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

 

1553. 3절,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Verse 3. And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at the first, between Bethel and Ai.

 

그가 길을 떠나’, 질서(order)를 따라, ‘네게브(남쪽, the south)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며’, 총명의 빛(the light of intelligence)으로부터 출발, 지혜의 빛(the light of wisdom) 안으로,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어린 시절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가지고 계셨던 거룩한 것들에, ‘벧엘과 아이 사이’, 여기, 곧 앞 내용처럼, 지식의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들,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signifies according to order;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signifies from the light of intelligence into the light of wisdom;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before” signifies to the holy things which there were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between Bethel and Ai” signifies here, as before, the celestial things of knowledges, and worldly things.

 

 

1554. 그가 길을 떠나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이것이 ‘질서를 따라, 순서대로’라는 의미임은, ‘’(journeys)의 의미가 다음 단계들로 더욱 나아감이라는 사실에서(관련, AC.1457 참조)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질서를 따라, 순서대로 일어났기 때문에 여기 ‘’은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according to ord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ourneys” as being further progressions (concerning which, see n. 1457); and as these were made according to order, “journeys” here signify nothing else.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님은 모든 신적 질서(Divine order)를 따라 천적인 것들을 향해 나아가셨으며, 아브람에 관한 기록을 통해 이런 질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그 속뜻입니다. From his earliest infancy the Lord advanced according to all Divine order to celestial things, and into celestial things; and in the internal sense, the nature of this order is described by what is said concerning Abram.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음 받는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질서를 따라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는 사람마다 매우 다양한데요, 그것은 각 사람의 성정과 타고남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According to such order also are all led who are being created anew by the Lord; but this order is various with men, according to the nature and genius of each one.

 

그러나 사람이 거듭날 동안 이 질서가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는지는 그 어떤 사람한테도, 심지어 천사들한테도 대략적으로만 허락됩니다. 오직 주님만 홀로 아십니다. But the order by which a man is led while being regenerated is known to no man, and not even to the angels, except obscurely, but to the Lord alone.

 

 

1555. 네게브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며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이것이 ‘총명의 빛으로부터 출발, 지혜의 빛 안으로’라는 의미임은, ‘네게브’의 의미가 총명의 빛, 혹은 같은 말이지만, 내면을 비추는 빛의 상태(AC.1458번 글 참조)라는 점과, ‘벧엘’의 의미가 지식들로 말미암아 열리는 천적인 빛(AC.1453번 글 참조)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from the light of intelligence into the light of wisdo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south” as being the light of intelligence, or what is the same, a state of light as to the interiors (spoken of before, n. 1458);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celestial light arising from knowledges (concerning which before, n. 1453).

 

이것을 총명의 빛이라 하는데, 이 빛은 신앙에 관한, 선과 진리의 지식으로 얻어지는 빛입니다. 반면, 지혜의 빛은 그렇게 살 때, 즉, 총명의 빛으로 살 때 생기는 생명의 빛입니다. That is called the light of intelligence which is procured by means of the knowledges of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but the light of wisdom is that of the life which is thence acquired.

 

총명의 빛은 지적(intellectual) 파트, 혹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관한 것이지만, 지혜의 빛은 의지(the will) 파트, 혹은 생명(삶)에 관한 것입니다. The light of intelligence regards the intellectual part, or the understanding; but the light of wisdom regards the will part, or the life.

 

[2] 거의 없지만, 만약 있다면, 극소수의 사람만이 사람이 어떻게 참된 지혜에 이르게 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Few, if any, know how man is brought to true wisdom.

 

총명은 지혜가 아니며, 지혜로 인도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참되고 선한 사람인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건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실제로 지혜로와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Intelligence is not wisdom, but leads to wisdom; for to understand what is true and good is not to be true and good, but to be wise is to be so.

 

지혜는 오직 삶으로만, 사람이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만, 지혜롭다 할 수 있는 겁니다. Wisdom is predicated only of the life—that the man is such.

 

사람은 아는 거, 곧, 지식을 통해서 지혜나 생명을 접하게 됩니다. A man is introduced to wisdom or to life by means of knowing [scire et nosse], that is,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 그렇다고 지적 추구, 지식 습득이 소용 없다거나 무슨 저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혜에 이르려면 일단 뭘 배워 아는 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지식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천적 지혜, 주님의 지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식의 쓰임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파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the will), 즉, 마음먹는 능력, 결심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the 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 배우는 능력입니다. 의지가 메인 파트고, 이해는 보조입니다. In every man there are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the will is the primary part, the understanding is the secondary one.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후 삶(死後, life after death)은 그의 의지 파트를 따른다는 겁니다. 지적(intellectual) 파트가 아니고 말입니다. Man’s life after death is according to his will part, not according to his intellectual part.

 

의지는 사람 안에서 그의 유아기부터 어린시절까지 주님에 의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밀어넣으시는 이노센스(innocence, 순진)에 의해, 그리고 부모, 보모(保姆, nurse) 및 같은 연령대 어린이들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자선, 관용, 너그러움)에 의해, 그리고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천적인, 다른 많은 일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The will is being formed in man by the Lord from infancy to childhood, which is effected by means of the innocence that is insinuated, and by means of charity toward parents, nurses, and little children of a like age; and by means of many other things that man knows nothing of, and which are celestial.

 

사람이 유아 및 어린이일 동안, 먼저 사람 안에 이들 천적인 것들이 주입되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Unless these celestial things were first insinuated into a man while an infant and a child, he could by no means become a man.

 

첫 번째 면(plane)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first plane.

 

[3] 그러나 사람은 또한 이해하는 능력이 부여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의지만으로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이 함께 해야 사람입니다. 또 이해하는 능력은 지식 없이는 생기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어린 시절 주님은 서서히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나가야만 하셨습니다. But as a man is not a man unless he is endowed also with understanding, will alone does not make the man, but understanding together with will; and understanding cannot be acquired except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and therefore he must, from his childhood, be gradually imbued with these.

 

두 번째 면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second plane.

 

이 지적 파트가 학습을 통해 지식들, 특별히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을 얻게 되는 이때가 일단은 사람의 거듭남의 시동이 걸릴 수 있는 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의 안에서 거듭남이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되면, 이때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이식(移植, implant)됩니다. 이 이식은 주님에 의해 그의 유아 시절부터 무상으로 공급되어 온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일어나며, 이 이식의 결과, 그의 지적인 것들과 그의 천적인 것들이 하나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이 그것들과 결합하시면서, 사람은 이번에는 체어리티를 무상으로 공급받으며, 드디어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 체어리티는 양심에 속하게 됩니다. When the intellectual part has been instructed in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especially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good, then first can the man be regenerated; and, when he is being regenerated, truths and goods are implanted by the Lord by means of knowledges in the celestial things with which he had been endowed by the Lord from infancy, so that his intellectual things make a one with his celestial things; and when the Lord has thus conjoined these, the man is endowed with charity, from which he begins to act, this charity being of conscience.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처음으로 새 생명을 받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차근차근 일어납니다. In this way he for the first time receives new life, and this by degrees.

 

이 생명의 빛을 지혜라 하며, 첫 자리를 차지하고, 총명 위에 자리를 잡습니다. The light of this life is called wisdom, which then takes the first place, and is set over the intelligence.

 

이렇게 세 번째 면이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third plane.

 

사람이 몸 안에 있을 동안 이렇게 되면, 사후에도 계속해서 완벽해지는 가운데 있게 됩니다. When a man has become like this during his bodily life, he is then in the other life being continually perfected.

 

이상의 내용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총명의 빛이 무엇이며, 지혜의 빛이 무엇인지 하는 것입니다. These considerations show what is the light of intelligence, and what the light of wisdom.

 

 

1556.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before.

 

이것이 ‘어린 시절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주님 안에 있었던 거룩한 것들에’라는 의미임은, ‘장막’(tent)의 의미가 신앙의 거룩한 것들인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 AC.414, 1452 및 방금전까지 말씀드린 것 참조). 그래서 이것의 의미가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천적인 것들에’임은 앞 장에서 말씀드린,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창12:8)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이때는 애굽으로 출발하시기 전, 그러니까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o the holy things which there were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tent,” which is the holy things of faith (concerning which, n. 414, 1452, and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it thus signifies to the celestial things which the Lord had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a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Abram removed from thence un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pitched his tent” (verse 8); which was before he departed into Egypt, that is, before the Lord was imbued with knowledges.

 

 

1557. 벧엘과 아이 사이 Between Bethel and Ai.

 

이것이 ‘지식의 천적인 것들과,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의미함은 ‘벧엘’의 의미, 곧 지식으로 말미암은 지혜의 빛인 점(AC.1453 참조)과, ‘아이’의 의미가 세속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빛인 점을(AC.1453 계속 참조)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celestial things of knowledges, and worldly thing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which is the light of wisdom by means of knowledges (see n. 1453);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Ai,” which is the light from worldly things (also spoken of in n. 1453).

 

거기 언급된 걸 보면, 그때 주님의 상태는 아이같은 순진한 상태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상태는 세속적인 것들이 섞여있는 상태인데요, 세속적인 것들은 진리와 선이 지식을 통해 천적인 것들에 심기기 전까지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 세속적인 무엇인지를 알 때까지는 천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is there said, it may be seen what the Lord’s state then was, namely, that it was childlike; and the state of a child is such that worldly things are present; for worldly things cannot be dispersed until truth and good are implanted in celestial things by means of knowledges; for a man cannot distinguish between celestial and worldly things until he knows what the celestial is, and what the worldly.

 

지식은 평범하고 흐릿한 아이디어를 또렷하게 하며, 지식으로 그 아이디어를 더 또렷하게 할수록 세속적인 것들이 더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Knowledges make a general and obscure idea distinct; and the more distinct the idea is made by means of knowledges, the more can the worldly things be separated.

 

[2] 하지만 아이같은 상태는 여전히 거룩합니다. 순진하기(純眞, innocent) 때문이지요. But still that childlike state is holy, because it is innocent.

 

무지(無知, ignorance) 안에 순진이 있을 때, 무지하다고 해서 결코 거룩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거룩은 순진한 무지 안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Ignorance by no means precludes holiness, when there is innocence in it; for holiness dwells in ignorance that is innocent.

 

주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경우, 거룩은 무지 안에서 홀로 거주할 수 있습니다. 무지가 아니면 그들은 절대 거룩할 수 없습니다. With all men, except with the Lord, holiness can dwell solely in ignorance; and if not in ignorance, they have no holiness.

 

가장 높은 총명과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 본인의 경우에도 거룩은 여전히 무지 안에 거주합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들이 무엇을 알고 있든지 그것은 다 주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With the angels themselves, who are in the highest light of intelligence and wisdom, holiness also dwells in ignorance; for they know and acknowledge that of themselves they know nothing, but that whatever they know is from the Lord.

 

그들은 또 알고 인정하기를, 그들의 모든 기억-지식과 총명, 그리고 지혜는 주님의 무한하신 지식과 총명, 그리고 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무지입니다. They also know and acknowledge that all their memory-knowledge, intelligence, and wisdom, is as nothing in comparison with the infinite knowledg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Lord; thus that it is ignorance.

 

자기가 습득한 것들을 초월하는, 자기가 미처 습득하지 못한 것들이 무한히 존재한다,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천사들의 상태인 거룩한 무지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He who does not acknowledge that there are infinite things with which he is not acquainted, beyond those with which he is acquainted, cannot be in the holiness of ignorance in which are the angels.

 

[3] 거룩한 무지라는 건 남들보다 더 무지, 무식해지는 걸로 되는 게 아니고, 대신 몇 가지, 곧 사람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가 아는 것에 비해 모르는 것은 무한하고, 특히 자기가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들은 천적인 것들에 비하면, 즉 이해에 속한 것들은 생명에 속한 것들에 비하면 정말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그런 걸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The holiness of ignorance does not consist in being more ignorant than others; but in the acknowledgment that of himself a man knows nothing, and that the things he does not know are infinite in comparison with those he does know; and especially does it consist in his regarding the things of the memory and of the understanding as being of but little moment in comparison with celestial things; that is,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in comparison with the things of the life.

 

주님의 경우, 주님은 인성(things human)을 신성(things Divine)과 결합해나가실 때, 질서를 따라 진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처음 어린시절 가지셨던 그 천적 상태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상태는 세속적인 것들도 있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As regards the Lord, as he was conjoining things human with things Divine, he advanced according to order; and he now for the first time arrived at the celestial state such as he had had when a child; in which state worldly things also were present.

 

이 상태에서 여전히 더욱 더 천적 상태로 나아기심으로써, 주님은 마침내 유아기 천적 상태에 이르셨고, 이 상태에서 주님은 그 인성(the human essence)을 신성(the Divine essence)과 온전히 결합하셨습니다. By advancing from this into a state still more celestial, he at length came into the celestial state of infancy, and in this he fully conjoined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essen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3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부지런히 접하신 모든 지식으로 총명해지시고, 그 총명의 빛으로 지혜의 빛, 곧 어린 시절 간직하신 천적인 것들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셔서 마침내 도달, 인성과 신성을 하나되게 하셨다

 

※ 주님 안에서 지식, 곧 세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바른 쓰임새 가운데 있음을, 즉, 주님을 지성에서 영성으로, 총명에서 지혜로 인도하도록 사용됨을 봅니다. 우리도 거듭남 가운데 있는 동안 주님이 허락셔서 접하게 되는 많은 지식들을 그렇게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듭 반복되지만, 주님은 한눈팔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이미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이르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본받아 거룩한 집중, 신성한 몰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021-11-05(D6)-매일예배(2226, AC.1553-1557, 창13,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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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4sly6atnw8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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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분들은 크게 주님과 나머지 모두로 양분해야 합니다. 나머지 모든 분은 그저 주님의 빛을 대신 반사, 은은한 달빛의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이지 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해이십니다. 그러나 해는 직접 보기엔 너무 눈이 부셔서, 주님은 그 빛을 달처럼 대신 반사, 우리로 하여금 이들을 통해, 해처럼 빛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둘은 이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분들은 생전 책 한 권 직접 쓰거나 남기지 않고 가셨다는 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어록이니 책이니 뭘 친히...

 

이분들은 우리처럼 무슨 종이에 남기시는 대신 사람들의 마음, 심비(心碑)에 새기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접하는 모든 기록은 이분들을 직접 만났던 당대 사람들의 증언에서 나온 것입니다

 

같은 책이라도 그래서 이런 책, 이런 기록은 그 무게감이 다르며, 그 감동이 차원이 다릅니다. 법적 용어로는 검사가 작성한 조서(調書)와도 같은 것입니다 ^^

 

거의 매일 번역의 일과 글 쓰는 일을 하는 저로서는 두 가지를 결심하게 됩니다

 

하나는, 나도 내 얘기보다는 나를 만나주신 주님 이야기를 하자! 이분들도 자기와 함께 동행하신 주님 이야기로 살다 가신 것처럼, 그래서 주님을 빛반사하는 달로 살다가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다가야지... 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내 실제 삶은 이런데 글에서는 저런 것처럼 거짓의 글은 쓰지 말아야지... 목회자로서 나는 내가 사는 만큼 설교하고, 설교하는 만큼 살아야지... 하게 됩니다.

 

아! 특히 이 후자는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지요!!!

 

오, 주님, 제가 블로그를 운영하며, 유튜브에 올리는 그 동기를 하감(下鑑)하시오며, 스마트폰과 세상 뉴스로부터 물러나서 주야로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시선을 고정하는, 맑고 밝은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아멘아멘, 영원히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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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여러 재미난 특징 중 하나는 천국은 자기의 내면이 열린 만큼만 누릴 수 있는 데라는 겁니다

 

이걸 좀 응용하면, 그래서 사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데가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

 

자기 역량만큼만 담을 수 있으며 누릴 수 있는 덴데, 우리 주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이셔서 항상 부어주시거든요! 할렐루야!

 

자기가 아주 조그만 종지이든, 또는 태평양을 다 담을 정도이든 주님은 얼마든지 부어 넘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뭐뭐만큼이라는 원리(?)를 삶에 조금 응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에서 좀 생각을 해 보면... 늘 아래와 같은 시선을 갖는 겁니다

 

지금 이분이 듣고자 하시는 대답, 또는 이 애가 듣고싶어 하는 말이 뭘까?

 

지금 이분이 원하시는 게, 이 애가 바라는 게 뭘까?

 

무슨 아첨을 하라는 게 아니지요. 주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르면 안 되지요... ^^

 

지혜롭게, 그리고 살피는 시선을 가지며,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는,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오지랖의 경계를 잘 판단하시고... ^^

 

지금 저분의 역량이 어느 정도일까, 이 아이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일까를 살펴 대하라는 것입니다

 

감당하실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무엇을 하면, 아무 유익도 없거니와 오히려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걸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알리고 전할 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자, 이걸 또 역으로 적용하면,

 

지금 나는 저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싶을 때, 화를 내거나 싸늘해지는 대신,

 

왜 이런 얘길 주님은 나로 하여금 듣게 하실까? 주님은 왜 나한테 저런 사람을 허락하셨을까? 등등...

 

또는

 

주님, 저는 이 모든 일이 주님의 허락하심, 주님의 섭리로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주님,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또는 왜 저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지... 제게 빛을 비춰 깨닫게 해주셔요

 

이렇게 매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 여쭙는 것이 좋습니다 ^^

 

만물이 다 주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 안에 담겨 있는 주님 닮은 형상, 곧 주님의 신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것은 곧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신성, 곧 이웃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신 주님, 이웃으로, 부모자식으로, 선후배, 동료, 상사와 부하 등으로 내게 나타나신 주님께 피조물로서 예의바르게 행하는 것, 더욱 만물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마치 주께 하듯 ‘대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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