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43.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Verse 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자기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은 엄청나게 결실하며(fructify), 번성합니다(multiply). 몸 안에 사는 동안뿐 아니라 내세에서조차 어리둥절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to be fruitful)라는 건 사랑에 속한 걸,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to multiply)라는 건 신앙에 속한 걸 각각 말하는 겁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는 ‘’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배가합니다.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낱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들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도,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

 

※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를 통해 주님 알리신 이 아케이나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미미하고 세상에서 천대를 받고 변죽만 울리고 있습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 초창기에도, 아브라함 이후 유대교회 초창기에도, 주님 성육신 이후 기독교회 초창기에도 늘 시작은 아주 미미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은 저마다 오랜 세월 대하처럼 흐르는 시대별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새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각 시대 초기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福,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 이 원리가 동, 식물에게만 적용되겠습니까? 우리 사람도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그 하는 모든 일에 형통, 크게 번성, 번창할 줄 믿습니다. 요셉이 주님으로 말미암게 되자 그 안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지혜가 흘러 들어가 바로의 애굽 전역은 물론 주변국들까지 구원하는 큰일이 일어남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 복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 중심적으로 볼 때, 태양(해)의 질량은 지구의 약 33만 배, 즉 지구는 그만큼 정말 보잘것없는 행성입니다. 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구 하나를 비추고 덥히기 위해 그 큰 태양을 태우는 건 정말 큰 낭비가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그것도 언제나 늘 변함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해는 늘 이 지구를 비추지만 지구의 자전으로 어디는 낮일 때, 어디는 밤이 되고, 또 지구의 공전으로, 어디는 여름일 때, 어디는 겨울이 됩니다.

 

즉, 주님의 빛과 복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주님 책임이 아니라 우리 책임이라는 겁니다. 지구가 해를 바라볼 땐 낮이요, 봄, 여름이듯,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땐 주님의 빛과 복이 내 삶에 흘러 들어오는 것이며, 그게 바로 복 받는 삶인 것입니다.

 

23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Verse 2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 지난번 다룬 것처럼 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즉, 첫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르며,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세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나머지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 가운데서 사람은 비록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시며 동행하시지만 그렇다고 늘 하하호호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사람의 연약함 때문인데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또 어느새 자아를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요, 심지어 천국의 천사들조차 이런 상태 변화를 겪는다 하니 우리는 자신의 이런 연약함의 오르락내리락을 결코 이상하게, 또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건, 천사들의 증언처럼, 오히려 이런 굴곡을 통해 더욱 예리해져 가며, 더욱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을 통해, 우리는 더욱 성장, 성숙해져 가며, 그래서 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만큼, 그리고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내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더 성장, 성숙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2-23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속뜻)

주님은 마치 해가 잘 보이지도 않는 지구를 위해 늘 모든 정성을 다하듯 지으신 땅 위 모든 피조물을 위해, 즉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속 사람, 겉 사람을 위해 한결같으십니다.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는 모든 동, 식물이 자기들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생육하고 번성하듯, 속 사람, 겉 사람 안에 거듭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과 이해, 이성과 합리, 지성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사람은 여전히 또 자아를 향해 눈을 돌림으로 저녁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밤은 없습니다. 곧 다시 새벽이 오며, 아침이 될 것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완성, 곧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그러나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우리는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됩니다.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사고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 지식에 힘쓰고, 그걸 선용(善用, 쓰임새, use), 천적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창1,22-23, AC.43,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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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crdodWyh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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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주제는 ‘교회에 속했던 적이 없는데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인데요, 오늘 이야기를 끝으로, 이런 일대일 카톡 형태의 나눔 대신 제 개인 블로그(https://bygrace.kr/)를 통한 나눔 형태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1. 이렇게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보내는 건 ‘모든 건 자원(自願)함으로!’라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평소 늘 여겼기 때문이며,

 

2. 그래서 일종의 신앙,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요, 자칫 스토킹일 수도 있고,

 

3. 솔직히 말씀드리면, 보내고 나서도 매번 좀 마음고생 하는 것에 이젠 지쳤기 때문입니다.

 

4. 부연하여 하나 더 말씀드리면,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 공유를 정례화하다 보니 정작 제가 소명으로 받은 번역의 일에 전념할 수가 없게 되어 가고... 그래서 고민, 이건 아니다 판단,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동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오신 분들 계시면, 그분들껜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글을 안 쓰겠다는 게 아니고, 단지 지금까지 일일이 보내드렸던 것을 대신, 앞으로는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려 놓겠습니다 하는 것이니, 앞으로도 생각나실 땐 언제든 방문하여 보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그동안 정말 원치 않으셨는데 차마 말씀은 못 하시고 꾹꾹 참으셨던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저로선 ‘이 사실은 모두가 알아야 해!’ 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가 받은 모든 걸 나누고자 하였어도 그것이 상대방에겐 신앙을 빙자한,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사42:3)시는 주님을, 그리고 탤런트 김혜자 씨의 책 제목,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많이 생각한 며칠이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제 36장을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생전, 예수를 안 믿으면, 죽은 후 바로 지옥 가는데 아... 이걸 어째? 주님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하셨으니 내가 다소 좀 무례하더라도, 욕을 먹더라도 어떻게든 교회를 다니게, 예수를 믿게 해야겠다. 그것이 참된 도리요, 효도고, 우정이요, 사랑이다!

 

꼭 이대로는 아니어도 거의 많은 전도와 선교의 동기와 시도가 이런 비슷한 아이디어에서 연유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27년간 수시로 천국을, 영계를 왕래하면서 그는 거기서 정말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천국에 와 있음을 보았으며, 또 그들과 교류하였다는 사실인데, 그러면, 이는 어찜이며,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 행하는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눅13:29-30)

 

하신 것을 보면, 분명 살아생전 기독교 개신교인이 되어 예수영접기도를 해야만 천국 가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한, 그 사람의 내면이, 속 사람이 그 기도를 받쳐주는 한, 가장 좋은 경우이겠지만 말입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은 살아생전 선한 삶을 살았으며, 이웃을 사랑했고, 비록 그땐 몰라 주님 아닌 자기들의 무슨 우상을 경배하였지만, 그 경배는 과연 제대로 된 경배였으며, 기독교인들의 경배보다 훨씬 더 거룩하였고, 그들의 영의 상태가 신앙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내적 애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사랑에서 우러난 자비가 있었고, 그들의 무지에는 이노센스(innocence, 천진난만, 순진무구)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즉시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책 36장 본문에서 메인 아이디어를 얻어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

 

1. 천국은 신성(神性, the Divine)으로 충만한 나라다.

 

2. 주님의 신성은 사랑의 선(善, the Divine good)과 신앙의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다.

 

3. 진리(교리)는 선을 담는 그릇(recipient)이다.

 

4. 중요한 건, 그릇이 아니라 거기 담기는 내용물이다.

 

5. 단지 기독교의 그릇, 교리가 권장되는 이유는, 기독교에는 주님과 직접 결합할 수 있는 말씀(the Word)이 있기 때문이며, 그 말씀 아래 살아생전, 이미 밝고 환한 빛 가운데 천국 생활에 꼭 필요한 선으로 명료하게 준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이에 비해 타 종교는 흐린 초롱불이며, 초라한 그릇들이어서 어쩔 수 없다면 몰라도 가능하다면 이 밝은 빛 아래서, 이 좋은 그릇 안에서 신앙 생활하자 권하는 게 전도요, 선교다.

 

7. 주님의 마음, 주님의 시야는 온 세상이다.

 

※ 참고로, 전 세계 현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략적으로, 기독교 25억, 이슬람교 18억, 힌두교 11억, 불교 5억, 중국 전통 신앙 3억 9천 4백만, 부족 신앙 3억, 아프리카 전통 1억, 시크교 2천 3백만, 스피리티즘 1천 5백만, 유대교 1천 5백만 등, 이 외에도 계속되며,

 

여기서 기독교만 보더라도

 

가톨릭 53%, 개신교 40% (이중 주류 교단 17%, 독립교회, 초교파 19%), 성공회 4%, 정교회 11%, 기타 1.3% 등...

 

이 자료는 위키피디아 현재 자료에서 참조했습니다.

 

8. 비기독교인들, 생전에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 말씀을 들어본 적도, 접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그럼 어찌 되는가?

 

그들의 구원이 단순히 예수를 안 믿었다는 걸로,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걸로 결정된다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믿음이라는 거, 신앙이라는 거는 단지 그릇, 교리의 문제일 뿐인데, 그 그릇의 문제 때문에 천국을 못 간다면, 주님이 그런 신이시라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만인에게 공정한,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보다 시스템적인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누구라도 ‘’으로 준비되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시스템! 왜? 천국은 ‘’의 나라이므로...

 

9. 생전에 주님을 몰랐지만 자기 종교의 교리라는 그릇 안에서 ‘’한 삶을 살며, ‘’으로 준비된 자들은 천국 오리엔테이션 때,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정성을 다한 안내를 받고는,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 그것도 아주 흔쾌히, 아주아주 기뻐하며, 감사하며...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가 거기서 이루어지며 완성된다!

 

10. 주님은 심지어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영원히 사랑하신다. 그래서 지옥의 기운이 전체 피조 세계의 균형을 흔들 때, 그냥 쉽게 바로 지옥에 내려가 직접 교통정리를 하실 수 있는 분이 불편(?)을 감수하시고,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방문하신 것! 왜? 그래야 지옥이 소멸되지 않으니까...

 

주님은 천국보다 지옥보다 크신 분!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 이 세상이든 주님이 여호와의 신성 그 자체로 만일 이 피조 세계에 훅 들어오시면, 주님의 방문을 받은 그 세계는 그냥 바로 소멸됨!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삼층천 천사들조차 사실은 주님이 얇은 막을 입히셔서 소멸되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사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신데, 하물며 전 세계 67%에 육박하는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6, 70%에 육박하는 비개신교인들을 외면하실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은 개신교인들만의 하나님이실까?

 

...

 

네, 이상으로 저 36장의 내용을 제 나름대로 좀 풀어보았습니다. 좀 더 생생하고 실제 영계 체험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저 책 36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3년 전, 처음 저 내용을 접하고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몇 번이고 읽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편협한 기독교 개신교 침례교인이었는지 말입니다!

 

저는 지금은 장로교 통합 측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태생부터 밝은 빛 아래 말씀으로 양육 받을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셨던 주님께 무한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흔한 말로는 금수저도 이런 금수저가 없지요!

 

저 역시 그러나 그동안 이런 주님의 은혜를, 다른 입장, 다른 그릇이라는 환경 가운데 태어나 그런 신앙, 그런 종교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는 일에 힘썼던 지난날을 고백합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던 신앙적 철부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국이 어떤 곳이며,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말씀’이란 오직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야만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말씀(the Word)임을 시인, 고백하게 된 지금은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에 힘쓰며,

 

※ ‘말씀’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도들, 특히 현 기독교 교리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을 비롯, 신약성경 사도들의 서신서들, 그리고 구약성경의 여러 글들, 가령, 룻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잠언, 전도서 등... 은 주님의 말씀을 환히 비추어 주는 조명등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이 조명등들이 비추는 주님을 바라보아야지 이 조명등들을 보면서 거기서 교리를 추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처럼, 곧 주님은 현 좌파를 비롯, 우파나 중도 안에서도 여전히 불의한 자들이 있지만 변함없이 햇볕과 비를 공평하게 내리시는 주님처럼 선한 삶, 사랑의 실천, 변함없으시고 한결같으신 주님 앞에 나의 할 도리 다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자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 주님 사랑으로 이웃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으신 분들을 보면, 그분들은 이단, 삼단 어쩌고 하실 겨를도 없으시며, 아무리 자기가 듣기에 많이 낯설고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천사들처럼 그 속 사람, 곧 상대방의 내면의 선만 보십니다. 그릇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내용에만 주목하시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님과 천사들은 사람의 내면, 속 사람, 영의 참모습만 보십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샬롬! ^^

 

2021-12-17(D6)-천국이야기(8), '교회에 속했던 적이 없는데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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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42.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Verse 21.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made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물고기들’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으로 움직이고,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상징합니다.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으면 ‘살아있는’(alive), ‘움직이는’(animate) 상태이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죽은’(dead),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이기 때문이며, 지식들이 이런 상태가 된다는 것은, 비록 세상, 세속 지식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식, 특히 세상 지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선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생물들)은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상징하는데, 세부 원리들이 이 원리들을 향하기도, 또 들어오기도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주님 지으신 이 피조 세계에서는 어떤 지식이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채, 무슨 낙동강 오리알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존재하고 또 존속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 되는 그런 더 큰 원리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고래들’, ‘큰 바다짐승들’이 바로 그런 겁니다. 이들이 선지서, 예언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그 본문에서 다른 기억-지식들의 무슨 근원적인 역할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예를 들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즉 일반적으로는 지식 [scientia]을 가리켜 ‘애굽의 바로 왕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에스겔에서는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도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들 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는, 모든 세부, 또는 하부 진리는 상부 진리에서 오며, 상부 진리들은 단 하나의 근원 되는 진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신앙의 지식들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는 ‘좋은 음식’으로 표현되었는데요, 이걸 마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듯 그렇게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a whale)은 신앙 관련 지식들의 일반적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 지식 중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값비싼 지식이며, 그중에서도 일반적 지식,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와 같은 말씀 지식은 가히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도무지 무슨 가슴 신앙으로 감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큰 뱀’이라 한 것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1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속뜻)

주님은 사람의 겉과 속, 겉 사람과 속 사람 안에 모든 기억-지식과 합리, 지성을 가득하게 하시되 근본원리에서 특별원리로, 일반원리에서 세부원리로 아주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질서대로 쌓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입니다.

 

※ 세상 지식을 학습, 습득하면서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또 그 지식들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천국 지성에 이르는 중에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늘 시인하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냥 간단히 허락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이렇게 속 사람, 겉 사람, 내면, 외면, 기억-지식, 합리와 이성, 지성 등 복잡한 일을 또 치밀하게 조직적으로 하실까요?

 

그것은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속으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설령 주님의 허락이 있다 해도 사람은 천국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방열복을 안 입고 용광로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아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는 상태를 맛보게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이렇게 아주 단단히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창1,21, AC.42,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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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ckHC7alI9E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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