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라틴어로는 ‘콘켑티오 임마쿨라타’(conceptio immaculata)라고 하며, 오늘날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로 ‘원죄 없으신 잉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비로소 특별히 거룩해졌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 자신이 어머니 안에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으며, 평생 어떠한 개인적인 죄도 짓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마리아가 특별히 준비되었다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접하면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어떻게 마리아 한 사람만은 처음부터 원죄 없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죄 없으신 거룩한 분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어머니 역시 원죄가 없어야 했던 것일까요? 무엇보다 마리아가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마리아 개인의 거룩함을 넘어, 주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였으며,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의 성향과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검토하려면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유전악과 주님의 구속 및 영화의 질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무염시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염시태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입니다. 이 교리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교황령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했습니다. 그 내용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그리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원죄’(原罪, original sin)의 모든 더러움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가 마리아를 구원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하여 구원받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달리 죄에 빠진 다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존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흔히 ‘예방적 구속’(preservative redemp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마리아는 구원이 필요 없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라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마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0–493항에 체계적으로 나타납니다. 491항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설명하고, 492항은 그 특별한 거룩함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493항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생 모든 개인적인 죄에서 자유로웠다고 밝힙니다. 여기에는 구별해야 할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 생애 동안 실제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 둘을 연결하면서 마리아가 구원자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성육신에 합당하도록 준비되었다’라는 신학적 설명과 ‘주님께서 성육신하시려면 반드시 죄 없는 어머니가 필요했다’라는 논리적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베푸신 특별한 은총으로 설명하지, 하느님께서 원죄 없는 어머니가 없으면 성육신하실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마리아의 이러한 특별한 보존이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무염시태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도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으로 이해하였으며,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을 대비하는 신학적 해석도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교리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마리아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원죄에서 정화되었는가를 놓고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가르침과 마리아의 특별한 무죄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미리 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이후 무염시태 교리를 정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과정을 새로운 교리를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신앙의 유산을 점차 명확하게 이해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교리의 역사적 발전과 그 교리가 신적 계시에 근거한 진리인지는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교리가 오랜 논쟁을 거쳐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바로 성경의 속뜻에 포함된 신적 진리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무염시태의 근거로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는 눅1:28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인사하며, 주께서 그와 함께하신다고 전합니다. 가톨릭 신학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케카리토메네’(kecharitōmenē)를 중요하게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은총을 받은 상태를 나타내며, 천주교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충만하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 자체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은총이 정확히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역사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근거는 창3:15입니다. 천주교는 뱀과 여자, 그리고 그 후손 사이의 적대 관계를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연결하여 이해하며, 마리아를 ‘새 하와’(New Eve)로 해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순종을 구원의 역사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본문 자체가 마리아에게 유전적 악의 성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까지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창3의 인물과 사건들은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와 인간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담고 있으므로, 그 의미를 후대의 특정 교리에 단순히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 명시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도출한 결론을 구별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교리가 곧바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무염시태론과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에서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최초의 인간 아담이 지은 한 번의 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 evil)은 부모와 조부모, 여러 세대의 조상들이 실제적인 삶에서 형성한 악한 성향이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인간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면서 실제적인 악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456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부모에게서 유전악을 물려받지만, 그 유전적 성향 자체 때문에 실제적 죄를 범한 사람으로 책망받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악을 선택하고 행할 때, 그 실제적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악을 향한 성향과 관계되며, 이미 개인적으로 범한 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주장과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주교의 원죄를 스베덴보리의 유전악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아담의 죄에 대한 후손 개개인의 직접적인 개인적 책임이나 단순한 법적 죄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죄는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에 전해진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이며,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물려받은 상태입니다. 교리서는 인간 본성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상처를 입었으며,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영향을 받고 죄로 기우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죄로 기우는 성향을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세례로 원죄가 제거된 사람에게도 이러한 성향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서로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가톨릭의 무염시태가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의 유전적 성향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가톨릭의 원죄 개념에 따른 무염시태가 곧바로 논리적으로 반박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야 두 전통의 실제적인 신학적 쟁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염시태를 검토할 때, 가장 결정적인 본문은 AC.1573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항목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겉 사람 안에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유전악이 있었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오는 유전악은 전혀 없었지만, 인간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외적 인성에는 유전적 악이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AC.1573은 이러한 모성적 유전성이 주님께서 실제로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던 이유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유전악을 취하셨다는 사실과 실제로 죄를 지으셨다는 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실제적인 악을 행하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통하여 시험을 받으셨지만,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영화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주님께서는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그 인성을 점차 신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가 특별히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AC.4564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이 거듭날 때, 유전악과 실제적인 악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 악은 주님의 섭리에 의하여 분리되고 주변으로 물러나며, 인간은 주님께서 그를 악으로부터 붙드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만큼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간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선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조차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은 악과 거짓이며,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전혀 다른 일을 이루셨습니다. AC.4564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악을 완전히 제거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일반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주님의 영화 사이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악에서 분리되고 선 안에 보존되지만, 주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과 구속의 핵심은 마리아의 무죄한 출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취하신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주님의 시험과 구속의 관계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히4:15는 주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사실과 죄 없으셨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 시험에 굴복하여 죄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시험을 단순히 인간에게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한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세력과 싸우시고, 그들을 이기심으로써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으며, 동시에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이러한 시험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였으며,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악의 성향을 취하셨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주님의 거룩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왜 실제적인 시험을 받으셨으며 어떻게 구속과 영화를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 도출되는 판단이지, AC.1573 자체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라는 후대의 가톨릭 교리를 명시적으로 논박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문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과 그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염시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가 실제로 많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을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 동안 어떤 구체적인 죄를 범했는지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마리아의 일생과 그의 모든 내적 상태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특별히 죄 많은 사람으로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천사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한 복된 여인입니다. 눅1:38에서 그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의 거룩함을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구원을 기뻐하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고백이 무염시태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구속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마리아에게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가 주님의 은총을 받고 거룩한 쓰임을 감당한 복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인간의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어떤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참된 선과 거룩함의 근원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선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 거룩한 삶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높은 천국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가 선 자체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피조물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마리아의 거룩함을 하느님에게서 독립된 속성으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모든 은총과 거룩함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거룩함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특별한 상태를 신적으로 계시된 진리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이러한 특별한 무죄 상태를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인간성을 취하신 주님의 시험과 영화에 신학적 무게중심을 둡니다. 또한 그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보다, 주님께서 그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어떻게 다루시고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가에 더욱 집중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했다는 사실도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천주교가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을 그의 독립적인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으며, 평생 모든 실제적인 죄에서도 자유로웠다는 주장은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이 교리를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고, 그 유전적인 것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완전히 제거하시고,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특별한 상태에 있었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인간이지만, 성육신의 능력과 구속의 완성은 오직 주님께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가장 귀중한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특별한 신분이나 거룩함을 선언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의 중심에는 마리아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의 출생과 거룩함을 바라보는 데 머무르기보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 거듭남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선과 진리의 생명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의 유전적 한계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것을 영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주시며, 그들이 천국의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가장 위대한 신비는 마리아의 특별한 출생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인간의 구원과 거룩함의 유일한 근원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했던 바로 그 주님 한 분이십니다. (SL.RC.032 해설)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되었으며, 모든 참된 거룩함과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마리아가 구속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였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구속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고 평생 개인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573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직접 가르치며, AC.4564에서는 주님께서 그 유전적인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므로, 두 교리의 차이를 단순한 직접적 모순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전제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자신의 능력으로 영화하셨고, 모든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의 근원 역시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RC.031.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SL.RC.03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 주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칭호인가, 영화된 주님의 본성을 혼동하는 표현인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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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 주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칭호인가, 영화된 주님의 본성을 혼동하는 표현인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이 명제는 천주교의 마리아 교리를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신학적 출발점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은 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은 어머니이며, 교회가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복된 여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이 칭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중요한 신앙 표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어머니를 가지실 수 있는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말은 그가 신성의 근원이라는 뜻인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한 인간 여성에게 지나치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신성을 만들어 냈거나 하느님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이 칭호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확립되었는지 이해하고,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성육신과 인성의 영화에 비추어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66항과 495항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교리서 495항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육신으로 낳은 분이 성부의 영원한 아들, 곧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테오토코스’(Theotokos)이며,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낳은 이’ 또는 ‘하느님을 출산한 이’로 번역됩니다. 이 칭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중요한 교리적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논쟁의 핵심은 마리아 개인을 얼마나 높이 공경해야 하는가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신적 말씀과 특별히 결합한 별개의 인간 인격이 아니라, 신적 말씀이 친히 인간이 되신 한 위격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단순히 어떤 독립적인 인간 인격의 어머니이고, 그 인간 안에 하느님이 별도로 거하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마리아가 신성의 기원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교리서 466항은 신적 말씀의 본성이나 신성이 마리아에게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며, 신적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육신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우선 마리아론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칭호를 처음부터 마리아 숭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표현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보호하려 한 핵심적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을 신적 말씀과 분리된 독립적 인간 인격으로 이해한다면,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느 인간과 특별히 결합하신 사건으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테오토코스’라는 칭호의 본래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칭호는 천주교뿐 아니라 정교회와 상당수 개신교 신학 전통에서도 인정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칭호가 올바른 그리스도론적 의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칭호로부터 발전한 모든 후속 마리아 교리가 정당하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후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와 공경을 설명하는 신학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칭호의 본래 의미와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한 마리아 공경 및 신심 체계를 구별해야 합니다. 후대의 신학적 발전을 비판하기 위하여 처음 칭호에 담긴 진리까지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처음 칭호가 지닌 정당성을 근거로 그 이후의 모든 교리를 자동으로 인정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눅1:31-35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며,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43절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천주교가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인용하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의 ‘내 주의 어머니’라는 표현과 후대에 확립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적 칭호는 그 역사적·신학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으며, 그분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지만, 마리아가 신성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또한 46절, 47절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스스로 신적 지위를 주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이 보여 주는 마리아의 복됨은 그가 신성의 근원이 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한 쓰임을 감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그는 주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의 영혼은 마리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일반 인간처럼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혼은 신성 자체이며,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것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이었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일반 인간의 출생과 주님의 성육신을 구별하면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이신 여호와로부터 신성을,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분리된 두 신적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며, 아들은 그 신성이 인간에게 나타나기 위하여 취하신 인성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도록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지만, 주님의 신성을 낳거나 그 신성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마리아를 신성의 기원으로 이해하지 않는 천주교의 공식 설명과 중요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의 차이는 성육신의 출발점보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35와 TCR.102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오는 인성을 입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벗으셨다’는 표현을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단순히 버리시고, 신성만 남기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한하고 자연적인 인간적 요소를 극복하시고, 그 인성을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영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화는 신성이 인간 안에 머무는 정도의 결합이 아니라, 인성 자체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영화 이후에도 영원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성의 상태에 머물러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의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며, 그분은 신적 인성으로 영원히 계십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전통적 그리스도론과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고, 신성과 인성이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보존하면서 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고백하지만, 그 인격 안에서 인성이 영화되는 방식과 최종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102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마리아의 아들이시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잘못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셨다는 사실은 참되지만, 영화 이후에도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적인 것에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에서는 더 이상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오는 신적 인성을 입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요2:4와 19:26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라고 부르신 말씀들을 이러한 구별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 본문의 문자적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여자여’라는 호칭 자체가 모자 관계의 부정이나 무례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요19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의 장래를 돌보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만으로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마리아와의 자연적 모자 관계를 부정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들을 사용하는 목적은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연적 인성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과 스베덴보리의 인성 영화론에 근거한 해석을 구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입장은 TCR.94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이해가 주님의 신성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다른 성인들보다 높이고 성인들의 여왕으로 공경하는 관행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신심이 지나치게 발전하면 주님을 영원한 신적 존재로 이해하기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자연적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비판이 향하는 대상을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에서 감당한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정체성을 자연적 모자 관계 안에 가두거나, 마리아에게 지나친 종교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주님의 유일한 신성을 흐리게 만드는 이해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또한 TCR.94에 나타나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강한 비판은 스베덴보리가 18세기의 종교적 상황을 바라보며 제시한 자신의 평가입니다. 이를 오늘날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이라고 가르친다는 주장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를 피조물로 인정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신이라고 선언했는가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부여한 특별한 칭호와 공경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주님을 향한 예배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가 앞으로 다룰 마리아의 여러 교리와 신심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마리아에 관한 특별한 영적 경험도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이 흰옷을 입고 나타난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고 주님께서 자신에게서 태어나셨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 안에 모든 신성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여전히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첫째,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적 증언과 동일한 종류의 자료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마리아의 말 가운데 주님께서 ‘하나님이 되셨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원래 신적 존재가 아니셨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변화는 신성의 획득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의 영화입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하면 TCR.827은 마리아를 주님의 신성과 구별되는 피조물로 이해하며, 천국에서도 그가 오직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보는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보여 줍니다. 특히 이 기록은 마리아에 대한 그의 평가가 단순한 역사적 인물에 관한 논평이 아니라, 영화된 주님과 천국의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판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 칭호를 통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신적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 칭호 자체가 마리아를 신성의 근원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문제는 영화 이후의 주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참되지만, 그분은 그 인성을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 인성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진술과 ‘영화된 주님은 지금도 마리아의 아들이시다’라는 영원한 관계에 관한 진술은 같은 의미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마리아가 신성을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그런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어떻게 영화되었으며, 그 영화 이후 자연적 모자 관계를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계속 말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육신하신 신적 위격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지속적으로 고백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화된 주님의 인성이 더 이상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인간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두 전통 사이의 실제적인 신학적 쟁점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했다고 해서 마리아라는 인물의 신앙과 순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눅1:48에서 마리아는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에게 맡겨진 거룩한 쓰임을 존중하는 것은 성경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의 복됨을 이해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역할이 마리아에게 독립적인 신적 권위나 구원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국의 모든 천사와 사람은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받은 인간이며, 그분을 예배하는 천국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신앙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인도한다면 그 안에는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중이 마리아를 주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별도의 중재자나 특별한 영적 권위자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근거는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무염시태와 성모 승천, 하늘의 여왕, 마리아의 전구와 공경을 다룰 때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동시에 이 문제는 천주교만이 아니라 개신교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개신교 신자들 역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나란히 존재하시는 별개의 신적 존재로 생각하거나, 성육신 이후에도 신성과 인성이 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해 역시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며, 아들은 그 신성이 세상에 나타나신 인성과 관계되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작용과 관계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된 세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질문도 결국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지식을 자신의 영적 우월감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깊은 진리를 배우고도 그 진리가 지향하는 사랑과 겸손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목적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신학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가장 귀중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46절, 47절에서는 자신을 높이는 대신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된 여인인 것은 그가 주님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쓰임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눅8:21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혈연관계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영적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길은 그에게서 주님의 영광을 나누어 받는 특별한 권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 성육신의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가 보여 준 순종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복된 여인이었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참된 신앙은 마리아에게서 멈추지 않고,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했던 바로 그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SL.RC.031 해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중요한 그리스도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칭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확립되었으며, 천주교는 마리아가 신성의 근원이라거나 하느님보다 높은 존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명제 자체를 마리아를 신격화한 오류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주님께 자연적인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영화 이후에도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인성을 지니신 채 영원히 그의 아들이시라는 이해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시고, 아버지이신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마리아가 신성을 낳았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의 인성의 영화와 그 이후 마리아의 모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의 핵심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영화된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관계로 계속 적용하거나, 그 관계에서 마리아의 특별한 영적 권위와 구원적 역할을 확대하여 도출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후대의 마리아 공경과 전구에 관한 문제는 이 칭호 자체와 구별하여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존중받아야 할 믿음과 순종의 본보기이지만, 모든 신적 생명과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이 명제를 이해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그 인성을 영화하여 영원한 신적 인간이 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영광을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RC.032.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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