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60.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Verse 31.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하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 합니다. 그 이유는,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되어, 그래서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 드디어 일종의 결혼의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61. 신앙에 속한 지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will)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62. 사람의 거듭남의 때와 상태는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여섯으로 나뉘며, 이를 가리켜 사람 창조의 날들이라 합니다. 사람의 처음 상태, 그러니까 거듭나기 전 상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먼저 뭔가가 되고,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까지 이루어 가다가 여섯째 날, 비로소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63. 그를 위해 끊임없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싸우시는 동안, 주님은 이 영적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을 가리켜 선지서에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심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사랑이 원리가 되어 움직일 때,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이때까지는 주님은 잠시도 쉬지 않으십니다.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주님이 해 오신 일이 아주 잘 되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 이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이때 주님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의 모양(likeness)처럼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되어, 즉, 무엇을 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하는 모습이 마치 한 분 주님 안에서 세 위가 결혼한 상태와 같아 ‘하나님의 모양’ 같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인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64. 다음은 말씀의 속뜻,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가장 놀라운, 더할나위 없는 생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비록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나타나지만, 그러나 이 아케이나(arcana, 秘義, 영적, 천적 의미 전반에 관한 통칭)는 사실은 그 속에 담긴 것이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것만 가지고도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질 겁니다.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단어 하나가 가지는 가장 가까운 의미 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파트에 아주 자주 나오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그들은 오직 단어와 이름이 상징하는 것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합니다. 물론,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을 개인으로가 아닌, 그가 표현한 어떤 구원 신앙을 지각하는... 네, 계속해서 이런 식입니다.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와 이름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65. 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천사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제가 보고 있는 말씀 안 무슨 단어는 고사하고 글자 하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가장 근접한 속뜻이 뭘 상징하는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고, 그것은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31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속뜻)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 드디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결혼한 상태에 이르자 주님은 심히 좋아하십니다. 이때 드디어 악한 영은 떠나가고 이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https://youtu.be/0oa9xcZnM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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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58. 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Verse 30.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같은 인간, 즉 영적 인간의 자연적 음식을 여기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The natural meat of the same man is here described.

 

땅의 모든 짐승’, 그리고 ‘하늘의 모든 새’는 인간의 자연적인 면을 상징합니다. 자연적 인간의 양식으로는 채소와 푸른 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His natural is signified by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by the “fowl of the heavens,” to which there are given for food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사람의 자연적, 영적 양식을 그래서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Both his natural and his spiritual food are thus described in David: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시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여기서 ‘가축’은 같은 시편 앞선 구절들인 11절, 12절에서 언급한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 둘 다를 표현하기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where the term “beast” is used to express both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which are mentioned in verses 11 and 12 of the same psalm.

 

 

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만 언급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갈수록,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영적 전투, 싸움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거듭남 이전 사람은 탐욕(cupidities)이 주(主, the dominion)가 되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전체가 그저 탐욕과 탐욕에서 나오는 거짓(falsities)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 거듭남이란 악과 거짓의 사람이 선과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므로, 필연적으로 선악 간, 진리와 거짓 간 영적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정상이며, 한 가운데 나를 놓고 두 세계, 곧 지옥과 천국에서 파송된 악한 영들과 천사들의, 서로 자기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가고자 하는 싸움이 반드시,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즉각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사람이 살면서 습득하여 온 유일한 생명인데,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면 사람은 그냥 통째로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그와 함께 하면서 겪는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탐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킵니다. 그리고 계속 그러다 보면 살짝 느슨, 사람은 늘 반복되는 그 탐욕에 시큰둥해지는데요, 이런 케이스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어느 정도로 느슨해지냐면, 이 탐욕이 주님에 의해 선쪽으로 기울어져 사람이 개혁이 될 정도로까지입니다.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 주님은 사람을 잘 아십니다. 사람은 심지어 천국 생활조차도 늘 똑같으면 금방 지루해 하며, 싫증을 내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한편, 주님은 정말 한결같으시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사람의 한 평생, 끝까지 책임지시고,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셔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영들이 애를 써도 사람이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주님은 마침내 이기시며,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의 거듭남을 완성하십니다.

 

전투 때, 악한 영들은, 선과 진리인 모든 것에 대해,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무엇이든지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합니다. 오직 이런 것이야말로 선이요, 진리여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인데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고작해야 ‘채소와 푸른 풀’이라 할 수 있는 것 밖에 아무 것도 남기질 않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들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저들과는 정반대로,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양식으로 주십니다. 이때 사람은 더할나위 없는 고요와 평안, 기쁨과 즐거움의 상태에 있게 되는데요, 주님은 이런 양식을 간격을 두고 계속 주십니다.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주는, 악한 영들이 주는 달콤한 것의 그 숨은 정체를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결국은 ‘채소와 푸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 곧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있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심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2] 주님이 인간을 매순간, 아니 눈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계된 것들에 관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영들의 세계에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 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 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어떠함에 대하여, 그리고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왜 반드시 참아야 하고, 그래서 영생의 행복을 왜 반드시 기필코 얻어내야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3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속뜻 및 풀이)

영적 인간의 자연적인 면들로 인해 영적 양식 말고도 역시 자연적인 양식들도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주님과 악한 영들의 차이가 있는데요, 악한 영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 그리고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 사람에게 오직 ‘푸른 풀과 채소’ 밖에는 남아있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외의 것에는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그건 기본이요, 그 외,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도 함께 주십니다. 그로 하여금 이런 영적, 천적 양식을 통해 최종적으로 거듭남을 완성,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영들의 세계의 그 참혹함과 증오를 조금이라도 알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끝까지 거듭남을 완주, 꼭 천국에 들어가고야 말겠다 굳게 결심하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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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56.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Verse 29.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천적 인간은 천적인 걸로만 아주 기뻐합니다. 그것이 그의 생명과 맞기 때문인데, 이를 일컬어 천적 양식이라 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으로 아주 기뻐합니다. 그 이유 역시, 그것이 그의 생명과 맞기 때문이며, 이를 일컬어 영적 양식이라 합니다.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마찬가지로,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인 것을 아주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자연적인 것이 맞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에게는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주로 기억-지식으로 구성됩니다.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 기억-지식은 그 출처가 세상, 세속인 지식으로 학습을 통해서 습득하는 지식입니다.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며, 그래서 영적 인간의 영적 양식을 무슨 표상들(表象, representatives)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 등인데요, 이걸 보통은 ‘씨 가진 나무’(tree yielding seed)라 하지요.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그의 자연적 양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 사람은 영과 육의 존재이므로 영적 양식과 자연적 양식, 둘 다 필요합니다.

 

 

57. ‘씨 맺는 채소’는 쓰임새에 관한 모든 진리, ‘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에 속한 선, ‘열매’는 주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 ‘열매 맺는 씨’는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 그래서 ‘씨 가진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The “herb bearing seed” 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 “tree in which is fruit” is the good of faith; “fruit” 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 “seed producing fruit” 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천적 양식을 나무로 말미암는 열매라 하는 건 다음 장을 보면 분명한데요, 다음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이걸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에스겔에서 하신 말씀들만 인용하는데요,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겔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는 ‘성소’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 “sanctuary.

 

열매’는 그들의 양식이 될 지혜를, ‘’은 그들의 쓰임새, 곧 ‘약재료’라 하는 쓰임새를 위한 지성을 각각 의미합니다. Fruit” 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 “leaf” 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 “medicine.

 

한편, 영적 양식을 ‘’이라고 하는 건 다윗의 시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 “herb,” 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속뜻)

천적 인간은 천적 양식을, 영적 인간은 영적 양식을, 각각 자신의 생명에 맞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완성 단계에 이른 사람에게 이처럼 천적, 영적 양식을 주시는데, 곧 모든 선과 진리이며, 이 진리로 말미암아 사람은 자신의 쓰임새를 발견하는 영적 지혜를, 이 선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천적 열매를 각각 발견하며, 맺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마무리되어 가는 사람에게 주님은 그에 합당한 양식을 풍족히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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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55.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Verse 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태고인들(太古, the most ancient people)은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 또는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을 일종의 결혼(a marriage)이라 했는데요, 그래서 그들은 이 결혼의 결과, 태어나는 모든 선을 가리켜서는 ‘생육’(fruitfulness)이라, 모든 진리를 가리켜서는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하였습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그래서 선지서들, 예를 들면, 에스겔에 그렇게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 ‘사람’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인 사람을, ‘전 지위’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처음’은 홍수 후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먼저 진리에 속한, ‘수가 많고’(multiplication)가 언급되고, 그 다음에 선에 속한, ‘번성하게’(fruitfulness)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닌, 앞으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또는 신앙이 사랑과 하나가 될 때, 주님은 이 사람을 일컬어 ‘결혼한 땅’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때 달리는 열매들, 이 열매들이 진리에 속하였으면 ‘아들들’이라 하고, 선에 속하였으면 ‘딸들’이라 합니다. 이런 표현은 말씀에 아주 자주 나옵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많은 진리와 선의 존재로 땅은 다시 ‘충만한’(replenished) 상태, 가득 채워진 상태가 됩니다. 주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실 때는, 즉, 사람을 돌보실 때는 선과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은 영적인 사람이 되기 전 갖고 있던 선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자기 것을 가지고 행하는 줄로 알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미안하지만, 무엇이든 사람에게 속한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그러나 이제는 거듭남의 어떤 상태에 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안에 뭔가 선한 게 있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아직은 모든 것 중에 가장 작은 것입니다.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시간이 흘러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처음엔 ‘모든 것 중에 가장 작았던’ 이것이 점점 자라 ‘’(herb)이 되며, 끝에 가서는, 즉. 이 결합이 완성이 되면, 그때는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공중의 새들’은 진리, 지성적인 것들을,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기억-지식을 각각 말합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 knowledges.

 

사람이 영적일 때, 그리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는 동안은 그는 일종의 전투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신 것입니다.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속뜻)

태고인들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일종의 결혼이라 여겼고, 그 결과, 태어나는 모든 선을 ‘생육’, 모든 진리를 ‘번성’이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이를 가리켜 ‘결혼한 땅’이라 하였고, 이때 열리는 진리를 ‘아들’, 선을 ‘’이라 합니다. 주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그를 케어하실 때, 그의 안에는 어마어마한 선과 진리가 부어져 ‘충만’한 상태가 되며, 주님의 이런 사역으로 ‘겨자씨 한 알’에 지나지 않았던 인생이 변화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드는 큰 나무가 됩니다. 사람이 이런 영적 인간이 될 때, 그의 안에서는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데, 그래서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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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6(D1)-제9권52호통435호.성탄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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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성탄 주일 메시지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9:6-7)

 

 

평화(peace)는 주님에게서 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며, 그러므로 천국과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요, 그 안에 있는 삶의 행복(happiness)을 의미합니다. 가장 높은, 혹은 가장 내적(inmost) 의미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평화에 속합니다. 즉,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은, 평화는 체어리티(charity)이며, 영적 보호(spiritual security)이고, 내적 휴식(internal rest)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님 안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첫 번째, 사람은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또 그럴 때라야 두 번째, 사람은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보호입니다. 이렇게 세 번째, 사람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며,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면, 그때 비로소 사람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벗어나 내적 휴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By “peace” are signified all things in their aggregate which are from the Lord, and thence all things of heaven and the church, and the happiness of life in them; these are of peace in the highest or inmost sense. It follows therefore that “peace” is charity, spiritual security, and internal rest; for when man is in the Lord, he is in peace with his neighbor, which is charity; in protection against the hells, which is spiritual security; and when he is in peace with his neighbor, and in protection against the hells, he is in internal rest from evils and falsities. (AR.306)

 

 

오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우리의 모양, 곧 한 아기로, 한 아들로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 주일입니다. 이 아침에 우리는 우리에게 한 아기로, 한 아들로 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 오시기 약 800여 년 전인 이사야 때, 그를 통해 미리 무엇이라 하셨는지를 살피며,

 

먼저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주님의 탄생을 말씀하시면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합니다. 얼핏 들으면 비슷해 보이는 말을 선지자는 왜 이렇게 반복적으로 하고 있을까요?

 

여기 ‘아기’와 ‘아들’은 주님의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 곧, ‘’(善, the Divine good)과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아기는 선을,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아기’가 선을 나타내는 이유는, 선의 본질은 아기와 같은 순진함(이노센스, innocence, 純眞無垢)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좀처럼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쉽게 화내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그 모든 일을 통해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 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그래서 선한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 순진함은 우리 내면에서 자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 오신 주님은 선이시며 순진함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주님에 대해 ‘한 아들’이라 하셨는데, 이 말은 주님은 진리 자체인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진리를 뜻하는 이유는, 진리는 주님의 최초의 본질인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두 번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나오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말할 때, 아버지라고 하면 선 또는 사랑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이라고 하면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따로 있고, 아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본질을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하는 것은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인 선의 본질과 진리의 본질을 모두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 하십니다. 정사(政事)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Government’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를 말하지요. 정부는 수많은 조직과 부서, 기관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고 통제하는 것은 법과 원칙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정사 또는 정부는 하나님의 법인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깨에 메었다’ 할 때, ‘어깨’는 무엇일까요? 어깨는 주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일꾼들이 짐을 어깨에 메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깨는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어깨에 정사를 메셨다는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진리와 그 능력을 의미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진리와 진리의 능력으로 지상의 교회와 천국을 다스리시는데 주님의 그러한 모습을 본문에서는 주님의 ‘어깨에 정사, 정부를 메셨다’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 계속해서 주님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주님은 한 가지 모습만이 아닌,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기묘자’(奇妙)라 하십니다. 기묘자에 대한 영어는 ‘Wonderful’입니다. 주님은 놀랍고 불가사의한 분이라는 뜻이지요. 진리이신 주님을 왜 놀라우신 분이라 했을까요?

 

진리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상징, 상응으로 쓰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상징이나 상응,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지상에 있는 교회와 하늘의 천국을 서로 연결하고, 그렇게 또 우리를 주님과 연결, 결합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결하는 방법이 말할 수 없이 놀랍고 심오하기 때문이지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말씀을 통해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놀랍고 신기하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주시고 경이로운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말씀 또는 진리이신 주님을 성경에서 ‘놀라우신 분’, ‘기묘자’라고 하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을 또 ‘모사’(謀士)라고 하십니다. 모사에 대한 영어는 ‘Counselor’, 즉 상담자라는 뜻이지요, 모사 또는 상담자라는 말은 미가서 4장 9절에도 나오는데 거기서 이르기를,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이 말씀은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말씀입니다. ‘왕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왕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또 ‘모사가 죽었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담자 또는 모사는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 안에서는 거듭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은 심오한 진리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으로도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던져놓기만 하시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까지도 함께 주십니다. 그 진리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할 수가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삶을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육성으로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손으로 우리의 아픔과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주님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가지고 있는 부와 재물, 사회적 지위 같은 것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잠깐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 영원하신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의 것으로는 아무도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의 능력으로만 사람은 진실하게 될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또 ‘평강의 왕’이라 하십니다. 평강, 또는 평화에 대해, 스벤덴보리 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394번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에 속한 가장 내적인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순진함과 평화다.'

 

천국에 속한 것이란 영적인 것, 즉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 안에서도 내적인 것이 있고, 보다 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에 가까워질수록 내적인 것이고요,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외적인 것입니다. 순진함과 평화가 천국에 속한 가장 내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선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진함이 없으면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화가 없다면 그 또한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은 본질적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평화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야만 내면이 바뀌고, 그렇게 해서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선이 없는 지식만 가지고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7절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7절도 6절과 비슷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낱말이 계속해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사와 평강’이 그렇고,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가 그렇습니다. 또 ‘정의와 공의’가 그렇습니다. 이것들은 진리와 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조금 전에 주님을 선을 동반한 진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7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에 대해 말하면서 진리와 선이 하나로 연결된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즉 정사와 다윗의 왕좌, 정의는 모두 진리를 나타내는 말이고요, 그런가 하면 평강과 나라와 공의는 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은 본질적으로 선과 하나가 된 진리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선이 없는 진리이거나 진리가 없는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이사야 9장 6, 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속뜻)

주님은 본질적, 본성적으로 선과 진리이신 분으로서, 선으로도, 진리로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 모든 피조 세계의 통치 원리와 질서가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의 섭리와 보살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라우며, 모든 선한 능력이 홀로 주님으로, 모든 존재하고 존속함이 다 그분으로만 말미암는 그런 분이십니다. 천국이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래서 천국의 두 기둥, 곧 순진함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과 모든 피조 세계 여러 기둥과 같은 원리들의 기초이신 분으로서, 그 모든 것이 다 그분의 신성, 곧 선과 진리의 합일, 하나 됨, 융합과 결합으로 존재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가 하나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분의 자녀 된 우리 역시 당연히 어느 한쪽이 아닌, 선과 진리, 진리와 선이 아름답게 융합된, 결합 된 균형 잡힌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깨달았으면 행하고, 모든 행함은 오직 주의 진리로 말미암는 그런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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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53.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Verse 27.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여기 ‘형상’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반복되는 이유는, 신앙을 가리켜서는 ‘자기 형상’이라 하고, 사랑을 가리켜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며, 후자는 의지(the will)에 속하지요. 이때 후자인 이 ‘사랑’은 영적인 사람한테서는 뒤따라 나오는(come after) 것이지만 천적인 사람한테서는 먼저 나오는(precede) 것입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 영적인 사람의 경우는 신앙, 곧 교리, 진리가 먼저요, 사랑, 선이 나중이지만, 천적인 사람은 반대로 사랑, 선이 먼저고, 신앙, 진리는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의 의미, 그 속뜻을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 가운데에서 말씀의 내면적 뜻을 잃어버렸을 때, 이 아케이나 역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그들, 태고교회라 일컫는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혼’(結婚, marriage)은 그들 행복(happiness)과 기쁨(delight)의 최고의(chief) 원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그것이 비교의 용도로 사용할 수만 있으면 다 결혼에 비유했는데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결혼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 가령, 햇볕, 곧 해의 빛과 열의 융합을 결혼으로, 자녀들 및 모든 동식물의 자식 및 열매들을 결혼의 결과로, 사람을 영과 육의 결혼으로, 삼위일체를 결혼으로 등등, 가능한 모든 것을 다 ‘결혼’으로 보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내적인(internal)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직 내적인 일들을 가지고만 기뻐했습니다.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외적인 일들에 관해서는, 그들 역시 우리처럼 두 눈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 이게 뭘 표현하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 내면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겉의 일들, 겉의 것들을 가지고 흥분하고, 감격하고, 추구하고, 모든 걸 걸고 하지만, 태고 시대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겉의 일들 때문에 좌지우지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겉의 일들은 그들에겐 별 게 아니었습니다. 겉의 일들은 그들에겐 그저 그들의 관심을 속의 일들을 향해 돌리게 하는, 즉, 내적 시야를 갖도록 하는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적 시야를 통해서, 천적 시야를, 천적 시야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모든 것 되신 주님, 그리고 그 결과, 천국의 결혼이라는 시야로까지 확대할 수 있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바로 여기서 온다는 것을 지각했습니다.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사람한테 있는 이해를 ‘남자’라, 의지를 ‘여자’라 하였고, 그리고 이 둘이 하나로(as a one) 움직일 때, 그걸 가리켜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 즉, 태고교회인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행실이 일치할 때, 그가 이해와 의지가 결혼한 상태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교회에 대한 관례적 표현들이 왔고, 여기서 교회를 ‘’, ‘처녀’,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처럼, 그리고 ‘아내’라 하였습니다. 이는 선에 속한 교회의 애정에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보시게 됩니다.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속뜻)

거듭남이 진행 중인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신앙, 즉 이해에도 주님의 이미지가, 그의 사랑, 즉, 의지에도 주님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가는데, 특히, 태고교회인들은 이를 가리켜 각각 남자와 여자로 부르며, 이 둘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을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https://youtu.be/wvsIFhFvS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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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49.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Verse 26.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주님이 그 멤버들과 대면하여 대화하셨던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교회에, 주님은 한 사람(a man)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많은 것이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주님 자신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한테도 ‘사람들’(men)이라 하지 않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가운데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지각한 것들, 가령,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에만 썼습니다.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 처음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걸 본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후 자신들을 향해 감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사람에게 속한 것’(of man)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 ‘사랑의 선’, ‘신앙의 진리’ 등은 참으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주님의 것’, ‘사람으로 나타나신 주님의 것’입니다.

 

[2] 그래서 예언서들에 나오는 ‘사람’, ‘사람의 아들’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을,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는 지혜와 지성을, 그래서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예레미야에서처럼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도 거기 ‘사람’이 그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 자신, 곧 바로 그 한 사람(the one man)이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들에게 사람처럼(as a man)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26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보이셨을 때, 다니엘은 주님을 ‘인자’(the son of man), 즉 사람, 같은 의미인 ‘그 사람’(the man)으로 호칭하였습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은 종종 자신을 가리켜 ‘인자’, 곧 사람이라 하셨고, 다니엘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구름을 타고’는 말씀(the Word)의 겉 글자의 뜻입니다. ‘능력과 큰 영광으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이 속뜻으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레퍼런스합니다. 능력과 영광이 말씀의 속뜻인 것은 바로 이런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50. 태고교회는 ‘주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사람은 자기가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사람마다 최소 영 둘, 천사 둘씩 있다는 사실에 거진 다 무지(無知, ignorant)합니다.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천사들하고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고,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으면 사람은 전혀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이러한 결합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떠나가 버리면 사람은 즉시 사멸될 것입니다.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있지 않을 동안은 거듭남 가운데 있을 때 보다도 더 굉장한 묶임 가운데 있게 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있지 않을 동안은 그와 함께 하는 악한 영들이 있어 이들이 그를 좌지우지합니다. 이때에는 천사들은 그저 그가 가장 저급한 악 안으로 거꾸러져 들어가는 대신 어떤 선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그를 가이드만 겨우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사실, 그 자신의 탐욕을 사용해서 선으로, 거짓된 감각을 통해서 진리로 구부리는 정도입니다.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그는 그래서 자기와 같이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만, 천국하고는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천사들은 그들의 통치를 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 이랬던 사람이 거듭날 때에는 천사들이 다스리고, 그를 모든 선과 진리로 북돋우며, 악과 거짓들을 두려워하고 기겁하는 정도로만 그치게 합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실제로 일상에서 그를 리드하는 것은 천사들이지만 천사들은 단지 미니스터, 즉, 봉사자, 대리인일 뿐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정말로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홀로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이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복수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주님 홀로 다스리시고, 배치하시기 때문에 다음 구절에서는 단수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이것이 주님이 또한 이사야에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은 더더욱 스스로 이렇게들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직 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입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51. ‘형상’ 관련해서는, 형상(an image)은 모양(a likeness)이 아니고, 모양을 닮은 것(according to the likeness)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신 것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영적(靈的, spiritual)인 사람은 형상, 천적(天的, celestial)인 사람은 모양입니다. 유사함(similitude)이지요.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천적인 사람은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영적인 사람, 그가 ‘형상’인데요, 주님은 그를 ‘빛의 아들’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12:35-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주님은 또한 그를 ‘친구’라고도 하십니다. 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4-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천적인 사람은, 이 사람이 ‘모양’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52. 사람이 영적인 한, 그의 영향권은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반면, 그가 천적인 사람이 되면, 그래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때는 반대로 속 사람에게서 겉 사람으로 진행됩니다. 주님이 다윗의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모양인 천적인 사람을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래서 여기서 보면, 먼저 ‘들짐승’부터 언급하시고, 그리고 차례대로 ‘새’, ‘바다의 물고기’를 말씀하시는데요, 천적인 사람은 사랑에서 출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의지(the will)에 속하며, 여기 영적인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영적인 사람을 묘사할 때는, 먼저 ‘물고기’와 ‘새’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는 것이요, 신앙에 속한 것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들짐승’을 언급하지요.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 천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이 그 성향과 속성 등 근본적인 것이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적인 사람은 의지에서 출발, 이해로 나아간다면, 영적인 사람은 반대로 이해에서 출발, 의지로 나아갑니다. 천적인 사람은 가슴이 먼저 움직인다면, 영적인 사람은 머리가 먼저 움직입니다. 천적인 사람은 선의 사람인 반면, 영적인 사람은 진리의 사람입니다. 참 다릅니다. 그래서 천국도 두 나라, 천적 나라, 영적 나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6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속뜻)

본래 참사람이신 주님은 주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 곧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 일을 주님은 각 사람에게 붙이신 두 천사와 두 악령을 통해 하시는데요, 이들을 통해 주님은 평소 사람으로 하여금 두 천사를 통해서는 각각 천적 천국, 영적 천국에, 두 악령을 통해서는 각각 지옥의 두 나라와 연결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과 지옥 사이 한 가운데 완전한 자유 속에서 거듭남의 여정을 밟게 하십니다. 그래야 그 모든 크고 작은 선택이 온전히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되며, 그래야 나중 결과 역시 온전히 그 사람 본인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천사들과 협력하여 동역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 쪽으로, 천국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사람은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결국 주님 바라시던 영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https://youtu.be/95seM2N2E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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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49.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Verse 26.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주님이 그 멤버들과 대면하여 대화하셨던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교회에, 주님은 한 사람(a man)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많은 것이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주님 자신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한테도 ‘사람들’(men)이라 하지 않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가운데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지각한 것들, 가령,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에만 썼습니다.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 처음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걸 본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후 자신들을 향해 감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사람에게 속한 것’(of man)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 ‘사랑의 선’, ‘신앙의 진리’ 등은 참으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주님의 것’, ‘사람으로 나타나신 주님의 것’입니다.

 

[2] 그래서 예언서들에 나오는 ‘사람’, ‘사람의 아들’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을,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는 지혜와 지성을, 그래서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예레미야에서처럼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도 거기 ‘사람’이 그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 자신, 곧 바로 그 한 사람(the one man)이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들에게 사람처럼(as a man)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26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보이셨을 때, 다니엘은 주님을 ‘인자’(the son of man), 즉 사람, 같은 의미인 ‘그 사람’(the man)으로 호칭하였습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은 종종 자신을 가리켜 ‘인자’, 곧 사람이라 하셨고, 다니엘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구름을 타고’는 말씀(the Word)의 겉 글자의 뜻입니다. ‘능력과 큰 영광으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이 속뜻으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레퍼런스합니다. 능력과 영광이 말씀의 속뜻인 것은 바로 이런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50. 태고교회는 ‘주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사람은 자기가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사람마다 최소 영 둘, 천사 둘씩 있다는 사실에 거진 다 무지(無知, ignorant)합니다.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천사들하고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고,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으면 사람은 전혀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이러한 결합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떠나가 버리면 사람은 즉시 사멸될 것입니다.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있지 않을 동안은 거듭남 가운데 있을 때 보다도 더 굉장한 묶임 가운데 있게 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있지 않을 동안은 그와 함께 하는 악한 영들이 있어 이들이 그를 좌지우지합니다. 이때에는 천사들은 그저 그가 가장 저급한 악 안으로 거꾸러져 들어가는 대신 어떤 선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그를 가이드만 겨우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사실, 그 자신의 탐욕을 사용해서 선으로, 거짓된 감각을 통해서 진리로 구부리는 정도입니다.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그는 그래서 자기와 같이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만, 천국하고는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천사들은 그들의 통치를 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 이랬던 사람이 거듭날 때에는 천사들이 다스리고, 그를 모든 선과 진리로 북돋우며, 악과 거짓들을 두려워하고 기겁하는 정도로만 그치게 합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실제로 일상에서 그를 리드하는 것은 천사들이지만 천사들은 단지 미니스터, 즉, 봉사자, 대리인일 뿐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정말로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홀로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이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복수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주님 홀로 다스리시고, 배치하시기 때문에 다음 구절에서는 단수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이것이 주님이 또한 이사야에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은 더더욱 스스로 이렇게들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직 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입니다.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https://youtu.be/VAUDZ-Zn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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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44. 24절, 25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Verse 24. 25,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사람은 땅처럼 먼저 자기 안에 신앙에 관한 지식이 심기지 않고는 어떤 선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그걸 가지고 뭘 믿어야 할지, 뭘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understanding)가,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will)가 하는 일입니다.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걸 행하지는 않는다는 건, 마치 실제론 믿음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말로는 믿는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들음과 행함을 분리, 결국 일종의 나뉜 마음이 되는 것이며, 주님이 다음 구절들에서 '어리석다' 하신 사람들처럼 되는 겁니다.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는 앞서 보여드린 대로, 이해에 속한 것들을, 여기 ‘땅은 생물을 내되’, ‘가축’, ‘기는 것’, ‘땅의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45. 태고(太古)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관한 것을 그렇게 상징했고, 그런 이유로, 예언서들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것, 곧 이해와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짐승은 두 종류, 악한 짐승과 선한 짐승이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후자는 우리에게 무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사람 속 악들은 악한 짐승들, 예를 들면, 곰, 늑대, 개 등으로 상징되고, 반면, 사람 속 선하고 부드러운 것들은 같은 본성을 가진 짐승들, 곧 어린 암소, 양, 어린 양 등으로 상징됩니다.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여기 언급된 ‘짐승’(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며, 그래서 애정(affections)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는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사람 속 더 아래에 있는 것들, 즉, 몸(body)에 더 연결된 것들을 가리켜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 하고, 탐욕(cupidities), 쾌락(pleasures)이라 합니다.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 animals of that 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46. ‘짐승’이 사람의 애정, 곧, 악을 지닌 악한 애정과 선을 지닌 선한 애정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 속 많은 구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36:9, 11 거듭남을 다루는)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서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다윗 또한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입니다. 거듭남을 다루는 가운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땅의 짐승’ 역시 유사한 상징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에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는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다시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것은 앗수르에 대한 말씀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상징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다윗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여기서도 같은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whales), ‘과수’(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beasts),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 등, 이것들이 사람 속 생명의 원리들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일컬음 받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과 ‘땅의 짐승’, 그리고 ‘가축’과 ‘들의 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분했습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하지만 사람 안의 선들은 ‘가축’이라 하였습니다. 천국에서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을 ‘생물’(animals)이라 한 것처럼 말입니다. 에스겔과 계시록 두 군데 다에서 말입니다.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4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7:11; 19:4)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7:11; 19:4)

 

또한 자신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사람들을 가리켜 ‘만민’(creatures)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47. 이들 워딩에(these words) 거듭남에 관한 비의(秘義, arcana)가 들어 있다는 것은 앞 구절 말씀을 잘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앞 구절인 24절을 보면, 땅은 ‘생물, 가축, 땅의 짐승’을 내라 하시는 반면, 다음 구절인 25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는데, 즉,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만드셨다, 그리고 ‘가축’도... 등등, 바로 이 순서에 비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그리고 나중에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자기 힘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이렇게 먼저 사람의 겉에서부터 시작, 차근차근 속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또 다른 순서가 등장하는 것이며, 겉의 일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48. 사람이 이해에 속한 어떤 신앙 원리를 가지고 말을 하며, 그리고 그때 자기는 지금 진리 안에 있고, 선 안에 있다 확신하고 있다면,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분명히 지금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이때 그를 통해서 일어난 일들을 가리켜 살아 있다(animate) 하시고,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라 하신 것입니다.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이 사람이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해에 속한 신앙뿐 아니라 이 신앙에서 나오는,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도 행할 때, 그때 그는 여섯 번째 상태에 있는 것이며, 이때 그의 모든 행실을 가리켜 ‘생물’이다, ‘가축’이다 하는 것입니다.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이제 그는 사랑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행하기를 시작합니다. 비로소 영적 인간이 된 것이지요. 주님은 이를 가리켜 일종의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셨고, 이것이 지금 다룬 주제입니다.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4-25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속뜻)

주님의 최종 목적은 사람이 자원함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이 긴 거듭남의 과정을 도우시며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여섯 번째 마지막 단계에서 사람의 의지에 관한 일을 하십니다. 곧 사람의 안에 있는 두 종류의 애정들에 관한 일인데, 육체와 가까운 저급한 애정들에서 영과 가까운 고급한 애정들까지, 그리고 선한 애정, 악한 애정에 관한 일들입니다. 다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주로 선한 애정과 깊이 관련됩니다. 사람은 처음엔 자기 힘으로 무엇을 말하고 무슨 일을 하지만 점차 이 모든 일이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깨닫고 그 일의 순서가 바뀝니다. 즉, 주님을 시인하고, 주님을 앞세우며, 자기는 뒤로 물러납니다. 그는 예전엔 그저 머리로만 알던 것을 이제는 가슴으로 시인하고 자원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는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 영적 인간이 되며,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 사람 일생이 백 년이라면, 이 백 년에 걸친 거듭남의 풀코스를 한결같으신 마음으로 우리를 돌보시며, 건사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파노라마를 창세기 1장을 통해 맨 먼저 보여주시는 주님의 뜻을 눈으로 확인하며, 오늘 좀 흔들렸다고 좌절하는 그런 모습을 이젠 버리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창1,24-25, AC.44-48,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hwp
0.08MB

https://youtu.be/OHnSlxeII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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