 바로 이어서 이것이  교회의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에노스는 한 개인의 이름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그 상태를 가진 교회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심으로써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됨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앙과 체어리티를 만들어 결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앙도 주님께서 주셨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께서 심으십니다. 인간이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영적 존엄과 함께 인간의 전적인 의존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proprium으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사람다운 생명을 갖게 됩니다. 교회 역시 조직이나 이름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참된 교회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신앙에 관한 교리와 예배가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점차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에노스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고, 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  하나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교회의 인간다운 형상을 이루는 데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  하나의 사람을 최초의 태고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의 회복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에노스 역시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 앞선 상태와 동일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another man’,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성격과 변화는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의 관계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옮겨 놓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행하다가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식의 단계는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AC.336의 에노스는 아직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이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신앙, 곧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아는 퍼셉션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36에서는 우선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고,  체어리티와 교회가 에노스,   하나의 사람이라 불렸다는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원리를 우리의 거듭남에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단계가 지나면 에노스 단계가 온다는 식의 고정된 시간표로 적용하기보다, 참된 인간의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나타난다는 영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교리를 정확히 가지고 있고 많은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람이라 불릴 만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로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들의 삶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고 해서 진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올바른 질서가 아닙니다. 에노스는 셋을 없앤 뒤 나타난 것이 아니라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제거하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 안에서 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 AC.336  하나의 사람이라는 짧은 표현은 참된 인간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참된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자기 선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둘이 결합된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공동체 안에 이루어질 때 그 교회 역시 하나의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셋과 에노스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계십니다. 새로운 신앙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바로 그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에노스’,   하나의 사람입니다.

 

 

 

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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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336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교회의 이름입니다. (26)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한 문장처럼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입니다. 이제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은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이며, 동시에 그 상태로 형성된 교회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바로 앞 AC.335에서도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의 질서와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셋, 아벨과 에노스의 대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결국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 역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셋의 신앙에서는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대조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으로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사실상 퍼셉션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36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먼저 진리를 배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후대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AC.336이 직접 말하는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그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했고, 그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태고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another man, homo)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교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고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 그 상태가 참된 의미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를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짐으로써 다시 교회라 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졌지만, 셋과 에노스에서는 그 둘이 다시 교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질서가 마련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에노스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이 됩니다.

 

다만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을 곧바로 최초의 태고교회와 똑같은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다시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 상태가 최초의 태고교회와 어느 점에서 같고 어느 점에서 달랐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336 한 문장만으로 그 차이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블로그 해설에는 최초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가졌고, 에노스 교회는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대비가 들어 있습니다. 큰 방향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것을 최초의 퍼셉션은 이미 사라졌고 이제 신앙을 먼저 배우는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하면 너무 앞서갑니다. 이어지는 AC.337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참된 상태를 사랑에서 오는 퍼셉션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초 상태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정도로 두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AC.336의 마지막 표현인 이것이 교회의 이름입니다는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셋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이름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 하나의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에서 인물들의 이름은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창4:25-26은 창4 전체의 긴 흐름을 매우 압축해서 마무리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은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그 분리는 여러 파생 상태를 거쳐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셋과 에노스는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가 단순히 체어리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심어진 하나의 교회적 상태 전체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참된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룰 때 교회가 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 , 에노스의 역사적 표상과 개인의 거듭남을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살아 있게 하시는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교회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때 에노스’, 하나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AC.336의 짧은 말은 참된 교회와 참된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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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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