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

CONTINUATION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537. 어떤 영이 제 왼쪽에 달라붙어 제게 묻기를, 자기가 어떻게 천국에 올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attached himself to my left side, and asked me whether I knew how he could get into heaven.

 

저는 허락을 받아 그 영에게 말하기를, 천국 입국 허가는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며, 주님만이 어떤 사람의 퀄러티를 아십니다 대답하였습니다. I was permitted to tell him that admission into heaven belongs solely to the Lord, who alone knows what a man’s quality is.

 

천국에 오려고 나름 무슨 추구를 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나 정작 천국이 어떤 곳인지,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 천국은 서로 사랑하는 곳이며, 천국의 기쁨은 그런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라는 등의 사실들을 전혀 모른 채 세상을 떠나 이곳에 오고 있습니다. Very many arrive from the world who make it their sole pursuit to get into heaven, being quite ignorant of what heaven is, and of what heavenly joy is, that heaven is mutual love, and that heavenly joy is the derivative joy.

 

그래서 이런 걸 모르고 오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실제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Therefore those who do not know this are first instructed about it by actual experience.

 

예를 들어, 세상을 떠나 막 도착한 어떤 신참 영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같은 식, 그러니까 천국에 대한 철저한 무지 가운데서도 천국을 갈망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천국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직접 지각하게 하려고, 그의 내면들을 열어 천국의 기쁨 얼마를 실제 느껴볼 수 있게 했습니다. For example, there was a certain spirit, newly arrived from the world, who in like manner longed for heaven, and in order that he might perceive what the nature of heaven is, his interiors were opened so that he should feel something of heavenly joy.

 

그는 천국을 향해 열린 내면들을 통해 천국의 기운이 닿자마자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더니 제발 좀 자기를 옮겨달라고, 자기는 극심한 괴로움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천국을 향해 열렸던 그의 내면들이 도로 닫혔고, 그렇게 그의 상태는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습니다. But as soon as he felt it he began to lament and to writhe, and begged to be delivered, saying that he could not live on account of the anguish; and therefore his interiors were closed toward heaven, and in this way he was restored.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천국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은 아주 잠깐이라도, 양심의 격렬한 고통과 고문을 당하는 듯한 극심한 괴로움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즉, 단 한 순간이라도 천국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From this instance we may see with what pangs of conscience and with what anguish those are tortured who not being prepared for it are admitted even but a little way.

 

 

538.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There were some who sought admission into heaven without knowing what heaven is.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으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화염 속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걸 추구했습니다. They were told that unless they were in the faith of love, to enter heaven would be as dangerous as going into a flame; but still they sought for it.

 

그들이 첫 번째 입구 안 마당, 즉, 천사적 영들의 낮은 영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고통에 사로잡혀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자신을 던질 정도로 힘들어했습니다. 신앙의 어펙션들을 받을 수 있도록 먼저 주님에 의해 준비되지 않고, 무작정 천국을 향해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When they arrived at the first entrance court, that is to say, the lower sphere of angelic spirits, they were smitten so hard that they threw themselves headlong back, and in this way were taught how dangerous it is merely to approach heaven until prepared by the Lord to receive the affections of faith.

 

 

539. 몸 안에 있었던 생애 동안 간음과 간통의 빛 가운데 살았던 어떤 영이 간절히 원한 덕분에 천국의 첫 번째 문턱에 들어가 보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그가 거기 도착하자마자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에게서 죽은 사람의 악취가 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그는 내가 여기 더 머물렀다간 소멸됙겠구나 싶어 다 내던지고 더 낮은 곳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천국 첫 문턱, 간음과 정반대되는 영역에 고작 도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사실에 격분했습니다.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그는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즉, 지옥에 있습니다. He is among the unhappy.

2021-07-28(D4)-매일예배(AC.537-539), '창5 클로징,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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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RFsDD5WK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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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창5:32)

 

 

534. ‘노아’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고대교회(古代敎會, the ancient church)를 상징합니다. By “Noa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셈, 함, 야벳’은 ‘노아’라는 고대교회를 부모로 하는, 세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By “Shem, Ham, and Japheth” are signified three ancient churches, the parent of which was the ancient church called “Noah.

 

 

535. ‘노아’라는 교회는 홍수 전에 있었던 교회들 중 하나로 번호를 매기지는 않는다는 내용이 2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안위하다, 위로하다’는 것은 살아남아 견디는 것입니다.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36. 선행 페이지들에서, 홍수 전에 존재한 교회들에게 소유되었던 퍼셉션에 관한 많은 내용을 말씀드려왔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은 퍼셉션에 관해 전혀 알려진 바 없어 어떤 사람들은 퍼셉션을 일종의 계시의 지속으로, 혹은 사람들 안에 심긴 어떤 것으로, 다른 사람들은 그저 상상일 뿐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어떤 걸로 등 이렇게 온갖 의견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그리고 퍼셉션은 주님이 사랑의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천적인 것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리고 광범위한 천국 전체의 끝없는 다양성 안에는 이 퍼셉션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등, 이런 여러 이유로, 사람들 안에 퍼셉션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개념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을 받아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수많은 천국에 존재하는 퍼셉션의 주된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2021-07-27(D3)-매일예배(AC.534-536, 창5,32), '노아, 고대교회의 시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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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_WvpMMru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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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Lamech were seven hundred seventy and seven years; and he died. (창5:30-31)

 

 

532. ‘라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황폐해진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Lame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the church vastated.

 

자녀들’은 그와 같은 교회를 계속해서 잉태 및 해산하였음을 상징합니다.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533. 라멕과 관련해서는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 곧 그런 교회의 여러 잉태와 해산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더 이상 뭐가 없으므로 라멕에 관해서는 이쯤 하겠습니다. As nothing more is related concerning Lamech than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which ar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we shall dwell no longer on the subject.

 

여러 해산, 곧 ‘자녀들’이 무엇인지는 그 교회를 보면 압니다. 그 교회의 모습이 곧 그 교회의 여러 해산, 태어남이기 때문입니다. What the births were, or the “sons and daughters,” appears from the church; for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births from it.

 

므두셀라’와 ‘라멕’이라 하던 교회들은 둘 다 홍수 직전에 끝났습니다. Both the churches called “Methuselah” and “Lamech” expired just before the flood.

2021-07-26(D2)-매일예배(AC.532-533, 창5,30-31), '므두셀라, 라멕, 홍수 직전에 끝난 교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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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sP5VNnX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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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And Lamech lived a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a son; (창5:28)

 

 

526. 여기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교회의 퍼셉션, 곧 주님의 신성,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 능력은 너무나 그저 그렇고, 흐릿해서 더 이상 그 다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곧, 교회가 황폐해진 것이지요. By “Lamech” is here signified a ninth church, wherein the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was so general and obscure that it was next to none, so that the church was vastated.

 

아들’은 어떤 새 교회가 일어남을 상징합니다. By the “son”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527. ‘라멕’에 관한 위의 내용, 곧, 라멕이라는 교회는 진리와 선에 관한 퍼셉션 능력이 그 이전 교회들보다 더 그저 그렇고, 흐릿해서 더 이상 그 다음이 없을 정도로 황폐한 교회였다라는 사실은 앞장에서 이미 언급했고, 또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a church wherein the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was so general and obscure as to be next to none, consequently a church vastated, appears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from what follows in the next verse.

 

앞장에서 ‘라멕’은 여기 라멕과 거의 똑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바로 황폐함입니다. (창4:18-19, 23-24 참조) 그리고 그를 낳은 자 역시 거의 비슷한 이름인 ‘므두사엘’인데요, 이런 걸 보면, 이 이름들이 거의 동일한 것들을 상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Lamech” in the preceding chapter has nearly the same signification as in this, namely, vastation (concerning which see Gen. 4:18, 19, 23, 24); and he who begat him is also called by nearly the same name, “Methusael,” so that the things signified by the names are nearly the same.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8-19, 23-24)

 

므두사엘’과 ‘므두셀라’는 곧 죽게 될 무언가를 상징하며, ‘라멕’은 무엇인가 파괴, 파멸된 것을 상징합니다. By “Methusael” and “Methuselah” is signified something that is about to die; and by “Lamech” what is destroyed.

2021-07-23(D6)-매일예배(AC.526-527, 창5,28), '라멕, 파괴, 파멸, 황폐(vastatio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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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krmAdGWZ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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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창5:25)

 

 

523.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Methuselah” is signified an eighth church, and by “Lamech” a ninth.

 

 

524. 이 교회의 퀄러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할 게 없습니다. 다만 그 퍼셉션 역량에 관해 굳이 언급하자면... 그건 그저 그랬다는 것, 곧, 그저 일반적이고 흐릿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노아’라는 교회에 관한 설명을 보시면 분명히 아실 수 있습니다. 즉, 완전함이라는 게 감소하여 허술해졌는데, 특히 지혜와 지성에서 그랬습니다. Nothing is mentioned concerning the quality of this church; but that its perceptive faculty was general and obscure, is evident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 called “Noah”; so that perfection decreased, and with perfection wisdom and intelligence.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ethuselah were nine hundred sixty and nine years; and he died. (창5:26-27)

 

 

525. 이 표현들도 같은 의미입니다. These words have a like signification.

2021-07-22(D5)-매일예배(AC.523-525, 창5,25-27), '므두셀라, 점점 더 희미해진 교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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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8tZBBdli7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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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창5:23-24)

 

 

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라는 표현은 그들의 수가 아주 적었다는 뜻입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그의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표현은 위에서처럼, 신앙 관련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은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심을 뜻한다는 것에 관하여, 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의 일이었던 것을 교리라는 형태로 하향 재탄생케 하였는데, 이것은 그 교회 시대에는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로 배우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예를 들어, 잘 생각하는 법을 이미 아는 사람은 생각하는 법을 예술 수준으로까지 올린 무슨 규칙들을 가지고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그의 잘 생각하는 타고난 재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스콜라 철학의 먼지를 스틱으로 빠르게 찌르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내적 방식과 경로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은, 지식이라는 것을 외적 방식, 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얻게 되는데,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또한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점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특별한 것들 속으로 상태들과 환경들, 상황들을 따라 온갖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사라지고 난 후, 인류는 무엇이 진리요, 선인지를 교리로 배우게 되며, 곧, 어두움을 겪고 나서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여기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즉, 후손들이 사용하도록 그 교리를 보존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522. 또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그것은 일종의 무슨 차이점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마음은 자기 밖 희미한 뷰를 교리적인 것으로 결정합니다.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2021-07-21(D4)-매일예배(AC.520-522, 창5,23-24), '에녹,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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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dVSLTJ7w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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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518. ‘하나님과 동행’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519. 태고 교회에서 출발, 그 후속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퍼셉션에 속했던 사안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 교리를 기준으로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그걸 가리켜 교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에녹’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이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이기 때문입니다.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동행하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그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 하지 ‘여호와와 동행하였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가르치며 사는 것이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행(行)하다, 걷다, 살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걸 상징하는 일상적인 말투입니다. 예를 들면, ‘법대로 살다’, ‘규범 가운데 살다’, ‘진실하게 살다’처럼 말입니다.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행하는 것’은 어떤 길이나 삶, 방식에 대한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인데, 이 길은 진리, 곧 신앙 혹은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말씀에서 ‘행함’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입니다.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미6:8)

 

여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서 가리키는 것들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과 함께’라는 표현에 대해서, 에녹에 대한 다른 성경(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로부터’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시편입니다.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시56:13)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다니는 것’은 신앙의 진리, 곧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는 것입니다.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이사야에서도 같습니다.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사9:2)

 

또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레26:12)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상징하십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렘8:2)

 

여기 보면, 사랑 관련된 것들과 신앙 관련된 것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두는데요, 전자는 ‘사랑하며’와 ‘섬기며’로, 후자는 ‘뒤따르며’와 ‘구하며’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모든 예언서들을 보면, 모든 표현들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표현을 다른 걸로 적당히 대신하거나 섞어 쓰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말씀에서 ‘여호와와 함께 걷다’나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2021-07-20(D3)-매일예배(AC.518-519, 창5,22), '에녹, 하나님과 동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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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ysJC29GA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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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516.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517. ‘에녹’이라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합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2021-07-19(D2)-매일예배(AC.516-517, 창5,21), '에녹, 일곱 번째 교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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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gzGBjXp1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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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창5:19-20)

 

 

515. 이들 표현들의 상징들 또한 위 같은 표현들의 것들과 유사합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also is similar to that of the like words above.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았다 하여 대홍수 이전 사람들의 나이가 실제로 이렇게 엄청났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특별히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다음 장 3절,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6:3)를 통해 모두가 아시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햇수들은 어떤 개인의 수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해당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That the ages of the antediluvians were not so great, as that of Jar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that of Methuselah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must appear to everyone, especially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at verse 3 of the next chapter, where we read, “Their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o that the number of the years does not signify the age of any particular man, but 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

2021-07-18(D1)-주일예배(AC.515, 창5,19-20), '야렛, 구백육십이 세와 백이십 년(창6,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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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LWpgSoi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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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513. ‘야렛’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각각 상징합니다. By “Jared,”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ixth church; by “Enoch” a seventh.

 

 

514. ‘야렛’이라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대략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그 앞 교회였던 ‘마할랄렐’과, 그 다음 교회인 ‘에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둘 사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Concerning the church called “Jared” nothing is related; but its character may be known from the church “Mahalalel” which preceded it, and the church “Enoch” which followed it, between which two it was intermediate.

2021-07-16(D6)-매일예배(AC.513-514, 창5,18), '야렛,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었던 교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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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MrjpK6_8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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