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오류 100선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유아 세례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아이라도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들을 때 우리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세례라는 외적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의 내적 생명에도 실제로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인간의 내면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은 과연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생명을 받아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번 주제의 핵심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1265항은 세례가 모든 죄를 씻을 뿐 아니라 세례받은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 하느님의 양자,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으로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제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며,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능력과 선을 행할 영적 능력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세례를 단순한 상징적 의식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천주교는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례의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죄는 그 은총의 열매를 가로막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고 인정하며, 세례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를 통한 구원 가능성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실제 쟁점은 ‘천주교 신자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가?’라는 단순한 배타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세례라는 외적 성사가 그 자체로 인간의 영적 신분과 내적 생명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이해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하면서도, 그 출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구절을 세례의 필요성과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실제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에는 외적 정결과 내적 새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단순히 외적 사건이나 자연적 신분 변화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주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이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원은 인간의 혈통이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세례는 그 출생을 가리키는 거룩한 표지가 될 수 있지만, 그 표지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분리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외적 물세례와 내적 거듭남을 동일한 사건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세례가 가리키는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 걸쳐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세례에 세 가지 쓰임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 쓰임은 사람을 기독교회 안으로 인도하고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하는 것이며(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관습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하는 세례가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례의 첫 번째 쓰임과 마지막 쓰임을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고, 후자는 그 입구를 지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을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인도하며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준비시키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유아 세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그는 유아들이 아직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지만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세례가 교회로 들어가는 표지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기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성인의 의미에서 거듭남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아 세례에는 아무런 영적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고,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전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결정적인 구별이 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기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출발이며, 장차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시작입니다. 따라서 세례받은 어린아이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를 때에도, 그 표현이 가리키는 은총의 시작과 장차 이루어져야 할 실제적인 영적 성장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TCR.677–680 해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에서도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남과 거듭남에 속한 것들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세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그 거듭남을 나타내는 표지라는 구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은 말씀의 진리를 상응적으로 나타내며,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영적 정결을 뜻합니다. 그러나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미움과 탐욕, 교만과 악한 욕망을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내적 악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물이 가리키는 참된 씻음은 물이라는 자연적 요소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이 상응하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세례가 거룩한 이유는 물 자체에 독립적인 영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인간에게 거듭남의 길과 목적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례의 표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의식 자체에 지나친 구원적 효력을 부여하는 것은, 외적 표지와 그것이 나타내는 내적 실재를 혼동하는 문제가 됩니다. (AC.4255, 10239 해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목적을 설명하는 TCR.681과 684, 그리고 성찬과 거듭남의 관계를 설명하는 TCR.728과 729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분이 변경되거나 교회의 회원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새롭게 형성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TCR.729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으며 점차 거듭나 주님의 자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유아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세례받은 아이가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놓인다는 사실은 참으로 귀중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영적 성장의 완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기독교회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어떤 특정한 교회의 제도적 의식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사람이 태어난 종교적 환경에 따라 그분의 사랑을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생명으로 새롭게 하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존재로 자라나도록 인도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TCR.681, 684, 728–729 해설)

 

이제 이러한 가르침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기억하고, 세례받은 날짜를 소중히 여기며, 주일마다 미사에 참여하고, 여러 성사생활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하며, 가족에게 분노와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세례받은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이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최종적인 운명은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반대로 아직 세례받지 않았거나 특정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삶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역사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세례는 신앙생활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세례받은 날이 중요한 것은 그날부터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거룩한 표지가 평생의 삶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생명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라는 가르침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주교만을 비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개신교 신앙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구원받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서 세례가 새로운 신분의 출발점으로 강조된다면, 일부 개신교에서는 영접기도나 회심의 고백이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두 전통의 구원론과 성례전 이해는 서로 다르지만, 신앙인이 외적 종교 행위나 과거의 한 사건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확실한 보증으로 삼으려는 위험은 공통으로 존재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이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고, 상응론을 배우고, 거듭남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신자들보다 더 높은 영적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지식과 생명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심지어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도 자기 우월감과 영적 교만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내가 세례를 받았는가?’, ‘내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질문은 ‘나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따라 실제로 악을 피하고 있는가?’, ‘나의 사랑은 이전보다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생명을 내 삶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참된 열매는 사람의 이마에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 삶으로 나타나는 사랑과 선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장차 이루어질 거듭남의 중요한 표지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인간을 신앙의 공동체와 연결하시고, 영계의 질서 안에서도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외적 세례의 시행 자체를 인간의 내적 거듭남과 동일시하거나, 그 의식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영적 상태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받은 이후의 성장과 은총에 대한 협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단순한 오해를 공식 교리 전체의 입장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례가 그 자체로 새로운 영적 신분과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부여한다는 성사적 이해는, 세례를 거듭남의 표지와 입문으로 구별하는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종교 조직에 가입하거나 특정한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분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살아 있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례가 가리키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은 한 번 머리 위에 부어질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을 씻고 새롭게 하는 일은 평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속적인 거듭남 속에서 인간은 점차 주님의 자녀다운 존재로 형성되어 갑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세례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거룩한 입문이자 거듭남의 표지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영적 생명은 외적 세례의 시행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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