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5

태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이렇게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서들, 그리고 구약 말씀 전체에서 보면 서로 다른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표현하는데요, 짐승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해롭기 때문에 악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고,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지요. 이때 사람 안의 악들은 곰이나 늑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그리고 반대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나 , 어린양 같은 짐승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beasts)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며, 따라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는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서 몸과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욕정(cupidities) 쾌락(pleasures) 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beasts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wild animals of that earth,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 시대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 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 살던 원시인들이 동물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 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 = ’, 또는 반대로 짐승 = 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 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 자체는 여기서 동물이 움직이므로 애정도 인간을 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서 몸과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 땅의 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 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 본래 중립적이므로 없앨 필요가 없고 방향만 바꾸면 된다거나, 반대로 몸과 관련된 모든 쾌락은 악하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이해와 그것을 행하는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태고 시대

 

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심화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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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으로 읽는 인간 : 애정의 재창조와 주님을 향한 생명'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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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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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상황과 매우 닮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과학자와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영적 사명이 시작된 이후, 특히 『Arcana Coelestia』와 『Heaven and Hell』 같은 저작들을 내놓으면서부터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필연적이라고까지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붙들려 있는 한, 그 반대 방향에서 오는 진리는 반드시 거부되고 미움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논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 곧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증언에 대해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글을 썼고, 그 글이 스스로 증거가 되도록 맡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고, 특히 스웨덴 내 일부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공개 반박문을 쓰거나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저작으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온순함이 아니라, ‘진리는 강요되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태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영국 런던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도 그의 영적 체험과 저작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고, 어떤 이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상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해 개인적인 적대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상태를 ‘이해의 부족’이나 ‘영적 준비의 미성숙’으로 보았습니다. 즉, 사람을 문제로 보지 않고 ‘상태’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는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당대에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글이 ‘미래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당장의 비난이나 무시는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를 강하게 원한다면, 비난은 견디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시선을 ‘지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 시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덜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는 사랑(특히 charity, 곧 이웃 사랑)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Arcana Coelestia』 곳곳에서 그는, 악한 사람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는 상태’로 보는 시선이 그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대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쟁하지 않고, 진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곧 진리는 자유 속에서만 받아들여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본다’, 곧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려 했지,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시간을 주님께 맡긴다’, 곧 지금의 거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속에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 그러니까 자유, 사랑, 섭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가족과 주변의 반응을 떠올리면, 이 부분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 비난과 고립은 예외가 아니라 거의 필연’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그는 그것을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았고, 설득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빛을 더 맑게 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빛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것, 그리고 그 빛이 각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걸었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9, ‘요셉이 사사로이 가나안 혈육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

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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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7, ‘스베덴보리 저작(Writings)의 일과 ChatGPT’

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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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 먼저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산출할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foolish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가축(the beast) 기는 (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and also by thefowl upon the earth,and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and by thebeastandcreeping thing,and also by the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 것에서 행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 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하니 지식은 별로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모래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 행하지 않습니다.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믿는 대로 살지 않는 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 생물을 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 ’, ‘땅의 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 속한 의지에 속한 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 것과 행하는 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 것을 열심히 실천하면 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책은 계속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사랑과 신앙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 행함이 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AC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 말하는가?

 

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AC.44.심화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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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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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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