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RC.004.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이 명제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바라보는 신앙적 확신과, 그 확신이 자칫 잘못 이해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영적인 위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연속체로 이해하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총이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 종교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며, 교회가 보존해 온 신앙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성사와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전승된 신앙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대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려는 귀중한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을 가르치고 보존하는 공동체라는 사실과, 그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 실제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같은 것일까요? 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가르침이 자신의 내면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특정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제도적 권위가 그 구성원 개개인의 영적 상태를 보증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천주교의 교회론뿐 아니라, 인간이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하고 무엇을 신앙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36–838항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설명하면서,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회 통치 및 친교의 유대 안에서 교회와 온전히 결합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제837항은 교회에 온전히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명시합니다. 그 사람은 교회의 품 안에 외적으로 머물러 있을 뿐, 마음으로는 참되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14항 역시 같은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또한 이 문헌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받은 은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생활이 인간 안에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라는 명제를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로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명제는 교회가 보존하고 전달하는 구원의 수단들에 대한 신뢰가, 일부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한 확신으로 옮겨질 때 발생할 수 있는 신앙적 통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공식 교리가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고 해서, 교회 소속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권위, 전통과 규모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공동체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계승과 신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면, 그 안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이 올바른 신앙의 길 위에 있다는 확신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신앙의 안정과 지속성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확신의 근거가 점차 주님과의 실제적 결합에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감으로 이동할 때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가르치므로 나는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이므로 나는 이미 참된 신앙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다릅니다. 앞의 문장은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뒤의 문장은 교회의 권위와 정통성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에서, 자신이 어느 공동체에 속하고 어떤 가르침을 인정하는가의 문제로 옮겨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교회는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는 수단에서, 인간이 자신의 영적 안전을 확인하는 외적 근거로 변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위험을 이미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어지는 22절과 23절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주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으로 종교적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에 거해야 참으로 자신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참된 제자의 표지는 단순히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말씀 안에 거한다는 데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역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참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은 외적인 종교적 정체성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인정하는 일이 실제적인 순종과 사랑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귀중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의 마음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에게 주어진 진리는 아직 온전한 영적 생명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참된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과 참된 교회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 걸쳐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특히 NJHD.242는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있으며, 말씀은 인간이 그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NJHD.243에서는 교회가 존재하려면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사람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를 무시하거나 올바른 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되려면 교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인간 안에 교회를 이루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하여 인간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이해에 지식으로만 머물고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직 참된 교회의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 역시 단순히 진리를 인정하는 생각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적인 삶의 원리가 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천주교회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교회의 모든 가르침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과 동의만으로 참된 신앙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교회의 기준은 교리적 소속이 아니라,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NJHD.242–243 해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798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들이 교리적인 차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및 그 밖의 여러 이름으로 구별되어 왔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교회들을 구별하실 때 그 결정적인 기준은 단순히 서로 다른 교리적 명칭이 아니라, 그 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그는 교회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교리의 차이로 발생하는 분열과 적대감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서로 다른 교리들이 모두 동일하게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리는 여전히 진리와 오류의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하며, 잘못된 교리는 인간의 삶과 신앙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차이를 근거로 다른 공동체 전체를 배척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을 참된 신앙의 유일한 보유자로 여기는 태도는 주님의 교회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기준입니다. 그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답게, 곧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아갈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명칭과 역사적 계보, 교리적 정체성이 참된 신앙의 결정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다른 교회들을 잘못된 공동체로 판단하더라도, 정작 자신의 삶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리적 이해에 일정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AC.1798 해설)

 

스베덴보리는 AC.8152에서 이 문제를 한층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참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가 본질적인 것이며, 교리와 삶에서도 그것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리를 삶과 분리하는 사람들은 참된 영적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교회를 이루는 것은 삶이지 교리 자체가 아니며, 교리는 삶이 되는 만큼 교회를 이룬다고 밝힙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매우 깊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 안에 저장된 진리는 아직 그 자체로 인간의 생명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진리를 얼마든지 설명하고 가르치면서도 실제로는 그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멸시한다면, 그의 이해 안에는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을지라도 의지 안에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가 아는 진리가 이미 그의 삶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주님의 교회가 어느 한 장소나 공동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더 이상 인간이 외적으로 가입하는 조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각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표현되는 영적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결합할 때 주님의 보편적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참된 신앙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참된 신앙이 그 사람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보증은 될 수 없습니다. (AC.8152 해설)

 

그렇다면 천주교회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전통, 성사와 전례, 수도생활과 자선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러한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외적 질서와 형식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예배의 질서는 인간이 일상적 생각에서 벗어나 주님께 마음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오랫동안 전해져 온 기도문은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도록 도울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선과 봉사는 이웃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수단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내적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 영적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이웃을 멸시할 수 있고, 오랜 시간 기도하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며, 교회의 권위를 열심히 옹호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사랑과 겸손에서는 멀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가능성은 어느 종교 공동체에나 존재하며, 특정 천주교 신자들의 실제 내면을 단정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활동의 외적 모습과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반대의 가능성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는 자신이 배운 교리를 모두 깊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교회는 단순한 신분의 보증이 아니라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실제적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러한 내적 차이를 중요하게 봅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영적 상태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그 차이는 외적인 종교적 지위보다 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삶의 방향에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미묘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천주교회가 교회 소속만으로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 없는 교회 소속은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837항의 설명은, 교리와 삶을 분리해서는 참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주장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전통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가톨릭교회 안에 신앙과 성사와 교회 통치의 온전한 질서가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며, 이러한 교회적 일치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두며, 외적인 교회의 소속 여부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거듭나고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이 차이는 교회 제도의 가치를 인정하는가 부정하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제도의 영적 가치를 어디까지 인정하며, 그것이 인간의 내적 신앙과 어떤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도 외적 소속만으로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므로, 이번 명제에서 오류로 지적해야 할 대상은 천주교회의 모든 교회론이 아닙니다. 교회가 지닌 권위와 은총의 수단에 대한 신뢰를 자신의 내적 신앙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바꾸어 놓는 이해, 바로 그것이 핵심적인 검토 대상입니다. 교회가 참된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그 교회에 속한 사람 모두가 그 진리에 따라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돌아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주교 밖의 신앙생활도 생각하게 됩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오랫동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해 왔다는 사실에서 신앙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정통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안수를 받았으며 오랜 세월 말씀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외적 경력과 지위가 그 사람 안의 참된 신앙을 자동으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로운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도 같은 경고가 적용됩니다. 자신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알고, 내적 의미와 상응의 원리를 이해하며, 다른 기독교 전통의 교리적 문제까지 분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더 높은 영적 위치에 놓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순간 그는 참된 교회에 관한 진리를 배웠으면서도 그 진리의 핵심에서 멀어질 위험에 놓입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종교적인 이름과 지식을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많이 알게 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의 악을 더욱 세밀하게 발견하고,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임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교회에 속해 있는가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통하여 배운 진리가 실제로 자신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어떤 생명으로 자라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공동체를 내려다보는 기준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실천하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귀중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오랜 세월 전승된 신앙의 가르침과 예배의 질서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이러한 교회적 소속과 신앙의 외적 질서를 참된 신앙 자체의 보증으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과 교회가 자기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앞의 것은 외적 관계와 소속의 문제이지만, 뒤의 것은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적 삶으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특정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시며, 반대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서 참된 선과 진리를 발견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아시며,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그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신앙의 보증을 찾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명칭이나 역사적 권위, 종교적 지위와 경력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거듭남과 그 열매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영적 상태조차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이러한 열매를 근거로 자신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선언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자신의 사랑이 점차 자신에게서 주님과 이웃에게로 향하도록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길임은 분명합니다. 결국 교회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은 ‘당신은 우리 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안전합니다’라는 확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지금도 인도하고 계십니다’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참된 신앙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참된 신앙의 보증은 외적 교회 소속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RC.003.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SL.RC.00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