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2 심화 1,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여섯째 날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AC를 처음부터 따라온 독자라면 AC.13에서 이미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13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사실은 누구나 결국 일곱째 상태에 이른다거나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일곱째 상태를 완성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거의 없다 아무도   없다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scarcely는 문자 그대로 거의 없다’, ‘좀처럼 없다는 뜻이지 절대로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AC.62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 여섯 단계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입니다. 일곱째 상태의 성질을 AC.62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C.62 한 문장만 가지고 여섯째 날은 영적 천국이고 일곱째 날은 천적 천국이다’, 또는 모든 사람은 여섯째 날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체계를 만들면 본문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AC.13으로 돌아가 보면 첫째 상태에서 일곱째 상태까지의 전체 윤곽이 이미 간단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일곱째 상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상태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일곱째 상태가 매우 높은 거듭남의 상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도달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마지막 단계인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정확히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충분히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통계나 운명론으로 바꾸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극소수인가?’, ‘나는 영적 유형으로 태어났으니 애초에 일곱째 상태에는   없는가? 같은 질문이 곧바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13 AC.62는 사람들을 출생 때부터 두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글만으로 누가 처음부터 영적 인간형이고 누가 천적 인간형인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온순하고 다정한 성격이면 천적 인간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이면 영적 인간이라는 식으로 사람의 자연적 기질을 스베덴보리의 영적 천적에 그대로 대응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AC가 사용하는 용어보다 훨씬 피상적인 구별이 됩니다.

 

그러면 AC.13 거의 없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가장 먼저 거듭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과 이어지는 일곱째 상태는 며칠 동안 몇 가지 종교적 체험을 하면 끝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62가 굳이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낙심의 근거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AC.62의 초점은 너는 몇째 날까지   있느냐를 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처음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도 나는 일곱째 상태에 들어갈  있을까?라는 자기 등급 판정보다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거의 없다는 말을 보고 그 상태에 이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내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여섯째 상태이고 누가 일곱째 상태인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AC.13이나 AC.62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보다 거듭남이 얼마나 깊은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의 순서를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입니다. AC.62 역시 이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지를 말합니다. 일곱째 날은 곧 이어지는 창2:1-3의 말씀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AC.13은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 표현을 약화시킬 필요도, ‘아무도 없다고 강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AC.62는 사람이 여섯 창조의 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진술을 그대로 붙들고, 일곱째 상태와 천적 인간의 더 깊은 관계는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할 때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독법은 답을 조금 늦추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AC를 더 정확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체계화하기보다, 말씀과 AC가 열어 주는 순서를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남 자체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고 하듯, 그것을 이해하는 일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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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AC.62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지금까지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어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글입니다. 말씀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C.62는 이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고 하며, 그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으로 읽어 온 앞의 모든 설명이 여기에서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는 셈입니다.

 

먼저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단순히 여섯 개의 종교적 지식이나 여섯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지나가는 상태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무엇을 여섯 가지 배운다는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62는 이것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 역시 하나의 창조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의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는 말에서도 창조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전혀 인간이라 없는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아니라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C.49에서도 참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는 만큼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혀 인간이라 없다는 강한 표현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은 AC.62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다른 사람의 인간 자격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얼마나 근본적인 새 창조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AC.62에서 특히 아름다운 표현은 그 다음의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사람은 전혀 인간이라 없는상태에서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 뒤 조금씩 조금씩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거듭남이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물 것입니다.

 

여기서도 원문이 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했다고 해서 이번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세부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단계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나 오래 걸리며, 반드시 어떤 후퇴를 몇 번 겪어야 하는지까지 AC.62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by degrees’, 곧 단계적으로, ‘by little and little’, 곧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AC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거듭남의 상태로 읽는다고 해서 나는 지금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인가?를 판정하는 영적 등급표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2는 사람에게 자기 단계를 측정하라고 하기보다, 거듭남이 주님의 창조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 표현은 앞의 AC.26부터 이어져 온 창1:26-27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외모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주님에게서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특히 AC.51-53형상과 신앙, 이해의 관계를 설명했고, AC.60-61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여섯째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AC.62는 그 흐름을 받아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는 것을 곧 거듭남의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여섯째 날 뒤에 일곱째 날로 이어지고, AC 역시 일곱째 상태를 따로 설명합니다. AC.6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무엇이며 여섯째 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 내용을 직접 다루는 글에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점을 지키면 그러면 여섯째 날에 완성되었는데 일곱째 날이 필요한가?’, ‘모든 사람이 결국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영적 천국에 사람과 천적 천국에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가?같은 질문을 이번 한 문장에서 억지로 모두 해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은 AC 전체를 읽으면서 충분한 근거가 모였을 때 다루어야 할 큰 주제들입니다. AC.62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의미를 요약하는 글입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라는 표현도 너무 빨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 거듭남의 여섯 상태가 단 한 번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류 전체의 역사에도 정확히 여섯 단계가 있고, 사람의 생애에서도 같은 여섯 단계가 계속 반복된다는 완성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떻게 펼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AC.62의 핵심은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창1:31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라는 말씀도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을 품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날의 빛에서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심히 좋았더라에 이르기까지, AC는 이 창조의 말씀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AC.62는 그 긴 흐름을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해 둘 표현을 하나 고른다면 조금씩 조금씩이어도 좋겠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단번에 높은 상태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심화

1.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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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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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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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으로 저는 단순히 이해’(理解)를 선호합니다. 이해력’, 사고력 등 여러 번역이 있고, 그 이유와 배경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말입니다.  이해라는 번역이 많이 낯설어 꼭 다른 번역이 필요하다면, 저는 이해하는 능력으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의지 또한 의도하는 능력으로 같이 바꾸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understanding’을 이해’로 두시려는 방향은 충분히 타당하고, 오히려 AC 전체를 일관되게 읽어 나가는 데에도 좋은 선택입니다. 다만 핵심은 이해’를 단순한 결과(알아진 상태)가 아니라 작동하는 기능(능력)’으로 읽히도록 어떻게 보완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로 두되,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시는 방식은 매우 균형 잡힌 접근입니다.

 

먼저 왜 이해’가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짚어보면 분명해집니다. 한국어에서 이해’는 보통 이미 알아버린 상태’, 즉 결과로 느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nderstanding’은 단순히 알고 있음’이 아니라, ‘판단하고,분별하고, 받아들이고, 연결하고, 형성하는 살아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이 이해력’, ‘지성’, ‘사고력 같은 표현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번역들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해력’은 능력은 살리지만 딱딱하고, ‘지성’은 철학적으로 들리고, ‘사고력’은 범위가 너무 넓어집니다. 반면 이해’는 가장 자연스럽고, 성경 읽는 흐름에도 잘 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처럼 이해’를 기본으로 두고, 독자가 오해할 수 있는 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방식이 실제 목회와 설교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이제 의지’와의 짝을 보시면 더 또렷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항상 understanding - will’입니다. 이것을 이해 - 의지’로 두면 간결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이해하는 능력 -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도 아주 정확한 접근입니다. 특히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이 설명이 훨씬 와닿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하실 점이 있습니다. 매번 이해하는 능력’,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면 문장이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식은 이렇게 보입니다. 기본 텍스트에서는 이해 - 의지’를 유지하고, 처음 설명할 때 한 번만 여기서 이해는 단순한 앎이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라고 풀어 주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이해’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자와 청중 모두에게 가장 부담이 적습니다.

 

이걸 실제 설교 흐름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단순한 의욕이 아니라, 무엇을 원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한 번만 정확히 잡아 주면, 이후에는 이해’와 의지’만 써도 청중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해’라는 번역은 충분히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살아 있는 기능’이라는 점을 초기에만 분명히 밝혀 주면 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은 매우 좋은 보완 방식입니다. ‘의지 - 의도하는 능력’과의 짝도 구조적으로 잘 맞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understanding 이해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보완 설명으로 살려 주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방법입니다.’

 

 

 

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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