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Genesis 5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Hitherto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has been known to none.

 

이 주제들에 관하여 생각해 온 사람들은 이것들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를 형성해 왔는데, 그 아이디어는 너무 일반적이고 너무 뭉뚱그린 것이어서 거의 무슨 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Those who have thought about them have formed an idea concerning them so general and so gross as scarcely to amount to any idea at all.

 

그들이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저는 최근에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의 일부가 된 영들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영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듯 이 세상에 있을 때와 똑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What notion they have conceived on the subject I have been able to learn most accurately from spirits who had recently passed from the world into the other life; for when left to themselves, as if they were in this world, they think in the same way.

 

몇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I may give a few examples.

 

 

450. 세상에 있는 동안, 말씀에 관하여 놀라울 정도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여겨졌던 영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관하여 아주 거짓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은 높이 올려져 천국에 있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들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영광과 남들을 압도하는 뛰어남 가운데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Som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seemed to be preeminently enlighte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conceived so false an idea about heaven that they supposed themselves to be in heaven when they were high up, and imagined that from that position they could rule all things below, and thus be in self-glory and preeminence over others.

 

그들이 이런 환상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오류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높이 올려졌고, 거기서 허락하심 하에 어느 정도 아래에 있는 것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런 것은 환상 속 천국이며, 실제 천국은 높아지는 걸로 이루어지지 않고, 대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혹은 자기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사람이면 어디나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과, 천국은 남들보다 더 뛰어나기를 원하는 그런 걸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워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위대해지고자 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On account of their being in such a fantasy, and in order to show them that they were in error, they were taken up on high, and from there were permitted in some measure to rule over things below; but they discovered with shame that this was a heaven of fantasy, an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being on high, but is wherever there is anyone who is in love and charity, or in whom is the Lord’s kingdom; and that neither does it consist in desiring to be more eminent than others, for to desire to be greater than others is not heaven, but hell.

 

 

451. 한 영이 있었는데, 그는 몸 안에 있을 동안, 권력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세상에서도 똑같이 권력을 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possessed authority, retained in the other life the desire to exercise command.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지금 다른 왕국에 있고, 이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라는 것, 지상에서의 그의 다스림은 끝났다는 것,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아무도 선과 진리, 그리고 주님의 자비, 그가 지금 이 자비 가운데 있는데, 이외의 것으로는 평가받지 않는 곳이라는 것, 더 나아가 지상 왕국처럼 이 나라 역시 모든 사람이 국왕의 총애와 자기가 가진 부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왕국인데, 이 나라에서는 선과 진리가 부(富)요, 국왕의 총애는 주님의 자비라는 것, 만일 그가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는 반역자라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반역자인 건 지금 그가 다른 나라에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는데요, But he was told that he was now in another kingdom, which is eternal; that his rule on earth was dead; and that where he was now no one is held in estimation except in accordance with the good and truth, and the mercy of the Lord, in which he is; and further, that it is in that kingdom as it is on earth, where everyone is rated according to his wealth, and his favor with his sovereign; and that there good and truth are wealth, and favor with the sovereign is the Lord’s mercy; and that if he desired to exercise command in any other way, he was a rebel, seeing that he was now in the kingdom of another.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했습니다. On hearing this he was ashamed.

 

 

452. 저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가장 큰 자가 되는 걸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던 영들과 대화를 해오고 있습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그들은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결과적으로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큰 자가 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이유입니다.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힘을 가진 자는 힘을, 부유한 자는 부를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곧 행복입니다.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더 나아가 그들은 천국은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해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실제로는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천국은 이것, 곧 마음으로 제 몸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것, 그들의 행복 증진을 위해 그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절대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사랑으로 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453. 어떤 영들은 천국에 대한 생각을 너무 대충 하는 바람에 천국을 그저 단순히 허락만 있으면 되는 곳으로, 실제로 그곳은 문이 있어 입장 허락만 받으면 들어가는 곳, 문은 열려 있고, 문지기가 있어 문지기의 허락으로 들어가는 그런 곳인 줄 압니다. Some entertain so gross an idea of heaven that they suppose it to be mere admission, in fact that it is a room into which they are admitted through a door, which is opened, and then they are let in by the doorkeepers.

 

 

454. 어떤 영들은 생각하기를, 천국은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편안한 삶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는데요, 수고 없이 행복을 누리는 그런 삶은 없다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행복을 이용해서 자신이 행복하고자 하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원하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Some think that heaven consists in a life of ease, in which they are served by others; but they are told that there is no possible happiness in being at rest as a means of happiness, for so everyone would wish to have the happiness of others made tributary to his own happiness; and when everyone wished this, no one would have happiness.

2021-06-24(D5)-매일예배(AC.449-454, 창5 O), '창5 오프닝,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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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aNisqQIg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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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들이 몸 안에 있는 동안 영혼에 대해 가졌던 생각에 관하여

그들을 만나보고 쓴 몇 가지 사례들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BOUT THE SOUL OR SPIRIT

 

 

443. 다른 삶이 시작되면, 모든 영은 생전에 사람들이 혼과 영 및 사후 삶(생명)에 관해 가졌던 견해들을 더욱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있을 때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들은 살아있을 때처럼 생각하고, 그들의 생각은 마치 큰 소리로 말한 것처럼 명료하게 통하기 때문입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어떤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고, 제가 그에게서 지각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혼자 중얼거린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영의 존재를 정말 믿었던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나는 사후 무슨 안개 같은 생명으로 살게 될 거야. 왜냐하면, 몸의 생명이 그치면 남는 것은 안개같이 희미한 것 밖에 없을 테니까...’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몸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았고, 영은 일종의 유령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가진 생명과 거의 같은 생명을 짐승들도 갖고 있는 걸 보고, 이런 생각을 스스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그랬던 그가 이제는 경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며, 또 가장 놀라운 지성과 지혜, 그리고 행복 가운데, 너무나 완벽하여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지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삶은 모호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장 완벽한 명료함과 확실함 가운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444. 생전에 믿기를, 영은 무슨 외연 같은 걸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었던, 그리고 이런 믿음 때문에 대화 중에도 이런 개념이 포함된 일체의 표현조차 매우 조심하던 사람과 대화하면서,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은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말이지요. 지금은 그는 혼 또는 영이 되었고, 시력, 청력, 후각, 매우 정교해진 촉각, 갈망, 생각 등, 그가 자신을 마치 몸 안에 있는 거와 완전 똑같다 여길 정도로 모든 감각이 그대로인 상황을 보면서 말입니다. Conversing with one who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had believed that the spirit has no extension, and on that ground would admit of no word that implied extension, I asked him what he now thought of himself, seeing that now he was a soul or spirit, and possessed sight, hearing, smell, an exquisite sense of touch, desires, thoughts, insomuch that he supposed himself to be exactly as if in the body.

 

그는 세상에 있을 때 했던 생각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었는데, 말하기를 영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He was kept in the idea which he had when he had so thought in the world, and he said that the spirit is thought.

 

저는 허락하심을 얻어 그의 대답을 구하기를, 혹시 세상 살 때, 눈 같은 보는 기관이 없으면 무슨 육체적 시력 같은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계셨는지 물었습니다. I was permitted to ask him in reply, whether, having lived in the world, he was not aware that there can be no bodily sight without an organ of vision or eye?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내적 시야 혹은 생각 또한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입니다. And how then can there be internal sight, or thought?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어떤 기관을 이루는 실체를 가져서는 안 되나요? Must it not have some organic substance from which to think?

 

그때 그는 인정하기를, 몸 안에 있는 동안, 자기는 영 또한 모든 기관이나 외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영은 그저 생각일 뿐이라는 망상을 지키느라 헛수고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He then acknowledged that while in the bodily life he had labored under the delusion that the spirit is mere thought, devoid of everything organic or extended.

 

저는 덧붙이기를, 만일 혼이나 영이 단지 생각일 뿐이라면, 사람의 머리가 그렇게 클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머리 전체가 내면의 모든 감각을 총괄하는 기관인 것을 볼 때 말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두개골은 텅 비었을 것이고, 그럴지라도 생각은 여전히 영으로서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I added that if the soul or spirit were mere thought man would not need so large a brain, seeing that the whole brain is the organ of the interior senses; for if it were not so the skull might be hollow, and the thought still act in it as the spirit.

 

이런 한 가지만 살펴보더라도, 그리고 뿐만 아니라 영혼이 근육에 들어가 매우 엄청나게 다양한 운동을 일으키는 걸 보더라도, 당신은 영이 기관, 즉, 하나의 기관을 이루는 실체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From this consideration alone, as well as from the operation of the soul into the muscles, giving rise to so great a variety of movements, I said that he might be assured that the spirit is organic, that is, an organic substance.

 

그러자 그는 자신의 오류를 시인했고, 자신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막혀했습니다. Whereupon he confessed his error, and wondered that he had been so foolish.

 

 

445. 더욱 주목하게 된 것은, 사후에도 계속 사는 혼, 즉, 영에 대해, 배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영은 추상적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It was further remarked,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the soul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s, the spirit, is abstract thought.

 

이것은 영의 외연과 외연에 속한 것을 포함하는 어떤 말도 인정하기를 꺼리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외연을 갖지 않지만, 생각의 주제, 그리고 생각의 대상들은 외연을 갖기 때문입니다. 외연을 갖지 않는 그런 대상들에 관하여 사람들은 바운드리를 정하고, 확장합니다.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지요. This is very manifest from their unwillingness to admit of any term that implies extension and what belongs to extension, because thought abstractedly from a subject is not extended, whereas the subject of the thought, and the objects of the thought, are extended; and as for those objects which are not extended, men define them by boundaries and give extension to them, in order that they may comprehend them.

 

이것으로 아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배운 사람들은 혼 또는 영의 개념과 관련, 그건 그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사후엔 사라지는 것으로밖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his shows very clearly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conception of the soul or spirit than that it is mere thought, and so cannot but believe that it will vanish when they die.

 

 

446. 저는 오늘날(18세기 중엽 유럽)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일반적인 생각들에 관하여 영들과 담론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영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도, 그들이 가진 머릿속 지식으로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영이 확장, 곧 무슨 외연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할 뿐 아니라, 영이 일종의 실체라는 것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무엇이냐를 가지고도 다투면서 말이지요.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영이 외연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하며, 또 영의 실체에 관해 다투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영은 어떤 곳, 곧 사람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순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의 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제가 이런 얘기들을 하자 훨씬 더 단순한 사람들이었던 그 영들은 현대인들이 그토록 어리석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습니다.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그리고 ‘부분들 없는 부분들’ 같은, 그리고 다른 말들을 가지고 다투고들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런 걸 우스꽝스럽다, 터무니없다, 웃음거리다고 하며, 그런 걸로 마음을 채우면 안 된다고, 안 그러면 지혜의 길이 닫힌다고 하였습니다.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 without 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447. 어떤 수사 수련 기간 중인 영이 저에게 영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영이라는 게 뭡니까?” 물었습니다. 마치 자기는 사람인 줄 착각하면서 말이지요.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 is a 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그리고 저는 그에게 모든 사람에게는 영이 있다는 것과, 생명 관련, 사람은 영이라는 사실, 즉, 몸은 그저 사람이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일 뿐이며, 살과 뼈, 곧, 몸이 사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말하면서,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걸 보면서, 그에게 혹시 전에 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혼은 뭡니까?” 그는 대답하면서, “저는 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What is a soul?” he replied, “I do not know what a soul is.”

 

그때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그 자신 지금 혼 또는 영이라고, 그가 지금 내 머리 위에 있으며, 땅 위에 있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제가 그에게 이 사실을 알겠느냐 묻자 그는 몸서리치며 도망가면서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 am a spirit! I am a spirit!”

 

어떤 유대인이 자기는 완전히 몸 안에 살고 있다 생각하는 영이었는데, 그는 사실은 그 정반대임을 도무지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자기가 영임을 보았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기는 사람이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기는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고 말이지요.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살 때, 몸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이런 사례들은 끝도 없이 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이런 말씀 드리는 이유는, 감각을 지각하는 것은 몸이 아닌, 사람 안 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448. 저는 세상에서 저를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랫동안,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씩 해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비록 내적이지만 아주 맑은 목소리로, 마치 이 세상 친구들하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many who had been known to me in this life (and this I have done for a long time—for months and years), in as clear a voice, although an inward one, as with friends in this world.

 

우리 대화의 주제는 때때로 사람의 사후 상태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몸 안에 사는 동안 아무도 자기가 몸 안에 사는 삶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삶은 계속되며, 사람은 현재의 모호한 삶을 지나 명료한 삶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주님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명료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였습니다. The subject of our conversation has sometimes been the state of man after death, and they have wondered exceedingly that during the bodily life no one knows or believes that he is so to live when the bodily life is over, when yet there is then a continuation of life, and such a continuation that the man passes 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and 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into 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

 

그들은 제가 아직 살아있는 자기 친구들에게 글이나 말로, 자기들이 지금 어떤 상태 가운데 있는지, 마치 제가 여기 있는 자기 친구들에 관해 자기들한테 많은 걸 알려주는 거처럼 그렇게 알려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They have desired me to tell their friends that they are alive, and to write and tell them what their condition is, even as I had related to themselves many things about that of their friends here.

 

그러나 저는 답하기를, 만일 제가 그들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하면, 혹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하면, 그들은 안 믿을뿐더러, 오히려 그들을 망상이라며 비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을 수 있도록 무슨 싸인이나 기적을 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But I replied that were I to tell their friends such things, or to write to them about them, they would not believe, but would call them delusions, would scoff at them, and would ask for signs or miracles before they would believe; and I should merely expose myself to their derision.

 

그리고 이런 얘기가 사실이다, 혹시 믿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And that these things are true, perchance but few will believe.

 

진실로, 사람들은 영들의 존재를 부인하며, 설령 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가 영들에 관해 말하는 걸 아주 듣기 거북해들 하기 때문입니다. For at heart men deny the existence of spirits, and even those who do not deny it are unwilling to hear that anyone can speak with spirits.

 

고대에는 영들에 관한 그런 상태의 믿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정신 나간 추론을 가지고 사람들은 영들이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신들의 정의와 가설들을 가지고 영들로부터 모든 감각을 박탈하며, 더 많이, 더 많이 배운 자들일수록 이런 짓을 저리르고 있습니다. In ancient times there was no such state of belief in regard to spirits, but so it is now when by crazy ratiocination men try to find out what spirits are, and by their definitions and suppositions deprive them of all the senses, and do this the more, the more learned they desire to be.

2021-06-23(D4)-매일예배(AC.443-448, 창4 클로징), '영들이 생각하는 영에 관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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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T3WhcZLJ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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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2.44.421-431.'중간영계란 무엇인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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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ytdjfOmy3M

https://youtu.be/6dq5jg-j75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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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438. ‘’은 신앙을 상징하며, 체어리티가 바로 이 신앙으로부터 오는 것임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에노스’였으며, 체어리티를 신앙의 원리로 여겼던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로 말미암았음을 상징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439. ‘’이 신앙을 상징하며, 이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나오는 것임은 앞 절에서 보여드렸습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그의 ‘그 이름이 에노스였던 아들’이 체어리티를 신앙의 원리로 여겼던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씀드린 내용들을 통해서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분명한데요, 곧, ‘에노스’라는 그 교회의 이름이 갖는 또 다른 뜻은 ‘사람’(man)인데, 천인(天人, celestial man)을 말하는 건 아니고, 대신 인성(人性, human) 어린 영인(靈人, spiritual man)을 말하며, 이를 가리켜 여기서 ‘에노스’라 한다는 것입니다. That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바로 이어지는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본문으로도 또한 분명합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40. 방금 인용한 본문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로 말미암은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향한 모든 예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 언어 형태라는 사실로 분명하며, 이 예배가 체어리티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여기서 ‘여호와’로 언급되시는 반면, 전 절에서는 ‘하나님’으로 언급되셨다는 사실로, 뿐만 아니라, 주님은 체어리티 없는 예배는 받으실 수가 없으신데, 그 이유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을 가지고는 참 예배를 진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그런 건 단지 입술의 예배일 뿐, 마음의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등의 사실로 보아 분명합니다.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님을 향한 모든 예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언어 형태라는 사실은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아브라함에 관한 본문들입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3:4)

 

그리고, 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21:33)

 

That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Gen. 12:8; 13:4); and again, that he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Jehovah, the God of eternity.” (Gen. 21:33)

 

이 표현에 모든 예배가 포함되어 있음은 이사야를 통해서도 명료합니다. That this expression includes all worship, is plain from Isaiah: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hath said, thou hast not called upon me, O Jacob, but thou hast been weary of me, O Israel. Thou hast not brought to me the small cattle of thy burnt offerings, neither hast thou honored me with thy sacrifices. I have not caused thee to serve with an offering, nor wearied thee with incense, (사43:22-23)

 

이 본문에 모든 표상적 예배의 요약이 들어 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탄원하는 것이 이때 시작된 것이 아님은 다음 두 가지 사실로 충분히 알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태고 교회에 관하여 위에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태고 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도 가장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한 교회입니다. 이미 이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예배했지요. 두 번째는, 양 떼의 첫 새끼를 희생제물로 드린 아벨의 경우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본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는 새 교회의 예배를 상징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다와 씰라 이전의 교회들은 ‘가인’과 ‘라멕’이라 불린 사람들에 의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442. 위에 설명한 대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사실은, 태고 시대에,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으며, 그 하나하나는 다 이름이 있었고, 그 교리와 이단의 결과물들은 오늘날 교회의 것 보다 훨씬 더 심오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천재성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2021-06-21(D2)-매일예배(AC.438-442, 창4,26), '에노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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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U76XleZx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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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434. 여기 ‘아담’(남자, 사람, man)와 그의 ‘아내’는 위 ‘아다와 씰라’로 상징된 새 교회를 뜻하며, 그녀의 ‘아들’, 셋은 체어리티를 얻게 될 새 신앙을 상징합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가인이 분리 및 소멸시켰던 체어리티가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교회에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435. ‘아담’과 그의 ‘아내’는 위 ‘아다와 씰라’로 상징된 새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은, 겉뜻으로는 아무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지금까지는 태고 교회와 그 후손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실이 속뜻으로는, 그리고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로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인 5장 1절로 4절에,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낳은 셋이 다시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오늘 본문과 전혀 다른 말로 언급됩니다. 이 경우는, 태고 교회의 첫 번째 후손을 상징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1-4)

 

지금 보고 있는 이 구절에, 이것 말고는 다른 아무 상징도 없다면, 여기서 굳이 같은 걸 말할 필요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들면, 1장에서 보면, 거기 사람, 땅의 열매들, 그리고 짐승들의 창조를 다루더니, 얼핏 보면 같은 내용을 2장에서 또 다룹니다. 그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지만,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반면,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하나를 언급하고, 다른 데서 또 같은 사람이나 사물을 언급하는 이런 반복이 있는 곳마다 항상 어떤 다른 상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속뜻으로 말고는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컨넥션이 있다는 자체가 그 안에 이미 어떤 상징이 주어졌음을 확실히 알 수 있고요,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부가적인 것은, ‘아담(homo)과 아내’라는 표현은 지금 보고 있는 교회의 부모 교회를 상징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436. 셋이라 이름한 그녀의 ‘아들’은 새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재개될 건데요, 이런 사실은, 앞서 서술한 내용으로, 그리고 뿐만 아니라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신 가인 관련 말씀(cf. 392)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가인’으로, 체어리티는 ‘아벨’로,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 때문에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각각 상징했습니다.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여기서, 주께서 신앙을 보존하시는 것을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로 상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함이지요.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말미암은 선, 즉 천적인 것이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걸 아다가 낳은 야발로,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 또한 주어지는데 그걸 야발의 아우 유발로,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으로 각각 상징했습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창세기 4장을 결론짓는 이들 두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결론 및 요약을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는데요, 그것은, ‘아담과 그의 아내’는 전에 아다와 씰라로 불린 새 교회를, ‘’은 체어리티가 심기는 신앙을 각각 나타낸다는 것과, 다음 이어지는 구절의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긴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437. 여기 ‘’은 새 신앙을 상징합니다. 체어리티가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 사실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되는데요,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신 이름입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께서 또다른 신앙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씨’는 체어리티를 낳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가 신앙인 것은 위(cf. 255)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2021-06-20(D1)-주일예배(AC.434-437, 창4,25), '아담과 그의 아내, 셋, 다른 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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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VBACTfiU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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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432. 이 말씀은, 신앙적 폭행에 관한 신성한 금지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가인’으로 불리는 (분리된) 신앙을 끝장냈고, 동시에 (가인의) 신앙을 통해 나오게 되어 있었던 체어리티 또한 끝장냈음을, 이 경우는 더욱 심각한 신성모독인데, 그래서 이런 이유로, 이 말씀은 지옥, 곧, ‘칠십칠 배의 벌’로 표현된 지옥과도 같은 결과를 맞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433. 가인의 경우, ‘벌이 칠 배’라는 것은, 이미 15절에서 보여드린 대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음을 상징합니다. That Cain’s being “avenged sevenfold” 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 “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칠십칠 배의 벌’은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을 상징하며,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이것은 ‘칠십칠’(77)이 상징하는 바를 보면 분명합니다. And that by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ty and sevenfold.

 

’(7)이라는 숫자는 거룩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하는데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나라,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 바로 주님 자신을 상징한다는 사실입니다. That the number “seven” 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 “seventh day” 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그래서 ‘’이라는 숫자는 말씀 가운데 나올 때마다 거룩한 것, 혹은 가장 신성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과 신성함은 그 본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들로 서술되거나, 따릅니다. Hence the number “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숫자 ‘칠십’(70)의 상징은 여기에서 오는데요, 일곱 때(age)로 구성됩니다. 말씀에서, 한 때는 십 년입니다.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정말 거룩하거나 신성한 것을 표현해야 할 때, ‘칠십 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그의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죄를 얼마나 짓든지 끝없이, 혹은 영원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 “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2)

 

그리고 여기, 라멕의 말,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의 의미는 지옥입니다. 가장 신성한 것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2021-06-19(D7)-토요예배(AC.432-433, 창4,24), '칠 배, 칠십칠 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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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XK4vcs_r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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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429. 라멕은 체어리티 또한 파괴했습니다. 라멕이 말하는 ‘어린이’ 혹은 ‘소년’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이런 사실이 바로 뒤이어 나오는 이유는, 신앙을 부인하거나 죽이는 사람은 체어리티 또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430. 말씀에 나오는 ‘어린이’ 혹은 ‘소년’은 이노센스를 상징하며, 체어리티 또한 상징합니다. 참된 이노센스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체어리티 역시 이노센스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이노센스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말씀에서 각각 ‘젖먹이’, (걸음마 배우는) ‘아이’ 및 ‘소년’으로 구분합니다. 참 사랑과 체어리티 없이 참된 이노센스는 없기 때문에, ‘젖먹이’, ‘아이’ 및 ‘소년’은 또한 사랑의 세 단계를 상징합니다. 즉, 엄마 혹은 유모를 향한 젖먹이의 사랑 같은 다정한 사랑, 엄마 아빠를 향한 아이의 사랑 같은 사랑, 선생님을 향한 소년의 상냥한 사랑과 유사한 체어리티입니다.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이사야에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Thus it is said in Isaiah: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사11:6)

 

여기 ‘양’, ‘염소’, ‘송아지’는 이노센스와 사랑의 세 단계를 상징합니다. ‘이리’, ‘표범’ 및 ‘어린 사자’는 그 반대를, 그리고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 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 child,” charity.

 

예레미야에 In Jeremiah: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Ye commit this great evil against your souls, to cut off from you man and wife, infant and suckling, out of the midst of Judah, to leave you no remains. (렘44:7)

 

‘남자와 여자’는 진리에 관한 지적 속성들과 선에 관한 의지 지향적인 속성들을 상징합니다. ‘아이와 젖 먹는 자’는 사랑의 첫 번째 단계들을 상징합니다. “Man and 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 and 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아이’와 ‘어린이’로 이노센스와 체어리티를 식별하는 것은 누가복음에 주님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n “infant” and a “little 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They brought unto him little children that he should touch them. And Jesus said,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in no wise enter therein. (눅18:15, 17)

 

주님 자신 ‘아기’, ‘아들’로 불리십니다. 주님은 이노센스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주님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일컬음 받으십니다. The Lord himself is called a “little one,” or “child” (사9:6), because he is innocence itself and love itself, and in the same passage he is spoken of as “wonderful, counselor, God, hero, father of eternity, prince of peace.”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6)

 

 

431. ‘상처’와 ‘상함’은 더 이상 건전한 것이 없음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상처’는 특별히 신앙이 버림을 받아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을, ‘상함’은 체어리티가 마치 물청소를 한 것처럼 깨끗이 씻겨 내려갔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상처’와, 소년은 ‘상함’과 각각 연관된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 one.”

 

신앙의 황량함 및 체어리티의 황폐함을 이사야는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사1:6)

 

이 구절에서, ‘상한 것’은 황량해진 신앙으로, ‘터진 것’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로, ‘새로 맞은’은 둘 다로 각각 서술되고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2021-06-18(D6)-매일예배(AC.429-431, 창4,23), '소년, 체어리티(charity), 이노센스(innocence)'.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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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JprLbkV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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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428. 이 본문과 다음 절을 볼 때 아주 분명한 것은, ‘라멕’은 황폐함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소년을 죽였다’ 하고 있고, 또 가인의 경우는 일곱 배이지만, 라멕의 경우는 ‘일흔일곱 배’이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 a man,” and a “little 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29. ‘사람’이 신앙에 관한 상징인 것은 본 장 1절, 하와가 가인을 낳고 한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문장에 더 충실한 번역은, ‘내가 여호와라는 사람을 얻었다’입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라는 사람’, 곧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cf. 340) That by a “man” [vir] 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 man, Jehovah.

 

이런 사실은 또 훨씬 앞서 다룬 (cf. 158, 265), 남자, 여자에 관한 내용을 봐도 확실합니다. 거기서 남자는 지적 능력을 상징합니다. 지적 능력은 신앙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2021-06-17(D5)-매일예배(창4,23, AC.428-429), '라멕, 황폐함, 사람, 신앙의 교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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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WfsU1QUR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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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427. 앞서 살핀 대로(cf. 405, 406), ‘라멕’은 황폐함을 상징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는 죄에 대한 시인, 곧 자백을 상징하며, 이것은 교회가 있는 데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멕의 ‘아내들’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cf. 409), 새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는 그가 신앙의 불을 끔, 곧, 신앙을 파괴했음을 상징하며, 여기 ‘사람’은 신앙을(cf. 340, 367:1) 상징합니다.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은 그가 체어리티의 불을 껐음을, 파괴했음을 상징합니다.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 little one to my 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상처’와 ‘상함’은 더 이상 온전한 것, 건전한 것이 없음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상처’는 신앙 상태가 황량함, 곧, 신앙이 철저히 버림받았음을, ‘상함’은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 곧, 싹 지워졌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2021-06-16(D4)-매일예배(창4,23, AC.427), '라멕의 아내들, 라멕의 자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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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창4:22)

 

 

425.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구리’(銅, brass)가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것과,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금속은 그 속뜻으로는 어떤 특별한 상징들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金, gold)은 천적 선을, ‘’(銀, silver)은 영적 진리를, ‘’(銅, brass)은 자연적 선을, ‘’(鐵, iron)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그렇게 다른 금속들도 그런데요, ‘나무’(木, wood)와 ‘’(石, stone)도 마찬가지입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법궤와 성막, 그리고 성전에 사용된 ‘’, ‘’, ‘’ 및 ‘나무’가 이런 걸 상징하는 데, 그 자세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이런 상징적 의미들이 예언서들에 보면 아주 또렷한데요, 예를 들면, 이사야입니다.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사60:16-17)

 

이 내용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왕국,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는 자연적 선을 대신하는 천적 선을,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는 자연적 진리를 대신하는 영적 진리를,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는 몸의 선을 대신하는 자연적 선을, ‘철로 돌을 대신하며’는 감각적 진리를 대신하는 자연적 진리를 각각 상징합니다.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겔27:13)

 

여기 주제는 두로인데, 두로는 영적, 천적 부를 소유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놋그릇’은 자연적 선입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입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신8:9)

 

여기 또한 ‘’은 감각적 진리를, ‘’은 자연, 즉, 이성적 진리를, ‘’은 자연적 선을 각각 나타냅니다.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에스겔이 본 것은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겔1:7)

 

여기서 다시 ‘’(구리)은 자연적 선을 상징합니다. 사람의 ‘’은 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같은 식으로 다니엘에도 나타납니다.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단10:5-6)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 자연적 선을 표현하는 것을 위 다니엘 본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9)

 

※ cf. 197번 글

 

 

426. ‘’이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것은 방금 인용한 데 뿐 아니라 아래 에스겔 두로에 대한 말씀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iron” signifies natural truth is further evident from what Ezekiel says of Tyre:

 

12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거래하였음이여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을 네 물품과 바꾸어 갔도다 19워단과 야완은 길쌈하는 실로 네 물품을 거래하였음이여 가공한 쇠와 계피와 대나무 제품이 네 상품 중에 있었도다 Tarshish was thy trader by reason of the multitude of all riches; in silver, iron, tin, and lead, they gave thy traffickings. Dan, and Javan, and Meusal furnished bright iron in thy tradings; cassia and calamus were in thy mart. (겔27:12, 19)

 

이 구절들뿐 아니라 같은 장 앞뒤 구절들을 보면, 천적, 영적 부들과 모든 특정 표현들, 하나하나의 이름들까지 어떤 특별한 것들을 상징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저 말이 아닌 영이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12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Can one break iron, even iron from the north, and brass? Thy substance [facultates] and thy treasures will I give for a spoil without price, and this for all thy sins, (렘15:12-13)

 

’과 ‘’은 자연적 진리와 선을 상징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그것이 ‘북방’에서 온다는 것은 그것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임을 상징합니다.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영적, 천적인 것과 비교하여 자연적인 것은 ‘남방’의 빛과 비교하여 짙은 어둠, 즉, ‘북방’과 같기 때문입니다.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 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혹은 여기서 ‘씰라’로 상징되는 그늘과 같습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의 '어머니'입니다.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재산’과 ‘보물’은 분명히 천적, 영적 부를 의미합니다.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3] 다시 에스겔입니다. Again in Ezekiel: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Take thou unto thee a pan of iron, and set it for a wall of iron between thee and the city, and set thy faces toward it, and let it be for a siege, and thou shalt straiten against it, (겔4:3)

 

여기도 역시 ‘’이 진리를 상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강함은 진리의 속성입니다. 진리를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철을 가리켜 다니엘과 계시록에서, ‘부서뜨리다’, ‘깨뜨리다’ 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혹은 신앙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 in pieces” and “crushes”; as in Daniel (2:34, 40), and in John: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단2:34, 40)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He that overcometh, to him will I give sovereign power over the nations, that he may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as the vessels of a potter shall they be broken to shivers. (계2:26–2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The woman brought forth a man child, who should pasture all nations with a rod of iron. (계12:5)

 

[4] ‘철장(鐵杖)은 주님의 말씀인 진리임을 계시록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That a “rod of iron” is the truth which is of the Word of the Lord, is explained in John: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I saw heaven open,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righteousness he doth judge and figh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out of his mouth goeth a sharp sword, that with it he should smite the nations; and he shall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계19:11, 13, 15)

2021-06-15(D3)-매일예배(창4,22, AC.425-426), '구리(銅), 쇠(鐵)'.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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