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내용

The Contents

 

131. 여기서부터는 태고교회의 후손, 후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own, 라 proprium)을 향해 기울어진 사람들입니다.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3 is here treated of.

 

※ 여기 ‘자신들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진’의 의미는, 자치(自治, autonomy)를 얻고자 분투했다(strive for autonomy)는 뜻으로, 주님에게서 벗어나 독립하고자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분투할 게 따로 있지!

 

※ 아주 중요한 주석 #3. 라틴어 ‘프로프리움’(proprium)은 여기 이 본문과 다른 여러 곳에서 ‘오운’(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온, 원전(the original text)에 사용된 용어입니다. Critical Notes 3.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프로프리움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 ‘아무개의 것, 소유’(one’s own), ‘적절한’(proper), ‘아무개 자신에게만 속한’(belonging to one’s self alone), ‘특별한’(special), ‘특정한’(particular), ‘특유한’(peculiar) 등입니다.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이 프로프리움이라는 말이 중성(neuter) 명사로 사용되었을 때의 의미는, ‘소유’(possession), ‘재산’(property), 또 ‘어떤 특이점’(a peculiarity), ‘특징점’(characteristic mark), ‘구별점’(distinguishing sign), ‘특징’(characteristic) 등입니다.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영어 형용사 ‘오운’(own)을 웹스터에서 보면 그 의미를 ‘...에 속한’(belonging to), ‘...에 독점적으로 혹은 특별하게 속한’(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특유한’(peculiar) 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운’이야말로 ‘프로프리우스’(proprius, 형, 고유한)에 딱 맞는 번역이지 싶고요, 라틴어 ‘프로프리움’(proprium)에 맞는 말을 찾기 위해, 이 ‘오운’을 명사로 쓰면, 그거야말로 정말 가장 근접한 최상의 번역이 아닐까 합니다. [편집자역]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로는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혹은 자신의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연유로, 여기서는 그런 인간에게 환영받는 인간 자신의 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18절)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 즉, 이 절은,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인류에게 생겨난 자율성(自律性), 곧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대신 자신이 세운 원칙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경향을 다루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133. 그래서 먼저 그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그에게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주어지는데, 이것들은 주님이 그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20절) 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 선과 진리 및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주님의 신성, 곧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주님 자신을 주시지만, 그러나 인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를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본성이며, 심지어 천국 천사들마저 그래서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만큼 천사다’ 할 정도입니다.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운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성향, 자치, 자율 성향을 보인다는 뜻입니다.

 

 

134. 이런 이유로, 인간은 자기 본성에 속한 어떤 상태 안으로 들어가고(let into), 다른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이 여자(a woman)로 빚어진 갈빗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21-23절)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 즉, 일종의 자치 상태(a state of self-governance)로 옮겨지고, 어떤 자율성(a sense of autonomy)이 주어지는데, 이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135. 천적, 영적 생명과 인간의 본성(the man’s own)은 서로 인접, 아주 밀접하게 붙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입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 ‘인간의 본성’은 독립성(獨立性, the sense of independence)을 말합니다.

 

 

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듭니다.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25절)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 무례한 존재, 불쾌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신다는 뜻으로, 인간이 그 본성상, 독립하고자 하는 건 어쩔 수 없으나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주님 앞에 무례하고 불쾌한 존재가 되는 것은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살피시며, 배려하십니다.

 

 

속뜻

The Internal Sense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敎會,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첫 시기부터 끝에 가서 사라지게 될 때까지, 이 교회를 가리켜 ‘사람’(man, homo, 천적 인간)이라고 했는데요, 이 장의 전반부에서는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상태를 다루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 자기 사랑, 곧 주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태도가 모든 악과 거짓,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https://youtu.be/gSH2dMR1p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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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126.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Verse 17.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지금까지 설명된 내용과 함께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perception)으로 진리와 선에 익숙해져 가는 것은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는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the mysteries of faith)를 감각과 지식에 관한(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것으로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the celestial of faith)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12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지식에 관한 것을 가지고 조사하고자 함, 이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후손의 몰락의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가 몰락하는 원인입니다. 여기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 또한 나오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 목회의 성공을 교인 수와 헌금 수입으로 가늠하고자 하는 일련의 세속적 태도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말씀 풀이를 비록 ‘창조’라는 표현을 덧댔지만 어쨌든 ‘과학’으로 풀려는 시도 및 원어 연구를 통해 접근하려는 일련의 노력 등도 사실은 안전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시보다는 감각과 세상 지식을 더 의존하려는 경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128. 세속적이고 육적(肉的)인(worldly and corporeal) 사람은 속으로 말하길, ‘만일 내가 신앙과 신앙 관련 모든 것에 관해, 감각적인 것(the things of sense)을 가지고, 그래서 내가 눈으로 볼 수 없거나, 그리고 지식적인 것(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을 가지고,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나는 안 믿을 거야.’라고 말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서로 반대될 리 없다는 생각으로 더욱 굳어집니다(confirms himself).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 사실, 이런 태도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태도 중 하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은 오직 1단계, 즉, 자연적인 단계만 열렸기 때문인데요, (사실, 이건 ‘열렸다’ 하기도 좀... ) 영적, 천적인 선택지가 있음을 알 수 있으려면, 2단계, 3단계가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은 천적이며 신적인(celestial and Divine, 天的, 神的) 것을 감각적인 걸 가지고 접근하고자 아주 간절해지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이런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더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사실은 자신을 더욱더 소경이 되게 할 뿐이며, 그는 결국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영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 혹은 영생의 존재까지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이런 건 처음에 그가 가정했던 원리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이런 것이 바로 ‘선악 관련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먹으면 먹을수록, 먹는 그는 죽게 됩니다.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그리고 세상으로는 아닌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곧 말씀(the Word)에서 주님이 말씀하신(has spoken) 것들은 진리이므로 반드시 믿어야 해.’ 그리고 이걸 원리 삼아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정합니다(regulat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그는 이성(reason, 합리), 지식, 감각, 그리고 본능에 관한 것을 가지고 점점 더 확신 가운데 거하며,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그는 버립니다(casts aside).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129. 사람들은 다 아는 건데요, 인간은 자기가 가정한 원리들(the principles he assumes)에 의해 다스려지며, 자기의 모든 지식과 이성(reasoning)은 이 원리들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걸 말입니다. 어쩌면 이 원리들 자체가 몹시도 거짓된 것일 수 있는데도 말이죠. 인간이 이토록 어처구니없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원리들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무수한 생각들(considerations)이 그의 마음에 계속되면서 그는 드디어 거짓된 것(what is false) 안에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 분명히 주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하셨고, 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셨으며, 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 등등 정말 많은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먹고 사는 것이다!’ 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런 거짓된 가정을 자신의 중심 원리로 세운 사람은 다른 모든 권면이 다 쇠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맙니다.

 

이런 이유로,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걸 하나의 중심 원리로 정한 사람은 결코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무슨 마음속으로 상상,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반면, 참된 질서, 올바른 순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후 모든 것이 뒤를 따르며, 이 사람은 눈이 밝아지는데 심지어 이성(reason) 및 그동안 습득한 지식(memory-knowledge)의 일들에서도 그렇게 됩니다.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 즉, 그동안 역기능을 하며, 잘못된 쓰임새로 쓰임 받던 이성과 지식이 정상으로 회복됩니다. 사람이 세상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기를 선택하면 더욱 아름답고 향기로운 이성적 사고를 하게 되며, 그동안 학습하여 습득한 세상 지식 역시 그 쓰임새가 180도 달라져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 쓰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과학을 배우는 것 금지가 결코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며, 아주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이 신앙 안에 있다고 해서 세상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 금지도 아닙니다. 대신 다음의 원리, 곧 ‘주님 말씀을 믿음’이라는 원리로 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가능한 한,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영적, 천적 진리들을 확증하되 학자들에게 친숙한 그런 용어들을 써서 해야 합니다.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바리새 및 사두개 등 당시 종교 엘리트들의 지독한 지적, 교리적 논쟁에서 결코 밀리지 않으셨습니다.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매번 그들로 하여금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으나 할 말이 없음) 할 수밖에 없게 만드셨습니다. 주님의 지혜, 천국 지혜는 다른 차원의 지혜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요셉도, 다니엘도 왕들과 나라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 편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오히려 어깨를 펴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모든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고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130. 세상으로 지혜로워지기를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동산’을 위해 감각 및 지식과 관련된 것들을 추구합니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에게는 ‘에덴’이며, 그에게 있어서 ‘동쪽’은 서쪽, 혹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은 그가 가진 모든 세상 지식인데, 이것은 비난을 받게 되며, 그의 ‘두 번째 강’, 거기가 ‘앗수르’인데, 거짓을 지어내느라 정신이 나간 것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 거기는 ‘에디오피아’인데, 이것은 여기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원리들로서, 그가 가진 신앙 관련 지식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은 거기서 나오는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걸 ‘마술’이라 부릅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그래서 ‘애굽’은, 이것은 기억-지식을 상징하며, 이 지식이 나중에 마술이 되었지요. 애굽은 이런 사람을 상징하는데, 말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사람은 자아(self)로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이와 관련, 에스겔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 선지자는 또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하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 이라 하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바로(Pharaoh), 혹은 애굽인이 다음과 같은 말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 ‘에덴의 나무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식을 가리키는데, 이 지식을 저들은 이성으로 모독하는(profane by reasonings) 것입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1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속뜻)

주님의 신비는 오직 퍼셉션으로만 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D3UJ9RxLd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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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125.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Verse 16.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각종 나무를 먹는 것’, 퍼셉션(perception, 知覺)으로 선한 것과 참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앞서 관찰한 것처럼(AC.103), ‘나무’는 퍼셉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o “eat of every tree” 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 “tree” signifies perception.

 

태고교회 사람들은 참된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시(啓示, revelations)로 얻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대화하였고, 천사들하고도 그랬으며, 또한 비전과 꿈으로(by visions and dreams)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그들에게 정말 기쁘고 행복한 천상 낙원의 경험과 같은(most delightful and paradisal) 것들이었습니다.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ad the knowledges of true faith by means of revelations, for they conversed with the Lord and with angels, and were also instructed by visions and dreams, which were most delightful and paradisal to them.

 

※ 계시,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함’이며, 묵시(默示)라고도 합니다. 주님에 관한 것을 세상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주님의 것, 곧 퍼셉션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퍼셉션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그래서 고이 간직하고 있던 어떤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들은 그 기억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각적으로 지각했으며, 만일 그 가운데 어떤 거짓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들은 그것을 피할 뿐 아니라 몸서리를 쳤습니다. 이런 게 또한 천사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 퍼셉션에 관한 이전 글들(AC.104)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태고교회의 이런 퍼셉션이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tio])으로 대체되어 계승되었는데, 이 지식은 앞서 지금까지 밝혀진 것과, 나중에 말씀에 계시된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 쉽게 말씀드리면, 퍼셉션으로 직접 접하던 것을, 문자와 언어, 기록된 말씀으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어려워졌고, 더 미개해진 것인데,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더 어두워지고, 더 감각의 사람,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16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에게 퍼셉션을 늘 공급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 퍼셉션으로 주님,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알게, 직관하게 하셨습니다.

 

 

※ 우리말 번역은 원문에도 없는 ‘열매’를 추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함으로써 아케이나가 더욱 흐릿하게, 안 보이게 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18B1v-90w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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