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것은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 속하고, 후자는 그의 의지(will)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AC.61은 매우 짧지만 앞으로 AC를 읽는 데 자주 만나게 될 두 용어, 영적(spiritual)천적(celestial)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을 영적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을 천적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자는 인간의 이해, 후자는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60에서는 창1:31심히 좋았더라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AC.61은 그 설명에 이어 그러면 영적인 것이 무엇이고 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간결하게 밝혀 주는 글입니다.

 

먼저 영적이라는 말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영적이다라고 하면 세속적이지 않다거나, 신앙심이 깊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결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관계된 말입니다. 이 점은 연결된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반면 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에 속합니다. 여기서 의지도 단순히 의지가 강하다’, ‘무엇을 해내려는 의욕이 있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넓게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내적 생명의 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61의 문장을 가장 단순하게 놓아 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이해에 관계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의지에 관계됩니다. 전자를 영적’, 후자를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은 지식이고 천적인 것은 사랑이니, 영적인 것은 머리에만 있고 천적인 것만 실제 생명이라는 뜻인가?그러나 AC.61을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지, 영적인 것을 무가치한 지식으로 낮추고 천적인 것만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에서도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구별되지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을 단순한 성경 상식이나 교리 암기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아는 것이 포함되겠지만, AC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단순한 정보 저장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을 단순한 따뜻한 감정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의지에 속한다고 하는 데에는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좋은 느낌을 갖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쉽게 이해 = 머리’, ‘의지 = 가슴이라고 바꾸는 것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설명하기에는 쉬운 비유지만, 이해와 의지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두 근본적인 능력에 관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관한 지식과 이해의 측면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기에는 의지와 사랑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예는 AC.61의 구별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는 것은 무조건 영적이고 행동하는 것은 무조건 천적이다라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행동의 근원이 어떤 사랑과 의지에 있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천적을 단순히 신앙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AC 전체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하지만, AC.61 자체는 먼저 영적 인간이 다음 발전하면 천적 인간이 된다는 단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천적이라는 하나의 직선적인 승급 과정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AC를 읽을 때 오히려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AC.61이 말하는 만큼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이고 이해에 속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것은 천적이고 의지에 속한다.이것이 이 글의 직접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 앞 AC.60에서는 이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했을까요?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채 따로 존재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60은 그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했고, AC.61은 그 결합을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막연히 사랑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이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까지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천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1이 천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점은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사랑을 동일하게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을 천적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에 속한다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는 그의 내적 생명과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를 버리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 말씀의 속뜻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AC.61을 함께 읽으면 창1:31심히 좋았더라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AC.60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한다고 했고, AC.61은 그 가운데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영적이며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천적이며 의지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을 읽으면서 나는 영적 인간인가, 천적 인간인가?부터 판정하려 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확히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 ‘이해’, ‘의지라는 말이 계속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은 여전히 창1:3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AC.61은 말씀을 대신하여 인간에 관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AC.60에 이어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안에 있는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심화

1. understanding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 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 심화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에는 앞으로 AC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두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understanding’과 ‘will’입니다. 여기서는 각각 ‘이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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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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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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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창1:31의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단순히 신앙 = 아는 ’, ‘사랑 = 행동하는 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처음 이해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너무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기억하거나 어떤 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들과 관계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외우고 있다는 것은 기억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실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면 신앙에 속한 것과 더 깊이 관계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 역시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의지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선을 행하려 한다면 사랑에 속한 것이 삶에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면 신앙, 행동하면 사랑이라는 공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많은 종교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곧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 역시 단순히 머리에만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AC.60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결국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처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들 =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관계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관계된 것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합니다.

 

바로 다음 AC.61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60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은 다음 글의 영적인  천적인 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적 천적의 전체 차이를 미리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는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 글이 말할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60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을 통해 이익을 얻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계속 복수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알고 인정하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아직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AC.60 심히 좋았더라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알던 것을 이제 실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실천은 물론 중요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합은 더 안쪽의 의지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무엇이 참인지 인정하는 이해와 무엇이 선한지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은 이 결합을 단순한 협력이라고 하지 않고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 대목은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사람은 이제 성경을 많이 안다고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좋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60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깊은 이유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서로 분리된 채 각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매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동기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누가 여섯째  인간인가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합을 인간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31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받는 상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결과입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자기 힘으로 생명 있게 만들고 사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장 간단하게 구별한다면, 전자는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이고, 후자는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0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 구별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 됨 때문에 말씀은 앞선 날들의 좋았더라를 넘어 여섯째 날에 이르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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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소명 이후에도 사람들을 완전히 끊고 산 ‘은둔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는 분명한 ‘내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준은 세상적인 사교나 필요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쓰임’과 ‘영적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제한된 교류였지만, 그 속의 밀도는 매우 깊고 의도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명 이후 그의 삶의 중심은 글을 쓰는 일이었고, 그것도 단순한 저술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받아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시간은 사실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명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적 일의 흐름을 끊는가, 아니면 돕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런던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출판업자, 지식인, 성직자들과 교류도 했지만, 그 모든 만남은 길게 이어지는 사교적 관계라기보다는 ‘필요한 만큼, 그러나 깊게’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즉, 넓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선택된 접촉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사람은 단순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집합’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지는 곧 자신이 어떤 영적 영향(influx)을 받는지와 직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작위적인 만남이나, 감정적 친분 중심의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영들과의 교류까지 경험했던 그였기에, 외적 사람 뒤에 있는 내적 상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사람을 만나는 기준도 자연스럽게 ‘이 만남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가’로 좁혀졌습니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영적 위생’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말을 나누는 것’ 자체에도 분명한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아무에게나 쉽게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매우 평범한 주제—정치, 과학, 일상—로 대화를 나누었고, 깊은 영적 내용은 책을 통해서만 전달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들으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배려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만남 속에서도 ‘내적 진리를 직접 주입하지 않는’ 절제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외적 교제보다 내적 교제’를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진짜 교류는 육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수많은 천사들과 더 깊이 교제하고 있었고, 지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그의 삶의 밀도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혼자 있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항상 내적 중심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만남이 사명을 방해하는가, 돕는가’, 둘째,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 영적 영향을 주는가’, 셋째, ‘이 대화가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능한가’입니다. 이 세 기준 아래에서 그의 만남은 매우 제한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깊고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조용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극도로 밀도 높은 삶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바로 그 직감, 곧 ‘시간 시간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는 시간을 줄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만남을 제거함으로써 시간의 본래 밀도를 회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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