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Verse 1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 기억-지식들이 천적 지식들을 볼 때, 그 모습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그 기억-지식들이 이르기를, 저 지식들은 천적이다 하리라는 뜻입니다.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signifies that they will call the knowledges celestial;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그들, 그 기억-지식들은 천적인 것들엔 관심이 없고, 대신 오직 단순한 지식들, 그들이 얻었으면 하는 지식들에만 관심을 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signifies that they would not care for the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the mere knowledges, which they would carry off.
1465. 11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Verse 11. And it came to pass, when he drew nigh to come into Egypt, that he said unto Sarai his wife, Behold I pray, I know that thou art a woman beautiful to look upon.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주님이 배우기 시작하셨을 때를 말합니다. ‘애굽’,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스키엔티아 코그니티오눔] 말합니다. “And it came to pass, when he drew nigh to come into Egypt” signifies when he began to learn; “Egypt,” as before said, mean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scientia cognitionum];
※ 주님도 어린 시절, 여느 어린이들과 같이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겉 사람(the external man)은 지식이 아니고서는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상응하고 일치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겉 사람은 유형의 신체를 가진 감각적인 것입니다. 마치 땅에 심기듯 지식이 겉 사람 안에 심기지 않으면 겉 사람은 그 어떤 천적, 영적인 것도 받을 수 없지요. 즉, 이 지식은 천적인 것이 담기는 그릇입니다.
이 지식은 반드시 말씀에서 와야 합니다. 말씀에서 오는 지식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열린, 즉, 이 지식을 통해서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지식이기 때문이며, 말씀 자체가 주님에게서 나와 천국을 두루 통하고, 주님의 생명이 말씀 안 모든 것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그래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 시절, 말씀 말고 다른 지식으로는 자신을 가득 채우시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해 열려 있고,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며, 주님이 결합하셔서 하나가 되실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말씀은 그 가장 안쪽, 가장 내적 의미로도 오직 주님에 관한 것뿐이며, 무엇이든지 오직 맨 처음 주님으로부터 온 것뿐입니다. 휴먼 에센스, 곧, 인성이라는 것은 그저 영원부터 계신 디바인 에센스, 곧, 신성에 보태어진 뭔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AC.1461)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천적인 것들에 인접해 있는 진리에 관하여 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음을 말합니다. “he said unto Sarai his wife” signifies that he so thought concerning the truths to which celestial things were adjoined; ‘사래’, 아내로서의 ‘사래’는 주님 안에 있는 천적인 것들에 인접해 있는 진리입니다. “Sarai” as a wife is the truth adjoined to the celestial things that were in the Lord;
※ ‘아내’에 대한 말씀의 속뜻은 선과 결합한 진리 말고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정확히 결혼이라는 상황과 같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사람’을 뜻할 때는 반대로 남편은 진리를, 아내가 선을 뜻합니다. 이것은 말씀 어디에서나 항상 같습니다. (AC.915)
여기서는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서 그의 아내 사래가 나오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사래는 진리입니다.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에게 말한다는 것은,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를 천적인 것과 결합한 진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갈 때,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실제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의 모든 실제 있었던 일들은 표상이며, 사용된 모든 말은 어떤 의미들을 가집니다. 말씀에 기록된 어떤 일, 사건들도, 그 순서와 말들 모두 이런 아케이나를 표현하기 위한 속뜻을 갖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AC.1468)
※ 아내로서의 ‘사래’는 천적인 것에 아주 가까이 있었던 진리이며, 이 천적인 것은 주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천적인 것에 아주 가까이 있었던 진리’라 하는 것은, 모든 진리는 주님이 그것을 가르치시기 전에 이미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적인 것은 늘 함께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둘 사이를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 마치 빛이 불에서 나오는 것과 같지요. 이 진리는 주님의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신성(Divine), 곧 신적 진리였습니다. 주님이 배우신 지식은 진리가 아니었고, 단지 뭘 담아두는 그릇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억 속 무엇이 들어 있든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비록 그리 불려도 말입니다. 진리는 그 안에, 곧 그릇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릇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그릇 안의 내용물이 진리인 것입니다. 이 그릇은 말씀 관련 지식의 범주 안에서 주님에 의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됩니다. 어쩜 열린다는 게 더 나은 표현이지 싶습니다. 천적인 것이 그 안으로 스며들 수도, 이런 식으로 신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인성 관련된 것들이 신성과 똑같이 될 수 있도록 신성과 인성을 결합하셨기 때문입니다. (AC.1469)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그 출처, 기원이 천적인 진리는 정말 기분 좋다, 정말 마음에 든다는 뜻입니다. “Behold I pray, I know that thou art a woman beautiful to look upon” signifies that truth from a celestial origin is delightful.
※ 천적이거나 천적인 것에서 나온 모든 진리는 속 사람에게는 행복이요, 겉 사람에게는 정말 기분 좋은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도 그렇게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천적이지 않으면 정반대입니다. 속 사람 안에 두 종류의 행복이 있는데 그에 상응하여 겉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는 선이요, 다른 하나는 진리입니다. 천적 행복과 즐거움은 선으로 되어 있고, 영적 행복과 즐거움은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행복과 즐거움을 수반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진리가 오직 천적 기원을 가지려면 이건 필수입니다. 그때 진리 자체가 천적이 되고, 천적 진리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그때 진리는 마치 봄철 태양 빛과도 같습니다. 그 안에 열이 있어 땅 위 모든 것을 자라나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빛 말입니다. 이 천적 진리는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에 담긴 더 많은 아케이나가 이어지는 주된 내용이 될 것입니다. (AC.1470)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1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주님이 말씀에서 오는 지식을 배우기 시작하셨을 때, 주님은 그 지식에 담기는 진리가 천적인 것과 아주 가깝고, 정말 기분 좋은, 매우 마음에 드는 진리라고 생각하셨다
1456. 9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Verse 9. And Abram journeyed, going and journeying toward the south.
‘점점 옮겨갔더라’, 더 깊이 나아감을 말합니다. “And Abram journeyed, going and journeying” signifies further progression;
※ 고대인들에게는 ‘여행’(travels), ‘여정’(journeys) 및 ‘체류’(sojournings)는 단순히 단어의 뜻 말고 무슨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이들 표현은 단순히 그 단어의 뜻밖엔 무슨 속뜻이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즉, ‘점점 옮겨갔더라’가 더 깊이 나아감을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go’와 ‘journey’의 뜻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여느 일반인처럼 지식을 향한 나아감이 시작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1:8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40)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2:46-49)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도 다른 어린이들처럼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시고 배우신 것입니다. (AC.1457)
‘남방으로’, 선과 진리 가운데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면이 빛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게 하시려고를 말합니다. “toward the south” signifies into goods and truths, and thus into a state of light as to the interiors.
※ ‘남’(南, the south)은 빛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계에서는 방위(quarters)도, 시간도 없고, 대신 방위와 시간으로 상징되는 ‘상태’(states)가 있습니다. 지적인 것들(intellectual things)의 상태는 날(the day)과 해(the year)의 시간(때)들의 상태 및 방위의 상태들과 같습니다. 날의 상태들은 저녁, 밤, 아침 및 정오의 상태들이 있고, 해의 상태들은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의 상태들이 있습니다. 방위의 경우는 해(the sun)의 상태들과 같은데, 서(西, the west), 북(北, the north), 동(東, the east) 및 남(南, the south)과 관련된 상태들이 있습니다.
지적인 것들의 상태가 이와 유사합니다. 놀라운 것은, 천국에서는 지혜와 지성(intelligence)의 상태 가운데 있는 이들이 곧 빛 가운데 있습니다. 정확히 그들의 상태에 따라 말이지요. 가장 높은 지혜와 지성 가운데 있는 이들은 가장 큰 빛 가운데 있습니다. 지혜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빛 가운데, 지성은 주님 신앙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지상의 빛 가지고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빛입니다. (AC.1521-1534, 1619-1625) 천국에는 빛과 지성 사이 이런 상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말씀에 나오는 ‘남’은 이것 말고는 무슨 다른 속뜻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남’은 지식을 사용하여 아주 어렵게 구한 지성을 말합니다. 이 지식은 천적, 영적 진리들인데, 천국에 있는 수많은 빛의 복사(輻射, radiations)가 바로 이것이며, 이지식은 앞서 말한 대로, 천국에서는 빛의 형태로 눈에 보이게 나타납니다. 주님이 지금 이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가득 채우고자 하심은, 나중에 주님의 인성(人性, the human essence)에 대해서도 주님 자신 실제 천국의 빛이 되고자 하심이며, 이것을 일컬어 여기 9절 오늘 본문에서는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하신 것입니다.
남방을 향한 아브람의 계속된 여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선과 진리를 향한 주님의 나아가심,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빛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게 하심에 관한 상징임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천적, 영적 진리들이므로 천적,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지식을 통해서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며, 여기서 후자는 그것을 받아 담아놓는 그릇입니다. 후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있는 만큼 그 수가 많습니다. 이 지식 안, 곧 이들 진리의 그릇들 안으로 천적인 것들이 흘러들어옵니다. (AC.1458)
※ 이상으로 오늘 본문 9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실제 천국의 빛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시려고 계속해서 천적, 영적 지식으로 자신을 채우셨다
1449. 8절,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Verse 8. And he removed from thence in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spread his tent; having Bethel toward the sea, and Ai on the east.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어린 시절 주님의 네 번째 상태, 즉, 사랑의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진행(progression)을 말합니다. ‘벧엘 동쪽 산으로 옮김’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사랑의 천적인 것들입니다. “He removed from thence in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signifies the Lord’s fourth state when a child, namely, the progression of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signified by being transferred to a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 이 표현이, 어린 시절 주님의 네 번째 상태에 관한 것임은, 앞서 다룬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또한 진행 순서 자체를 보면 분명합니다. 주님은 가장 먼저 유아기 때부터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 채워지셔야 했습니다.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란 여호와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있는 이노센스(innocence)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생명의 더할 나위 없는 근원들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모든 것이 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 파생물이지요. 이들 천적인 것들은 사람의 유아기 때, 그에게 집중적으로 스며들기 시작, 어린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를 채웁니다. 이때에는 사실 다른 무슨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 어펙션(affection)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주님에게서 나와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그를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유아들의 상태와 조금 시간이 흐른 어린 시절 초기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 안의 이것이 앞서 여러 번 말씀드린 (AC.468, 530, 560-561, 660-661) 리메인스(remains)입니다. 주님도 여느 사람들처럼 태어나셨기 때문에, 순서대로 실제로 유아기를 거쳐 어린 시절까지 서서히 이렇게 천적인 것들로 채워지셨고, 나중에는 지식들 가운데로 인도되셨습니다. 본 절에서는 이런 일이 주님의 경우에는 어떠셨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AC.1450)
※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사랑의 천적인 것들의 진행을 말하는 것임은, ‘산’(mountain)이 상징하는 것, 곧, 천적인 것에 관한 내용들(AC.795-796) 및 ‘동’(東, the East)이 사랑에 관한 여호와 자신에 관한 상징인 것, 그리고 ‘벧엘’의 상징이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임을 보면 분명합니다. 주님은 앞서 살핀 대로(AC.101 등) ‘동’ 자체이십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람 안에 지식 없이도 스며들고, 지식과 함께도 스며듭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천적인 것들은 지식 없이도 유아기로부터 어린 시절에 이르기까지 스며들며, 또한 어린 시절부터 성인까지는 지식과 함께 스며듭니다. 주님은 ‘벧엘’이라고 하는,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 가운데로 곧장 나아가셨기 때문에 본 절에서 표현하길, 아브람이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겼다 한 것입니다. (AC.1451)
‘장막을 치니’,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말합니다. “and spread his tent”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faith;
※ ‘장막을 치니’,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상징하는 것은, 전에(AC.414) 살핀 대로, ‘장막’(tent)의 상징이 사랑의 거룩한 퀄러티를, 그리고 그 결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거룩한 퀄러티를 상징하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그가 그의 장막을 쳤다’라는 표현은, 이 일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 (AC.1452)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주님의 상태가 아직 어슴푸레하였음을 말합니다. “having Bethel toward the sea, and Ai on the east” signifies that his state was still obscure;
※ 주님의 상태가 아직은 어슴푸레, 즉,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관련, 아직 불투명한 상태임을 말합니다. 천적인 것들 가운데 있는 것과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있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유아 및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천적입니다. 그들은 부모를 사랑하며,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노센스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반면, 어른들은 유아와 어린이들에 비해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더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 중 상당수는 사랑의 천적인 것들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아직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을 배우기 전인 사람은 어슴푸레한 상태, 즉, 지식 수준의 상태 가운데 있으며, 이 상태를 가리켜,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한 것입니다. ‘벧엘’은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아이’는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말합니다.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 아직 어슴푸레할 때는 ‘서쪽에 있다’ 합니다. 말씀에서, ‘서(西, the west)’는 어슴푸레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 명료함 가운데 있을 때는 ‘동쪽에 있다’ 합니다. 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은 명료하기 때문입니다. (AC.1453)
※ ‘벧엘’과 ‘아이’가 각각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과,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상징하는 것은 아래 말씀들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벧엘’의 경우입니다.
3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3:3-4)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28:17, 19)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6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창35:1, 6-7)
18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26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삿20:18, 26-27)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삼상7:16)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10:3)
27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왕하17:27-28)
12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암7:12-13)
이 외에도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고, 다음은 ‘아이’의 경우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수7:2)
1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2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수8:1-2이하 28절까지)
3헤스본아 슬피 울지어다 아이가 황폐하였도다 너희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을지어다 굵은 베를 감고 애통하며 울타리 가운데에서 허둥지둥할지어다 말감과 그 제사장들과 그 고관들이 다 사로잡혀 가리로다 4패역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를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대적하여 오리요 하느냐 (렘49:3-4)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 상태에서 아버지께 드린 주님의 외적 예배를 말합니다.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signifies the external worship of his Father from that state;
※ ‘제단’에 관한 상징, 곧 예배에 관한 주된 표상에 대해서는 921번 글 참조 (AC.1454)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 상태에서 아버지께 드린 주님의 내적 예배를 말합니다.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of his Father from that state.
※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에 관한 글(AC.440) 참조. 여호와께 제단 쌓는 것은 외적 예배, 여호와의 이름 부르는 것은 내적 예배입니다. (AC.1455)
※ 이상으로 오늘 본문 8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어린 시절, 네 번째 상태로 계속 진행하셔서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 채우시고, 아직 어린 시절이시라 여전히 어슴푸레하시지만 주님은 그 상태에서, 채우신 사랑의 천적인 것들을 가지고 아버지께 외적, 내적 예배를 드리셨다
1445.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Verse 7. And Jehovah was seen of Abram, and said, 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who was seen of him.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여호와께서 주님이 아직 아이였을 동안 나타나셨음을 말합니다. “Jehovah was seen of Abram” signifies that Jehovah appeared to the Lord while yet a child;
※ 앞에,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을 통해서, 그리고 ‘아브람’이라는 이름, 곧 ‘아브람’은 주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표상이라는 것, 또한 주님은 먼저 천적인 것을 얻으신 후, 퍼셉션을 받으시는데, 이런 순서를 통해 ‘여호와께서 나타나심’이 이어지는 것 등을 두루 연결하면, 위와 같은 내적 의미로 정리됩니다. (AC.1446)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천적인 것은 주님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야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and said, 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signifies that celestial things should be given to those who should have faith in him;
※ ‘네 자손’의 ‘자손’은 ‘seed’입니다. 또 ‘이 땅을’의 ‘땅’은 ‘land’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말씀에서 ‘seed’는 주님 신앙을(AC.255, 256), ‘land’는 천적인 것을(AC.620, 636, 662, 1066) 각각 가리킵니다. (AC.1447)
※ 겉 글자의 뜻으로는, ‘아브람의 씨’는 야곱으로 말미암은 그의 후손을, ‘땅’은 가나안 땅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땅을 그들의 소유로 주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왕국과 교회에 관한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 가운데 표상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주님께서 그곳에서 태어나시니까요. 그러나 속뜻, 곧 내적 의미로는, ‘씨’는 주님 신앙 말고는, 그리고 ‘땅’은 천적인 것 말고는 달리 의미하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위 본문의 내적 의미가 ‘천적인 것은 주님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야 받을 수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AC.1447)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아버지께 드린 첫 번째 예배를 말합니다.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who was seen of him” signifies the first worship of his Father from the celestial of love.
※ ‘제단’은 예배에 관한 주된 표상(representative)입니다. (AC.1448)
※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창8:20)는 주님에 관한 표상입니다. 고대교회의 모든 제의는 주님에 관한 표상입니다. 유대 교회의 제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후대에 이르러 제의 중 메인 표상, 즉, 가장 주된 표상이 바로 ‘제단’(altar)과 ‘번제’(burnt offering)입니다. 번제에는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가 각각 그 상징하는 바 표상을 따라 드려졌는데, 정결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정결한 새는 신앙의 진리를 상징하였습니다. 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런 걸 드리면서, 자기들이 주님께 선과 진리의 선물을 드리고 있음을 상징했습니다. 그 밖의 것으로는 사람이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AC.921)
※ 이상으로 오늘 본문 7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주님은 천적인 것, 곧 하늘에 속한 것은 오직 주님 신앙을 가진 자라야만 받을 수 있음을 퍼셉션으로 아셨고, 그때 주님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아버지께 첫 예배를 드리셨다
1431. 5절,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Verse 5. And Abram took Sarai his wife, and Lot his brother’s son, and all their substance that they had gotten, and the soul that they had gained in Haran: and they went forth to go into the land of Canaan; and into the land of Canaan they came.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선과 그동안 선에 인접해 있어 온, 붙어있어 온 진리를 말합니다. “And Abram took Sarai his wife” signifies good to which truth has been adjoined;
‘아브람’, 계속 말씀드리고 있는 대로, 주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어린 시절 주님을 가리킵니다. by “Abram,” as has been said, is meant the Lord; here, when he was a child;
‘아내’로서의 ‘사래’, 진리를 의미합니다. by “Sarai” as a “wife” is meant truth:
※ 말씀에서 교회가 묘사되는 두 가지 표현 중 하나는 ‘남자(vir)와 그의 아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homo)과 그의 아내’입니다. 전자의 경우, ‘남자’는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또는 진리를, ‘아내’는 윌(will) 또는 선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사람’은 사랑의 선 또는 사랑을, ‘아내’는 신앙의 진리 또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AC.915) 그러므로 여기 5절, ‘아브람과 그의 아내’는 후자, 곧 ‘아브람’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AC.1432)
※ 사람의 모든 것 안에는 결혼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말이지요. 그 이유는, 주님의 휴먼 에센스와 디바인 에센스가 바로 이 결혼이라는 이미지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며, 만물의 기본 질서는 바로 결혼이라는 이 하나됨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천국과 지상 두 왕국의 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아브람’은 선을 의미하고, 그리고 선과 어울리는 짝은 진리이므로 여기서 ‘그의 아내’, 곧 ‘사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AC.1432)
‘조카 롯과’, 감각적 진리를 말합니다. 한 어린아이 안으로 맨 처음 스며드는 것입니다. “and Lot his brother’s son” signifies sensuous truth, thus the first that is instilled into a child;
※ 조카는 형제의 아들입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AC.264, 480, 491, 533), ‘형제’는 신앙의 진리를 (AC.367), 그리고 ‘롯’은 앞에서 감각이라 하였으므로, 이 ‘조카 롯’이 감각적 진리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AC.1434)
※ 어린아이는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눈’으로 봅니다. 눈에 비치는 그 모든 것을 ‘보며,’ ‘이것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일까?’, ‘왜 이것을 만드셨을까?’ 생각합니다. 아직 그 내적 의미까지는 알 수 없는 어린아이는 그러나 주님 지으신 이 세상을 ‘눈’으로 보며, ‘아, 이곳을 보니 천국도 이렇겠구나!’ 하며,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감각적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는 오직 천인(天人, the celestial man)한테만 스며들며, 오직 주님만이 천인이시므로 주님의 어린 시절인 지금, 주님에게 이런 감각적 진리가 스며든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천국의 진리를 받을 수 있는 토양이 됩니다. (AC.1434)
‘모은 모든 소유와’, 모든 감각적 진리를 말합니다. “and all their substance that they had gotten”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sensuous truths;
※ 식재료가 없으면 음식을 준비할 수 없듯, 사람이 무엇을 생각할 때도 우선은 그 생각의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 나오는 ‘모은 모든 소유’입니다. 이렇게 얻은, 또는 습득한 감각 진리들 중, 기억-지식은 영적 재료를 담는 그릇, 애정은 천적 재료를 담는 그릇입니다. 특별히 ‘하란’에서 얻은 것을 어슴푸레한 상태라 하는 것은, 그때가 아직 주님의 유아기를 비롯, 어린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AC.1435)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 그 어슴푸레한 상태에서 가능했던 모든 리빙 에센셜을 말합니다. “and the soul that they had gained in Haran” signifies every living essential that was possible in that obscure state;
※ ‘사람들’로 번역한 것은 ‘혼’이라고도 하는 ‘소울’(soul)입니다. 이 소울은 인간 안에 있는 ‘살아있는 것’, 곧 인간의 ‘생명’입니다. 인간 안에서 살아있는 것은 육체가 아닌 소울이며, 육체는 단지 소울에 의해 사는 것일 뿐입니다. 이 소울이라는 생명의 근원은 천국의 사랑입니다. 천국 사랑에 근원을 두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생명을 가질 수도, 생명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소울은 천국 사랑을 가지고 사는 선이며, 이 선이 곧 리빙 에센셜입니다. (AC.1436)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천적이며, 사랑인 것들을 향해 나아가셨음을 말합니다. “and they went forth to go into the land of Canaan” signifies that he thus advanced to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 ‘가나안 땅’, 곧 ‘랜드 오브 가나안’은 천국과 지상, 주님의 왕국을 표상합니다. 이곳에 표상 교회가 있었고, 이 교회 안 모든 것, 가령, 각종 제의, 희생 제물, 제사장 등 섬기는 사람들, 성막 등 모든 것이 주님과 주님의 왕국에 대한 천적, 영적 표상물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거룩한 곳이며, 그러나 참으로 거룩한 곳으로 구별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로 인한 천국적 퀄러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 왕국에는 이런 퀄러티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C.1437)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주님은 결국 천적이며, 사랑인 것들을 얻으셨음을 말합니다. “and into the land of Canaan they came” signifies that he attained to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 주님은 마침내 천적이며, 사랑인 것들에 도달하셨습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이 여기서 연유합니다. 이런 천적 사랑이 어린 시절 주님에게 맨 먼저 유입되며, 서서히 스며든 것입니다. 이것은 씨가 되어 이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씨는 천국이며,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출생하셨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기 안에 그 씨로 천국을 가지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씨는 악한 씨요, 더러운 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시는 새로운 씨를 받아야 합니다. 아멘, (AC.1438)
※ 이상으로 위 5절의 내적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선이신 주님은 늘 곁에 있어온 진리와, 순진무구한 감각으로 받아들인 모든 진리, 그리고 비록 아직은 어슴푸레하지만 모든 기억-지식과 애정 및 생명의 에센셜들을 가지고 천국, 사랑의 여정을 시작, 결국 도달하셨다
1425.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Verse 4. And Abram went as Jehovah spoke unto him; and Lot went with him. And Abram was a son of five years and seventy years when he went forth out of Haran.
‘아브람’, 이미 말씀드린 대로, 휴먼 에센스 측면에서 주님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By “Abram,” as already said, is represented the Lord as to his human.
※ 휴먼 에센스(human essence), 이 에센스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살짝 개운치가 않습니다. 굳이 옮기자면, ‘인간으로서의 본질(本質)’ 정도가 되겠습니다. 다른 번역으로는 ‘정수(精髓)’, ‘진수(眞髓)’도 있습니다. 창12는 주님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주님의 인성(人性)이 신성(神性)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 곧 신적 인성이 되어가시는 과정이므로 필요한 곳에서는 단순히 ‘인성’으로 번역하겠습니다.
※ ‘아브람’은 주님의 휴먼 에센스 측면을, ‘아브라함’은 주님의 디바인(Divine) 에센스 측면을 각각 표상합니다. (AC.1426)
※ 1절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처녀 마리아를 통해 휴먼 에센스를 유전하신 주님이 그러나 자신에게 디바인 에센스 역시 있음을 처음 자각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AC.1407)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신성한 것을 향하신 주님의 진보, 나아가심을 말합니다. “And Abram went as Jehovah spoke unto him” signifies his progression toward Divine things;
※ 주님의 휴먼 에센스가 디바인 에센스로 되어가는 첫발을 떼신 것, 그 여정의 시작을 말합니다. (AC.1427)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감각적인 것을 말합니다. ‘롯’ 역시 주님을 표상하는데, 특별히 육체적 감각을 가진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주님을 표상합니다. “and Lot went with him” signifies what is sensuous; by “Lot” is represented the Lord as to his sensuous and corporeal man;
※ 주님은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것 외에는 여느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몸, 곧 육체적 감각을 가지셨는데, ‘롯’은 주님의 이런 측면을 표상합니다. 주님은 타고나신 이런 외적 속성들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 천적 속성들과 하나 되게 하셔서 결국 신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인성, 주님의 휴먼은 우리와 달리 나중에 신적 인성, 디바인 휴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화, 영광화(glorification)입니다. (AC.1428)
‘아브람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직은 신성이 많지 않으셨음, 충분하지 않으셨음을 말합니다. “and Abram was a son of five years and seventy years” signifies that as yet there was not very much of the Divine;
※ 말씀에서 ‘칠’(7), ‘칠십’(70)은 거룩함(AC.395, 433, 716, 881), 특히 주님을 가리키며, 그래서 신적 거룩, 디바인 홀리니스(Divine holiness)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숫자 ‘오’(5)는 ‘적다’를 표시합니다(AC.649). 그래서 ‘칠십오’(75)는 신성이 아직은 충분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AC.1429)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주님의 불투명한 상태를 말합니다. “when he went forth out of Haran” signifies an obscure state of the Lord.
※ ‘하란’은 데라, 아브람, 그리고 라반, 곧 우상숭배와 관련된 곳입니다. 즉, 예배가 외적일 뿐이었던 곳이지요. 이런 ‘하란’도 내적 의미로 넘어가면 더 이상 ‘우상숭배’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어슴푸레하다’, ‘불투명하다’ 같은 의미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위 표현이 곧 주님의 불투명한 상태를 표상하는 이유입니다. (AC.1430)
※ 이상으로 위 4절의 내적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인성(人性, human essence)이 신성(神性, Divine things)을 향하실 때, 주님의 육체적 감각들도 함께 하였으며, 그때는 아직 주님의 신성이 충분하지 않아 어슴푸레한 상태였다.’
※ 제가 눈 상태가 안 좋아 하루 이틀에 한 챕터씩 진도를 나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당분간은 며칠에 한 번씩, 한 챕터 하는 데 여러 날 걸릴 수도 있겠습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창12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THE INTERNAL SENSE
1407. 1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Verse 1. And Jehovah said unto Abram, Get thee out of thy land, and from thy birth, and from thy father’s house, to the land that I will cause thee to see.
이 말씀과 이어지는 내용은 그 기록된 대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표상이며, 각 단어는 깊은 의미들이 있습니다. These and the things which follow occurred historically, as they are written; but the historicals are representative, and each word is significative.
※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몸과 같습니다. 몸이 영을 담는 그릇이듯, 말씀의 겉 글자는 속뜻을 담는 그릇입니다. 육이 잠잠할 때, 영이 생생해지듯 사람의 마음이 말씀의 겉 글자로부터 물러날 때,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은 또렷해집니다. (AC.1408)
※ 비록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읽고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 천성이 천진난만하고, 선하여 말씀의 최종 결론인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즉 체어리티의 삶 가운데 계신 분은 안전하며, 괜찮습니다. 이런 분은 나중에 말씀을 겉 글자로 읽은 데서 온 모든 오류가 쉽게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AC.1408)
‘아브람’은 그 속뜻, 그 내적 의미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을 의미합니다. By “Abram” in the internal sense is meant the Lord, as has been said before.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는 모든 것에 관한 첫 번째 눈 번쩍 떠짐, 곧 깨달음(realization)을 말합니다. By “Jehovah said unto Abram” is signified the first mental observation of all;
※ 고대인들은 어떤 것이 양심에 의하거나, 무슨 내면의 소리 및 말씀에 의한 훈계 등이 있을 때, 그걸 가리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즉, 이 표현은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문체입니다. (AC.1410)
‘너는 너의 땅을 떠나라’, 한글 번역은 ‘고향’인데요, 이는 주님이 물러나 계셔야 했던 육적이고 세속적(혹은 세상적)인 것을 뜻합니다. “get thee out of thy land” signifies the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from which he was to recede;
※ 아브람의 고향은 우상숭배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런 외적인 것들로부터는 물러나 계셔야 하며, 아니 오히려 이런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물러나야 하며, 주님 안의 외적인 것들은 역시 주님 안의 내적인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AC.1411)
‘너의 출생으로부터’, 한글 번역은 ‘친척’으로 번역했는데요, 이것은 역시 육적이고 세속적인데, 더 외적인 것을 뜻합니다. ‘너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이 역시 육적이고 세속적인데, 이번엔 더 내적인 것을 뜻합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앞으로 제공되어 보게 될 영적, 천적인 것을 뜻합니다. “and from thy birth” signifies the more exterior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nd from thy father’s house” signifies the more interior of such things; “to the land that I will cause thee to see” signifies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that were to be presented to view.
※ 몸을 가진 사람은 그 특성상, 그 안에 육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러나 외적 및 내적, 두 가지로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인 기쁨 같은 것은 외적, 어펙션(affection, 애정) 같은 것은 내적입니다. (AC.1412)
※ 1절의 속뜻, 그 내적 의미는 태어나실 때의 주님의 첫 상태입니다. 주님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잉태되셔서 처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신 것 말고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으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허약함(infirmity)을 주님도 물려받으셨지요.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두 가지 유전, 곧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이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는, 아버지로부터는 신성을, 처녀 어머니로부터는 다른 사람들처럼 허약함이셨습니다. 주님의 일생은 여호와로서의 신성이 드러나도록 허약한 인성으로 하여금 신성이 되게 하는 과정이었고, 그래서 주님은 인성의 모든 외적인 것들, 곧 육적, 세속,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 계셨던 것입니다. (AC.1414)
1415. 2절,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Verse 2. And I will make thee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thee, and will make thy name great; and thou shalt be a blessing.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하늘과 땅에 있는 왕국을, ‘큰 민족’, 천적인 것과 선으로 말미암음을, “I will make thee into a great nation” signifies the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t is said “a great nation,” from things celestial and from goods;
※ 한글 번역은 ‘민족’이지만, 천적으로는 ‘나라’, 영적으로는 ‘왕국’입니다. 사람들의 퀄러티가 천적이며, 그런 사람들한테서 선한 체어리티가 있는 곳, 그곳이 ‘나라’요, ‘왕국’입니다. 주님은 이 나라의 주인이시며, 나라 그 자체, 왕국 그 자체이십니다. 모든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AC.1416)
※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창17:5), 사래의 이름을 ‘사라’(창17:15-16)로 개명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에 있는 글자 ‘h’가 여호와,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이며, 사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AC.1416)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5)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15-16)
‘네게 복을 주어’, 천적인 것의 결실과 영적인 것의 배가를,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영광을, “and I will bless thee” signifies the fructification of celestial things and the multiplication of spiritual things; “and will make thy name great” signifies glory;
※ ‘복’은 외적, 곧 세상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이익, 잘됨을 말합니다.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요삼1:2)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천적, 영적 이익, 잘됨입니다. 천적인 것들의 결실, 열매를 많이 맺음과 영적인 것들의 배가, 곧 번성을 말합니다. (AC.1420)
※ 천국에서는 모든 이를 섬기며,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이름이 창대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6-28)
천국이 천국인 것은 모두가 자기의 모든 것을 남과 나누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모든 것 되신 주님이 친히 본을 보이시며, 자신을 인류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영광이며, 이것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에 담긴 내적 의미입니다. (AC.1419)
‘너는 복이 될지라’,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만물이 다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and thou shalt be a blessing” signifies that from the Lord are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 ‘복이 되는 것’,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모든 선의 근원이 되는 것, 모든 선을 주는 자가 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 아브람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 오직 주님! 오직 주님만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천적, 영적 퀄러티가 오고, 그리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야 선한 것이며, 그래야만 참으로 진정한 것입니다. 세상 복에 이렇게 주님으로 말미암는 천적, 영적 복이 함께 할 때, 즉 외적, 내적 복 가운데 있을 때, 이때가 바로 참으로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AC.1420)
1421. 3절,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Verse 3. And I will bless them that bless thee, and will curse him that curseth thee; and in thee shall all the families of the ground be blessed.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모든 행복은 심정에 우러나 진심으로 주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있음을, “I will bless them that bless thee” signifies all happiness to those who acknowledge the Lord from the heart;
※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복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주님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 안에 거하며, 그로 말미암는 모든 것을 누리게 됩니다. (AC.1422)
※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것은 고대인들의 관습적 언어 형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시68:26)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시96:2)
19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단2:19-20)
사가랴와 시므온도 역시 ‘여호와를 찬송하라’입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눅1:64)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2:28)
여호와를 찬양, 찬송하는 것은, 그분을 노래하는 것이요, 그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요, 그분의 지혜와 권능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마음의 애정을 다해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주님의 축복 가운데 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AC.1422)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의 불행을, “and will curse him that curseth thee” signifies unhappiness to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him;
※ 주님은 저주는커녕, 누구를 미워하시지도, 벌하시거나 외면하시거나 죽이시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셔서 본성상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며, 그때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져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저주는 모든 복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복에 포함된 모든 것과 정반대되는 모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 그래서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 이것이 저주이며, 저주 아래 놓인 자들의 처지가 곧 모든 불행인 것입니다. (AC.14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참되고 선한 모든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in thee shall all the families of the ground be blessed” signifies that all things true and good are from the Lord.
※ ‘땅’, 곧 ‘지면’(ground)은 교회를 뜻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신앙을 가리키지요. (AC.566) 여기 ‘모든 족속’은 ‘가문들’(families)로, 모든 선과 진리를 가리킵니다. (AC.1424)
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279. 1절로 9절에서 다루는 주제는 첫 번째 고대교회로서, 홍수 후에 있었던 교회입니다.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first ancient church, which was after the flood (verses 1–9).
1280. 1절은 그 첫 번째 상태로서, 모두가 하나의 교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Concerning its first state, that all had one doctrine (verse 1);
※ ‘언어’는 교리, ‘땅’은 교회이며,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는 전반적으로, ‘말이 하나였더라’는 구체적으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양하게 퍼져나간 고대교회의 내적, 외적 예배의 모양과 형태는 저마다 다 달랐지만, 처음, 곧 아직까지는 하나의 교리였다는 말이며, 이것은 마치 신체 내 각 장기와 모든 지체가 저마다 그 역할과 기능은 다 다르지만 한가지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AC.1284)
2절은, 그 두 번째 상태, 곧 그 교리가 외면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its second state, that it began to decline (verse 2);
※ ‘동방으로 옮기다가’는 그들이 체어리티의 삶에서 점점 후퇴하였음을, ‘시날 평지를 만나’는 그들의 예배가 점점 불결해지고, 주님을 모독하게 되었음을 뜻하며, 이는 곧 그들이 처음 교리, 신학,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며 외면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AC.1290-1292)
3절, 세 번째 상태, 탐욕에서 나온 거짓들이 군림하기 시작했음을 its third, that the falsities of yearnings began to reign (verse 3);
※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는 자기들을 위해 변화시킨 거짓과 자기 사랑에서 온 악을 말하며, ‘벽돌로 돌을’은 거짓으로 진리를, ‘역청으로 진흙을’은 탐욕으로 선을 각각 대신하는 것입니다. ‘서로 말하되’는 이런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 네 번째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신성한 예배를 가지고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its fourth, that men began to exercise dominion by means of Divine worship (verse 4)
※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는 그들이 교리와 예배의 틀, 프레임을 짰음을, 여기 ‘성읍’은 교리, ‘탑’은 자아를 예배함입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는 그들의 지배권이 하늘에 속한 것들에까지 미치도록을, ‘우리 이름을 내고’는 그런 식으로 유명해져서 권세를 누리고자 함을,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이런 방법 말고는 자기들이 인정받을 길이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5절, 6절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교회의 상태가 변했습니다. and therefore the state of the church was changed (verses 5–6);
※ ‘여호와께서 내려오셨더라’는 그들 위에 내려질 심판을,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는 그들이 교리를 뒤집고 예배를 모독했기 때문임을, ‘사람들이 건설하는’은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그런 걸 고안하였음을,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는 그들 모두 신앙과 교리에 관한 하나의 진리를 가졌음을, ‘이같이 시작하였으니’는 그들이 지금 변화에 대한 추구를 시작했음을,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는 그들의 상태가 지금 안 바뀌면...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는 이상과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7절로 9절입니다. 그 결과, 신앙의 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so that none had the good of faith (verses 7–9).
※ 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는 그 결과, 심판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아, 그리고 잠깐, 여기 ‘우리’라는 복수 형태가 사용되는 이유는, 이것이 심판의 집행이고, 이 집행은 영들, 실제로는 악한 영들에 의해서 집행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는 어느 누구도 교리의 진리를 갖고 있지 않음을,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는 모두가 서로 상충되는 가운데 있음을, 8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는 그들은 인정받지 못했음을,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는 그런 교리는 받으시지 않았음을, 9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는 그런 예배, 곧 주님을 향한 예배에 자아 사랑이 저변에 깔려 있어 몹시 불결, 순수를 짓밟은 예배, 즉, ‘바벨’이라 하는 예배를,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는 이 고대교회의 상태, 곧 내적 예배가 소멸되기 시작한 상태를, 여기 ‘땅’은 교회입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는 내적 예배가 전멸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10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1281. 두 번째 고대교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교회는 에벨로 명명되며, 그 퍼져나감 및 상태, 그리고 결국엔 우상숭배로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The second ancient church is then treated of—which was named from Eber—and its derivation and state, which finally ended in idolatry (verses 10–26).
※ 10절입니다.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는 두 번째 고대교회의 퍼져나감을, ‘셈’은 일반적으로 내적 예배를, ‘백 세’는 시작 당시 이 교회의 상태를, ‘아르박삿’은 이 이름으로 명명된 나라였으며,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상징함을, ‘홍수 후 이 년’은 홍수 후 두 번째 교회임을 각각 상징합니다. (AC.1329)
가급적 반복되는 표현들은 빼고, 좀 특별한 표현들 위주로 풀이를 달겠습니다.
11절,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는 셈이라는 교회가 아르박삿 이후 존속한 기간과 상태를, ‘자녀를 낳았으며’는 교리적 것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AC.1336)
12절,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는 두 번째 상태의 시작 및,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상태 자체를, ‘셀라를 낳았고’는 그렇게 파생됨을 상징합니다. 셀라는 그 이름으로 명명된 나라이며, 기억-지식에 존재하는 것을 이 이름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AC.1339)
14절, ‘셀라는 삼십 세에’는 세 번째 상태의 시작을, ‘에벨을 낳았고’에서 ‘에벨’은 그 이름으로 부르던 나라였으며, 히브리 나라는 이 에벨을 아버지로 한 나라입니다. 히브리 나라는 일반적으로 이 두 번째 고대교회의 예배를 상징합니다. (AC.1342)
16절, ‘에벨은 삼십사 세에’는 이 교회의 네 번째 상태의 시작을, ‘벨렉을 낳았고’, 벨렉은 앞장 25절은 보면,
25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창10:25)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은 그의 아우 욕단과 함께 이 두 번째 고대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AC.1345)
벨렉과 욕단은 에벨이라는 교회의 두 예배, 곧 내적 예배인 벨렉과, 외적 예배인 욕단을 의미합니다. ‘땅’은 교회를 의미하므로, ‘땅’, 곧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18절, ‘벨렉은 삼십 세에’는 다섯 번째 상태의 시작을, ‘르우’는 훨씬 더 외적인 예배를 상징합니다. (AC.1347)
20절, ‘르우는 삼십이 세에’는 여섯 번째 상태의 시작을, ‘스룩’은 외적인 것들 가운데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AC.1349)
22절, ‘스룩은 삼십 세에’는 이 교회의 일곱 번째 상태의 시작을, ‘나홀’은, 예배가 외적인 것에 치중하다가 아예 우상숭배로 기울어진, 그런 예배를 말합니다. (AC.1351)
24절, ‘나홀은 이십구 세에’는 이 교회의 여덟 번째 상태이 시작을, ‘데라’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AC.1353)
26절입니다. ‘데라는 칠십 세에’는 아홉 번째 상태의 시작을, 그리고 이 상태가 끝입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부터는 실제 했던 인물들(persons)이었습니다. (AC.1355)
창1부터 여기 아브라함 전까지는 고대인들의 문체인 일종의 스토리텔링입니다. 긴 역사, 생생한 많은 일들을 무슨 재미난 역사서술식 이야기로 함축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며, 고대인들은 이런 문체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처음 열한 장은 글자 그대로인 겉 글자의 뜻으로 읽으면 여러 난센스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The Word)은 모두 네 가지 문체로 기록되었는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따로 시간을 내겠습니다.
27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1282. 세 번째 고대교회의 기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우상숭배로 시작, 표상(表象) 교회, 표현(representative) 교회가 되었습니다. The origin of a third ancient church is treated of, which from being idolatrous became representative (verses 27–32).
※ 27절,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는 우상숭배의 기원과 그 파생되어 나감, 그리고 거기서 표상교회가 나왔음을 가리킵니다. ‘데라’ 하면 우상숭배(idolatrous worship)를 상징합니다. (AC.1359)
※ 우상숭배는 크게 세 종류입니다. 자기를 사랑함, 세상을 사랑함, 그리고 감각을 사랑함, 곧 관능적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이 세 종류의 우상숭배를 데라의 세 아들, 아브라함, 나홀, 그리고 하란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AC.1357)
※ 표현(representative)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표현, 즉 그것의 속이 아닌, 겉만 취하는 것입니다. 가령, 꼭 선한 왕이 아닌, 아주 악한 왕이라 하더라도 왕은 주님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왕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왕의 기능과 역할을 취하여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무대 위 배우들이 실제 그 배우의 성품이 아닌, 극 중 인물을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AC.1361)
※ 유대교회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표현’된 것은 주님과 주님의 왕국, 곧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입니다. 또 이것들에 속하는 많은 것들, 곧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이 표현됩니다. (AC.1361)
※ 교회가 표현뿐인 교회가 된 이유는 내적 예배가 완전히 사라지고 우상숭배로 전락했을지라도 여전히 지상은 천국과, 즉 주님은 천국을 통하여 인간과 어떤 결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AC.1361)
28절,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는 내적 예배는 완전히 잊히고, 껍데기뿐인 우상숭배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란’은 내적 우상숭배를, ‘그 아비 데라’는 일반적으로 우상숭배를, ‘고향’은 그것이 발원한 기원을, ‘갈대아인의 우르’는 그 안에 거짓이 있는 외적 예배를 작각 상징합니다. (AC.1365)
29절,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는 우상숭배, 곧 우상을 섬기는 예배 가운데 보면, 악과 거짓 간 결혼들이 있는데 바로 그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악을, 아내들은 거짓을 상징합니다. (AC.1369)
※ 아브라함과 사라 등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위와 같은 속뜻이 좀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위에서 말한 ‘표현’의 의미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30절,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는 악과 거짓이었던 것이 더 이상 무슨 재생산이 없었음을 말합니다. (AC.1371)
31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는 우상숭배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 바야흐로 본격적인 표상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AC.1373)
32절,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더라’는 우상숭배, 곧 우상을 향한 예배를 그치고, 아브람을 통한 표상교회(a representative church)를 시작함을 의미합니다.
1130. 1절, 이 장 전체를 통해 다루는 내용은 고대교회와 그 전파, 퍼져나감입니다. The subject treated of throughout this whole chapter is the ancient church, and its propagation (verse 1).
2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1131. 2절,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야벳의 아들’입니다. They who had external worship corresponding to internal are the “sons of Japheth” (verse 2).
※ 예배의 실체는 애정을 가지고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경배, 예배하되 참된 애정이 없으면 그건 경배도, 예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체어리티 가운데 계십니다. 그래서 오직 체어리티의 사람들, 실제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심정을 알며, 그래야 주님을 참된 애정으로 경배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배의 실체가 외적 예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천진난만한 사람들입니다. ‘야벳’이 바로 이런 예배이며, 이런 예배 가운데 있는 이들이 바로 ‘야벳의 아들’입니다. (AC.1150)
3, 4절, 내적 예배로부터 더 먼 외적 예배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고멜의 아들, 야완의 아들’입니다. They who had worship more remote from internal are the “sons of Gomer and Javan” (verses 3–4).
※ 지상의 예배는 갈수록 더 감각적, 곧 세상적, 육체적, 지상의 것과 함께하려 하기 때문에, 영적 예배, 곧 내적 예배로부터 그만큼 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AC.1153:3)
5절, 여전히 더 먼, 훨씬 더 먼 예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여러 나라 백성’, 곧 ‘여러 나라의 섬들’입니다. And they who had worship still more remote are the “isles of the nations” (verse 5).
※ 말씀에서 ‘섬들’은 진정한 내적 예배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사람들, 겉으로는 무슨 예배라고 드리기는 하는데, 정말 무지하여 주님에 관해, 교회 신앙의 교리들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AC.1158:1)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1132. 6절, 지식 및 기억 속 지식들, 그리고 제의(祭儀, rituals)를 경작하여 내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 떼어낸 사람들, 이들이 바로 ‘함의 아들’입니다. They who cultivated knowledges, memory-knowledges, and rituals, and separated them from things internal, are the “sons of Ham” (verse 6).
※ 주님의 것을 열심히 연구, 심지어 말씀의 속뜻, 곧 아케이나에 밝고, 신앙 관련, 모르는 게 없으며, 어떤 질문이든지 막힘이나 망설임이 없고, 목회 경험 풍부, 무슨 영적 기적과 권능을 행하여도, 그의 삶 가운데 체어리티가 없고, 선행의 삶이 없는, 그리고 끝에 가서 엉뚱하게도 세상을 향하는 사람들, 이들은 결국 처음부터 주님보다는 자기를 위하여 그랬던 것이 틀림없으며, 이들이 바로 ‘함의 아들’입니다.
7절,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경작한, 곧 영적 지식을 추구한 사람들은 ‘구스의 아들’,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경작한, 곧 천적 지식을 추구한 사람들은 ‘라아마의 아들’입니다. They who cultivated the knowledges of spiritual things are the “sons of Cush”; and they who cultivated the knowledges of celestial things are the “sons of Raamah” (verse 7).
※ 여기 영적, 천적 지식을 추구하였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적 예배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입니다. 내적 예배 없이 이런 걸 추구하게 되면, 그 결과는 자기가 가진 거짓 원리들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한 애정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133. 8-9절, 외적 예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예배는 겉과 달리 그 속이 악과 거짓이며, 그런 예배를 ‘니므롯’이라 합니다. Those treated of who have external worship in which are interior evils and falsities, “Nimrod” being such worship (verses 8–9).
※ ‘니므롯’은 내적 예배를 외적 예배로 만드는, 변형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적 예배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예배, 곧 예배의 실체인 반면, 외적 예배는 이것이 없는, 그래서 사실은 예배가 아닌 것이며,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주님의 일을 거꾸로 뒤집는 사람들이며,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다’라는 말은, 이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다, 미혹케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는 말은, 얼마나 이런 미혹이 성행했으면 그만 하나의 속담이 될 정도였으며, 이런 니므롯의 종교는 사람 마음을 쉽게 훔쳐 포로로 만들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AC.1173)
10절, 그런 예배에 있는 악과 The evils in such worship (verse 10).
※ 겉은 거룩하나 속은 주님을 모독하는 그런 예배를 뜻합니다. 겉과 속은 결국 같이 갑니다. 속이 거룩하면 결국 겉도 거룩해지며, 속이 더러우면, 결국 겉도 더러워집니다. 이들은 점점 더러워지며, 이들의 예배는 점점 더 주님을 모독하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AC.1182)
11, 12절, 그런 예배 가운데 있는 거짓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The falsities in such worship (verses 11–12).
※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는 위와 같은 외적 예배 가운데 있던 자들이 이제 예배의 내용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는 이런 이성 활동, 이런 추론 활동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신앙의 교리들을 꾸며냈다는 말씀입니다. ‘앗수르’는 인간의 이성, 합리성을, ‘니느웨’는 인간 이성에서 나오는 거짓, ‘갈라’는 탐욕에서 나오는 거짓입니다. (AC.1184)
1134. 13-14절, 기억 속 지식들을 가지고 추론,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종류의 예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Concerning those who form for themselves new kinds of worship out of memory-knowledges by means of reasonings (verses 13–14);
※ 내적 예배, 즉 주님 말씀의 속뜻은 오직 교회에 속한 것만을 다룹니다. 그러므로 이런 속뜻 없이 드리는 외적 예배, 그리고 그걸 또 인간의 머리로 추론, 무슨 예배를 만든들 그건 그저 겉보기에 치중한 예배 의식 외에 더 뭐가 아닙니다. 속뜻이 없는 무슨 장중한 예배 절차 같은 것은 그저 껍데기일 뿐입니다. (AC.1195)
14절, 그리고 신앙 관련 지식들을 단순한 기억 속 지식들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and concerning those who make mere memory- knowledge of the knowledges of faith (verse 14).
※ ‘블레셋’은 신앙에 관하여 말은 많이 하고, 구원은 신앙 안에 있다 하면서 정작 신앙의 삶은 없는 사람들을 고대교회에서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말로는, ‘할례받지 않은 자’(삼상14:6)입니다.
15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1135. 15-18절, 내적 요소가 없는 외적 예배, 이게 바로 ‘가나안’인데요, 이 예배의 파생 Concerning external worship without internal, which is “Canaan,” and the derivations of this worship (verses 15–18);
※ ‘가나안’은 내용물이 하나도 없는, 겉모습만 있는 예배입니다. 이는 마치 주님 오시기 전과 후, 유대인들의 예배와 같습니다. 그들은 외적 예배를 대단히 엄격하게 준수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내용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여, 그들은 인간은 오직 육체로만 존재한다 믿었습니다. 영, 신앙, 주님, 영적, 천적 생명, 사후 삶 등의 본성에 대해 그들은 완전 무지했습니다. 사후 삶에 대해 무지하고, 그래서 그걸 부정하게 되면, 이후 그의 모든 예배는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가 되며, ‘가나안’은 바로 이런 예배를 말합니다. (AC.1200)
19-20절, 및 그 확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and its extension (verses 19–20).
21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1136. 21절, 내적 예배, 바로 ‘셈’인데요, 이 예배와, 심지어 두 번째 고대교회에까지 미친 그의 확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Concerning internal worship, which is “Shem,” and its extension even to the second ancient church (verse 21).
※ ‘에벨’은 두 번째 고대교회입니다. 이 ‘에벨’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이 ‘에벨’에서 나왔습니다.
22-24절, 내적 예배와 그 파생, 즉 퍼져나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비롯되는데, 지혜, 지성, 기억 속 지식 및 지식 등으로 다양하게 퍼져나갔고, 이를 상징하여 ‘나라들’이라 하였습니다. Concerning internal worship and its derivations, which being from charity are derivations of wisdom, of intelligence, of memory-knowledge, and of knowledges, which are signified by the “nations” (verses 22–24).
※ 내적 예배를 통해서는 주님과 직접 교통하며, 그 결과, 천사들처럼 주님으로부터 모든 신령한 좋은 것을 받게 됩니다.
25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1137. 25절, 시리아에서 일어난 어떤 교회에 관한 내용으로, 이 교회는 에벨이 세웠고, 두 번째 고대교회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벨렉’이라는 내적 예배와, ‘욕단’이라는 외적 예배를 드렸습니다. Concerning a certain church which arose in Syria, instituted by Eber, which is to be called the second ancient church, the internal worship of which is “Peleg,” the external “Joktan” (verse 25).
26-29절, 이 예배의 제의들이 26절로 29절에 죽 나열된 나라 이름들입니다. Its rituals are the nations named in verses 26 to 29.
30절은 이 교회의 확장입니다. The extension of this church (verse 30).
31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1138. 31-32절, 고대교회에 각 나라의 타고난 천성을 따라 다른 종류의 예배들이 있었습니다. That there were different kinds of worship in the ancient church, in accordance with the genius of each nation (verses 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