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7(D1)-주일예배(2519, 눅15,1-10),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속뜻.pdf
0.40MB
2023-12-17(D1)-주일예배.축도.pdf
0.21MB

 

https://youtu.be/JJ27_O64dh0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속뜻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10)

 

천사들은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불러내 악령들이 선동하는 악과 거짓에 맞서게 한다. 그때 사람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유의 상태에 있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고 또한 보호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매 순간, 그리고 순간의 순간마다 이루어진다. (AC.5992:3) Especially do the angels call forth the goods and truths that are with a man, and set them in opposition to the evils and falsities which the evil spirits excite. Thus the man is in the midst, and does not perceive either the evil or the good; and being in the midst, he is in freedom to turn himself either to the one or to the other. By such means do angels from the Lord lead and protect a man, and this every moment, and every moment of a moment; (AC.5992:3)

 

 

누가복음 18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주님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였고, 세리는 자기를 낮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말씀에 따라 회개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립니다. 앞에서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며 기도했던 바리새인들이 지금은 그들의 기도의 대상이셨던 그 주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양 아흔아홉 마리’는 스스로 거룩한 것처럼 행세하는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은 누굴까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기 원하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세리이며 죄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주 거역, 때로는 부정한 재물을 탐내며, 그러다가도 후회하고 반성하며 다시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께 나아온 세리와 죄인을 닮았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양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양은 후미진 도랑에 빠졌을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슬피 웁니다. 목자가 이끄는 대로 왜 순진하게 따르지 않았는가 하고 후회를 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당연히 당신의 양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을 찾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주님은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양을 찾지를 못하실까요? 찾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를 바로 구해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그러다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일 때, 당신의 양을 도랑에서, 또는 가시덤불에서 건져내십니다. 본문 5절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주님을 떠났던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와 진심으로 회개할 때, 주님은 그를 어깨에 메고 기뻐하십니다. ‘양을 어깨에 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때부터는 주님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능력이나 힘을 나타낼 때 주로 손이나 팔, 어깨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중에서도 어깨가 가장 큰 힘을 나타냅니다. 잃어버렸던 양을 어깨에 메신다는 말씀에서 다시는 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주님의 각오가 느껴집니다. 계속해서 본문 6절과 7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안의 병든 진리와 선이 주님에 의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십니다. 벗과 이웃은 우리 안에 있는 건강한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즐긴다는 것은 그때 주님이 다른 건강한 선과 진리들과 더불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기뻐할까요? 신앙인들의 마음은 수많은 진리와 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들은 각기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체의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 것처럼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진리, 또는 선이 병이 들면 그것과 연결된 다른 진리와 선이 병이 들고, 그로 인해 마음 전체가 병이 들거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주님에 의해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하나의 진리가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진리와 선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깊이와 색깔이 다른 수많은 교인이 그들의 애정에 따라 서로 연결이 되고, 그런 연결들이 모여 교회 전체를 이룹니다. 그때 하나의 교인이 영적으로 길을 잃게 되면 그와 연결된 다른 교인들이 길을 잃고,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주변의 이웃들과 천국의 천사들을 기쁘게 합니다. 다음 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앞에서 말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영적인 병자, 또는 병든 진리를 뜻합니다. 드라크마는 주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 단위인데,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드라크마’라는 화폐 단위 말씀을 좀 드리면, 예수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는 좀 복잡했는데요, 로마 화폐와 로마 이전부터 쓰던 헬라 화폐, 그리고 이 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자체 화폐가 뒤엉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또 화폐, 즉 동전의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먼저 구리 재료로는 로마의 ‘앗사리온’과 ‘고드란트’로 음역된 콰드란스, 헬라 구리 동전은 ‘렙돈’, 그리고 ‘호리’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로마 동전인 콰드란스인지, 헬라 동전인 렙돈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은의 경우, 로마는 ‘데나리온’, 헬라는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드라크마는 당시 여인의 결혼지참금, 그러니까 혹시 이혼당할 때 보험용, 비상용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열 드라크마밖에 갖고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이 여인은 형편이 넉넉치는 않아 보입니다만, 그러나 숫자 ‘’(10)의 속뜻은 ‘전부’(all)인 걸 보면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을 경우, 상당히 엉뚱한 곁길로 나갈 수도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합니다. 그밖에 이스라엘 화폐, 즉 동전은 ‘세겔’이 있습니다.

 

따라서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진리 가운데 하나가 병이 든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병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아와 세상의 욕망으로 인해 진리가 오염되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병이 들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을 쓴다고 했습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들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빗자루로 집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비로 방바닥을 쓰는 것처럼 자신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객관적으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동안 시험에서 왜 자주 넘어졌는지, 왜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안됐는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읽다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했을까요?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이웃들 앞에서 또는 주님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의롭고 경건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때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신랄하게 나무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렇게 완곡하게 타이르셨습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1-32)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양인 줄 아는 자, 의로운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길 잃은 양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온 세리와 죄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매일 기도하는데도 영적인 성장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입으로는 죄인이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아도 다시 죄의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항상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집중해서 주님 앞에 충분히 낮아져야 합니다. 인간에 속한 것을 비우고, 또 비워야 합니다. 주님을 대할 때 진실하게 나아가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회개의 진정성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어깨 위에 안전하게 메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자기가 주님 앞에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0)

 

아멘

 

 

 

원본

2021-04-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3-12-10(D1)-주일예배(2518, 눅14,31-35),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0.32MB
2023-12-10(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8dz5vK-viOo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의 속뜻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14:31-35)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오는 악과 거짓을 따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 10490:7)

 

 

주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을 뜻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그러한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왜 악이며 거짓일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자아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이나 육신에 속한 것에 집착하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 같은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와 보복, 잔인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지옥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신성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자아와 세상과 싸우는 모범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임금,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하는데, 군사 일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저쪽의 군사 이만을 상대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합니다. 여기서 ‘왕들의 전쟁’은 신앙인들의 시험을 뜻합니다. 즉 진리와 거짓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또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쪽 왕의 군사가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가 이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의 진리가 지옥의 거짓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거짓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를 가지고는 지옥의 거짓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힘의 원천인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길 힘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 또는 사랑에서만 나옵니다. 시험이 올 때, 믿음이 깊은 사람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해 옳다 생각되는 일을 하고, 결과는 모두 주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시험이 오면 항상 집니다. 이것이 이쪽 왕의 군사는 만 명이고, 저쪽 왕의 군사는 이만 명인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해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과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주님을 의지, 미리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이 올 때는 갑자기 오지 않고, 그 전에 어떤 징후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얼마나 겸손한지, 주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은 아닌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의도나 버릇이 있다면 주님을 의지해서 끊어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미리 대비를 하면, 시험이 오더라도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지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도움을 청해 시험에 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절 말씀입니다.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험이 오기 전에 자신을 점검하고, 자아의 의도나 습관들을 미리미리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아와 세상과의 싸움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절 이하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19:20-21)

 

주님을 찾아온 어떤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부자’는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의 소유는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을 다 처분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부자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요 세상의 지식일 뿐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지 않고, 그러므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소금을 쳐야 음식의 맛이 살아나는 것처럼 진리 안에는 진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소금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소금이 뭘까요? 선 또는 선한 애정입니다. 모든 진리 안에는 선이라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선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살아납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옥 전체를 이길 힘이 있습니다. 진리 안에 들어있는 소금이 선이라면, 선 안에 들어있는 소금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와 선은 함께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악인에게 쫓기는 어떤 선한 사람이 자기 집 다락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악인이 와서 그 사람의 행방을 묻습니다. 그때 그가 다락방에 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까요, 아니면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진실일까요? 당연히 숨기는 것이 진실입니다. 모든 진실은 선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돈만 생기면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것이 선일까요, 아니면 거절하는 것이 선일까요? 거절하는 것이 선입니다. 모든 선은 그 바탕에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진리가 무엇입니까? 돈을 빌려주면 그 사람을 망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어려워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진리라고 하더라도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진리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행동하는 진리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선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선이 없는 진리를 맛을 잃은 소금에 비유하시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신 까닭은, 언약은 주님과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들어있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끝으로, 주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렇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귀는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주님께서 왜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하라고 하시는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별 생각 없이 했던 많은 일들이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곳곳에 그런 잘못들이 퍼져 있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생각만 하고 삶에 적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진리, 또는 삶에 적용하지 않는 진리는 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아서 쓸모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영적으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차지도 덮지도 않은 미지근한 자, 롯의 아내처럼 늘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하십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 항상 진실하기를 원하고 낮아지기를 원하며 온유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1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21-03-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61년생 대한민국 남자 기대수명이 21.8세... (2023/12/5)

 

완전생명표_성_연령별__20231206101440.xlsx
0.02MB

 

 

58년생 여자는 23.7세입니다. 구글링을 하니 나오는, 여성정책연구원 통계DB 완전생명표에 나오는 수치입니다. 참고로, 39년생 여자는 7.7세, 46년생 여자는 12.5세, 43년생 남자는 7.9세 등이 그 남은 기대수명입니다. 저는 61년생인데... 그러면, 이 통계대로라면, 제게 남은 시간은 22년이 채 안 되는군요...

 

꼭 이걸 신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나 유의미한 무슨 지표는 되지 싶습니다. 가령, 앞으로는 절대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앞으로는 오직 천국 입국 조건, 즉 주님의 신성에만 올인해야겠다 결심하는 등 말이지요.

 

저의 경우,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번역하는 일만 하기에도 너무 빠듯할 것 같은데요, 여러 저술 중 백미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년 시작, 총 8년에 걸쳐 저술된,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라틴 주석, 총 10,837개의 글)의 경우, 하루 다섯 개씩만 잡아도 6년!

 

이 외에도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232),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81), ‘결혼애’(Conjugial Love, 696),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435),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299), 그리고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851) 등 꼭 번역을 남기고픈 주요 저작들만 추려도 4,094개의 글이나 되는데다가...

 

스베덴보리의 책들은 그 내용이 내적(內的, internal)이요, 영적이기 때문에, 읽어보시면들 아시겠지만, 뇌가 마비될 정도로 그 내용이 깊고 높아 어렵습니다. 하여, 1차 결과물들인 번역들과 일반 독자들을 이어주는, 무슨 가교역할을 할, 좀 대중적 풀이들이 필요한데요, 사실 이 2차 결과물들이 더 요긴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그의 모든 저작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경우, 그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 이미 두 종류의 한글번역들이 나와 있는데요, 정말 고생고생하셔서들 번역하셨을 줄 믿기에 이 자리를 빌어 존경과 감사의 인사말씀 올립니다만... 그러나 저의 역량 때문인지 이 기존 번역들이 제게는 좀 맞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냥 제가 직접 번역하자 마음 먹게 된 것입니다.

 

번역 자체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자 본인이 영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그 내면이 열려야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영어나 라틴을 좀 한다고 바로 번역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고, 스베덴보리를 한 4, 5년 해야 겨우 제대로 된, 걸음마 수준의 번역이라도 할 수 있지요. 이 부분에서는 전문 번역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번역의 전문성은 있지만 이 책에 합당한 내면이 열리지 않았을 경우, 그런 분의 번역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어떤 엉뚱함, 살짝 영혼 없는 번역이 나타나거든요... 저 역시 이 문제 때문에 창세기 앞 부분만 일곱 번째 번역 중인데요, 이제는 더이상 유턴할 시간이 없어 이런 '처음부터 다시!'를 그만하고 그냥 쭈욱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난 5년, 이런 되풀이를 반복한 것은 하다 보니 너무 바보같은 번역,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번역을 한 게 하고 나면 또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만 62세를 조금 넘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칠 수 있을까요? 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그리고 다른 눈은 사분의 일이 안 보이는 경험을 한 2년 했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많이 회복, 번역하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운전도 별 무리 없고요. 그러나 늘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눈을 필히 영양가 있게 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도 모르게 유튜브 보는 일에 넋 놓고 있을 때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72년에 떠났습니다. 저도 저 위 기대수명만큼만 더 머물다가 간다면, 얼추 스베덴보리처럼 가게 되는데요... 그는 떠날 때, 자기가 떠나는 날을 알고 있었고, 저 위 마지막 저작, ‘참된 기독교’를 1771년에 끝마치고, 이듬해 어느 주일 오후, 아주 포근하고 향기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깔끔하게 떠났지요. 저 역시 떠나는 날까지 일하다가 깔끔하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식들을 비롯, 주변 사람들 폐 끼치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요... 저대로라면, 저희 사모는 제가 먼저 가고 한 이 년 후, 따라오겠네요. ㅎㅎㅎ

 

자식들은 이런 얘기하면 질색들을 하겠지만... 그러나 나름 또 유익도 있겠지요. 저는 어머님은 고3 때인 1980년 9월에, 아버님은 대졸 때인 1988년 2월에 제 곁을 떠나셨는데요, 만일 그 시절에 저런 통계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대략 부모님이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시겠다 그 기대수명을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다른 시간들을 보냈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령, 아버님의 경우, 옛날엔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그래서 특히 추운 겨울엔 방마다 요강이 있어 그 방안 요강으로들 해결했지요. 저는 그 시절, 중1에서 고1 때였는데, 제 기억에 아침에 요강 비우는 건 늘 칠순을 바라보시는 아버님이셨습니다. 저는 더럽다고 거의 손도 대지 않았거든요... 저는 지금은 이런 거 하나까지 다 후회가 됩니다. 그 시절, 불과 2년 후에 어머님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그리고 아버님이 8년 후, 그렇게 또 어머니 뒤를 따르실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이제는 주신 소명 마치는, 이 쓰임새의 일에만, 그리고 그와 더불어 더더욱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에만 올인해야겠습니다. 아직도 이 나라, 특히 내년 총선 걱정이 크지만, 균형을 잡아야겠다, 이제 저 나라로 이민 갈 준비도 착실히 하면서... 하는 생각을 오후 잠시 쉬면서 이렇게 해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