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3의‘그때에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사람을움직이신다’고 하면 사람이 자기 생각과 의지를 잃고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 문장을 앞뒤 문맥에서 떼어 내지 않고 읽으면 강조점이 조금 달라집니다.바로 앞에서는‘사랑이주된원리가되어작용할때’전투가 그친다고 했고,이어‘신앙이사랑과결합하게되면’그 상태를‘심히좋았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움직이신다’보다‘그때’입니다.어떤 때인가 하면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한 때입니다.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거듭남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사람이 자기 의지를 잃고 수동적인 도구가 된다는 뜻을 이 문장에 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자신의모양으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바로 앞AC.62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하나님의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그리고AC.63은 이제 주님께서 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신다고 합니다.이것은 거듭난 인간의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사람은 주님처럼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사랑과 신앙을 받아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형상과 모양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AC.63한 문장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따라서‘주님의의지와인간의의지가완전히하나가된다’, ‘이상태가인간에게가능한최고의자유이다’같은 결론까지 이번 글의 직접적인 뜻으로 확정하기보다,관련AC들이 자유와 의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면서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AC.63은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존재를 서로 없애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주님께서‘그를’움직이십니다.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동시에 그 움직임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합니다.그러므로 이 문장을‘주님이전부하시니인간은아무것도하지않아도된다’는 수동주의로 읽는 것도,반대로‘결국인간이자기힘으로선하게사는것이다’라고 읽는 것도 본문의 균형을 놓치게 됩니다.
처음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일상적인 예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어떤 사람이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처음에는 그 진리와 사랑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진리와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삶의 주된 원리가 된다면,그가 선을 행하는 생명의 근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다만 이것은AC.63을 이해하기 위한 예이지, ‘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신다’는 표현의 모든 의미를 이 한 사례로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표현이 지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신앙과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기보다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신다’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면,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그의 생명을 이끌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정확히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는 이 한 문장보다 훨씬 큰 주제이므로,이번에는AC.63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3
그동안주님은계속해서인간을위하여악과거짓에맞서싸우시며,여러싸움을통해그를진리와선안에굳게세우십니다.이싸움의시간은곧주님께서역사하시는시간이며,그래서예언자들가운데서는거듭난인간을하나님의손가락의일(theworkofthefingersofGod)이라고도부릅니다.그리고사랑이주된원리가되어작용하기전까지주님은쉬지않으십니다.일이이만큼진전되어신앙이사랑과결합하게되면,그상태를‘심히좋았더라’(verygood)라고합니다.이는그때에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시기때문입니다.여섯째날의끝에서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하며,인간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되는데,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AC.63은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전투에서 실제로 누가 일하고 계셨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조금씩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63은 그 과정의 이면에서 ‘주님은계속해서인간을위하여악과거짓에맞서싸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 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전투가 있고 그가 그 전투를 실제로 겪지만, 그를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그 전투들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이것은 AC.59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지만,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심지어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이제 그 흐름을 ‘전투의시간은주님께서일하시는시간’이라고 압축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험과 전투를 겪는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전투를 겪지만, 그 전투 가운데 그를 붙드시고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시간은주님께서일하시는시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실패, 질병, 갈등을 곧바로 ‘지금주님께서특별한영적전투를하고계신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3의 문맥은 거듭남 가운데 악과 거짓에 맞서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만능 공식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는 싸움으로 경험되는 그 시간이 동시에 주님께서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손가락의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가장미세하고정교한섭리’를 뜻한다고 별도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63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문맥의 핵심은 ‘일’의 주체입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손가락의일’입니다. 거듭남이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앞 문장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주된원리가되어작용하기전까지’ 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주된원리가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61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고,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3은 그 사랑이 ‘주된원리’로 작용할 때까지 주님께서 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원문 자체가 이어서 ‘그때전투가그친다’고 하므로, 사랑이 주가 되는 것과 전투가 그치는 것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이주가되면모든선한행동이아무노력없이자동으로흘러나온다’거나 ‘그뒤로는내적갈등이나시험이전혀존재하지않는다’고까지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여섯째 날의 거듭남의 전투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후의 모든 영적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는지는 뒤의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 상태를 ‘심히좋았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AC.60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60에서는 앞선 상태들이 ‘좋았더라’였던 것과 달리 이 상태가 ‘심히좋았더라’인 이유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입니다. ‘그때에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시기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사람을움직이신다’고 하면 마치 사람이 자기 의지와 자유를 잃고 주님께 조종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AC.63의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한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에서 주된 것이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움직이신다’를 곧 강제나 조종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신의모양’이라는 표현도 앞의 ‘하나님의형상’과 연결됩니다. AC.62는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고, AC.63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선해져서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에서 점점 더 생명의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주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매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는 것입니다. AC.59에서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처음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이제악한영들과의관계가완전히끊어진다는뜻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본문 이해에 직접 필요한 것이므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원문이 말하는 사실을 그대로 붙들면 됩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악한영들은여전히똑같이주변에있지만영향력만약해진다’는 식으로 바꾸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영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충분한 근거와 함께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즉시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너무 빨리 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사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무조건 ‘살아있는동안마음속에형성되는천국상태일뿐’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이 표현이 창2의 일곱째 날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앞 AC.62에서 우리가 일곱째 상태에 관한 질문을 서둘러 완성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AC.63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며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하며, 사람은 하늘 또는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그 ‘천적낙원’이 정확히 무엇이며 일곱째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다음 장이 설명할 몫입니다. AC가 스스로 ‘다음장에서’라고 한 것을 우리가 이번 해설에서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3의 중심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싸워 높은 상태에 도달했느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십니다. 주님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음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AC.60-63은 ‘심히좋았더라’의 속뜻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하여 밝혔지만, 그 모든 과정의 주체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지으신’ 것입니다. AC.63은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강하게 밝혀 줍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손가락의일’입니다.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사람이‘조금씩조금씩’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그런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여섯째 날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집니다.여기서AC를 처음부터 따라온 독자라면AC.13에서 이미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적고’(few),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거의없다’(scarcely)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AC.13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이 표현을‘사실은누구나결국일곱째상태에이른다’거나‘모든사람이각자다른방식으로일곱째상태를완성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거의없다’를‘아무도갈수없다’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scarcely’는 문자 그대로‘거의없다’, ‘좀처럼없다’는 뜻이지‘절대로없다’는 뜻은 아닙니다.그러므로AC.13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AC.62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여섯단계’와‘여섯째날에하나님의형상이됨’입니다.일곱째 상태의 성질을AC.62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따라서AC.62한 문장만 가지고‘여섯째날은영적천국이고일곱째날은천적천국이다’,또는‘모든사람은여섯째날을거쳐일곱째날의천적인간이되어야한다’는 식의 체계를 만들면 본문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AC.13으로 돌아가 보면 첫째 상태에서 일곱째 상태까지의 전체 윤곽이 이미 간단히 제시되어 있습니다.거기에서 일곱째 상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상태로 설명됩니다.따라서 일곱째 상태가 매우 높은 거듭남의 상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그러나 그것이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도달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마지막 단계인지,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정확히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충분히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일곱째상태에이르는이는거의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통계나 운명론으로 바꾸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천적인간으로태어나는사람은극소수인가?’, ‘나는영적유형으로태어났으니애초에일곱째상태에는갈수없는가?’같은 질문이 곧바로 생길 수 있습니다.그러나AC.13과AC.62는 사람들을 출생 때부터 두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글만으로‘누가처음부터영적인간형이고누가천적인간형인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더구나 온순하고 다정한 성격이면 천적 인간이고,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이면 영적 인간이라는 식으로 사람의 자연적 기질을 스베덴보리의‘영적’과‘천적’에 그대로 대응시켜서도 안 됩니다.그것은AC가 사용하는 용어보다 훨씬 피상적인 구별이 됩니다.
그러면AC.13의‘거의없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가장 먼저 거듭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창세기1장의 여섯 날과 이어지는 일곱째 상태는 며칠 동안 몇 가지 종교적 체험을 하면 끝나는 과정이 아닙니다.AC.62가 굳이‘조금씩조금씩’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낙심의 근거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AC.62의 초점은‘너는몇째날까지갈수있느냐’를 묻는 데 있지 않습니다.사람이 처음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다는 데 있습니다.따라서 우리의 관심도‘나는일곱째상태에들어갈수있을까?’라는 자기 등급 판정보다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또‘거의없다’는 말을 보고 그 상태에 이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내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누가 여섯째 상태이고 누가 일곱째 상태인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AC.13이나AC.62는 제공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보다 거듭남이 얼마나 깊은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의 순서를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입니다.AC.62역시 이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어떻게‘조금씩조금씩’하나님의 형상이 되는지를 말합니다.일곱째 날은 곧 이어지는 창2:1-3의 말씀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이것입니다.AC.13은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거의없다’고 실제로 말합니다.그 표현을 약화시킬 필요도, ‘아무도없다’고 강화할 필요도 없습니다.그리고AC.62는 사람이 여섯 창조의 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이 두 진술을 그대로 붙들고,일곱째 상태와 천적 인간의 더 깊은 관계는 관련AC들이 직접 설명할 때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독법은 답을 조금 늦추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AC를 더 정확하게 읽는 방법입니다.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체계화하기보다,말씀과AC가 열어 주는 순서를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거듭남 자체가‘조금씩조금씩’이루어진다고 하듯,그것을 이해하는 일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