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하나님께서는굳이동물을죽여제물로드리게하셨을까?’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의 목을 따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몸을 각 뜨고, 그것을 불에 태우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당히 낯설고 심지어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런 동물의 죽음과 피와 불을 원하셨던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제사자체가예배의본질이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Coelestia, 1749-1756, AC) 922(창8:20)는 번제와 희생제사가 내적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서로 다른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크게 보아 짐승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들은 신앙의 진리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짐승 자체가 아니라 그 짐승들이 표상하고 있는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체어리티와 신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 자체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번제와다른제사를그의목소리를청종하는것을좋아하심같이좋아하시겠나이까순종이제사보다낫고듣는것이숫양의기름보다나으니’라고 말합니다(삼상15:22). 미가 역시 수많은 번제물보다 ‘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을 말씀합니다(미6:6-8). 호세아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나는인애를원하고제사를원하지아니하며번제보다하나님을아는것을원하노라’고 하십니다(호6:6). 스베덴보리가 AC.922(창8:20)에서 바로 이러한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외적 제사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외적인 제사 형식이 필요했을까요? 고대의 표상교회에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연계의 사물과 행위들을 통해 표상되었습니다. 제단과 불과 피와 물,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은 각각 천국의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세세한 규례도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각 과정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AC.10057, 출29:18). 최고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정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는 ‘죄를지었으니하나님께서화가나셨고,그화를풀기위해동물을죽여피를보여드려야한다’는 구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고(AC.10046, 출29:16),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하며,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종류들 역시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 전체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가 그 안에 심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는 과정을 가시적인 의식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AC.10143(출29:42)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전체가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궁극적으로 짐승에게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무엇을 정결하게 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하시며, 어떻게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동물의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 외적 의식이 표상하고 있던 내적 실재였습니다. 인간이 악을 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체어리티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제사였습니다. 외적 제사가 그 내적 실재와 분리되는 순간 제사는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토록 강하게 제사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한다면 제사의 표상과 실제 삶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비둘기를 제단에서 불사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위기의 제사가 우리와 무관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외적 표상이 가리키던 실재를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번제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표상하던 ‘살아있는예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을 읽으며 ‘왜하나님께서는이런제사를명하셨을까?’라고 묻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피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표상되는 인간의 거듭남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참된 제사는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번제는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C.레1심화1)
레위기를 펼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가 나타납니다.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마침내 제물을 불태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레위기 1장은 자칫 오래전에 폐지된 제사 규정을 기록한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희생제사의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아르카나’가 있으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에 관한 것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은 단순히 짐승을 어떻게 잡고 불사를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고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회막에서모세를부르시고그에게말씀하여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첫 음성이 ‘부르심’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784(출27:20)는 ‘회막’이 주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입니다. 거듭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드려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소의 번제입니다. ‘그예물이소의번제이면흠없는수컷으로회막문에서여호와앞에기쁘게받으시도록드릴지니라.’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서로 다른 예배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별히 소 떼에 속한 동물들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하며, 수송아지는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노센스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AC.9391, 출24:5). 그러므로 번제는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나 감정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생활,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일상의 선택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의식적 접촉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이전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며, 머리는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AC.10023, 출29:10). 따라서 이 장면에는 인간 자신과 번제가 표상하는 예배 사이의 결합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나와 상관없는 짐승 하나가 대신 죽는 외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제가 표상하는 정결과 거룩하게 됨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가 등장합니다. ‘아론의자손제사장들은그피를가져다가회막문앞제단사방에뿌릴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고(AC.10046, 출29:16),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은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47, 출29:16).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막연히 착해지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히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며 살아갈 때 정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우리 안의 선과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게 하는 신적 진리의 표상입니다.
이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이 두 행위에도 분명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세한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AC.10057, 출29:18).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죽’이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의 것을 표상한다는 원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레1:6의 ‘가죽을벗기는행위’ 자체를 스베덴보리가 정확히 어떻게 적용하는지 충분한 직접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을뜨는것’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응은 현재로서는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상응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이므로, 확인되는 만큼만 읽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내장과정강이를물로씻을것이요’에서는 다시 매우 분명한 길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AC.10049, 출29:17), 이어 정강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50, 출29:17). 인간의 가장 낮고 자연적인 부분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감각적 즐거움과 오류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물로씻는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악에서 돌이킬 때 자연적 인간도 점차 정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레위기 1장의 거듭남 이해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연적 인간을 없애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없애지 않으시고, 일상생활도 없애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도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씻으십니다. 거짓과 악에 물든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선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서 안에 두십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바르게 표현되도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있게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씻은 내장과 정강이는 버리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 번제로 드립니다. 여기서 번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전부’입니다. 머리만도 아니고, 좋은 부분만도 아니며, 속 사람만도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부분까지 씻긴 후에는 모두 제단의 불 위로 올라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이 주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냄새’는 주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1:9, 13, 17을 인용합니다(AC.925, 창8:21). 그러므로 번제의 마지막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간 전체가 정결해져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번제가 지향하는 내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기로운 것은 제물의 연기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것입니다(AC.925, 창8:21).
10절부터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이어집니다. 절차는 소의 번제와 매우 비슷하지만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소 떼의 동물들과 양 떼의 동물들을 구별하며, 전자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391). 이것은 번제가 인간의 겉 생활만이 아니라 속의 애정과 의도까지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겉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한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거듭남은 어느 한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의 번제에서 양과 염소의 번제, 다시 새의 번제로 이어지는 순서를 거듭남의 시간적인 ‘1단계,2단계,3단계’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및 예배 상태를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1의 배열 자체를 인간이 차례로 통과하는 세 단계라고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번제는 거듭나는 인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층위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층위가 결국 하나의 목적, 곧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다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짐승이 아니라 ‘산비둘기나집비둘기새끼’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가 번제를 드린 창8:20을 해설하면서 레1:3-17을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번제에 사용된 소와 어린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특별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큰 구별에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22, 창8:20). 또한 비둘기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신앙의 진리와 선, 특별히 신앙의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합니다(AC.870, 창8:8-9).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애정만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이해,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번제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이는화제라여호와께향기로운냄새니라’로 끝납니다. 소의 번제도, 양이나 염소의 번제도, 새의 번제도 마지막 목적지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선과 진리,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새의 번제에는 ‘모이주머니와그더러운것은제거하여제단동쪽재버리는곳에던지고’, ‘날개자리에서그몸을찢되아주찢지말고’라는 매우 특이한 규정도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절차는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부 규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된 원전만으로 ‘모이주머니는이것이다’, ‘날개자리에서찢는것은이것이다’, ‘아주찢지않는것은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상응에는 충실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는 멈출 줄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레위기 1장 전체를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피와 죽음과 불의 장면 뒤에서 하나의 놀라운 거듭남의 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과 그 예배가 결합합니다. 피, 곧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결합합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삶까지 진리의 물로 씻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함께 주님께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가 불 위에 놓입니다.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매우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정리합니다. 희생제사와 번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AC.10143, 출29:42). 그리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은 그것들을 삼가고 피하며 싫어하는 것이고,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하는 것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번제는 종교적 감정의 한 순간이나 ‘모든것을바치겠다’는 결단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삶 전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하나님께무엇을희생할것인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안에서아직진리의물로씻기지않은것은무엇인가?’, ‘내속사람과겉사람은서로하나가되어있는가?’, ‘내가알고있는진리는실제선한삶과결합하고있는가?’, ‘나의가장자연적이고일상적인삶까지주님의질서안으로들어오고있는가?’, 그리고 ‘내삶전체는사랑으로부터주님을예배하고있는가?’입니다.
번제와 희생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 외적 형식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외적 제사가 내적 예배와 분리되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AC.922). 그러므로 오늘날 동물의 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레위기 1장의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표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표상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실재, 곧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을 읽어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으시며, 그것들을 서로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의 가장 깊은 애정에서 가장 바깥의 일상생활까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인간의 예배는 더 이상 입술이나 의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그전부를제단위에서불살라’라는 번제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 ‘향기로운냄새’가 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SWC.레1해설)
※ ‘스베덴보리의렌즈로읽는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2,눅15:11-32, ‘돌아온탕자와큰아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11-3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탕자의비유’는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흔히 이 비유를 ‘하나님을떠난죄인이회개하여돌아오면하나님아버지께서받아주신다’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 비유의 가장 분명한 문자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 비유를 다시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집을 나갔다 돌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넘어 한 인간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떠났다가 그것을 모두 잃은 뒤,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돌아서 주님께 돌아와 다시 진리와 선으로 옷 입혀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이번 비유에는 매우 든든한 직접 근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91(출24:5)에서 바로 이 돌아온 탕자를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탕자’가 ‘천국의부요함,곧선과진리에관한지식들을탕진한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은 ‘마음의회개와자기를낮춤’을 의미하며, 아버지가 입혀 준 ‘제일좋은옷’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살진송아지’는 그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는 것은 비유의 세부에 임의의 상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비유를 직접 그렇게 열어 준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Arcana Coelestia, 영어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속뜻주석, 총10,837개글)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비유는 ‘어떤사람에게두아들이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중에서내게돌아올분깃을내게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벌써 인간의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아들이 가진 것은 본래 아버지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내게돌아올분깃’으로 받아 들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있는 생명, 이해, 자유, 진리를 아는 능력, 선을 행할 능력은 모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느끼고 마침내 ‘내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사랑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이 마치 내 선택과 내 행동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선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내게서나온것’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와 분리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합니다.
13절은 ‘그후며칠이안되어둘째아들이재물을다모아가지고먼나라에가’라고 합니다. ‘먼나라’는 문자적으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이지만, 영적으로 읽으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공간적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과 삶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할수록 사람은 마음의 상태에서 ‘먼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그재산을낭비’합니다. 여기에서 AC.9391의 직접 설명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탕자가 탕진한 것을 ‘천국의부요함’,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밝힙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해 사용하거나 삶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그것을 탕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천국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없앤후’ 흉년이 옵니다. 이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재산을 다 없앤 뒤 흉년이 왔습니다. 외부에서 갑자기 불행이 닥쳐서 탕자가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을 다 탕진한 상태에서 흉년이 닥치자 그의 내적 빈곤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흉년은 선과 진리가 결핍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계속 삶에서 밀어내면 어느 순간 ‘먹을것’이 없어집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굶주리고, 많은 것을 경험했는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것이 영적 궁핍입니다.
그 결과 둘째 아들은 그 나라 사람에게 붙어 살며 돼지를 치게 됩니다. 유대인의 청중에게 ‘돼지를친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직업을 얻었다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아들로 살던 사람이 이제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의 지배 아래 내려간 인간의 상태를 아주 강하게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더욱 처참한 것은 16절입니다. ‘돼지먹는쥐엄열매로배를채우고자하되주는자가없는지라.’ 이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의 양식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음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인정, 소유, 쾌락, 우월감, 원망, 자기 합리화 같은 것들이 잠시 마음을 채우는 듯하지만 영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먹으려 하지만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이 비유 전체의 방향이 바뀝니다. ‘이에스스로돌이켜.’ 개역개정의 이 표현은 참 좋습니다. 외적 환경이 먼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합니다. ‘내아버지에게는양식이풍족한품꾼이얼마나많은가나는여기서주려죽는구나.’
거듭남에서도 이 순간은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이며 회개의 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아버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미 좋은 사람이 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지금어디에있는가’를 보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내가일어나아버지께가서.’ 이것은 단순한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후회는 돼지우리에서 ‘내가왜이렇게되었지?’ 하고 슬퍼하는 데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일어나아버지께가는것’입니다. 방향이 바뀝니다. 스베덴보리가 AC.9391에서 탕자의 귀환을 ‘마음의회개와자기를낮춤’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 주님께 향하는 실제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18절과 19절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아버지내가하늘과아버지께죄를지었사오니지금부터는아버지의아들이라일컬음을감당하지못하겠나이다.’ 여기에는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없습니다. ‘환경이나빴습니다’, ‘친구들을잘못만났습니다’, ‘아버지가처음부터재산을주지말았어야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을 자기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려면 먼저 그것이 ‘나의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한 뒤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길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도거리가먼데아버지가그를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그를 봅니다.
이 장면은 이 비유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들이 먼저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가 아버지께 도착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충분히 회개했음을 증명한 뒤 아버지가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거리가먼데’ 아버지가 먼저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에야 가까이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방향을 돌려 주님께 향하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의 자비는 그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목을안고입을맞춥니다.’ 여기에는 심문이 없습니다. ‘재산을얼마나남겼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어디서무엇을했느냐?’며 조서를 작성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안습니다. 이것은 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 죄를 보고 돌아섰습니다.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있었지만, 이제 아들이 그것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들은 돌아오기 전에 ‘나를품꾼의하나로보소서하리라’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 앞에 도착해서는 ‘아버지내가하늘과아버지께죄를지었사오니지금부터는아버지의아들이라일컬음을감당하지못하겠나이다’까지만 말합니다. ‘나를품꾼의하나로보소서’라는 말은 본문에서 사라집니다. 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아버지가 종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들은 ‘품꾼’의 자리라도 달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꾼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시작하는 일은 ‘아들의회복’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바로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풉니다. AC.9391에서 ‘제일좋은옷’은 ‘일반적인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AE.279(계5:1)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제일좋은옷’은 일반적이고 주된 진리들을, ‘손의가락지’는 속 또는 영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결합을, ‘발의신’은 겉 또는 자연적 사람 안에서 그와 같은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둘, 곧 가락지와 신이 함께 ‘거듭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단순한 환영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회복 장면입니다. 먼저 옷을 입힙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와 관련됩니다. 벌거벗고 궁핍해진 사람에게 다시 진리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머리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락지가 ‘손’에 끼워집니다. 손은 행위와 능력의 영역과 연결됩니다. 진리와 선이 속 사람 안에서 결합하고 그것이 삶의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발은 자연적 삶의 가장 바깥 영역과 관계됩니다. 즉 거듭남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가장 바깥 부분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이야기가 ‘용서받았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입히고, 연결하고, 걷게 합니다. 주님의 용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장부에서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을 다시 질서 안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해설합니다. AC.9391에서는 살진 송아지가 앞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선들’을 의미한다고 하며, AE.279에서는 더 분명하게 ‘사랑과체어리티의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옷과 살진 송아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옷은 진리이고 송아지는 선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진리만 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향해야 할 선,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우리가먹고즐기자’는 말씀도 단순한 잔치 장면이 아닙니다. AE.279는 이것을 ‘결합과천국의기쁨’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식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선을 함께 받아들이고 나누는 결합을 나타냅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서 쥐엄 열매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서는 살진 송아지를 함께 먹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대비입니까? 주님에게서 떠난 proprium의 삶이 주는 음식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받는 천국의 음식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러므로 24절의 ‘이내아들은죽었다가다시살아났으며내가잃었다가다시얻었노라’는 말씀이 비유의 중심에 놓입니다. 아들은 육체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떠난 상태가 ‘죽음’이었고, 돌아와 다시 결합된 상태가 ‘삶’입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하고 성공하고 즐기고 있느냐가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유가 끝났다면 우리는 훨씬 편안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가 서로 끌어안고 잔치를 벌이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맏아들이야말로 이 비유를 단순한 ‘탕자의회개이야기’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맏아들은 먼 나라에 가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여러해아버지를섬겨명을어김이없거늘.’ 외적으로 보면 모범적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노하여들어가고자하지아니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버지집안에있는것’과 ‘아버지의마음안에있는것’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몸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동생을 ‘내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아버지의살림을창녀들과함께삼켜버린이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나는이렇게충성했는데왜저사람에게더잘해주느냐’는 비교와 공로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문맥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사람이죄인을영접하고음식을같이먹는다’고 수군거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만큼이나 맏아들도 이 비유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죄인과함께먹는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맏아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보면 매우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종교적 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그 중심에 자기 공로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여러해아버지를섬겨명을어김이없거늘’이라는 말 안에는 순종의 기록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그러므로나는받을자격이있다’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공로로 붙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뻐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동생의 회복을 보면서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다른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중심에 놓는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비를 불공평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이렇게오래섬겼는데저사람은저렇게살다가돌아와서왜저런환대를받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맏아들에게도 ‘나옵니다.’ 둘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달려 나갔고, 맏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아버지가나와서권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버지는 먼 나라에 간 아들에게만 자비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의와 분노 때문에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는 맏아들에게도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사실 ‘잃어버린아들’은 한 명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 밖의 먼 나라에서 잃어버렸고, 맏아들은 아버지 집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허랑방탕 속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은 자기 의와 공로의식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얘너는항상나와함께있으니내것이다네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네동생은죽었다가살아났으며내가잃었다가얻었기로우리가즐거워하고기뻐하는것이마땅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맏아들이 ‘이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을 다시 ‘네동생’이라고 불러 줍니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체어리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됩니다. 주님께 돌아온 사람을 보면서 ‘저사람이과거에무엇을했는가’를 끝없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살아났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천국의 기쁨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비유는 맏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를 말하지 않고 끝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열린 결말입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일어나아버지께로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선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자기 공로와 분노를 내려놓고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며 잔치에 들어갈 것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온탕자의비유’를 읽으며 우리는 둘째 아들에게만 자신을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도 있고 맏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먼 나라로 가려는 proprium도 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proprium도 있습니다. 하나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떠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중심을 ‘탕자’에게만 두면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재산을 요구할 때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먼 나라에 있을 때도 아버지의 집은 그대로 있습니다. 둘째가 스스로 돌이킬 때 기억해 낸 것도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먼저 발견한 것도 아버지이고, 달려간 것도 아버지이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도 아버지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긴 것도 아버지이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이 분노하여 밖에 서 있을 때 다시 밖으로 나가 권하는 분도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인간이어떻게하나님께돌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주님께서잃어버린인간을어떻게대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억지로 집에 붙잡아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가 떠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떠났다고 사랑을 거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선택의 결과를 통해 자기 상태를 보고, 자유 가운데 돌이켜 주님께 향할 때 주님께서는 그를 품꾼으로 강등시키지 않으십니다. 다시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며,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안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AC.9391과 AE.279가 옷과 가락지와 신과 살진 송아지를 통해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질문, 곧 ‘아버지는둘째모르게사람을보내그가사는형편을은밀히살필수있지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 안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 깊은 답이 보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먼 나라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상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여 억지로 데려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 가운데 ‘내가일어나아버지께가리라’고 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리를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놓고 읽으면 질문은 아주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나는지금아버지에게서받은무엇을내것이라고여기고있는가?나는어떤선과진리를내목적을위해탕진하고있는가?내마음의먼나라는어디인가?나는무엇으로영혼의배를채우려하고있는가?나는지금돼지우리에서내처지를한탄하고만있는가,아니면실제로일어나아버지께가고있는가?그리고혹시나는이미아버지집가까이에있으면서도다른사람에게베푸시는주님의자비때문에화가난맏아들은아닌가?’
그런데 이 모든 질문 끝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주님입니다.
‘아직도거리가먼데아버지가그를보고측은히여겨달려가.’
이 한 장면 안에 이 비유의 복음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먼 나라에서 돌아오지만, 구원은 인간이 먼 길을 완주하여 마침내 주님께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주님께로 방향을 돌릴 때, 주님께서 그를 향하여 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단지 과거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다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삶의 가장 바깥까지 새롭게 하여 천국의 기쁨 안으로 들이십니다.
‘이내아들은죽었다가다시살아났으며내가잃었다가다시얻었노라.’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죽어 있던 것이 살아나는 것이며, 잃었던 것이 주님에게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