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며칠, 계속된 글 공유로 좀 어떠실까 하여 오늘은 쉴까 하였으나 금요 오후, 천국 이야기 약속도 있고 하여 부득불 공유합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천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많이, 아니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곳은 물질, 저곳은 비물질, 이곳은 자연계, 저곳은 영계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방법으로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결과, 이 세상은 천국을 가리키는 일종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잘 관찰하면 ‘아, 천국은 어떤 곳이겠구나!’, ‘영계는 어떤 곳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

 

천국을 비롯, 이 모든 피조세계에 주님이 심으신 몇 가지 설계 원리들이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리’라는 게 있습니다. 바로 ‘상태(狀態, state)’ 이야기인데요, 상태가 비슷하면 같이 지낼 수 있지만, 다르면 같이 못 지낸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원리 중 하나는 ‘심은 대로 거둔다’가 있습니다.

 

그런 예는 차고도 넘치지요. 우선, 천국과 지옥이 서로 하늘과 땅처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겠고요, 세 천국 간 구별이 있는 것이며, 천국 내에서도 또 수많은 공동체로 나뉘는 것이며, 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서로 간 간격의 가깝고 먼 등등... 이 모든 것이 다 상태로 결정됩니다.

 

그러면 이 ‘상태’라는 게 뭘까요?

 

상태는 천국을 예로 들면, 천국을 구성하는 각 천사들의 사랑과 신앙, 그로 말미암은 지혜와 지성의 상태와 그 변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천사의 사랑과 신앙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므로 결국, 상태란 주님에 대한 상태,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곧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에 대한 태도는 곧 주님에 대한 태도가 되는 것이지요 ^^

 

아, 한 가지 더, 천사라는 존재는 주님이 별도로 지으신 무슨 다른 피조물이 아닙니다. 본래, 그리고 진정한 ‘사람’이신 주님은 사람 이외의 그 어떤 피조물도 짓지 않으셨어요. 심지어 주님은 천국 전체도 사람 형상으로 지으실 정도이시지요. 우리가 사후(死後)에 천국에 올라가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 구성원들을 천사라 하는 것이며, 현재 존재하는 모든 천사와 영들은 예전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천사 따로, 사람 따로로 알고 있는 것은 말씀을 겉뜻으로,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어서 그런 것입니다. 천사가 곧 사람이라 하신 말씀은 계21:17을 참조하셔요.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라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천국을 무슨 지상 생활의 확장 정도로 생각하는 오류에서 물러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주님에 대한 현재 나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로 모든 게 결정되는 나라에 들어가는 걸, 세상에서처럼 무슨 표 한 장 끊으면 들어갈 수 있는 데로 안다거나, ‘그동안 잘못 산 거 다 용서해 줄 테니까 들어가서는 잘 살아야 해’하는 윗분의 ‘은혜’로 들어갈 수 있는 데로 안다든가 등등 말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사후 신성(神性, Divine Essence, 선과 진리로 표현되는, 주님의 神으로서의 성품)이라는 대기로 충만한 나라에 들어가서 신성 호흡을 하며 살 수 있으려면 생전에 미리 그 호흡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소위 ‘은혜’로 통과시켜 주신들 호흡을 할 수 없어 뛰쳐나오게 되지요... 신성을 준비한다는 건, 그 나라 주인님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비슷해야 가까이’, 곧 주님을 닮아야 주님 곁에서 지내죠!

 

참고로, ‘은혜’는 내면이 어떻든 그냥 ‘통과’시켜 주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한평생 선악 간 싸움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대신 우리와 동행하시며 도우시는 ‘은혜’, 끝까지 우리를 주님 자신을 향해, 천국을 향해 끌어당기시는 다함없으신 사랑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천국의 실상, 곧 천국은 주님 향한 내면 상태의 나라라는 걸 모른 채, 지상에서 남들 다 하는 대로 마치 무슨 동호회 활동하듯 교회를 다니며, 종교 생활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엔 당연히 자기들은 천국 들어갈 수 있는 줄 알고 무척 원합니다. 이럴 경우,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얼마든지 원하는 가장 좋은 걸 체험하게, 맛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 그것도 가장 낮은 천국의 입구로 인도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이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들은 온몸이 뱀처럼 뒤틀리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숨이 턱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극심한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들 내부에,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대신 모든 게 천국 질서와는 정반대로,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전에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 대신,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살면서 천국 준비를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교회를 다녔는데도 말이지요... 이윽고 그들은 죽을 것 같아 도저히 못 견뎌 그만 천국을 탈출, 뛰쳐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이 제 3자가 보기에는 얼핏 천국에서 사람을 쫓아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전혀 아닙니다. 자기가 자발적으로 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을 뛰쳐 나와 자기 내면과 잘 어울리는 곳으로 가서, 겨우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천국에 올라갈 엄두도 내지 않게 됩니다. 천국은 늘 항상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지낼 수만 있으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힘써 ‘상태’ 훈련, 곧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늘 머무르는 훈련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 훈련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허락하시며, 온갖 환경과 상황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 대신, 원망 대신 순간순간 깨어있어 주님을 늘 주시하며, 늘 그분의 현존과 임재 가운데 생활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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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어제 ‘말씀(The Word)이란?’ 글 공유 후, 주님께 드린 기도문입니다...

 

주님, 오늘 글을 수신, 읽어본 많은 구독자들 중 아마 대다수가, ‘내용 자체는 전반적으로 맞는 말 같은데 이상하게 화가 나네...’ 할 것 같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 제가 3년 전, 처음으로 이런 내용을 접했을 때처럼 말이지요

 

개신교인에게 있어 바울 서신을 비롯, 다른 많은 신구약성경은 사실 성도들의 매일 일상 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인데, 오늘 글은 그걸 통째로 건드리고 있으니까요...

 

주님, 오랜 세월 붙들고 살아온 성경 중 상당수가 사실은 메인이 아닌 조명이었다는 이런 글은, 비록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본의 아니게 개신교인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나름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 저의 구독자들은 다들 착하고 진실한 사람들이오니 불쌍히 여기시며, 빛을 비추사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동안, 마음이 환하여지며, 눈이 밝아져 주님의 위로가 쏟아져 들어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글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이 걸리고 마음이 힘들더라도 오늘 글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혹시 주님의 말씀(The Word)보다 더 우선하였던 어떤 교리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주님 의지하며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비롯, 종교개혁 여러 슬로건들도 그런 입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러나 슬로건이라는 게 주님보다 클 수 없음을, 교리라는 게 주님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불러 영계에 올라 루터, 멜랑히톤 및 칼빈을 만나 오랫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그중 루터의 말,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를 비롯, 자기가 힘써 주창했던 많은 독단교리들은 사실은 다 자기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고... 당시 카톨릭하고는 무조건 대척점에 서야 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어떤 교리들, 곧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해내는 교리를 만들어내야 했던 거라고...’(TCR.796:4)

 

주님, 우리 개신교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보니 불교 가정이었고, 태어나보니 무슬림 가정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태어나보니 개신교 가정이었고, 태어나보니 이런 교리들, 곧 사도들의 편지에서 추출한 교리들이었습니다...

 

주님, 저의 카톡 구독자들 중 상당수가 개신교인입니다. 저를 비롯, 이제 많은 새 일꾼들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저들에게 알리시고, 이제라도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The Word)으로 돌아와 주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온전히, 그리고 아름답게 이루어지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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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9

 

THE INTERNAL SENSE

 

 

977.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 man)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 부언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면 둘 다 더 잘 이해되지 싶어서입니다. As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regenerate man, a few words shall be said about what he is relatively to the unregenerate man, for in this way both will be apprehended.

 

거듭난 사람의 경우, 선한 것과 참된 것에 관한 어떤 양심(conscience)이 있어 그는 양심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진리를 생각하는데요, 그가 행하는 선은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이요, 그가 생각하는 진리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he does good and thinks truth from conscience; the good which he does being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which he thinks being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양심이 없거나, 있어도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거나 신앙의 진리를 생각하는 그런 양심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관한 사랑에 기반한 양심이며, 그래서 겉으로만 그럴싸하거나 거짓된 양심입니다. The unregenerate man has no conscience, or if any, it is not a conscience of doing good from charity, and of thinking truth from faith, but is based on some love that regards himself or the world, wherefore it is a spurious or false conscience.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가 양심을 따라 행할 때는 즐거움이 있지만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하거나 생각할 때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중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뭔지를 모르며, 심지어 양심을 따라 한다는 게 뭔지, 혹은 양심에 어긋나는 걸 한다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joy when he acts according to conscience, and anxiety when he is forced to do or think contrary to it; but it is not so with the unregenerate, for very many such men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much less what it is to do anything either according or contrary to it, but only what it is to do the things that favor their loves.

 

이것이 그들을 기쁘게 하며,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 걸 하게 되면, 그들은 근심하게 됩니다. This is what gives them joy, and when they do what is contrary to their loves, this is what gives them anxie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새 의지(a new will)와 새 이해(a new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 새 의지와 새 이해가 그의 양심입니다. 즉, 그의 양심 안에 이 둘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십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a new will and a new understanding, and this new will and new understanding are his conscience, that is, they are in his conscience, and through this the Lord 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에게 있는 것은 의지가 아닙니다. 의지 대신 갈망(yearning)이 있으며, 그 결과 모든 악으로 기우는 어떤 경향(proneness)이 있습니다. 또 그에게 있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슨 머리굴림(reasoning)만 있어 결과적으로 모든 거짓을 향한 구부러짐(falling away)만 있습니다. With an unregenerate man there is not will, but instead of will there is yearning, and a consequent proneness to every evil; neither is there understanding, but mere reasoning and a consequent falling away to every falsity.

 

거듭난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천적,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그저 육적(corporeal), 세속적 생명만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그가 선한 것,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에 말한 리메인스를 통해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그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도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man there i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but with the unregenerate man there is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and his ability to think and understand what is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s life through the remains before spoken of, and it is from this that he has the faculty of reflecting.

 

거듭난 사람의 경우, 속 사람은 지배적인 반면, 겉 사람은 복종적이고, 순종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겉 사람이 다스리고, 속 사람은 죽은 듯 조용합니다. 마치 없는 듯 말입니다. With the regenerate the internal man has the dominion, the external being obedient and submissive; but with the unregenerate the external man rules, the internal being quiescent, as if it had no existence.

 

거듭난 사람은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거나 깊이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의 무지하며, 심지어 이런 걸 깊이 생각할 줄도 모릅니다. 그는 체어리티로 말미암는 신앙의 선과 진리에 대해 낯설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n knows, or has a capacity of knowing on reflection,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but of these the unregenerate man is altogether ignorant, nor can he know them even if he reflects, since he is unacquainted with the good and truth of faith originating in charity.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퀄러티는 어떤지,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퀄러티는 또 어떤지를, 그리고 이들은 서로 정말 여름과 겨울처럼, 빛과 어두움처럼 완전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거듭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Hence may be seen what is the quality of the regenerate, and what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at they differ from each other like summer and winter, and light and darkness; wherefore the regenerate is a living, but the unregenerate a dead man.

 

 

978. 속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겉 사람에 대해서 오늘날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있어도 매우 희귀합니다.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is at this day known to few, if any.

 

다들 이 둘은 하나며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것도, 진리를 생각하는 것도 다 자기가 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는 게 사람들의 고유 본성이지요. 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른 건 마치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It is generally supposed that they are one and the same, and this chiefly because men believe that they do good, and think truth from what is their own, for it is the nature of man’s own to believe this; whereas the internal man is as distinct from the external as heaven is from earth.

 

배운 사람이든 무학자이든 이 주제에 관해 좀 생각하게 해보면, 속 사람에 관해서는, ‘생각’(thought)이라고밖에는 무슨 다르게 생각하지를 못합니다. 그건 안에(within) 있으니까요. 그리고 겉 사람에 관해서는, 그건 ‘’(body), 감각(sense)과 쾌락(pleasure)이라는 생명을 가진 몸이다, 왜냐하면, 그건 밖이니까(without) 합니다. Both the learned and the unlearned, when reflecting on the subject, have no other conception respecting the internal man than its being thought, because it is within; and of the external man that it is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because this is without.

 

그러나 이렇게 속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생각은 거기, 곧 속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의 것인 선과 진리들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속 사람 안에는 주님에 의해 이식되어 심긴 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들, 심지어 가장 악한 사람들 및 양심을 외면하는 사람들 역시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걸 보면, 사람의 생각은 속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Thought, however, which is thus ascribed to the internal man, does not belong thereto; for in the internal man there are nothing but goods and truths which are the Lord’s, and in the interior man conscience has been implanted by the Lord; and yet the evil, and even the worst of men, have thought, and so have those who are devoid of conscience, which shows that man’s thought does not belong to the internal, but to the external man.

 

이 감각과 쾌락의 생명을 가진 몸은 겉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들 역시 똑같이 일종의 겉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 살 동안 가졌던 그런 몸을 영들은 이젠 갖고 있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That the body, with its life of sense and pleasure, is not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spirits equally possess an external man, although they have no such body as they had during their life in this world.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의 천국(the angelic heaven)과 상응하는 어떤 천적, 영적인 것이, 그리고,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angelic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이성적인 것(a rational)이, 그리고 영들의 천국(the heaven of spirits)과 상응하는 어떤 감각적인 내면(an interior sensuous)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아무도 속 사람이 무엇인지, 겉 사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no one can possibly know unless he knows that there is in every man a celestial and a spiritual that correspond to the angelic heaven, a rational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an interior sensuous that corresponds to the heaven of spirits.

 

세 천국이 있고, 사람 안에도 역시 그 수만큼의, 아주 완전히 서로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있는 사람은 사후, 제일 먼저 영들의 천국에 있게 되고, 이후 주님에 의해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으로 올라갔다가 마침내 천사의 천국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 안에 천국과 같은 수만큼의 뭔가가 있지 않으면, 그리고 천국과 상응하는 그것의 상태가 천국과 같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re are three heavens, and as many in man, which are most perfectly distinct from each other; and hence it is that after death the man who has conscience is first in the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is elevated by the Lord into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into the angelic heaven, which could not possibly take place unless there were in him as many heavens, with which and with the state of which he has the capacity of corresponding.

 

이 일로 저는 속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또 겉 사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From this I have learned what constitutes the internal, and what the external man.

 

속 사람은 천적, 영적인 것으로, 내면(interior) 혹은 중간(intermediate)은 이성적인 것(what is rational)으로, 그리고 겉 사람은 감각적인 것(what is sensuous), 그런데 몸에 속한 대신 몸과 관련된 것들로 각각 형성됩니다. 이상의 내용은 사람뿐 아니라 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internal man is formed of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interior or intermediate man, of what is rational; and the external man of what is sensuous, not belonging to the body, but derived from bodily thing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man, but also with spirits.

 

지식인들처럼 표현하자면, 세 가지, 속, 내면 및 겉 사람은 마치 목적, 원인 및 결과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알고 있듯 원인 없는 결과 없고, 목적 없는 원인 없습니다. To speak in the language of the learned, these three, the internal, the interior, and the external man, are like end, cause, and effect; and it is well known that there can be no effect without a cause, and no cause without an end.

 

결과, 원인 및 목적은 외면과 내면, 그리고 가장 안쪽처럼 서로 구별됩니다. Effect, cause, and end, are as distinct from each other as are what is exterior, what is interior, and what is inmost.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감각적인 사람은, 이 감각적인 사람은 그 사고가 감각적인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겉 사람입니다. 영적, 천적인 사람은 속 사람,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은 이 둘 사이 중간 사람으로, 속과 겉 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Strictly speaking, the sensuous man—or he whose thought is grounded in sensuous things—is the external man, and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is the internal man, and the rational man is intermediate between the two, being that by which the communication of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is effected.

 

저는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겉의 것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겉의 것들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I am aware that few will apprehend these statements, because men live in external things, and think from them.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여기며, 몸이 죽을 때, 자신들도 함께 죽는다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도 말입니다. Hence it is that some regard themselves as being like the brutes, and believe that on the death of the body they will die altogether, although they then first begin to live.

 

선한 사람들은 사후, 가장 먼저 영들의 세계 혹은 영들의 천국에서 어떤 감각의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에서는 내면적 감각의 삶을 살고, 그리고 드디어 천사의 천국에서 가장 내적 감각의 삶을 삽니다. 이 속 사람의 삶은 그 삶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사람은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천사의 삶입니다. After death, those who are good, at first live a sensuous life in the world or heaven of spirits, afterwards an interior sensuous life in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lastly an inmost sensuous life in the angelic heaven, this angelic life being the life of the internal man, and concerning which scarcely anything can be said that is comprehensible by man.

 

거듭난 사람은 선과 진리 및 영적 전쟁의 본성을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그런 삶이 있음을 알 수도 있지 싶습니다.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서 체어리티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겉 사람 안에 있게 하신 이후부터는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The regenerate may know that there is such a life by reflecting on the nature of the good and the true, and of spiritual warfare, for it is the life of the Lord in man, since the Lord—through the internal man—works the good of charity and the truth of faith in his external man.

 

그때 그의 사고와 어펙션(affection, 애정)에 지각되는 것은 어떤 일반적인 것인데, 그 안에는 속 사람한테서 나오는 셀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천사의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지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What is thence perceived in his thought and affection is a certain general which contains innumerable things that come from the internal man, and which the man cannot possibly perceive until he enters the angelic heaven.

 

(이 일반적인 것과 그 경험에서 나오는 본성에 관하여는 위 AC.545 참조) (Concerning this general and its nature, see above, n. 545, from experience.)

 

여기서 말씀드린 속 사람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구원받기 위해 이런 걸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The things here said about the internal man, being above the apprehension of very many, are not necessary to salvation.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있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It is sufficient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o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979. 거듭난 사람에 관한, 그리고 겉 사람에게로 흐르는 속 사람의 인플럭스에 관한 이런 관찰을 먼저 좀 하는 이유는, 본 장이 거듭난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속 사람 및 겉 사람의 복종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se observations on the state of the regenerate man, and on the influx of the internal man into the external, have been premised because this chapter treats of the regenerate man, of the dominion of the internal man over the external, and of the submission of the external man.

AC.978, 창9, '창9, 속뜻'.hwp
0.08MB

https://youtu.be/TQ-YzN7ER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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