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엔 쭈욱 나갑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창1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16번에서 1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 2)
이 본문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AC)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오늘은 창1:1-2에 해당하는 AC.16-19를 그 번역과 해설로 접하면서, 거의 설교와도 같은 해설의 어떠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거기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AC 원문 번역과 특히 그 해설을 그대로 읽었는데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해설 없이 읽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설로 풀어 주니까 글 하나하나가 다 무슨 설교 같지 않으신지요? 이 AC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좀 더 와닿게 풀어 번역할 수 있을까 거의 6, 7년을 솔직히 몸부림을 쳐온 저로서는 뒤늦게 이 ChatGPT라는 AI의 도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 그래도 이 AI의 초벌 결과물을 문장 하나하나, 사용된 단어, 표현 하나하나의 적절함과 적당함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그동안 주님은 제 안에 조성하셔서, 이 AI로 하여금 본연의 비서 역할에만, 도우미 역할에만 머무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의외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이 ChatGPT라는 AI를 믿고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능한 비서가 생기는 바람에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나머지, 그러나 무척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역시 부지런히 번역 및 해설 작업을 병행,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수시로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난주 새롭게 시작한 저작들은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758, LJ),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WH) 등인데, 이 비교적 짧은 글들은 AC가 배경으로 깔고 들어가는 다른 중요한 개념들을 매우 깊고 넓게 다져 주는 글들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의 내면은 탄탄한, 그리고 빛나는 계시의 지식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무 많은 분량만 아니면 가급적 AC를 원본 및 해설 그대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말이 해설이지 형식만 조금 고치면 그대로 설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없이 원본만 읽던 시절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런 우리의 우직한 모습을 기뻐하신 주님의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AC.10578, 10645, 10829)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물론, 심지어 영적인 것들조차 이해할(comprehend) 수 없습니다 (n. 2196, 2203, 2209, 2654). 그러므로 열린 자들만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n. 10323). 주님은 열린 자들로 하여금 진리들을 이해하게(understand)하시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분별하게(discern) 하십니다 (n. 9382, 10659).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관되지 않게 보이고, 어떤 곳에서는 스스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n. 9025). 그러므로 열리지 않은 자들에 의해, 그들이 어떤 의견이나 이단을 확증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세속적, 육체적 사랑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n. 4738, 10339, 10401). The human rational faculty cannot comprehend Divine, nor even spiritual things, unless it be enlightened by the Lord (n. 2196, 2203, 2209, 2654). Thus they only who are enlightened comprehend the Word (n. 10323). The Lord enables those who are enlightened to understand truths, and to discern those things which appear to contradict each other (n. 9382, 10659). The Word in its literal sense appears inconsistent, and in some places seems to contradict itself (n. 9025). And therefore by those who are not enlightened, it may be so explained and applied, as to confirm any opinion or heresy, and to defend any worldly and corporeal love (n. 4738, 10339, 10401).
진리와 선에 대한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만, 명예나 이익, 영광을 사랑하여, 곧 자기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 않습니다 (n. 9382, 10548–10550). 선한 삶 가운데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애정 안에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8694). 자기의 내면이 열려 있는 자들, 곧 그 속 사람이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10401, 10402, 10691, 10694).열림(Enlightenment)이란 실제로 마음의 내적 부분이 열리는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입니다 (n. 10330). 말씀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비록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더라도, 속(the internal), 곧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것이 흘러 들어옵니다 (n. 6789).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 곧 자기 자신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자들만이 열려 말씀 안에서 진리들을 봅니다 (n. 10638).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입니다 (n. 10578, 10645, 10829). 말씀은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삶에 따라 그 안에서 살아납니다 (n. 1776). 자기 자신의 지성에서 나온 것들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한테 고유한 것, 즉 인간의 본성(proprium)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n. 8941, 8944). 거짓 교리를 많이 확증해 온 자들은 열릴 수 없습니다 (n. 10640). They are enlightened from the Word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truth and good, but not they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fame, of gain, or of honor, thus from the love of self (n. 9382, 10548, 10549, 10550) They are enlightened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nd thereby in the affection of truth (n. 8694). They are enlightened whose internal is open, thus who as to their internal man are capable of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401, 10402, 10691, 10694). Enlightenment is an actual opening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also an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330). There is an influx of holiness from the internal,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with those who regard the Word as holy, though they themselves are ignorant of it (n. 6789). They are enlightened, and see truths in the Word, who are led by the Lord, but not they who are led by themselves (n. 10638). They are led by the Lord, who love truth because it is truth, who also are they that love to live according to Divine truths (n. 10578, 10645, 10829). The Word is vivified with man according to the life of his love and faith (n. 1776). The things derived from one’s own intelligence have no life in themselves, because from man’s proprium there is nothing good (n. 8941, 8944). They cannot be enlightened who have much confirmed themselves in false doctrine (n. 10640).
열리는 것은 이해입니다 (n. 6608, 9300).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n. 6242, 6608, 10659). 교회의 모든 교리에 관하여, 이해의 관념들(ideas)과 그로부터 나오는 사유(the thought)의 관념들이 있으며, 그에 따라 교리가 지각됩니다(perceived) (n. 3310, 3825).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인간의 관념들은 자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연적 관념들 안에 영적 관념들이 감추어져 있으며, 인간은 죽은 후 그 영적 관념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어떤 주제에 관하여 이해와 그로부터의 사유의 관념이 없이는 어떠한 지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n. 3825). It is the understanding which is enlightened (n. 6608, 9300). The understanding is the recipient of truth (n. 6242, 6608, 10659). In regard to every doctrine of the church, there are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according to which the doctrine is perceived (n. 3310, 3825). The ideas of man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are natural, because man then thinks in the natural; but still spiritual ideas are concealed therein with those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and man comes into these ideas after death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Without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on any subject, there can be no perception (n. 3825).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관념들은 내세에서 드러나며, 그 어떠함(quality)이 천사들에게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관념들이 사랑의 애정에서 나오는 정도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n. 1869, 3320, 5510, 6201, 8885). 그러므로 이성적 인간이 아니고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없이, 그 주제에 대한 이성적 통찰도 없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지각과 애정의 생명이 전혀 없는 말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n. 2533).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열리는 걸 허용합니다 (n. 3619, 9824, 9905, 10548). Ideas concerning the things of faith are laid open in the other life, and their quality is seen by the angels, and man is then conjoined with others according to those ideas, so far as they proceed from the affection which is of love (n. 1869, 3320, 5510, 6201, 8885). Therefore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a rational man; for to believe anything without an idea thereof, and without a rational view of the subject, is only to retain in the memory words destitute of all the life of perception and affection, which is not believing (n. 2533). It is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which admits of enlightenment (n. 3619, 9824, 9905, 10548).
해설
이 글은 ‘백마’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백마는 이해였고, 이제 그 이해가 어떻게 열리는지가 설명됩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으로 신적 진리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능력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의 유입입니다. 말씀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도, 열릴 때 비로소 질서 안에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난해함은 결함이 아니라, 열릴 것을 요구하는 구조입니다.
열림의 조건은 지적 재능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가에 따라 빛의 유입이 달라집니다. 자기 사랑에서 읽는 자는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선한 삶 가운데 있는 자, 곧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내면이 열려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열린다는 것은 마음의 내면이 실제로 열리는 사건이며, 이는 단지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존재 구조의 상승입니다.
이해는 진리의 그릇입니다. 교리는 관념 속에서 형성됩니다. 관념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맹목적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를 이해하려는 이성적 노력은 믿음의 적이 아니라, 믿음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만 그 이해가 자기 지성에서 나오느냐, 주님의 빛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한테 있는 고유한 것(proprium), 즉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이 없고, 주님의 빛이 들어올 때만 이해가 살아 있습니다.
내세에서 관념이 드러난다는 언급은, 신앙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고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던 신앙의 관념들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은 영원한 결합을 결정합니다. ‘백마’가 이해라면, 그 말이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가 곧 인간의 영원한 방향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림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어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열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문자 속에 서 있고, 열리는 것은 그 문자를 통해 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과 진리의 애정으로 읽는 자에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이해가 열리고, 모순은 질서가 되며, 말씀이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