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

 

 

272.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By the “thorn and the thistle” are meant curse and vastation;

 

그리고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and by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is signified that he should live as a wild animal.

 

사람은 그의 속 사람이 그의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가장 기본으로만 겉 사람에게 작동될 때는 들짐승처럼 살니다. Man lives like a wild animal when his internal man is so separated from his external as to operate upon it only in a most general manner,

 

사람은 주님한테서 그의 속 사람을 통해 받는 것으로는 사람이지만,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그리고 또 유사 신체적 형태 면에서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for man is man from what he receives through his internal man from the Lord, and is a wild animal from what he derives from the external man, which,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s in itself no other than a wild animal, having a similar nature, desires, appetites, fantasies, and sensations, and also similar organic forms.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엔, 꽤나 그런 줄 알지요. 그는 이런 걸 영적 물질로부터 얻습니다. 이걸 통해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플럭스를 받는데요, 그러나 저런 인간 안에서는 이 인플럭스가 거꾸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That nevertheless he is able to reason, and, as it seems to himself, acutely, he has from the spiritual substance by which he receives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 which is however perverted in such a man, and becomes the life of evil, which is death.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지요. Hence he is called a dead man.

 

 

273.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저주와 황폐함을 상징한다는 것은, 정 반대되는 것들, 곧 축복과 번성을 가리키는 추수와 과실 나무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thorn and the thistle” signify curse and vastation, is evident from harvest and fruit tree denoting the opposites, which are blessings and multiplications.

 

가시덤불’, ‘엉겅퀴’, ‘들장미’, ‘가시덩굴’ 및 ‘찔레’ 등이 그런 상징을 갖는 것은 말씀을 보면 분명한데요, 호세아입니다. That the “thorn,” the “thistle,” the “brier,” the “bramble,” and the “nettle,” have such a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Lo, they are gone away because of the vastation; Egypt shall gather them; Memphis shall bury them; 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 (호9:6)

 

여기 ‘애굽’과 ‘’은 주님의 일들을 자신들과 자기들이 소유한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런 걸 가리킵니다. Here “Egypt” and “Memphis” denote such as seek to understand Divine things from themselves and their own memory-knowledges.

같은 예언서에서 In the same prophet: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The lofty places of Aven, the sin of Israel, shall be destroye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 (호10:8)

 

여기 ‘아웬의 산당’은 자아 사랑을 상징하며, where the “lofty places of Aven” signify the love of self;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는 신성모독을 상징합니다. and the “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 profanation.

이사야에 In Isaiah: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 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 (사32:12–13)

 

그리고 에스겔에 And in Ezekiel: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 (겔28:24)

 

 

274.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즉, 거친 음식)이 가리키는 것이 들짐승처럼 사는 것임은, 다니엘서 느부갓네살에 관한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eat the herb of the field” (that is, wild food) denotes to live like a wild animal,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Nebuchadnezzar in Daniel: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They shall drive thee from man, and thy dwelling shall be with the beast of the field; they shall make thee to eat grass as oxen,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thee. (단4:25)

 

그리고 이사야에 And in Isaiah: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Hast thou not heard how I have done it long ago, and from the days of old have I formed it; now have I brought it to pass, and it shall be to lay waste bulwarks, fenced cities, in heaps; and their inhabitants, short of hand, were dismayed and put to shame; they were made the grass of the field, and the green [olus] of the herb, the grass of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before [coram] the standing corn. (사37:26–27)

 

여기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그리고 ‘곡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Here it is explained what is signified by the “grass of the field,” the “green of the herb,” the “grass on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여기서 다룬 주제가 홍수 전 시대, 곧 ‘태초’와 ‘상고’로 표현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ime before the flood, which is meant by “long ago,” and the “days of old.

 

2021-04-30(D6)-창세기(창3,18, AC.272-274), '가시덤불과 엉겅퀴, 밭의 채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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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창3:17)

 

 

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는 아담, 혹은 래셔널(rational, 合理)의 동의를 상징하며, 이렇게 되면, 처음엔 래셔널 자신을, 결과적으로는 겉 사람 전체를 외면하거나 저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가 가리키는 것입니다. By the “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man, or rational, by which it also averted or cursed itself, and consequently the whole external man, denoted by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그의 미래의 삶은 비참할 것이며, 이것은 심지어 그 교회의 종말 때까지, 혹은 ‘네 평생에’ 그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To “eat thereof in sorrow” means that the future state of his life would be miserable, and this even to the end of that church, or “all the days of his life.

 

 

268. ‘’이 겉 사람을 상징함은 앞서 ‘’(earth, 창1:1, AC.16), ‘지면’(ground, 창2:5, AC.90), ‘’(field, 창2:5, AC.90) 관련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tated concerning “earth,” “ground,” and “field.

 

사람이 거듭날 때, 그를 가리켜 더 이상 ‘’이라 하지 않고, 대신 ‘지면’이라고 합니다. 천적 씨가 그의 안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When man is regenerate, he is no longer called “earth,” but “ground,” because celestial seed has been implanted in him;

그는 또한 ‘지면’으로 비유되며, 말씀 여러 곳에서 ‘지면’으로 불립니다. he is also compared to “ground” and is called “ground”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선과 진리의 씨앗들은 속 사람 안이 아닌, 겉 사람, 즉, 그의 어펙션과 기억 안에 심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그의 고유 본성과 관련된 아무것도 없고, 대신 겉에 있기 때문입니다. The seeds of good and truth are implanted in the external man, that is, in his affection and memory, and not in the internal man, because there is nothing of one’s own in the internal man, but only in the external.

 

속 사람 안에는 선들과 진리들이 있으며, 이것들이 더 이상 안 보이면, 그 사람은 겉, 혹은 몸이 됩니다.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and when these no longer appear to be present, the man is external or corporeal;

 

하지만 이들은 사람의 지식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는 상황, 가령, 시험들, 불행들, 질병들, 그리고 임종의 때와 같은, 그런 상황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y are however stored up in the internal man by the Lord, without the man’s knowledge, as they do not come forth except when the external man as it were dies, as is usually the case during temptations, misfortunes, sicknesses, and at the hour of death.

 

래셔널은 또한 겉 사람에게 속하며(AC.118), 실상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역할을 합니다. The rational belongs also to the external man (n. 118), and is in itself a kind of medium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속 사람은 래셔널을 통해 몸과 겉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 internal man, through the rational, operates on the corporeal external.

 

그러나 래셔널이 동의를 하면, 겉 사람은 속과 분리되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면 속 사람의 존재를 더 이상은 알 수 없게 되며, 그 결과 속에 속한 것들인 지성과 지혜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But when the rational consents, it separates the external man from the internal, so that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is no longer known, nor consequently the intelligence and wisdom which are of the internal.

 

 

269. 여호와 하나님(즉, 주님)은 ‘’, 혹은 겉 사람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외면하게 하거나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에 대한 저주이지요. 이것은 앞서 본 내용(AC.245)으로 분명합니다. That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did not “curse the ground,” or the external man, but that the external man averted or separated itself from the internal, and thus cursed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hown (n. 245).

 

 

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가 삶이 비참해짐을 상징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 그 속뜻으로는 사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앞선 내용들과 이어지는 내용들로 분명합니다. That to “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 signifies a miserable state of life is evident from what precedes and follows, not to mention that to “eat,” in the internal sense, is to live.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은 싸움을 시작하고, 수행 천사들은 고생할 때 따라옵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fact that such a state of life ensues when evil spirits begin to fight,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이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할 때 더욱 비참해집니다. This state of life becomes more miserable when evil spirits begin to obtain the dominion;

 

그때 그들은 겉 사람을 다스리고, 천사들은 단지 속 사람만 다스리는데, 속 사람 안에는 리메인스가 거의 없어, 천사들은 그 사람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것을 거기서 거의 못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for they then govern the external man, and the angels only the internal man, of which so little remains that they can scarcely take anything thence with which to defend the man;

 

그래서 비참과 염려가 일어납니다. hence arise misery and anxiety.

 

죽은 사람들은 이런 비참과 염려에 거의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비록 그들이 자신들을 더욱 사람으로 정말로 생각하더라도 말이지요. Dead men are seldom sensible of such misery and anxiety, because they are no longer men, although they think themselves more truly so than others;

 

그들은 더 이상 영적이고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삶에 관해 짐승들보다 더 아는 게 없으며, 짐승들처럼 땅에 속한 것들을 향해서는 아래를,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서는 밖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for they know no more than the brutes of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what is eternal life, and like them they look downward to earthly things, or outward to worldly ones;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에만 호의를 보이며, 래셔널의 완전한 동의 하에 자신들의 성향과 감각에만 탐닉합니다. they favor only their own, and indulge their inclinations and senses with the entire concurrence of the rational.

 

이들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 전투나 시험 없이 살아가며, 다 드러난 사람들이 되어, 이들의 삶은 그 무게로 가라앉고, 그래서 그 결과, 점점 더 자신들을 저주하고, 재촉해서 계속해서 더 깊이깊이 지옥의 저주 아래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Being dead, they sustain no spiritual combat or temptation, and were they exposed to it their life would sink under its weight, and they could thereby curse themselves still more, and precipitate themselves still more deeply into infernal damnation:

 

이들은 다른 삶, 곧 지옥이지요, 거기서는 무슨 시험이나 불행 때문에 죽음에 이를 위험이 전혀 없지만, 그러나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그런 삶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이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는,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로 상징한 것입니다. hence they are spared this until their entrance into the other life, where, being no longer in danger of dying in consequence of any temptation or misery, they endure most grievous sufferings, which likewise are here signified by the ground being cursed, and eating of it in great sorrow.

 

 

271. ‘네 평생에’가 그 시대 교회의 종말에 대한 상징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교회와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all the days of thy life” signifies the end of the day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not an individual man, but the church and its state.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은 홍수의 때였습니다. The end of the days of that church was the time of the flood.

 

2021-04-29(D5)-창세기(창3,17, AC.267-271), '듣고, 땅, 저주, 수고, 평생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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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창3:16)

 

 

261. 지금 ‘여자’가 상징하는 것은 프로프리움(proprium, 固有本性)에 관한 교회인데, 이 프로프리움을 교회가 사랑한 것입니다. By the “woman” is now signified the church as to proprium, which it loved;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가 상징하는 것은 전투이며,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입니다. by “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 is signified combat, and the anxiety it occasions;

 

임신’은 모든 생각을, by “conception,” every thought;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는 그래서 그녀가 낳게 될 진리들을, by the “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 the truths which she would thus produce;

 

남편은 여기서도 앞서 살핀 대로, 그것이 따르게 될, 그리고 다스리게 될 래셔널을 상징합니다. by “man,” here as before, the rational which it will obey, and which will rule.

 

 

262. 앞서 교회를 ‘여자’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아왔다면, 여기서는 전에는 자기 자신이었던 그 고유본성 때문에 지금은 비뚤어진 교회를 ‘여자’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태고교회의 비뚤어진 후손들을 지금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church is signified by the “woman” has been previously shown, but here the church perverted by 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signified by the “woman,” because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 is now treated of.

 

 

263. 그러므로, 감각 파트가 자신을 외면하거나, 자신을 향해 욕을 할 때, 그 결과는, 악한 영들은 싸움에서 파워풀해지는 반면, 수행 천사들은 애를 먹게 되고... 그래서 이 전투를 묘사하여 이르기를,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즉, 진리를 생각하고, 생각한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을 전투라고 할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 됩니다. When therefore the sensuous part averts itself or curses itself, the consequence is that evil spirits begin to fight powerfully,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and therefore this combat is described by the words,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that is, as to the thoughts and productions of truth.

 

 

264. 이 말씀에 나오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은 영적인 뜻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임신’이 마음에 품은 생각과 그 방법을, ‘자식’은 진리를 말하는 것임은,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in the Word, are taken in a spiritual sense—“conception” for the 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 and “sons” for truths—is evident from Hosea: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As for Ephraim, their glory shall fly away like a bird, from the birth, and from the womb, and from the conception; though they shall have brought up their sons, yet will I bereave them, that they be not man; yea, woe also to them when I depart from them, (호9:11-12)

 

여기 ‘에브라임’은 지성 혹은 진리에 대한 이해를, where “Ephraim” signifies the intelligent, or the understanding of truth;

 

그리고 ‘자식’은 진리들 자체를, and “sons,” truths themselves.

 

에브라임’에 관한 어떤 곳이든지, 그가 지성을 가졌든,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든 마찬가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It is likewise said elsewhere concerning Ephraim, or one who is intelligent, who has become foolish: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n unwise son, for at the time he will not stand in the breach of the womb of sons. (호13:13)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Blush, O Zidon, for the sea hath spoken, the fortress of the sea, saying, I have not travailed, nor brought forth, nor have I brought up young men, nor caused girls to grow up; as at the report concerning Egypt, they shall bring forth according to the report of Tyre, (사23:4-5)

 

여기 ‘시돈’은, 신앙의 지식들을 가졌었으나 나중에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파괴하여 지금은 척박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where “Zidon” means those who have been in the knowledges of faith, but have destroyed them by memory-knowledges, and so have become barren.

 

[2] 다시 같은 선지서인데요, 거듭남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이 ‘아이’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Again in the same prophet, treating of regeneration, and where likewise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by “sons”: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Before she travailed she bringeth forth; and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th heard such a thing? Who hath seen such things? 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 and shall I not cause to bring forth? saith Jehovah; shall I cause to bring forth, and close up? saith thy God. (사66:7-9)

 

천국 결혼을 통해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그래서 ‘아들들’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 하신 말씀입니다. Goods and truths, being conceived and born of the heavenly marriage, are therefore called “sons” by the Lord in Matthew: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마13:37-38)

 

구원하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요8:39)이라 하십니다. And 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 he calls “sons of Abraham” (John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They answered and said to Him, Abraham is our father. Jesus says to them, If you were Abraham’s children, you would do the works of Abraham. (요8:39)

 

후손’은 (255번 글에서 다룬 대로) 신앙을 가리키며, 그리고 ‘후손’에 속한 ‘자손’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기 때문입니다. for “seed” (as stated n. 255) denotes faith, wherefore “sons,” which are of the “seed,” are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이런 이유로, 또 주님은 그 자신을 ‘후손’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인자’, 즉, 교회의 신앙이라 하셨습니다. Hence also the Lord, as being himself the “seed,”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faith of the church.

 

 

265. ‘남편’이 래셔널을 상징한다는 것이 이 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아담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아담(남자, 사람, vir)은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하지만 여기 나오는 ‘남편’은 래셔널을 가리킵니다. 지식의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아무것도 안 남았기 때문이며, 이렇게 된 이유는, 외관상 그럴듯하게 지성을 흉내 내는 것으로 전락한 것이 바로 레셔널이기 때문입니다.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266. 모든 법과 수칙(守則, precept)은 참된 출발점인 천적, 영적인 것에서 나오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이 결혼의 법칙 또한 그렇다는 것이며, 그러려면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사려분별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성으로 움직이는 남편과 달리 그녀의 고유본성에 속한 디자이어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As every law and precept comes forth fro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as from its true beginning, it follows that this law of marriage does so, which requires that the wife, who acts from desire, which is of what is her own, rather than from reason, like the man, should be subject to his prudence.

 

2021-04-28(D4)-창세기(창3,16, AC.261-266), '여자, 고통, 임신, 자식, 남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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