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And Noah begat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창6:10)
616. ‘세 아들을 낳았으니’는 그 교회에서 일어난 세 종류의 교리, 신학(theology)을 말하며, ‘셈과 함과 야벳이라’가 의미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Noah begat three sons” signifies that three kinds of doctrine thence arose, which are meant by “Shem, Ham, and Japheth.”
617. 세 아들을 낳았으니 이것은 거기, 곧 노아 교회에서 세 종류의 새 교리, 신학이 일어남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은, 앞서 살핀 모든 내용들(AC.337, 339, 402, 468), 곧 이름들은 오직 다양한 교회들, 그리고 같은 말이지만, 교리들, 신학들을 상징할 뿐이라는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이름들이 여기 언급되는 이유는 순전히 이전 내용의 연속성 혹은 본문의 문맥 때문인데, 그것은 주님이 예견하신 것으로, 이런 지니어스를 가진 사람들, 곧 타고난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가운데서 세 종류의 다른 교리들이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이들 세 교리, 곧 신학은 아래 셈, 함 및 야벳을 다루는 데서 주님의 자비, 곧 허락하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Noah begat three sons. That this signifies that three kinds of doctrine thence arose is evident from all that has been shown before about names signifying nothing else than churches, or, what is the same, doctrines. So it is here; but here they are merely mentioned for the sake of the series or connection with the things that precede, which are, that it was foreseen by the Lord that the man of this genius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but yet that three kinds of doctrines would thence have birth, which doctrines, of the Lord’s Divine mercy, shall be described hereafter, where Shem, Ham, and Japheth are treated of.
618.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본 절, ‘세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과거 시제로 언급되었다는 사실, 이 모두, 아직 미래의 일인데 말이지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속뜻이라는 건, 시간, 즉 시제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초의 언어(the original language, 원어)는 이런 방식을 선호합니다. 거기서는 종종 한 가지 같은 말을 가지고 아무 시제에나 상관없이 사용합니다. 시제에 따라 다른 말을 쓰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하면, 그 속뜻, 그 내적인 것들이 더 명료해지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이런 융통성을 그 속뜻으로부터 얻는데요, 그 풍부함이란, 사람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 시제라든지 혹은 언어 문법의 어떤 엄격함 같은 걸 따지지 않았을까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That “Noah was righteous and perfect,” that he “walked with God,” and in this verse that he “begat three sons,” is all said in the past tense, and yet these expressions look to the future. It should be known that the internal sense is such that it has no relation to times; and this the original language favors, where sometimes one and the same word is applicable to any time whatever, without using different words, for by this means interior things appear more evidently. The language derives this from the internal sense, which is more manifold than anyone could believe; and therefore it does not suffer itself to be limited by times and distinctions.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창6:9)
610. ‘노아의 족보’는 새 교회가 개선되거나 다시 태어날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의미합니다. By “the births of Noah” is signified a description of the reformation or regeneration of the new church.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그 교회는 체어리티를 타고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의인’(또는 ‘의로운’)(just, righteous)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관계가 있고, ‘완전한’(perfect)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That “Noah was a man just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signifies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just” (or “righteous”) has relation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당대’(generation)는 종교적 발전의 한 단계를 말합니다. The “generations” are those of faith.
‘하나님과 동행’은 앞서 에녹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신앙과 관련된 교리를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here as before, when said of Enoch, the doctrine of faith.
611. ‘노아의 족보’라는 표현이, 새 교회가 개선되거나 다시 태어날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씀드린 내용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창2:4; 5:1) That by “the births of Noah” is signified a description of the reformation or regeneration of the new church,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Gen. 2:4; Gen. 5:1).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2: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612.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주2) in his generations.
이 교회는 체어리티라는 정서를 타고날 수 있었던 교회였음을 위와 같이 표현한 것이라는 이런 사실은, ‘의인이요 완전한’이라는 표현의 상징을 확인하면 됩니다. ‘의인’(또는 ‘의로운’)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완전한’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각각 관련됩니다. 같은 의미를 이 교회만의 차별화된 특징인 체어리티를 들여다 볼 때 또 만나게 되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따라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AC.640, 765) That this signifies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endowed with charity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ust and perfect,” “just” (or “righteous”) having regard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and also from the essential of that church being charity,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의인’(또는 ‘의로운’)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선과 관련이 있고, ‘완전한’은 체어리티에 수반된 진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아래 이사야 말씀을 보면 확실합니다. That “just” (or “righteous”) has regard to the good of charity, and “perfect” to the truth of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Isaiah: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They will seek me daily and desire knowledge of my ways, as a nation that doeth righteousness, and forsaketh not the judgment of their God; they will ask of me the judgments of righteousness, and will long for the approach of God. (사58:2)
여기 ‘규례, 판단’(judgment)은 진리에 의해 옹호되는 일들을, ‘공의, 의’(righteousness)는 선에 의해 촉구되어지는 일들을 각각 대표합니다. Here “judgment” denotes the things which are of truth, and “righteousness” those which are of good.
‘정의와 공의를 행함’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일종의 공식 표준이 되었습니다. (아래 말씀들 참조) “Doing judgment and righteousness” became as it were an established formula for doing what is true and good (as in Isa. 56:1; Jer. 22:3, 13, 15; 23:5; 33:15; Ezekiel 33:14, 16,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사56:1)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13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5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렘22:3, 13, 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렘23: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14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6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19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겔33:14, 16, 19)
주님 말씀입니다. The Lord said: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The righteous(주3) shall shine forth as the sun, in the kingdom of my father, (마13:43)
‘의인들’은 체어리티를 타고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종말과 관련된 구절에서는, “the righteous” meaning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nd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he said: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The angels shall go forth and shall sever the wicked from among the righteous. (마13:49)
여기서도 ‘의인들’은 체어리티에서 오는 선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Here also the “righteous” denote those who are in the good of charity.
[2] 하지만 ‘완전한’(perfect)은 체어리티 가운데 자라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진리는 여러 다른 곳에서 비롯될 수 있는데, 체어리티의 품에 안겨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 가운데서 자란 진리, 이 진리를 이름하여 ‘완전한’, ‘완전한 자’(perfect man,)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다윗의 글에 나옵니다. But “perfect” signifies the truth which is from charity, for there is truth from many another origin; but that which is from the good of charity from the Lord is called “perfect” and a “perfect man,”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Who shall sojourn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perfec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시15:1-2)
‘완전한’(perfect, 혹은 온전한 complete, 정직한, 반듯한 upright) 사람을 여기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perfect” [or “complete”] man is here described.
계속해서 Again: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With the holy thou wilt show thyself holy; with the perfect man thou wilt show thyself perfect, (시18:25)
‘완전한 자’는 체어리티를 동반한 거룩이나 선의 결과로 완전한 사람, 반듯한 사람입니다. where the “perfect man” is one who is so from holiness, or the good of charity.
다시 계속해서 And again: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Jehovah will withhold no good from them that walk in perfectness [integritate]. (시84:11)
[3] ‘완전한 자’(perfect man), 반듯한 한 개인은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선으로 격려를 받는 사람, 다시 말해서, 타인을 위한 사랑으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은 반듯함, 정직함에 대해 말씀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는 이것을 종종 ‘걸어가다’(walk), ‘길’(way) 같은 단어로 표현합니다. 반듯한 사람 혹은 성실한 사람과 관련해서는 ‘반듯한, 옳은’(upright, right)이나 ‘정직, 청렴’(uprightness, rectitude)을 사용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진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That a “perfect man” is one who is true from good, or who speaks and does trut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s “walk” and “way” being often applied to what is perfect, that is, to wholeness or entirety, and also the words “upright” or “uprightness,” which words pertain to truth.
예를 들면, 다윗의 글입니다. As in David: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I will teach the perfect in the way how far he shall come unto me. I will walk within my house in the perfectness of my heart; (시101:2)
그리고 6절에서 and in the sixth verse: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He that walketh in the way of the perfect, he shall minister unto me. (시101:6)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Blessed are the perfect in the way, who walk in the law of Jehovah. (시119: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Perfectness and uprightness shall guard me. (시25:21)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Mark the perfect man, and behold the upright, for the end of that man is peace. (시37:37)
이 구절들을 보면, ‘정직하다, 의롭다’(righteous)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온전하다’(perfect)는 선에서 나온 진리를 행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또한 ‘정의와 공의를 행함’인 것입니다. It is evident from these passages that he is called “righteous” who does what is good, and that he is called “perfect” who does what is true therefrom, which also is to “do righteousness and judgment.”
‘거룩’(holiness)과 ‘의’(righteousness)는 신앙의 천적 측면이며, ‘온전함, 성실’(perfectness, integrity)과 ‘공의’(judgment)는 그런 천적 측면에서 나오는 영적 측면입니다. “Holiness” and “righteousness” are the celestial of faith; “perfectness” and “judgment” are the spiritual thence derived.
※ 각주
2. 여기에 쓰인 ‘완전하다’는 ‘전체’, ‘모든, 온’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 단어는 정수입니다. [개정자] “Perfect”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whole,” “entire.” Swedenborg’s word is integer. [Reviser]
3. 두 영어 단어 ‘정의롭다’, ‘의롭다’에 대한 라틴어는 하나밖에 없으며, ‘정의’, ‘의’의 경우도 같습니다. [개정자] The Latin has only one word for our two English words “just” and “righteous,” and it is the same with “justice” and “righteousness.” [Reviser]
605. 지금 다루는 주제는 ‘노아’라는 이름을 가진 새 교회의 생겨남(formation)입니다. 이 교회의 생겨남을 방주를 가지고 묘사하고 있는데, 방주 안에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The subject now treated of is the formation of a new church, which is called “Noah”; and its formation is described by the ark into which living things of every kind were received.
늘 그렇듯,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데, 그것을 방주를 지어 띄움, 홍수로 범람한 물 위를 흔들거리며 하염없이 둥둥 떠다님 등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But as is wont to be the case, before that new church could arise it was necessary that the man of the church should suffer many temptations, which are described by the lifting up of the ark, its fluctuation, and its delay upon the waters of the flood.
새 교회, 곧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마침내 참된 영적 인간이 되면서 자유하게 되는데, 이것을 물의 빠짐과, 이어지는 많은 일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And finally, that he became a true spiritual man and was set free is described by the cessation of the waters, and the many things that follow.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고수하시는 분들은 결코 이런 메시지를 볼 수 없습니다. 이 경우가 특히 그런데요,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연결되고,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No one can see this who adheres to the sense of the letter only, in consequence (and especially is this the case here) of all things being historically connected, and presenting the idea of a history of events.
하지만 말씀을 이렇게 겉 글자와 달리 그 속뜻이 담기도록 기록한 이유는, 이런 형식이 그 당시 사람들의 스타일이요, 그들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형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무슨 대표성을 띤 그림처럼 포장, 그걸 역사 형태로 정돈하는 이런 문학 형태는, 그것이 더욱 더 역사 시리즈물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것은 더욱 더 그들의 재능에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But such was the style of the men of that time, and most pleasing to them it was that all things should be wrapped up in representative figures, and that these should be arranged in the form of history; and the more coherent the historical series, the better suited it was to their genius.
고대인들은 오늘날처럼 어떤 사실을 날 것으로, 있는 그대로 다루느라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깊은, 심오한 사고(思考, thoughts)에 힘썼고, 그 결과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 아주 기름진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For in those ancient times men were not so much inclined to memory-knowledges as at this day, but to profound thoughts, of which the offspring was such as has been described.
이것이 고대인들의 지혜였습니다. This was the wisdom of the ancients.
606. ‘홍수’, ‘방주’ 및 이런 이유로, 이들과 관련된 것들이 거듭남과, 거듭남에 앞서 선행하는 시험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거듭남과 시험을 홍수, 그 범람하는 물에 비유하지요. That the “flood,” the “ark,” and therefore the things described in connection with them signify regeneration, and also the temptations that precede regeneration, is in some degree known among the learned at this day, who also compare regeneration and temptations to the waters of a flood.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607. 하지만 이 교회의 캐릭터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But the character of this church will be described hereafter.
여기서는 살짝, 간략히만 말씀드리면, 태고 교회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었던 반면, 지금 보고 있는 이 교회는 영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That an idea of it may be presented here, it shall be briefly said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as already shown, but this church became spiritual.
태고 교회는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을 가졌었던 반면, 지금 이 고대 교회는 퍼셉션이 아닌, 그 자리를 대신하여 다른 종류의 딕테이트(dictate, inner voice), 곧 양심(conscience)이라고 하는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this, or the ancient church, had not perception, but in its place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2] 그러나 아직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고, 또 아마 믿기도 어려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태고 교회 사람들은 내적 호흡을 했다는 것입니다. 외적 호흡은 그저 암묵적이었고요. But what is as yet unknown in the world, and is perhaps difficult to believe, is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nternal respiration, and only tacit external respiration.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천사들처럼 생각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안색의 무궁한 변화, 특히 입술 주변의 미세한 변화들을 가지고 어떤 정신적 이미지들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Thus they spoke not so much by words, as afterwards and as at this day, but by ideas, as angels do; and these they could express by innumerable changes of the looks and face, especially of the lips.
입술에는, 셀 수 없는 근섬유들이 시리즈로 있는데, 오늘날엔 이 근섬유들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그 근섬유들을 가지고, 오늘날 사람들이 또렷한 음성으로 한 시간 동안이나 설명해야 할 어떤 아이디어를 일 분도 안 되어 보여주기도, 상징하기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오늘날 우리처럼 단어나 단어의 이런저런 조합, 곧 문장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분명하게 확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In the lips there are countless series of muscular fibers which at this day are not set free, but being free with the men of that time, they could so present, signify, and represent ideas by them as to express in a minute’s time what at this day it would require an hour to say by articulate sounds and words, and they could do this more fully and clearly to the apprehension and understanding of those present than is possible by words, or series of words in combination.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믿어지지 않지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입니다. This may perhaps seem incredible, but yet it is true.
또한 이 행성에 속하지 않은 다른 많은 존재가 있는데, 그들은 이런 비슷한 방식의 언어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자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814, 7359-7360, 7745-7746, 8022-8026, 8247-8248, 10587-10588, 10708-10710) And there are many others, not of this earth, who have spoken and at this day speak in a similar manner;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3] 저로 하여금 이 내적 호흡이 과연 무엇과 같으며,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nature of that internal respiration, and how in process of time it was changed.
그들 태고 교회 사람들은 천사들, 천사들이 이런 식으로 호흡을 하는데요, 이렇게 천사들이 가진 것과 같은 호흡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사고 속 아주 깊은 데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일종의 퍼셉션 같은 것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설명 불가한 것인데,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을 것입니다. As these most ancient people had a respiration such as the angels have, who breathe in a similar manner, they were in profound ideas of thought, and were able to have such perception as cannot be described; and even if it could be described such as it really was, it would not be believed, because it would not be comprehended.
그러나 그들의 후손으로 가면서 이 내적 호흡은 점차 감소, 고갈되어 갔습니다. 끔찍한 신념과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 내적 호흡은 소름 끼치도록 추한 것 말고는 무슨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생존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그들 모두는 쓸어버림을 당했습니다. But in their posterity this internal respiration little by little came to an end; and with those who were possessed with dreadful persuasions and fantasies, it became such that they could no longer present any idea of thought except the most debased, the effect of which was that they could not survive, and therefore all became extinct.
608. 내적 호흡이 줄어들면서,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외적 호흡이 점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 외적 호흡과 함께 온 것이 바로 말로 하는 스피치인데, 또렷이 발음되어 잘 들리는 스피치입니다. 생각을 구성하는 개별 아이디어들을 실어나르는 것이 바로 이 스피치입니다. When internal respiration ceased, external respiration gradually succeeded, almost like that of the present day; and with external respiration a language of words, or of articulate sound into which the ideas of thought were determined.
이 과정에서 인간의 상태는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전에 가졌던 그런 식으로 사물을 지각할 수가 없었고, 이 퍼셉션을 대신해서, 양심이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내적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곧 이 ‘내적 음성’이라는 것은 양심과 흡사하며, 퍼셉션과 양심 사이 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과 친숙합니다. Thus the state of man was entirely changed, and became such that he could no longer have similar perception, but instead of perception another kind of dictate which may be called conscience, for it was like conscience, though a kind of intermediate between perception and the conscience known to some at this day.
생각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들이 이런 형태의 주물 안으로 부어지기 시작하자, 즉, 말로 표현, 발음되기 시작하자, 태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사람을 통한 가르침을 받는 대신, 오직 겉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And when such determination of the ideas of thought took place, that is to say, into spoken words, they could no longer be instructed, like the most ancient man, through the internal man, but through the external.
태고 교회 계시들의 자리를 교리들이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육체적 감각들을 가지고 붙들 수 있는 첫 번째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육체적 감각들은 기억 속 구체적 이미지들로 이미지화 되어 가고, 다시 아이디어들, 생각을 구성하는 것들인데, 다시 이미지화되어 아이디어들이 됩니다. 바로 이 아이디어들이 가르침의 어떤 도로 내지는 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And therefore in place of the revelations of the most ancient church, doctrinal things succeeded, which could first be re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and from them material ideas of the memory could be formed, and from these, ideas of thought, by which and according to which they were instructed.
이렇게 태고 교회 뒤를 이어 일어난 교회인 고대 교회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니어스(genius, 재능, 마음, 정신, 심령)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인류에게 이 새로운 지니어스 또는 상태를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nce it was that this church which followed possessed an entirely different genius from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f the Lord had not brought the human race into this genius, or into this state, no man could have been saved.
609. ‘노아’라 이름하는 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 역시 똑같이 태고 교회 사람들의 상태 변화에서 왔기 때문에, 앞서 설명대로, 그들 역시 아무도 더 이상 태고 사람들이 누렸던 방식으로 무슨 가르침을 받거나 내면이 열리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면이 닫히고, 그래서 더 이상 하늘과 교통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예전의 그런 건 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As the state of the man of this church which is called “Noah” was altogether changed from that of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e could no longer—as said before—be informed and enlightened in the same way as the most ancient man; for his internals were closed, so that he no longer had communication with heaven, except such as was unconscious.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제는 오감을 통한 외적 방식으로밖엔 무엇을 배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Nor, for the same reason, could he be instructed except as before said by the external way of sense or of the senses.
이런 이유로, 태고 교회를 위해 만들었던 어떤 계시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이 이 세대의 사용을 위해 보호, 보전된 것은 바로 주님의 섭리입니다. On this account, of the Lord’s providence, doctrinal matters of faith, with some of the revelations to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preserve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가인’이 바로 이런 가르침들을 맨처음 수집, 멸망을 대비, 보전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케 하셨다 하신 이유입니다.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창4:15 관련 내용인 AC.392-396 참조) These doctrinal things were first collected by “Cain,” and were stored up that they might not be lost; and therefore it is sai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concerning which see what was said at that place, Gen.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에녹’은 이런 가르침들을 일종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으로 줄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만 유용한 것이었으며, 이걸 가리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창5:24 및 AC.521 참조) These doctrinal matters were afterwards reduced into doctrine by “Enoch”; but because this doctrine was of use to no one at that time, but was for posterity, it is said that “God took him.” (See also Gen.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지금 설명 중인 후손 또는 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이 따로 보관하신 것이 바로 이들 신앙의 가르침입니다. 퍼셉션은 사라질 것이며, 그래서 이 신앙의 가르침들이 잘 견디고 보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할 것을 주님은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These doctrinal matters of faith are what were preserved by the Lord for the use of this posterity or church; for it was foreseen by the Lord that perception would be lost, and therefore it was provided that these doctrinal things should remain.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These are the births of Noah; Noah was a man righteous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Noah walked with God.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And Noah begat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And the earth was corrupt before God;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And God saw the earth, and behold it was corrupt, for all flesh had corrupted its way upon the earth.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And God said unto Noah, The end of all flesh is come before me, for the earth is filled with violence from their faces, and behold I will destroy them with the earth.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Make thee an ark of gopher woods; mansions shalt thou make the ark, and shalt pitch it within and without with pitch.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And thus shalt thou make it: three hundred cubits the length of the ark, fifty cubits its breadth, and thirty cubits its height.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A window shalt thou make to the ark, and to a cubit shalt thou finish it from above; and the door of the ark shalt thou set in the side thereof; with lowest, second, and third stories shalt thou make it.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And I, behold I do bring the flood of waters upon the earth, to destroy all flesh wherein is the breath of lives from under the heavens; everything that is in the earth shall expire.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And I will set up my covenant with thee; and thou shalt enter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And of every living thing of all flesh, pairs of all shalt thou make to enter into the ark, to keep them alive with thee; they shall be male and female.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Of the fowl after its kind, and of the beast after its kind, of every creeping thing of the ground after its kind, pairs of all shall enter unto thee, to keep them alive.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And take thou unto thee of all food that is eaten, and gather it to thee, and it shall be for food for thee and for them.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And Noah did according to all that God commanded him; so did he.
요약
THE CONTENTS
599.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노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교회의, 거듭나기 이전 상태입니다.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state of the church called “Noah,” before its regeneration.
600. (9절) 그 교회의 사람들을 거듭날 수 있었던 사람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 그런 가운데 그 교회에서 세 종류의 교리(doctrine), 신학(theology)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바로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The man of that church is described, that he was such that he could be regenerated (verse 9); but that there arose thence three kinds of doctrine, which are “Shem, Ham, and Japheth” (verse 10).
601. (11-12절) 태고 교회의 남은 후손들은 그들의 끔찍한 종교적 신념(persuasion, 설득, 기만)과 더러운 갈망(yearnings, 욕망) 때문에 아무도 거듭날 수 없었으며, (13절) 그들은 결국 이런 걸로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That the man who was left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could not be regenerated, on account of his direful persuasions and foul yearnings (verses 11–12); whereby he would utterly destroy himself (verse 13).
602. (14절) 그러나 ‘방주’로 묘사하고 있는 ‘노아’ 교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5절) 그들에게 남아 있는 리메인스를 여러 수치(measures, 측량)로, (16절) 그들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력)의 여러 특징들은 ‘창’, ‘문’, ‘칸’으로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But the man of the church called “Noah,” who is described by the “ark,” was not so (verse 14); and the remains with him are described by the measures (verse 15);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by the “window,” “door,” and “mansions.” (verse 16)
603. (17절) 그들은 보호를 받게 되지만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은 악과 거짓의 범람, 홍수로 사라질 것입니다. That he would be preserved when the rest would perish by an inundation of evil and falsity (verse 17).
604. (18절) 그들에게 있던 진리들과 선들이 건짐을 받으며, (19-20절) 언더스탠딩에 속한 모든 것, 그리고 의지에 속한 모든 것도 건짐을 받을 텐데, 그 방법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21절) 그들은 거듭남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며, (22절) 그렇게 되었습니다. And that the truths and goods which were with him would be saved (verse 18); and thus whatever was of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was of the will, by regeneration (verses 19–20); for receiving which he was to be prepared (verse 21); and that it was so done (verse 2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창6:8)
59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의 의미는,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주님의 자비는 인류 전체의 구원에 관한 것이며, 주님은 인류의 구원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호의, 은혜 역시 그러하며, 그래서 여기 ‘은혜’(grace)가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 Lord’s mercy involves and looks to the salvation of the whole human race; and it is the same with his “grace,” and therefore the salvation of the human race is signified.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새 교회의 신앙, 곧 체어리티의 신앙 또한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not only a new church, but also the faith of that church, which was the faith of charity.
그래서 주님은 이 체어리티의 신앙, 곧 체어리티가 원인인 신앙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이 신앙에 관해서는 나중에) Thus the Lord foresaw that through the faith of charity the human race might be saved (concerning which faith hereafter).
[2] 말씀에서는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며, 이 구분은 이것을 받은 사람들에 따릅니다. ‘자비’는 천적인 사람들에게, ‘은혜’는 영적인 사람들에게 쓰입니다. 천적인 사람들은 자비만, 영적인 사람들은 거의 은혜만 압니다. Bu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and this in accordance with the difference that exists in those who receive them; “mercy” being applied to those who are celestial, and “grace” to those who are spiritual; for the celestial acknowledge nothing but mercy, and the spiritual scarcely anything but grace.
천적인 사람들은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며,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가 무엇인지 거의 모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자비와 은혜는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do not know what grace is; the spiritual scarcely know what mercy is, which they make one and the same with grace.
이것은 두 가지 아주 다른 겸손에서 나옵니다. 가슴(hear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자비를, 머리(thought)의 겸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만일 후자가 자비를 구한다면, 그건 시험 중이거나 진심이 아닌 말로만 구하는 것입니다. This comes from the ground of the humiliation of the two being so differen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heart implore the Lord’s mercy; but they who are in humiliation of thought beseech his grace; and if these implore mercy, it is either in a state of temptation, or is done with the mouth only and not from the heart.
‘노아’라 하는 새 교회는 천적이 아닌 영적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자비’를 입었다 하지 않고, ‘은혜’를 입었다 하는 것입니다. Because the new church called “Noah” was not celestial but spiritual, it is not said to have found “mercy,” but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3] 말씀에서 ‘자비’와 ‘은혜’를 구분하고 있음은, 여호와를 가리켜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다’ 하시는 많은 구절들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there is a distinction in the Word between “mercy” and “grace”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where Jehovah is called “merciful and gracious.” (as in 시103:8; 111:4; 145:8;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이런 구분은 다른 데, 가령 예레미야에서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The distinction is likewise made in other places, as in Jeremiah:
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Thus saith Jehovah, The people which were left of the sword found grace in the wilderness, when I went to give rest to him, to Israel. Jehovah appeared unto me from afar; and I have loved thee with an everlasting love; therefore in mercy have I drawn thee, (렘31:2-3)
여기 보면,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where “grace” is predicated of the spiritual, and “mercy” of the celestial.
이사야에는 In Isaiah: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Therefore will Jehovah wait that he may give grace unto you, and therefore will he exalt himself that he may have mercy upon you. (사30:18)
이 역시, ‘은혜’는 영적인 퀄러티를, ‘자비’는 천적인 퀄러티를 보고 있습니다. Here likewise “grace” regards the spiritual, and “mercy” the celestial.
창세기 후반부, 롯이 천사에게 말하는 장면, So in the chapter presently following, where Lot says to the angel: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Behold I pray thy servant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ou hast made great thy mercy which thou hast wrought with me, to make alive my soul. (창19:19)
‘은혜’는 신앙이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 같은 영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여기 ‘주께 은혜를 입었고’라는 표현을 보면 확실하고요, ‘자비’는 사랑이나 의지 같은 천적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은 천사가 한 말, ‘인자를 베푸셨다’, ‘내 생명을 구원하셨다’라는 표현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grace” relates to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or of the understanding, is evident here also in that it is said, he “hath found grace in thine eyes”; and that “mercy” relates to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or of the will,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angel is said to have “wrought mercy,” and to have “made alive the soul.”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창6:8)
596. ‘노아’는 새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그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씀은, 주님은 인류가 이렇게 구원받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다는 뜻입니다. That he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signifies that the Lord foresaw that the human race might thus be saved.
즉, 이것이 인류가 구원받는 방법임을 주님은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597. ‘노아’는 고대 교회라 하는 새 교회를 상징하는데요, 고대 교회라는 명칭은 홍수 전 존재했던 태고 교회와, 홍수 후 존재했던 이 교회를 구별해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By “Noah” is signified a new church, whi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for the sake of distinction between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before the flood, and that which was after the flood.
이들 두 교회들의 상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The states of these two churches were entirely different.
태고 교회의 상태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거기서 나오는 진리에 관한 일종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 배우지 않고도 주님의 선과 진리를 아는 타고난 능력)을 받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The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such that they ha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good and the derivative truth.
고대 교회, 혹은 ‘노아’의 상태는, 그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일종의 양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The state of the ancient church, or “Noah,” became such that they had a conscience of good and truth.
즉, 선량함(goodness)과 진실에 관한 일종의 양심으로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 간 상태의 차이는 이런 차이, 곧 퍼셉션을 갖는 것과 양심을 갖는 것 간 차이였습니다. Such as is the difference between having perception and having conscience, such was the difference of state of the most ancient and the ancient churches.
퍼셉션은 양심이 아닙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천사들은 퍼셉션을, 영적(靈的, spiritual) 천사들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Perception is not conscience: the celestial have perception; the spiritual have conscience.
태고 교회는 천적이었고, 고대 교회는 영적이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as celestial, the ancient was spiritual.
[2] 태고 교회는 영들 및 천사들과 어울려 지냄을 통해, 그리고 비전 및 꿈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는 선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인식하게 되자, 이번에는 이런 퍼셉션 능력으로 얻게 된 무수한 인사이트들(insights, 통찰력)을 통해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들, 말하자면, 엑시엄(axioms, 자명한 이치, 公理)들을 컨펌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인사이트들은 특정 디테일들을 구성하는데, 넓은 카테고리들이 이런 디테일들로 채워지는 그런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had immediate revelation from the Lord by consort with spirits and angels, as also by visions and dreams; whereby it was given them to have a general knowledge of what was good and true; and after they had acquired a general knowledge, these general leading principles, as we may call them, were confirmed by things innumerable, by means of perceptions; and these innumerable things were the particulars or individual things of the general principles to which they related.
즉, 천국, 곧 주님의 신적 질서의 나라, 질서정연한 진리 체계가 차곡차곡 각 사람 내면에 자리 잡아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들이 날마다 컨펌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 원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걸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부합하면 그런 것으로 지각했습니다. Thus were the general leading principles corroborated day by day; whatever was not in agreement with the general principles they perceived not to be so; and whatever was in agreement with them they perceived to be so.
즉, 주님의 신적 질서의 근본에 대한 감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 어떤 것이 그 질서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직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celestial angels.
[3] 태고 교회의 보편적 원리들, 곧 엑시엄들은 천적이며, 영원한 진리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주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신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사람의 것(own, 사람에게 고유한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등등... 그외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heavenly and eternal truths—as that the Lord governs the universe, that all good and truth is from the Lord, that all life is from the Lord,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in itself is dead; with many others of similar character.
태고 교회 사람들은 이런 진리들, 원리들을 컨펌하고 지지하는 수많은 것들, 생각들에 관한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And they received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countless things that confirmed and supported these truths.
그들에게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었습니다. With them love was the principal of faith.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도록 주님이 그들을 북돋워 주신 방법은 바로 사랑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cf. AC.32:2, 202, 398) By love it was given them of the Lord to perceive whatever was of faith, and hence with them faith was love, as was said before.
그러나 고대 교회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받고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ancient church became entirely different,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fowl of the heavens;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him. (창6:7)
591.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는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을,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는 태고 교회의 후손이었던 사람들을,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는 그들의 의지 안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이 그들을 전멸시킬 것이라는 것, ‘공중의 새까지’는 그들의 지적 능력 또는 사고 능력 안에 무엇이 있든지를,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는 위에서(cf. AC.587-588) 살핀, 불쌍히 여기심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he man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signifies that whatsoever is of the will would extinguish him; “and fowl of the heavens” is whatever is of the understanding or thought;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them” signifies as before compassion.
592.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쓸어버리되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이 말씀은, 인류가 전멸을 자초할 것이라는 의미임은 위(cf. AC.588)에서 말씀드린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즉, 여호와이신 주님에 관한 서술을, 그가 벌을 주신다, 그가 유혹하신다, 그가 악을 시행하신다, 그가 파괴하시거나 죽이시며, 저주하신다 한다는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an would extinguish him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it is predicated of Jehovah or the Lord that he punishes, that he tempts, that he does evil, that he destroys or kills, and that he curses.
예를 들면, 그는 유다의 장자 엘과, 또 다른 아들 오난을 죽이셨고, (창38:7, 10) 애굽의 모든 초태생(初胎生, firstborn)을 치셨습니다. (출12:12, 29) As for example, that he slew Er, Judah’s firstborn; and Onan, another son of Judah (Gen. 38:7, 10); that Jehovah smote all the firstborn of Egypt (Exod. 12:12, 29).
7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10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38:7, 10)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29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출12:12, 29)
예레미야에서도 And so in Jeremiah: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Whom I have slain in mine anger and in my wrath. (렘33:5)
다윗의 글에 In David: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He cast upon them the wrath of his anger; vehement anger, and fury and straitness, a sending of evil angels. (시78:49)
아모스에 In Amos: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Shall evil befall a city, and Jehovah hath not done it? (암3:6)
계시록에 In John:
15: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16:1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Seven golden vials full of the wrath of God who liveth forever and ever. (계15:1, 7; 16:1)
이 모든 골치아픈 일들이 다 여호와로 말미암는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완전 정 반대인데도 말입니다. All these things are predicated of Jehovah, although entirely contrary to his nature.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이런 속성들이 다 여호와께 속한 걸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형성해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은,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정돈하신다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나서 배우게 되는 것은, 어떤 악도, 주님으로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죽이시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요. 오히려 악을 자초하는 장본인은 바로 사람 자신입니다. 그가 악을 자신에게로 가져와 자신을 망치게 하고,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를 부추기고 꾀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실은 악한 영들이지만,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자기가 그렇게 한 장본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한 게 되는 것입니다. They are predicated of him for the reason explained before; and also in order that men may first form the very general idea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may afterwards learn that nothing of evil is from the Lord, much less does he kill; but that it is man who brings evil upon himself, and ruins and destroys himself—although it is not man, but evil spirits who excite and lead him; and yet it is man, because he believes that he is himself the doer.
그래서 여기 지금 여호와를 가리켜 그가 ‘사람을 쓸어버리신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을 파괴하고 끝내는 것은 바로 사람인 자기 자신인데도 말입니다. So now here it is said of Jehovah that he would “destroy man,” when in fact it was man who would destroy and extinguish himself.
[2] 이 경우, 내세에서는 실제로 어떤 상태일까 하는 것은, 지옥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형벌에 뒤따르는 모든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 끝없이 애통해 하며, 주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the case may be very evident from those in the other life who are in torment and in hell, and who are continually lamenting and attributing all the evil of punishment to the Lord.
악령들의 세계에는 남을 해하고 벌주며 처벌하는 걸 즐거움으로, 심지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So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there are those who make it their delight, even their greatest delight, to hurt and punish others; and those who are hurt and punished think it is from the Lord.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나쁜 일도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또 눈으로 확인도 합니다. 정반대로, 이 모든 일은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거, 내세의 모든 것은 정돈과 균형의 상태 가운데 있는데, 바로 악은 악을 행한 자에게로 돌아오고, 그 악에 대한 형벌의 비극으로 바뀐다는 거, 이것이 악은 어떻게 도울 수가 없는 이유이며, 이런 작용-반작용의 법칙, 질서는 피할 수가 없는 이유라는 말을 듣습니다. But they are told, and it is shown them, that not the least of evil is from the Lord, but they bring it upon themselves; for such is the state and such the equilibrium of all things in the other life that evil returns upon him who does evil, and becomes the evil of punishment; and for the same reason it is inevitable.
이런 균형, 이런 질서는 악을 고치기 위해, 악을 치료하기 위해 허용되는 것이라는 말을 그들은 듣습니다. This is said to be permitted for the sake of the amendment of the evil.
여기 허용이라는 말은 용인하다, 참다, 겪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한결같이 모든 악의 형벌을 선으로 돌리시며, 주님으로부터는 선말고 다른 무엇은 없으시다는 말도 듣습니다. But still the Lord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so that there is never anything but good from the Lord.
지금까지 허용이 무엇인지, 즉 이런 종류의 용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허용되었다는 건, 허용하신 분에 의해, 그가 허용하셨기 때문에 행해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But hitherto no one has known what permission is; what is permitted is believed to be done by him who permits, because he permits.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용인된 일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분에 의해 실행되어진, 쉽게 말해 그분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아주 다른데요,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cf. AC.2447)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fact is quite otherwis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창6:6)
588. 실제로 주님에 대하여 이런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후회와 근심 또한 주님의 속성, 성품이라고 하는 일이 이어집니다. 어떤 한 가지 주장은 또 다른 주장을 낳기 때문인데요. 이런 건, 말씀에 나오는 다음 본문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But as even such things as these are predicated of the Lord, it follows that repentance also and grief may be predicated of him; for the predication of the one follows from that of the other, as plainly appears from the following passages in the Word.
[2]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Mine anger shall be consummated, I will make my wrath to rest, and it shall repent me. (겔5:13)
여기, ‘노’(anger)와 ‘분’(wrath)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가라앉음’(repentance) 또한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because “anger” and “wrath” are predicated, “repentance” is predicated also.
스가랴입니다. In Zechariah:
14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나를 격노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나 15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As I thought to do evil when your fathers provoked me to anger, saith Jehovah Zebaoth, and it repented me not, so again I will think in those days to do good unto Jerusalem and to the house of Judah. (슥8:14-15)
여기 보면, 여호와가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은 결코 악을 행하실 생각조차 하실 수 없으시며, 오직 각 사람과 모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신데도 말입니다. Here it is said that Jehovah “thought to do evil,” and yet he never thinks to do evil to any, but good to all and to everyone.
모세의 글, 모세가 여호와께 나아가 관용을 구할 때에 In Moses, when he prayed forbearance of the face of Jehovah:
12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4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Turn from the wrath of thine anger and repent thee of this evil against thy people; and Jehovah repented of the evil which he said he would do unto his people. (출32:12, 14)
여기서도 ‘맹렬한 노’(wrath of anger)라는 표현을 여호와께 사용하고 있고, 그 결과, ‘뜻을 돌이키사’(repentance)라는 표현 역시 뒤따르고 있습니다. Here also the “wrath of anger” is attributed to Jehovah, and consequently “repentance.”
요나서에서, 니느웨 왕의 말입니다. In Jonah, the king of Nineveh said: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Who knoweth whether God will not turn and repent, and turn from the heat of his anger, that we perish not? (욘3:9)
여기서도 비슷하게 ‘노’(anger)라는 표현 때문에 ‘뜻을 돌이키시고’(repentance)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Here similarly “repentance” is predicated because “anger” is.
[3] 호세아입니다. In Hosea: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My heart is turned within me; my repentings are kindled together; I will not execute the wrath of mine anger; (호11:8-9)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 ‘마음에 근심하시고’와 똑같은 말씀,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가 나오네요. where likewise it is said of the heart that “repentings were kindled,” just as in the passage we are considering it is said that he “grieved at heart.”
‘긍휼’(repentings)은 누가 봐도 큰 자비를 가리킵니다. “Repentings” plainly denote great mercy.
그래서 요엘서에는 So in Joel: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Turn unto Jehovah your God; for he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slow to anger and plenteous in mercy, and repenteth of the evil; (욜2:13)
여기 ‘뜻을 돌이켜’(repent) 역시 두말할 것도 없이 자비를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manifestly denotes mercy.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If so be they will hearken, and turn every man from his evil way, and it repent me of the evil, (렘26:3)
이 역시 자비, 불쌍히 여기심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o have mercy.
계속해서 Again: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If that nation turn from their evil, it shall repent me of the evil; (렘18:8)
이 또한 ‘뜻을 돌이키겠고’(repent)는 그들이 만일 돌아오면 불쌍히 여기시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where also to “repent” denotes to have mercy provided they would turn.
자기한테서 주님의 자비가 떠나버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먼저 사람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For it is man who turns the Lord’s mercy away from himself: the Lord never turns it away from man.
589. 이들과 다른 많은 구절들을 보고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인간의 수준(appearances)으로 기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맞춰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Word wa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s with man.
그래서 말씀이 기술된 이런 수준을 가지고 거짓된 원리들(false principles)을 컨펌(confirm, 증거를 들어 사실임을 보여주다, 확인하여주다)하고픈, 잘못된 전제들(false premises)을 뒷받침(support)하고픈 사람은 수없이 많은 말씀 구절들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Whoever therefore desires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appearances according to which the Word was spoken, can do so by passages without number.
그러나 잘못된 가정들(false assumptions)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말씀을 액면가(face value)로 사용하는 것, 말씀을 겉글자의 뜻 그대로 사용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또다른 사람은 말씀에 있는 것을 단순히 믿는 사람입니다. But it is one thing to confirm false principles by the Word, and another to believe in simplicity what is in the Word.
잘못된 가정들을 컨펌하는 사람은 먼저 그가 절대 포기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어떤 원리를 골라 시작합니다. 대신 그는 말씀을 포함, 모든 가용(可用, available) 소스들로부터 증거들을 긁어모아 차곡차곡 쌓습니다.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그 원리, 전제, 가정에 철저하게 스스로 사로잡힙 때까지 말이지요.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은 진리 앞에 장님이 될 때까지 이런 짓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e who confirms false principles, first assumes a principle which he will not at all recede from, nor in the least yield, but scrapes together and accumulates confirmations wherever he can, thus also from the Word, until he so strongly persuades himself that he can no longer see the truth.
똑같이 말씀을 겉글자의 뜻으로 받지만, 그러나 단순한 마음(simple heart)으로 그걸 믿는 사람은 저 사람처럼 무슨 원리를 붙잡으면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즉, 자기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해 먹으려는 동기가 아닌, ‘이건 주님이 하신 말씀이야. 그러니까 진리야.’라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만일 그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가지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잠자코 따르며, 마음으로 즐거워 합니다. But he who simply or with simple heart believes, does not first assume principles, but thinks that because the Lord has thus said it is true; and if instructed from other sayings of the Word how it is to be understood, he acquiesces and rejoices in his heart.
주님은 화를 내시며, 벌하시고, 후회하시거나 근심하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믿되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하게 믿는 것은 전혀 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은 크고 작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이런 믿음을 갖게 되면, 그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눈이 밝아지며,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Even the man who in simplicity believes that the Lord is angry, punishes, repents, and grieves, and so believing is afraid of evil and does good, takes no harm; for this belief causes him to believe also that the Lord sees everything; and being in such a belief he is afterwards enlightened in other matters of faith, if not before, then in the other life.
자기들이 사랑한 가정들(assumptions)과, 아주 역겨운 자기 사랑 및 탐욕으로 스스로를 속인 사람들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Very different is the case with those who in agreement with a foul love of self or of the world persuade themselves to believe certain things that are deduced from the principles they have already adopted.
590. ‘후회’(repenting)는 지혜와, ‘마음에 근심함’(grieving at heart)은 사랑과 각각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apprehension)로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인간의 경험 수준, 겉모습 수준에서만 가능합니다. That “repenting” has reference to wisdom, and “grieving at heart,” to love, cannot be explained to human apprehension, save in accordance with the things that are with man, that is, by means of appearances.
인간의 사고(thought) 속에 들어있는 모든 생각(idea)은 지적 능력(understanding, intellect) 및 의지, 다르게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사랑과 관계된 무엇입니다. In every idea of thought in man there is something from the understanding and from the will, or from his thought and his love.
어떤 생각이든지 어느 정도 그의 의지나 그 의지에서 나온 사랑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면 그건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Whatever idea does not derive anything from his will or love is not an idea, for otherwise than from his will he cannot think at all.
사고와 의지 사이엔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일종의 결혼 같은 게 있는데, 사람의 사고 속 생각들에도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겨나는, 의지 혹은 사랑에 속한 일들이 있습니다. There is a kind of marriage, perpetual and indissoluble, between the thought and the will, so that in the ideas of man’s thought there inhere or adhere the things that are of his will or his love.
인간에게 속한 이런 일들을 잘 관찰하면, 주님의 자비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즉, 지혜와 사랑인데요, 어느 정도 살짝 아는 것, 얼핏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싶습니다. From this state of things in man it may as it were be known, or rather it seems possible to form some idea of what is contained in the Lord’s mercy, namely, wisdom and love.
그래서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 어디서나 거의 항상 두 가지 표현을 써서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천적인 것을 각각 포함하지요. Thus in the prophets, especially in Isaiah, there are almost everywhere double expressions concerning everything; one involving what is spiritual, the other what is celestial.
주님의 자비, 영적 측면이 지혜요, 천적 측면이 사랑입니다. The spiritual of the Lord’s mercy is wisdom; the celestial is love.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창6:6)
586a. ‘한탄하사’(후회, repent)는 자비(mercy)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걸 상징합니다. ‘한탄하사’는 지혜와 관련이 있고, ‘마음에 근심하시고’는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That he “repented” signifies mercy;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to “repent” has reference to wisdom; to “grieve at the heart” to love.
587.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가 자비를 상징하며, ‘마음에 근심하시고’ 역시 같은 상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 곧 결론지을 수 있는데요, 여호와는 결코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만물을 온전히 영원부터 예견(豫見, foresee)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을 지으셨을 때, 즉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온전하게 하사 천적 인간이 되게 하셨을 때에도 그는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지금 여기서 설명 중인 이런 인종이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예견하셨고, 그래서 후회하실 수 없으십니다. That it repented Jehovah that he made man on the earth signifies mercy, and that “he grieved at the heart” has a like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is, that Jehovah never repents, because he foresees all things from eternity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nd when he made man, that is, created him anew, and perfected him till he became celestial, he also foresaw that in process of time he would become such as is here described, and because he foresaw this he could not repent.
사무엘이 한 말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This appears plainly from what Samuel said: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The invincible one of Israel doth not lie, nor repent, for he is not a man that he should repent. (삼상15:29)
모세의 글에는 And in Moses: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God is not a man that he should lie, or the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hath he said, and shall he not do? Or hath he spoken, and shall he not make it good? (민23:19)
오히려 ‘후회하다’라는 것은 자비로워짐, 불쌍히 여김을 상징합니다. But to “repent” signifies to be merciful.
여호와의 자비(mercy), 곧 주님의 자비는 인류를 향하여 주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인류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상태에 있으며, 주님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저마다의 상태에 따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벌을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선의 즐거움을 누리게(grant) 된 사람 또한 불쌍히 여기십니다. 벌(punishment)은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그 이유는 자비는 벌에 포함된 모든 악을 선으로 구부리기 때문입니다. 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자비의 한 가지 행위인데, 아무도 어떤 종류의 선도 결코 자기 공로로 얻을(earn)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 전체가 악하며, 모든 사람은 그냥 방치되면 지옥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 밖으로 사람을 끌어당기시는 것이 자비이며, 이것이 순수한 자비인 것은, 주님은 이 일에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The mercy of Jehovah, or of the Lord, includes everything that is done by the Lord toward mankind, who are in such a state that the Lord pities them, each one according to his state; thus he pities the state of him whom he permits to be punished, and pities him also to whom he grants the enjoyment of good; it is of mercy to be punished, because mercy turns all the evil of punishment into good; and it is of mercy to grant the enjoyment of good, because no one merits anything that is good; for all mankind are evil, and of himself everyone would rush into hell, wherefore it is of mercy that he is delivered thence; nor is it anything but mercy, inasmuch as he has need of no man.
자비를 미세리코르디아(misericordia, 라틴, 자비)라 합니다. 인간을 지옥의 비참(miseries)(주1)에서 건져주시기 때문이며, 인류가 처한 비참한 상태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비는 비참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Mercy has its name from the fact that it delivers man from miseries1 and from hell; thus it is called mercy in respect to mankind, because they are in such a state of misery, and it is the effect of love toward them all, because all are so.
588. 주님에 대하여, ‘후회하신다’, ‘마음에 근심하신다’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자비 한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주님의 ‘후회’, ‘근심’이라는 표현은, 말씀 여러 다른 구절처럼 그래 보이는 겉모습을 따른 것입니다. But it is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repents,” and “is grieved at heart,” because there appears to be such a feeling in all human mercy, so that what is said here of the Lord’s “repenting” and “grieving” is spoken according to the appearance, as in many other passages in the Word.
주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 곧 주님의 자비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인간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것은 인간의 이해를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자비, 곧 후회하고 근심하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자비에 대한 개념을 잡지 않으면, 그는 결코 자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곧 주님의 속성을 서술할 때, 왜 종종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또는 주님이 벌하신다, 시험하신다, 파괴하신다, 화내신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은 결코 누구를 벌하시지도, 결코 누구를 시험에 빠트리시지도, 결코 누구를 파멸에 이르게 하시지도, 그리고 결코 화를 내시지도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What the mercy of the Lord is none can know, because it infinitely transcends the understanding of man; but what the mercy of man is we all know to be to repent and grieve; and unless a man were to form his idea of mercy according to his own apprehension, he could not have any conception of it, and thus he could not be instructed; and this is the reason why human properties are often predicated of the attributes of Jehovah or the Lord, as that Jehovah or the Lord punishes, leads into temptation, destroys, and is angry; when yet he never punishes anyone, never leads any into temptation, never destroys any, and is never angry.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And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at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창6:5)
584.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는,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이 전혀 없었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signifies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58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cf. AC.568), 즉, 진정한 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신 탐욕(cupidity), 욕구(desire)만 남았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하고요, ‘세상에 있는 사람’이 상징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That by the evil of man being multiplied in the earth is signified that there began to be no will of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bove, namely, that there was no longer any will, but only cupid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in the earth.”
‘땅’, ‘세상’은 글자의 뜻으로는, 사람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In the literal sense the “earth” is where man is.
‘땅’은 속뜻으로는, 사랑이 있는 곳, 그리고 사랑은 의지 혹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 그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땅’이 사용된 것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it is where the love is, and as love is of the will, or of the cupidity, the earth is taken to mean the will itself of man.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의지입니다. 알고 있고, 이해한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는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뭔가를 말하거나 하고 있을 때조차 거기엔 여전히 그의 의지와 관계된 뭔가가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이나 행위하고는 직접적 관련은 없어 보이나 사실은 은밀히 그를 움직이는 무슨 숨은 동기,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For man is man from willing, and not so much from knowing and understanding, because these flow out from his will; whatever does not flow out from his will he is willing neither to know nor understand; nay, even when he is speaking or doing something that he does not will, still there is something of the will remote from the speech or action that governs him.
‘가나안 땅’이라든지, ‘거룩한 땅’ 같은 표현을 써서 사실은 사랑, 그리고 결과적으로 천적(天的, the celestial)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씀 여러 곳에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같은 식으로, 세상 여러 나라들 역시 그들의 사랑, 곧 일반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만 이 주제는 아주 많이 반복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걸 다루느라 머무를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That the “land of Canaan,” or the “holy land,” denotes love, and consequently the will of the celestial man, might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in like manner, that the lands of various nations denote their loves, which in general are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but as this subject so often recurs, it need not be dwelt upon here.
이런 이유들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보는데요, ‘땅(세상) 위 사람의 죄악’은 그의 자연적 악, 곧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세속적 악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을 ‘불어났다’, ‘배가되었다’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즉, 철저하게 사악하지는 않았기 때문인데, 선행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기적인 목적으로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라는 표현을 통해 도착(倒錯, perversion), 왜곡(corruption)의 완성, 즉, 철저하게 부패하고,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ence it appears that by “the evil of man on the earth” is signified his natural evil, which is of the will, and which is said to be “multiplied” because it was not so depraved in all but that they wished good for others, yet for the sake of themselves; but that the perversion became complete is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586.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가 상징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 지각, 영적 통찰)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대로 (cf. AC.560, 570),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주 더러운 갈망(yearnings)에 잠기게 하였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결과, 모든 퍼셉션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대신 끔찍한 자기기만(persuasion), 즉, 가장 뿌리 깊고 치명적인 환상들이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질식시켜 멸망케 한 것입니다.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signifies that there was no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reason, as before said and shown,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filthy yearnings, and when this occurred all perception was lost, and in place thereof a dreadful persuasion succeeded, that is, a most deep-rooted and deadly fantasy, which was the cause of their extinction and suffocation.
이 끔찍한 자기기만, 죽음을 초래하는 신념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 곧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고안해낸 것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계획’, 곧 마음이 날조(fabricate), 조작하는 것이 ‘생각’, 사고(thoughts) 없이 언급될 때, 그것은 자기 사랑 혹은 갈망의 악, 곧 자기 사랑이나 욕망과 연결된 악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장에서 노아가 번제를 드린 후, 여호와께서 하신 아래 말씀에 나옵니다. This deadly persuasion is here signified by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 heart”; but by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without the word “thoughts,” is signified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or of yearnings, as in the following chapter, where Jehovah said, after Noah had offered a burnt offering: “I will not again curse the ground for man’s sake, because the imagination of the heart of man is evil from his childhood” (Gen.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8:21)
‘계획’(imagination), 곧 제작(fabrication)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지어내는 것, 곧 자기 마음 안을 꾸미며, 자기가 참이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에 그 예가 있습니다. An “imagination” is that which man invents for himself, and of which he persuades himself; as in Habakkuk: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What profiteth a graven image, that the fashioner thereof hath graven it, the molten image and teacher of lies, that the fashioner trusteth to his imagination, to make dumb idols? (합2:18)
‘새긴 우상’, 조각물은 사람이 속으로 품고 생각해낸 것들에 기반을 둔 거짓된 설득, 신념, 자기기만을 상징합니다. ‘새겨 만든 자’, 제작자는 자기-설득된 사람, 곧 위에서 설명한 ‘계획’으로 설득된 사람입니다. A “graven image” signifies false persuasions originating in principles conceived and hatched out by one’s self; the “fashioner” is one who is thus self-persuaded, of whom this “imagination” is predicated.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O your perversity! Shall the potter be reputed as the clay, that the work should say to him that made it, He made me not; and the thing fashioned say to him that fashioned it, He had no understanding?; (사29:16)
여기 ‘빚음을 받은 물건’은 사람의 것에 기반한 사고와, 거짓과 거기서 나온 것에 의한 설득, 곧 자아중심적 사고와, 거짓을 참이라 하는, 거기서 나온 확신을 상징합니다. the “thing fashioned” here signifies thought originating in man’s own, and the persuasion of what is false thence derived.
‘빚음을 받은 물건’이나 ‘계획된’, 곧 제작(fabrication)이나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마음이나 의지로 고안한 것, 그리고 또 생각이나 신념(persuasion)으로 발명한 것입니다. 다윗의 글입니다. A “thing fashioned” or “imagined,” in general, is what a man invents from the heart or will, and also what he invents from the thought or persuasion, as in David: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Jehovah knoweth our fashioning [figmentum], he remembereth that we are dust. (시103:14)
모세의 글입니다. In Moses: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I know his imagination that he doeth this day, before I bring him into the land. (신3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