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창1:8)
AC.26
‘저녁’(evening),‘아침’(morning),그리고‘날’(day)의의미는위의5절에서이미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AC.26은 매우 짧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8의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둘째날이니라’를 다시 길게 해설하지 않고, ‘저녁’(evening), ‘아침’(morning), ‘날’(day)의 의미는 앞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다고만 말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데 있지 않고, 첫째 날을 해설하면서 이미 세워 놓은 원리가 둘째 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22에서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곧 그늘이나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그 뒤에 오는 상태, 곧 빛이나 진리와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일반적으로 ‘저녁’, 주님께 속한 것은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AC.23에서는 ‘날’이 말씀에서 시간 자체를 나타내며, 그로부터 그 시간의 상태도 나타낼 수 있음을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AC.26의 짧은 참조는 바로 앞에서 확정한 이 의미들을 다시 가져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읽는 데 중요한 점을 보여 줍니다. 첫째 날에 적용된 ‘저녁’, ‘아침’, ‘날’의 속뜻이 둘째 날에 와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창1에서 창조의 날들이 이어질 때, 각 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지지만 ‘저녁’, ‘아침’, ‘날’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설명된 의미를 바탕으로 계속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그 뜻을 다시 설명하지 않고 5절 해설을 가리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AC.26은 바로 앞 AC.24-25와 연결해서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이 생기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구별되며,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고, 사람 안의 것들이 점차 질서 안에 놓이는 거듭남의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끝에도 다시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역시 단순한 자연계의 하루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저녁’, ‘아침’, ‘날’의 의미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26자체가 ‘모든영적성장은반드시혼란과약화를거쳐야한다’는 새로운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짧은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하려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독자가 이미 설명된 용어의 의미를 잊지 않고 계속 적용하도록 앞의 해설을 다시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AC를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설명했다’고 할 때에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기보다, 먼저 그가 가리키는 앞의 설명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26의 핵심은 ‘재확인’입니다. 둘째 날의 ‘저녁’, ‘아침’, ‘날’도 첫째 날에서 이미 밝혀진 속뜻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각 날은 서로 고립된 장면들이 아니라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이어지며, 같은 표현들은 앞에서 밝혀진 의미를 지니면서 다음 상태로 계속 나아갑니다. AC.26은 짧은 한 문장으로 그 연결을 놓치지 않도록 해 주는 번호입니다. (AC.26해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6, 7)
AC.25
‘땅을펼치고하늘을편다’(spreadouttheearthandstretchouttheheavens)는표현은사람의거듭남을다룰때선지자들이매우흔히사용하는말입니다.이사야에보면,To “spreadouttheearthandstretchoutthe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즉,주님께서는오류들을꺾지않으시고욕정들을끄지않으시며,오히려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십니다.그러므로이어서말씀하시기를, that is,he does not break fallacies,nor quench cupidities,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and therefore it follows:
이와같은뜻을지닌다른구절들은더언급하지않겠습니다.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바로 앞 AC.24에서 설명한 ‘궁창’,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선지서의 언어를 통해 한 번 더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 ‘땅을펼치고하늘을편다’는 표현을 매우 흔히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하늘과 땅에 관한 설명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언어가 사람의 재창조, 곧 거듭남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과 연결되었으므로, 하늘과 땅을 새롭게 펴고 펼친다는 표현은 거듭남 가운데 사람의 내적·외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세워지는 것과 연결됩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4:24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네구속자요모태에서너를지은’분이라고 하시면서 ‘홀로하늘을폈으며나와함께한자없이땅을펼쳤다’고 말씀하십니다. AC.2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선지서의 표현이 사람을 지으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구속자’와 ‘지은자’라는 표현이 하늘과 땅을 펴시는 창조의 언어와 함께 놓임으로써, 창조의 언어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주님의단독사역’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과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 안에서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응답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AC.25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42:3입니다. ‘상한갈대를꺾지아니하며꺼져가는등불을끄지아니하고’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는오류들을꺾지않으시고욕정들을끄지않으시며,오히려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모든 오류와 욕정을 한순간에 강제로 제거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오류와 욕정이 존재하는 그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도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를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십니다.
여기서 ‘굽히신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오류 자체를 조금씩 고쳐 마침내 진리로 만들고, 악한 욕정 자체를 정화하여 마침내 선한 사랑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가 되어야 할 재료가 아니며 악한 사랑은 그대로 천국적 사랑으로 발전하는 씨앗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처음에는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끄시면서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게 하십니다. AC.24에서 사람이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고 한 설명이 바로 이 대목과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42:3다음에 사42:5를 이어 인용합니다. ‘하늘을창조하여펴시고땅과그소산을내시며’라는 표현은 다시 창조의 언어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AC.25가 여기서 ‘호흡’, ‘영’, ‘소산’각각의 세부 상응을 해설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이 단락에서의 직접적인 논지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같은 문맥 안에서 ‘꺾지않고끄지않으며굽히심’과 ‘하늘을펴고땅을펼치심’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거듭남은 파괴를 통한 새 창조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면서 그의 내적·외적 질서를 새롭게 세우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한갈대’와 ‘꺼져가는등불’을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일대일로 대응시켜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25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이 이미지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역사 방식입니다. 사람에게 아직 오류와 욕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강제로 꺾고 끄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점진성은 인간의 악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따라 질서 있게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5가 선지서의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표현을 가져오는 이유는 창세기의 창조 언어와 인간의 거듭남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1에서 하늘과 땅이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번에 파괴하고 새것으로 대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의 자유 안에서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새롭게 세워 가십니다. 이것이 AC.25가 보여 주는 ‘하늘과땅을펴심’과 ‘굽히심’의 거듭남입니다. (AC.25해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창1:6, 7)
AC.24
하나님의영,곧주님의자비가참되고선한지식을낮으로이끌어내시고,첫빛,곧주님이계시며,그분이선자체이시고진리자체이시며,그분으로말미암지않는선과진리는없다는빛을주신후,주님은속사람과겉사람을구별하시며,따라서속사람안에있는지식(cognitiones)과겉사람에속한기억지식(scientifica)을구별하십니다.속사람을‘궁창’(expanse)이라하고,속사람안에있는지식을‘궁창위의물’(thewatersabovetheexpanse)이라하며,겉사람의기억지식을‘궁창아래의물’(thewatersbeneaththeexpanse)이라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or the Lord’s mercy,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and has given the first light,that the Lord is,that he is good itself,and truth itself,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watersabovetheexpanse”;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watersbeneaththeexpanse.”
주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우리가실제로알고있는것들을뜻하는데, 예를들면우리가‘나는단지그렇게생각하는것이아니라,그것을안다’라고말할때의그앎입니다. 반면‘기억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외적기억속에들어있는것들로, 신학적인것이든그밖의것이든온갖종류가대량으로축적되어있는것들을말합니다. 이두용어에대한스베덴보리자신의정확한정의는‘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C.27, 896, 1486, 2718, 5212를보시고, 또한개정자의서문주해(Reviser’sPrefatoryNotes)도참고하시기바랍니다.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as when we say “Idonotmerelythinkso,Iknow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896,1486,2718,5212.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Reviser]
[2] 사람은거듭남이시작되기전에는속사람이존재한다는것조차알지못하며,더욱이그성질과상태에대해서는알지못합니다.그는속사람과겉사람이서로구별되지않는다고생각합니다.왜냐하면몸과세상에속한것들에깊이잠겨있으면서속사람에속한것들까지그안에잠기게하여,서로구별되는것들을혼란스럽고어두운하나로만들어버렸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먼저‘물가운데에궁창이있으라’(Lettherebeanexpanseinthemidstofthewaters)하시고,그다음에‘물과물로나뉘라’(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inthewaters)하시는것입니다.그러나아직은이후의구절에서처럼‘궁창아래의물과궁창위의물로나뉘라’(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whichareundertheexpanseandthewaterswhichareabovetheexpanse)고하지는않으십니다. Man,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Lettherebeanexpanseinthemidstofthewaters,” and then,“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inthewaters”;but not,“Letitdistinguishbetweenthewaterswhichareundertheexpanseandthewaterswhichareabovethe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3] 따라서사람이거듭남의과정에서다음으로인식하게되는것은,속사람이있다는사실,곧속사람안에있는것들은오직주님께속한선과진리라는사실입니다.그러나거듭남이진행되는동안그의겉사람은여전히자기가행하는선을자기에게서나온것으로여기고,자기가말하는진리도자기에게서나온것으로여깁니다.그럼에도그는그러한상태에있기때문에,주님에의해자기가자기자신의것이라고여기는이러한것들을통하여선을행하고진리를말하도록인도됩니다.그러므로먼저궁창아래의물들의구별이언급되고,그다음에궁창위의물들이언급됩니다.또한이것은천국의아르카나인데,사람은자기자신의것들,곧감각의착각이나욕정에의해서도주님에의해참되고선한것들로이끌리고굽혀진다는사실입니다.그리하여거듭남의모든움직임과순간은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저녁에서아침으로,곧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또는‘땅’(earth)에서‘하늘’(heaven)로진행됩니다.그러므로이제궁창,곧속사람을‘하늘’(heaven)이라하는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when being regenerated,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and whereas,being such,he is led by them of the Lord,as by things of his own,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that man,by things of his own,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or from “earth” to “heaven.”Therefore the expanse,or internal man,is now called “heaven.”
해설
AC.24는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에 등장하는 ‘궁창’이 인간의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단계에서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사람에게 ‘주님이계시며그분이선자체이고진리자체이시고모든선과진리는그분에게서온다’는 첫 빛을 주셨다면, 이제 그 빛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궁창의 핵심은 단순한 ‘분리’보다 ‘구별’입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그것들이 서로 다름을 드러내시고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을 ‘궁창’(expanse)이라고 하고, 속 사람 안의 지식을 ‘궁창위의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궁창아래의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cognitiones’와 ‘scientifica’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붙은 개정자의 주에 따르면 cognitiones는 사람이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나는그것을안다’고 할 때의 앎이며, scientifica는 외적 기억 안에 축적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기억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곧바로 ‘살아있는영적지식’과 ‘죽은세속지식’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우선 강조되는 것은 이들이 속하는 층위가 다르며, 거듭남 가운데 그 차이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같은 차원 안에 끌어들여, 본래 구별되어야 할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표현 순서도 섬세합니다. 처음에는 ‘물가운데에궁창이있으라’고 하고 ‘물과물로나뉘라’고 할 뿐, 곧바로 ‘궁창아래의물’과 ‘궁창위의물’이라고 명확히 부르지 않습니다. 이후에야 위와 아래의 물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장 순서에서 거듭남의 질서를 읽습니다. 사람은 먼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 가고, 그다음에야 그 둘에 속한 것들의 질서를 점차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속 사람이 있으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 중인 사람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앞선 거듭남의 단계들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지나갑니다.
바로 여기서 AC.24의 매우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사람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께서 사람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끄시고 굽히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을 주님께서 선한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아직 그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현재 상태와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점차 선과 진리 쪽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전해진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차츰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과 경험에서는 겉 사람의 것들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을 행한다고 느끼며, 그 뒤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처음부터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 안에 겉 사람과 구별되는 속 사람이 있음을 알고, 그 속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궁창’은 바로 이러한 구별이 시작되고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저녁에서아침으로’, ‘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 ‘땅에서하늘로’진행된다고 말합니다. 앞의 AC.22-23에서 살핀 저녁과 아침의 질서가 여기에서 다시 거듭남의 실제 과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주님께 속한 것으로 이끄시며, 겉 사람에 머물러 있던 그의 의식은 점차 속 사람의 질서와 연결되어 갑니다. 이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전체와 각각의 부분에서 계속된다는 것이 ‘모든움직임과순간’이라는 표현의 뜻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별도의 작은 천국이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4의 직접적인 뜻은 속 사람이 ‘땅’으로 표현되는 겉 사람과 구별되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렇게 혼란스럽게 섞여 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별되고, 사람 자신의 것처럼 여겨지던 것들이 점차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창1의 궁창은 바로 그 구별과 질서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AC.24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