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496. ‘’은 관찰(cf. 481)한 대로, 두 번째 교회이며,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교회입니다. 그가 ‘백오 세를 살았다’는 것은, 앞(cf. 482, 487, 488)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시간(times, 때)와 상태를 상징하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왔음을 상징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497. ‘’은 두 번째 교회요,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원인 교회라는 것은, 위 3절, 셋에 관한 내용(cf. 484, 485)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앞서 언급해온 대로, 교회들의 경우 서서히,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본질에 있어 위(cf. 494:2)에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왔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본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 말고 다른 걸 상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2021-07-06(D3)-매일예배(AC.496-498, 창5,6), '셋, 에노스를 낳았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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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zehIX_OK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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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492. 여기 ‘’(days)과 ‘’(years, 세)는 위에서처럼 때(횟수)와 상태를, ‘사람의 죽음’은 그런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493. ‘’과 ‘’가 때(혹은 횟수)와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 말고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 싶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실제 수량을 나타내는 숫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들이 그 고유 본성의 끝단, 곧 일상에 필요한 하나하나의 수량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달걀 한 판에 얼마, 수도세, 전기세 얼마 등등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이 숫자들이 그 수량에 맞춰 어떤 추상적 상징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20:9),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8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레25:8, 1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제자, 칠십 인의 장로들, 그리고 주님의 칠십 인의 제자들 및 다른 많은 경우들 모두, 이렇게 구체적 숫자가 적용되었을 때 어떤 특별한 추상적 상징들을 갖게 되는데, 그렇게 갖게 된 추상적 상징이 바로 그 숫자가 상징하는 상태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494. 그가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런 퍼셉션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뜻임은 ‘죽다’라는 단어의 상징, 즉, 어떤 것이 이전 상태에 더 이상 있기를 멈추다라는 의미임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요한계시록입니다.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계3:1-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렘22:26)

 

여기 ‘어머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 교회의 경우, 처음 상태, 정말 깨끗했던 온전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고, 퇴색되며, 잃어갔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악의 세습 및 증가였는데, 역대 모든 부모마다 자기가 타고난 악에다 새로운 악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부모의 모든 실제적 악은 일종의 본성을 옷 입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재발 시, 그들의 본성이 되고, 그렇게 그들의 유전 악에 더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에게 전이되고, 그렇게 후손에게 전해집니다.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이런 식으로, 유전 악은 후손들에 이르러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아이들의 악한 기질이 정확히 그들의 조상의 것과 똑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이식되어 유전되어 온 악 외에 다른 유전 악은 없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완전 거짓입니다. (cf. AC.313)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진실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죄를 실제로 지어 유전 악을 만들며, 그걸 자기가 물려받은 악에다 보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악은 모든 후손들 가운데 축적되며, 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한테서만 줄어드는 거 빼고 말입니다.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모든 교회마다 이것이 타락, 퇴보의 첫째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495. 태고 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태고 교회는 퍼셉션이 있었던 교회였고, 오늘날엔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한 교회의 퍼셉션은 이런 것으로 구성됩니다. 곧,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치 천사들처럼 선악을 구별합니다. 이 선악은, 사람들 사는 시민 사회의 선악과 같은 것이 아니고, 주님 사랑과 주님 신앙에 속한 선악을 말합니다.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생활로 확인되는 신앙고백을 통해 퍼셉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2021-07-05(D2)-매일예배(AC.492-495, 창5,5), '구백삼십 세, 살고 죽었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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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eqagC_i7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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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4)

 

 

486. ‘’(日, days)은 일반적으로, ‘’(年, years)는 구체적으로, 각각 때와 상태를 상징하며, ‘자녀’(sons and daughters)는 그들이 지각했던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 이후, 예를 들어, 영어 복수 표현인 ‘days’에 대한 우리말 번역을 굳이 ‘날들’로 하지 않고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로 하겠습니다. 우리말은 단수, 복수 등에 영어처럼 그렇게 예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은 문맥 상 정황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 ‘’, ‘상태’ 등, 다른 복수 표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87. ‘’이 일반적으로 때와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을 1장에서 보여드렸는데, 거기 보면, 첫째 날, 둘째 날 등 창조의 ‘’이 때와 상태 말고 무슨 다른 걸 상징하지 않습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말씀에서 ‘’, ‘항상’(all time)을 ‘’로 표현하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지금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의 경우가 특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 하면 마찬가지로 때의 상태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가 등장하면, 우르르 등장하는 해들을 통해 상태의 퀄러티, 그러니까 특별한 상태를 상징하게 됩니다.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태고인들은 자기들의 숫자들을 가졌는데, 그 숫자들로 그들은 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 숫자들은 예를 들면, ‘’(3), ‘일곱’(7), ‘’(10), ‘열둘’(12) 및 이 숫자들과 다른 숫자들 간 합성을 통해 생성되는 많은 숫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숫자들을 가지고 그 교회의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들 숫자들에는 오랜 시간 설명해야 하는 아케이나가 들어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숫자들은 그 교회의 상태들에 대한 일종의 설명 혹은 평가였습니다.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같은 일이 말씀 여러 군데서 발생하는데요, 특히 예언서입니다.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유대 교회의 제의들을 보면, 그 안에도 역시 ‘몇 번’(數) 및 ‘어느 정도의 양’(量) 등 숫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번제, 소제, 봉헌물 및 다른 것들과 관련되는 것들인데, 다들 그 드려짐에 따라 성물(聖物)을 상징합니다.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그래서, 여기 ‘팔백’(800)이라는 숫자, 그리고 다음 절, ‘구백삼십’(930) 및 이어지는 구절들에 나오는 햇수들 등에 들어 있는 것들은, 말하자면, 그들 고유의 일반적 상태에 생긴 그들 교회의 상태 변화들인데, 일일이 세기엔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앞으로 다루게 될 부분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으로 숫자 ‘열둘’(12)까지 단순 숫자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게 될 텐데, 이 숫자들의 상징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이런 합성수의 상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488. ‘’(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years)가 구체적인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 에스겔에 보면 나옵니다.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겔22:4)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자기들의 죄를 꽉꽉 채우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상태를 일반적으로는 ‘’로, 구체적으로는 ‘연한’(해, years)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그래서 시편에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시61:6)

 

주님과 주님의 왕국에 관한 말씀 중에, ‘장수’(날)와 ‘나이’(해)로 왕국의 상태를 상징하십니다.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다시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시77:5)

 

여기 ‘옛날’은 태고교회의 상태를, ‘지나간 세월’은 고대교회의 상태를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사63:4)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인데, 여기 ‘원수 갚는 날’은 저주의 상태를, ‘구속할 해’는 행복의 상태를 각각 상징합니다.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다시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사61:2)

 

여기 ‘’과 ‘’ 모두 상태를 상징합니다.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Renew our days as of old, (애5:21)

 

여기는 분명히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입니다.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욜2:1-2)

 

여기 ‘’은 ‘어둡고 캄캄한’ 상태, ‘짙은 구름이 덮인’ 상태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도 상징하고, 전체를 일반적으로도 상징합니다.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슥3:9-10)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슥14:7)

 

여기 역시 상태를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한 날을 가리켜,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하기 때문입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같은 내용이 십계명 표현들 가운데 나옵니다.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신5:16)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신25:15)

 

여기 ‘네 날이 길리라’는 것은 생명의 길이가 아닌, 행복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겉뜻, 글자의 뜻으로는 ‘’은 마치 시간인 것처럼 보여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천사들은, 그들은 속뜻, 내적 감각 가운데 있는데, 시간이라는 게 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구별하게 해주는 해와 달이 없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들은 날이 뭔지, 해가 뭔지를 모르며, 대신 상태와 상태의 변화만 압니다. 그래서 천사들 앞에서는, 그들은 내적 감각 가운데 있기 때문에, 여기 에스겔 구절의 속뜻처럼 무슨 일이든지 시공간에 관련된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겔30:3)

 

그리고 요엘서 구절의 속뜻입니다.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욜1:15)

 

구름의 날’은 구름, 혹은 거짓을, ‘나라들의 때’는 나라들, 혹은 사악(邪惡, wickedness)을, ‘여호와의 날’은 황폐(荒廢, vastation)를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시간개념이 사라질 때 남는 것은 그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상태개념입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본 장에서 아주 자주 언급되는 ‘’(days)과 ‘’(years)에 대한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489. ‘자녀’는 그들이 지각했던 진리와 선을 상징하며, 실제로 ‘아들’은 진리, ‘’은 선을 각각 상징하고 있음은 예언서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 옛날 이사야를 보면 교회의 잉태와 해산을 가리켜 ‘자녀’라고 합니다. That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as in Isaiah: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lift up thine eyes round about and see; all they gather themselves together and come to thee; thy sons shall come from far, and thy daughters shall be nursed at thy side; then thou shalt see and flow together, and thy heart shall be amazed, and shall be enlarged, (사60:3-5)

 

위 구절들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2] 시편입니다. In David: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Deliver me and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e sons of the stranger, whose mouth speaketh vanity; that our sons may be as plants grown up in their youth, that our daughters may be as cornerstones hewn in the form of a temple, (시144:11-12)

 

여기 ‘이방인’은 거짓된 진리들이나 거짓들을, ‘우리 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우리 딸들’은 선의 교리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 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 daughters,” doctrinals of good.

 

[3]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I will say to the north, Give up, and to the south, Keep not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bring forth the blind people, and they shall have eyes; the deaf, and they shall have ears, (사43:6, 8)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백성’은 진리를 보게 될 사람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은 진리를 순종할 사람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4]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Shame hath devoured the labor of our fathers from our youth; their flocks, their herds, their sons, and their daughters, (렘3:24)

 

여기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자손’과 ‘아들들’이 진리를 상징함은 이사야를 보면 명백합니다.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22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for when he shall see his children the work of my hands in the midst of him, they shall sanctify my name, and shall sanctify the Holy One of Jacob, and shall fear the God of Israel; they also that erred in spirit shall know understanding, (사29:22-24)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는 주님을 상징하며, ‘자손’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 위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선과 진리를 지성적으로 이해하게 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5] 다시 Again: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Sing, O barren, thou that didst not bear, for more are the sons of the desolate than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사54:1)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은 원시(primitive) 교회, 혹은 이방인들의 교회에 알려진 진리를, ‘남편 있는 자의 자식’은 유대 교회에 있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6]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of me, and are not, (렘10:20)

 

자녀’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sons” signify truths.

 

다시 Again: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His sons shall be as aforetime, and their congregation shall be established before me, (렘30:20)

 

자손’은 고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ancient church.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I will stir up thy sons, O Zion, with thy sons, O Javan, and make thee as the sword of a mighty man, (슥9:13)

 

사랑의 신앙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490. 말씀에서 ‘’은 종종 선을 가리킵니다. 시편입니다.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Kings’ daughters were among thy precious ones; at thy right hand doth stand the queen in the best gold of Ophir; the daughter of Tyre with a gift; the king’s daughter is all glorious within; of eyelet work of gold is her raiment; instead of thy fathers shall be thy sons, (시45:10- 17)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이 ‘’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where the good and beauty of love and faith are described by the “daughter.

 

그래서 교회를 선으로 말미암아 ‘’이라 합니다. 이사야 37장 22절과 다른 많은 데서 ‘딸 시온’, ‘딸 예루살렘’으로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내 딸 백성’(사22:4), ‘딸 다시스’(사23:10), ‘딸 시돈’(사23:12) 및 ‘들에 있는 딸’(겔26:6, 8)이라고도 합니다. Hence churches are called “daughters” by virtue of goods, as the “daughter of Zion” and the “daughter of Jerusalem” (Isa. 37:22, and in many other places); they are also called “daughters of my people” (Isa. 22:4), the “daughter of Tarshish” (Isa. 23:10), the “daughter of Sidon” (verse 12), and “daughters in the field” (Ezek. 26:6, 8).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사37:2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사22:4)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23:10)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8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겔26:6, 8)

 

 

491. 본 장 4, 7, 10, 13, 16, 19, 26 및 30절 등에 나오는 ‘자녀’는 모두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자녀’, 즉, 선과 진리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진리와 선은 뚜렷하게 지각되었던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바로 이것들로 설명이 되며, 이후 이어지는 모든 교회들에게 있어 하나의 원리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2021-07-04(D1)-주일예배(AC.486-491, 창5,4), '‘날’(days), ‘해’(years), 수명(壽命), 자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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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L4_rhPqC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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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4(D1)-제9권27호통410호.성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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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0.0.1.'저자 서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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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05CGsN3C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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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483. 태고교회는 심지어 일반적, 구체적 퍼셉션 차이들에 관해서조차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현했습니다만, 오늘날은 퍼셉션의 본성에 관한 가장 일반적 측면에서조차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 교회들의 퍼셉션 그 속(屬)과 종(種) 어떤 경우도 할 수 없이 어둡고 낯설게만 보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그들은 그 시절 가족, 가문 및 민족들로 구분되며, 결혼도 가족과 가문 내에서만 했습니다. 퍼셉션의 속과 종의 보존을 위해서이며, 민족적 특성의 전수처럼 부모를 통해 정확히 전수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천국에서 함께 지냅니다.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484. ‘’이라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아주 비슷하게 닮았었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라는 표현을 보면 분명합니다. 용어 ‘모양’(likeness)은 신앙과,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이 교회가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관련, 태고교회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은, 방금 앞서 말씀드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신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섯째 날 영적 인간을 상징하는데요, 즉, 아직은 사랑이 주된 원리가 아닌, 여전히 사랑과 결합된 신앙이 주된 원리였다는 말씀입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485. 여기 ‘’은 위 4장 25절의 ‘’과는 다른 교회라는 사실은 435번 글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a different church is here meant by “Seth” from that which was described above (Gen. 4:25), may be seen at n. 43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교리가 다른 교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앞 장 17절, 18절에 나오는 ‘에녹’과 ‘라멕’을, 여기 5장 21절과 30절에서는 다른 교회들인데 같은 이름인 ‘에녹’, ‘라멕’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churches of different doctrine were called by the same name, is evident from those which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4:17–18) were called “Enoch” and “Lamech,” while here other churches are in like manner called “Enoch” and “Lamech” (Gen. 5:21, 30).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18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7-18)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1, 30)

2021-07-02(D6)-매일예배(AC.483-485, 창5,3), '퍼셉션 나머지, ‘셋’이라는 교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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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iH2KRq3R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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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481. ‘백삼십 세’라는 표현은 하나의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 흐른 시간을 상징합니다. 이 새로 일어난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는 교회였습니다. ‘모양’이라는 용어는 신앙에, ‘형상’이라는 용어는 사랑에 각각 관련됩니다. By a “hundred and thirty years” there is signified the time before the rise of a new church, which, being not very unlike the most ancient, is said to be born “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 but the term “likeness” has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이 교회를 일컬어 ‘’이라 하였습니다. This church was called “Seth.

 

 

482. 이 장에 나오는 ‘’와 ‘몇 세를 살고’ 하는 표현들이 속뜻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습니다.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겉뜻에 머무르시는 분들은 세속적 년 수들로 생각하시겠습니다만, 이 장부터 십이 장까지는 겉뜻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고, 대신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이 들어 있습니다.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이름뿐 아니라 숫자 역시 같은 경우입니다.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숫자는 삼(3), 칠(7)이 있는데요, 이 숫자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거기서 이 숫자들은 그 숫자들에 포함되어 있거나 표현하고 있는 시간이나 다른 무엇과 관련,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숫자들은 가장 짧은 시간 간격들이나 가장 긴 시간 간격들이나 같은 걸 상징합니다.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듯 가장 작은 것들은 가장 큰 것에 속하기 때문인데, 전체가 부분에서,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에서 제대로 나올 수 있으려면 반드시 닮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그래서 이사야에서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사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사21:16)

 

둘 다 가장 작은 간격들과 가장 큰 간격들을 상징합니다.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하박국에서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합3:2)

 

수년 내에’라는 표현은 주님의 강림을 상징합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보다 작은 간격들의 경우,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처럼 모든 주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보다 큰 간격들의 경우는 주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경우를 상징합니다.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이사야에서 ‘구속할 해’라 하신 경우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사63:4)

 

그래서 계시록 20장 2절, 7절, 사탄이 결박되어 있었던 천 년과, 계시록 20장 4절로 6절, 첫째 부활 관련 천 년 역시 절대 천 년(1,000년)을 상징하는 게 아니고, 대신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며, ‘’ 또한 그렇습니다. 이렇게 년 수, 햇수를 가지고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20:4-6)

 

그래서 본 장의 시간들 또한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모든 개 교회는 선천적, 후천적 재능 차이에 따라 퍼셉션의 상태가 다른 교회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483. 다음과 같은 이름들, 곧, ‘’,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매우 많은 교회들을 상징합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제일의 교회를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그래서, 이 시절 교회 간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서 왔습니다.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저는 여기서 퍼셉션에 관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천국 그 어디든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 말고 다른 것으로 천국을 다스리는 것은 없습니다. 이 퍼셉션은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어떤 두 소사이어티도 유사한 퍼셉션을 엔조이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존재하는 퍼셉션들은 종(種, Species)과 속(屬, Genus)으로 분류됩니다. 속만으로도 셀 수가 없는데, 그 각각의 종 역시 하나하나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셀 수 없는 속(屬)이 존재하고, 그 각 속에 딸린 종(種)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며, 더욱이 개별 종 안에서도 셀 수 없는 다양함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세상이 알고 있다는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해 아는 것이 얼마나 미미한지, 너무 보잘 것 없어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퍼셉션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만일 그것에 관해 듣는다 해도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고, 그런 식으로 다른 것 역시 안 믿기 때문입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2021-07-01(D5)-매일예배(AC.481-483, 창5,3), '‘백삼십(130) 세’라는 숫자의 의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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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IrUkjbJM8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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