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397.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는 말씀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과 분리되었음을 상징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놋 땅에 거주하더니’는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상징합니다.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에덴 동쪽’은 지적인 마음 근처입니다.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지요.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398. ‘여호와 앞을 떠나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과 분리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14절 설명(※ n. 387)을 참조하세요.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놋 땅에 거주하는 것’은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이라는 말의 상징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 ‘’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그리고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와 선을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에덴 동쪽’은 지적인 마음 근처입니다.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며, 또 합리적인 마음 근처입니다. 체어리티가 다스렸던 곳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에덴 동쪽’의 상징, 곧,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상징한다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보시면 분명합니다.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의지와 이해력으로 구성되는 마음이,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였습니다.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의지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이해력은 의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이것은 그들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력에 속한 신앙 간 아무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 의지는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이런 마음에서는 반대로 의지 대신 이해력이, 혹은 사랑 대신 신앙이 다스렸기 때문에, 그는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 하는 것입니다.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방금 보았던 것처럼, 신앙을 구별하셨기 때문에, ‘가인에게 표를 주셨기’ 때문에, 인류의 유익을 위해 신앙은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2021-06-04(D6)-매일예배(창4,16, AC.397-398),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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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PGAmdbHY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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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창4:15)

 

 

394. 이제 이것을 미리 아셨고, 정하셨기 때문에, 인류가 영원한 사망으로 소멸하지 않도록 여기 선언하십니다. ‘아무도 가인을 건드리면 안 된다!’ 이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합니다.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게 어떤 표를 주셨는데요, 이 표의 의미는, 주님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신앙을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보존되도록 지키시기 위해서지요. (비록 가인의 신앙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이런 사실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케이나이며,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결혼과 고자(鼓子, eunuch)에 관하여 하신 말씀 중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마19:12)

 

천국의 결혼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고자’라 합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 “eunuchs”;

 

그래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들은 천적 천사들을 닮았습니다. those so “born from the womb,” 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사람이 만든’ 고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비슷합니다. those “made of men,” 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스스로 된’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과 비슷한데, 체어리티보다 순종으로 행합니다. and those “made so by themselves,” 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심지어 분리된 신앙일지라도)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됨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징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는 것과, ‘일곱(7)’의 상징이 신성한 것임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숫자 ‘일곱’은 잘 알려진 대로 아주 거룩하게 여겨집니다. 육일간의 창조와 일곱 번째 날 때문인데요, 이 날이 바로 천인(天人, the celestial man)이며, 이 천인 안에 평화와 쉼, 그리고 안식이 있습니다.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그래서 이 숫자는 유대 교회의 예전에서 아주 자주 나오며, 이 숫자가 나오는 곳마다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아주 길든지 짧든지 둘 다 숫자 ‘7’로 구별하며, 아래 다니엘 본문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아주 장구한 시간 간격을 가리켜 ‘이레’라 하였습니다.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단9:24-25)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단9:24-25)

 

창세기 본문에서, 라반과 야곱은 칠 년의 기간을 ‘칠 일’이라 하였습니다.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창29:27-28)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창29:27-28)

 

같은 이유로, 어디서든 이 ‘7’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곳이면 모두 거룩, 혹은 신성불가침의 의미로 여겨집니다.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그래서 시편을 보면,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시119:164)

 

이사야에서,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사30:26)

 

여기 ‘’는 사랑을, ‘’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가리키는데, 사랑으로 있게 될 신앙입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이 일곱 번째 날, 곧 천인이 되기 전, 숫자 ‘6’으로 구별되듯, 그가 황폐해지는 기간, 곧 천적인 것이 전혀 남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그렇습니다.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유대인들의 여러 번 포로 생활과, 마지막 혹은 바벨론 유수, 곧 십 년씩 일곱 번, 칠십 년간 지속된 기간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또한 땅은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같은 내용이 다니엘서, 느부갓네살을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단4:16, 23, 32)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때의 황폐함에 관하여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계15:1, 6-8)

 

그 내용은 and that: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계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계5:1)

 

같은 이유로, 징벌의 가혹함과 더함을 숫자 ‘7’로 표현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모세의 책에서처럼 as in Moses:

 

18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레26:18, 21, 24, 28)

 

그리고 다윗의 책에서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시79:12)

 

신앙을 범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십니다. 가인의 신앙도 (나중에는) 예배가 될 것이라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396.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은, 주님은 (가인의) 신앙일지라도 보전될 수 있도록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의 상징과, 그리고 누군가에게 ‘표를 주사’의 상징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 ‘표를 주는’ 것은 구별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That “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 a 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그래서 에스겔에서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겔9:4)

 

여기 ‘이마에 표를 그리라’는 그들의 이마에 무슨 표나 선을 그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where by “marking out the 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그래서 계시록에서 말씀하시기를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계9:4)

 

여기서도 표 받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 계시록 다른 곳에서도 보면,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계13:16)라고 되어 있습니다. 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계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13:16)

 

유대 교회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는’ 것 역시 같은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의 책, 관련 내용을 보면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신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신11:13, 18)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더 높이 구별해야 함을 표현하였으며, 이렇게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면 그 상징하는 바가 아주 뚜렷해집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becomes manifest.

 

[3]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사66:18-19)

 

그리고 다윗의 책에서 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시86:16-17)

 

이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지금까지 살펴본 이유로, 앞으로는 가인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에게 무슨 눈에 보이는 표를 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말씀의 속뜻에는 글자의 뜻에 들어있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2021-06-03(D5)-매일예배(창4,15, AC.394-396), '칠(7, 일곱), 가인에게 표를 주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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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CjnudT-I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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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창4:15)

 

 

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심지어 그렇게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력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By “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은 주님은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신앙이 보존될 수 있게 하셨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393. 우리는 이 말씀들의 속뜻 설명을 계속하기에 앞서 먼저 어떻게 이 경우가 신앙과 연결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태고교회는 사랑의 신앙 말고는 그 어떤 신앙도 모르는, 그래서 신앙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을 통한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우리가 앞에서 지금까지 말해 온 천적 천사들 또한 그렇습니다.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그러나 인류는 이런 캐릭터로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앞으로 주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 신앙을 따로 무슨 교리화하리라는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대안이 제공되었는데요, 그것은 그들은 실제로 분리될 것이며, 그 후 인류는 신앙을 통해,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이웃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먼저 지식 [cognitio]이나 들음이 오고, 이걸 통해서 그 다음은 이웃 사랑,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에 의해 주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이 이웃 사랑은 신앙과 분리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신앙의 원칙을 형성합니다.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이제 그들이 전에 태고교회 때 가졌던 퍼셉션 대신, 그 자리를 양심이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이웃 사랑과 결합한 신앙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며, 이 양심은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으로 아는 게 아니라 그것이 참이라 하니 참인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홍수 후 교회들은 상당 부분 이런 특성들이었으며, 주의 강림 후 첫 교회들, 초대 교회들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영적 천사들과 천적 천사들이 서로 구분이 됩니다.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2021-06-02(D4)-매일예배(창4,15, AC.392-393), '창4,15 이해를 위한 사전 설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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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rAkqc2PX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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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창4:14)

 

 

385.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상징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는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상징합니다.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상징합니다.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386.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이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이라는 것은 ‘’의 상징을 보면 분명한데요, ‘’은 진실한 뜻으로는 교회, 혹은 교회에 속한 사람이며, 그래서 앞서 밝힌 대로, 교회가 천명하는 모든 것입니다. That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어떤 말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에 따라 필연적으로 달라지는데요, 그래서 심지어 잘못된 신앙, 예를 들면, 스키즘이나 이단 같은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라 합니다.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 “ground.

 

하지만 여기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을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Here however to be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387.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가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상징한다는 것은, ‘주의 낯’의 상징으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s of Jehovah.

 

주의 낯’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비입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이 자비에서 나와서 진행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그의 ‘’은 신앙의 선을 상징합니다. The “face of Jehovah,” 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 “faces.

 

 

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알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389.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가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뒤이어 나오는데요, That “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이런 경우 때문입니다. For the case is this.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서 이웃 사랑을 빼앗을 때, 그는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웃 사랑,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이웃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에는 괴리가 있으며, 괴리가 있는 곳에 사람은 자기 자신 혹은 본성으로 남게 됩니다.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것은 거짓되며, 무슨 마음을 먹든지 그것은 악합니다.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이것이 바로 사람을 죽이거나 남은 삶 가운데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까 봐 끝없이 두려워합니다. 아래 모세의 글에 기록된 것처럼 말입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레26:33, 36-37)

 

이사야에 In Isaiah:

 

16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사24:16-20)

 

예레미야에 In Jeremiah: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렘49:5)

 

이사야에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사30:16-17)

 

이들과 말씀 다른 구절들에서,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기를, ‘도망하다’,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다’ 하고 있습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 “fleeing,” and as in “fear of being slain.

 

그들은 모든 사람에 대해 겁을 먹는데요, 자신들을 지켜 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모두가 자기들의 이웃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서로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391. 사후(死後) 세계 악한 영들의 상태를 보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음이 아주 분명합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스스로에게서 모든 이웃 사랑을 빼앗아 온 사람들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이리저리 도망을 다닙니다.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그들이 어디, 가령, 어느 소사이어티들을 가든지 그 소사이어티들은 이들이 그저 다가오기만 할 뿐인데도 이들의 캐릭터를 즉시 지각합니다. 그런 것이 저 세계에 존재하는 퍼셉션이기 때문입니다.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그들은 이들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죽이려고까지 하는 적대감을 가지고 그들을 응징합니다.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악한 영들은 서로 응징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습니다.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만족감입니다.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런 것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원하든 자기한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거짓은 그 안에 거짓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으며, 악도 그 안에 악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이런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2021-06-01(D3)-매일예배(창4,14, AC.385-391),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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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q2N3_Mtf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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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는 그가 악 가운데 있었다는 막연한 어떤 고백을 상징합니다. 이 악은 내적 고통을 좀 겪으면서 유발된 것입니다. 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는 그로 인한 절망을 상징합니다.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384. 그래서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그러나 그 후 이웃 사랑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음은 나중에 라멕이 하는 말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19절하고, 23절, 24절입니다.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3-24)

 

2021-05-31(D2)-창세기(창4,13, AC.383-384),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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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e2oVF-6w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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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창4:12)

 

 

380. ‘밭을 갈다’는 이런 (이웃 사랑에서) 갈라져 나옴이나 이단 경작을 상징합니다. To “till the ground” 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는 위와 같은 노력은 열매가 없음을 상징합니다. 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signifies that it is barren.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381. ‘밭을 갈다’의 의미가 이런 갈라져 나옴이나 이단 경작임은 방금까지 말한 ‘’이 상징하는 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o “till the ground” mean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of which we have just now spoken;

 

효력을 주지 않다’가 그런 노력은 열매 없음을 상징함이 분명한 것은, 땅에 관한 언급을 보아도 그렇고, 위에서 말한 대로, 지금 보고 있는 이 사람들, 곧, 이웃 사랑 없는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들은) 신앙이 전혀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그렇고, 뿐만 아니라, 표현들 자체도 그렇습니다. and that its “not yielding its strength” denotes its barrenness, is evident both from what was said concerning ground, and from the words themselves, as well as from this consideration, that those who profess faith without charity, profess no faith, as was said above.

 

 

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 상징함이 분명한 것은, 말씀에서 ‘방황함’과 ‘피함’의 상징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andering” and “fleeing away” in the Word.

 

예레미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As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The prophets and priests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in blood; the things they cannot do they touch with garments, (애4:13-14)

 

여기서 ‘선지자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들’은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where “prophets” are those who teach, and “priests,” those who live accordingly;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하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to “wander blind in the streets”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2] 아모스에서 In Amos:

 

7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A part of the field was rained upon, and the part of the field whereupon it rained not withered; so two or three cities shall wander unto one city to drink waters, and shall not be satisfied, (암4:7-8)

 

여기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는 이웃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를 상징합니다; where by the “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는 이웃 사랑이 없는 신앙의 교리를 상징합니다. and by the “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또한 진리 추구를 가리킵니다. To “wander to drink the waters” 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3] 호세아에서 In Hosea: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Ephraim is smitten, their root is dried up, they shall bear no fruit; my God will cast them away, because they did not hearken unto him; and they shall be wanderers among the nations. (호9:16, 17)

 

여기 ‘에브라임’은 진리 혹은 신앙을 이해함입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Ephraim” 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 or faith,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

 

그 뿌리가 말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웃 사랑을 가리킵니다. the “root which was dried up” 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는 무엇이 진리요 선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wanderers among the nations” 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4]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8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Go ye up against Arabia, and devastate the sons of the east. Flee, wander ye exceedingly; the inhabitants of Hazor have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for a habitation. (렘49:28, 30)

 

게달’과 ‘동방 자손들’은 하늘의 부 혹은 사랑에 속한 것들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이런 것들이 황폐해질 때, ‘도망하라’, ‘멀리 가라’, 즉,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말을 듣는데, 이때 이들은 선한 일을 전혀 못 합니다.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 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which, when vastated, are said to “flee,” and “wander,” that is, to be “fugitives and wanderers,” 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하솔 주민’, 혹은 영적 부를 보유한 사람들, 이 영적 부는 신앙의 부인데, 이런 말을 듣습니다. ‘하솔 주민아 깊은 곳에 살라’, 즉, 그들은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Of the “inhabitants of Hazor,” 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 which are those of faith, it is said that they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that is, they perish.

 

[5] 이사야에서 In Isaiah: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All thy foremost ones wander together, they are bound before the bow, they have fled from far, (사22:3)

 

환상의 골짜기’, 혹은 신앙은 이웃 사랑 없이도 가능하다는 환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speaking of the “valley of vision,” 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이어지는 구절인 14절에서 그 이유, 그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을 보게 되는데요, 이웃 사랑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즉, 선과 진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 in a subsequent verse (Isa. 22:14), 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 “fugitive and a wanderer,” that is, 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22:14)

2021-05-30(D1)-창세기(창4,12, AC.380-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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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2v4nAz-8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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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이웃 사랑에서) 갈라져 나옴을 통해 (주님을) 피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그 입을 벌려’는 그 이단이 그것들을 가르쳤음을 상징합니다.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은 그것이 이웃 사랑에 폭력을 가해서, 그 불을 꺼버렸음을 상징합니다.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379. (이상의 표현들이) 이런 것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앞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선을 싫어한다는 의미임은 앞서 245번 글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and that to be “cursed” is to be averse to good, has been already shown (n. 245).

 

불법들, 혐오스러운 것들, 증오들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오직 아래, 곧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그래서 지옥에 속한 것들만 바라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For iniquities and abominations, or hatreds, are what avert man, so that he looks downward only, that is,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thus to those which are of hell.

 

이런 일은 이웃 사랑이 쫓겨나 그 불이 꺼질 때 일어납니다. 이때 주님과 사람 사이 유대가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인데요, 오직 이웃 사랑이나 사랑, 자비로만 우리는 주님과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 없는 신앙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런 건 신앙도 아니요, 그저 신앙과 관련된 무슨 지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며, 지옥의 패거리들끼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걸로 선한 사람들을 아주 교활하게 속일 수도, 자신들을 빛의 천사로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This takes place when charity is banished and extinguished, for then the bond which connects the Lord with man is severed, since only charity, or love and mercy, are what conjoin us with him, and never faith without charity, for this is no faith, being mere knowledge, such as the infernal crew themselves may possess, and by which they can craftily deceive the good, and feign themselves angels of light;

 

가장 사악한 설교자들이 종종 아주 경건한 척, 열정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말이지요. 입술보다 마음이 오히려 더 텅 비었는데도 말입니다. and as the most wicked preachers are sometimes wont to do, with a zeal like that of piety, although nothing is further from their hearts than that which proceeds from their lips.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 혹은 그런 신앙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믿을 정도로 그렇게 빈약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그냥 보기에도 아무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말을 하는데도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존경을 표하고, 그를 찬성하면서 생각하기를, ‘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사람이다.’ 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 알지요. 말만 그럴듯하게 한다는 걸 다 압니다. Can anyone be of judgment so weak as to believe that faith alone in the memory, or the thought thence derived, can be of any avail, when everybody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at no one esteems the words or assenting of another, no matter of what nature,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will or intention?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서로를 묶어주는 것은 바로 이것, 곧 진정한 의지입니다. It is this that makes them pleasing, and that conjoins one man with another.

 

사람의 의지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의 마음이 안 담긴 생각이나 말 말고 말입니다. The will is the real man, and not the thought or speech which he does not will.

 

사람은 의지로부터 그의 천성과 기질을 얻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A man acquires his nature and disposition from the will, because this affects him.

 

그러나 만일 누가 무엇이 선인가를 생각 중이라면, 신앙의 본질, 그것은 이웃 사랑인데요, 그것이 그 생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if anyone thinks what is good, the essence of faith, which is charity, is in the thought, because the will to do what is good is in it.

 

그러나 만일 그가 선한 것을 생각한다 말은 하면서도 정작 사악하게 산다면, 그는 오직 악한 것밖에는 의도할 수가 없고, 그런 이유로 거기에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But if he says that he thinks what is good, and yet lives wickedly, he cannot possibly will anything but what is evil, and there is therefore no faith.

2021-05-29(D7)-창세기(창4,11, AC.378-379),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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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T99-8xN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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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373. ‘네 아우의 핏소리’는 폭력이 이웃 사랑에게 행해졌음을 상징합니다.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피의 호소’는 유죄 고발입니다. ‘’은 종파 분립이나 이단을 상징합니다. the “crying of bloods” 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 “ground”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374. ‘핏소리’의 상징이 이웃 사랑에 행해진 폭력임이 분명한 것은, 말씀에 나오는 많은 본문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소리’는 어떤 것에 대한 고발을, ‘’는 어떤 종류의 죄, 특히 증오를 가리킵니다. That the “voice of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voice” 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 “blood” 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향하여 증오를 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그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as the Lord teaches: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m of old, thou shalt not kill,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rashly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the hell of fire, (마5:21-22)

 

이 말씀들은 증오의 등급을 의미합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

 

증오는 이웃 사랑과 반대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만일 손으로 안 되면, 영으로 죽입니다. 손으로 하는 외적 규제로만 제지됩니다. 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

 

이런 이유로, 모든 증오는 ‘’입니다. 예레미야에서처럼 Therefore all hatred is “blood,” as in Jeremiah:

 

33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34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Why makest thou thy way good to seek love? Even in thy skirts are found the bloods of the souls of the needy innocent ones. (렘2:33-34)

 

[2]’ 하면 증오인 것처럼, 모든 종류의 불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증오는 모든 불법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hatred is denoted by “blood,” 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

 

호세아에서처럼 As in Hosea:

 

2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Swearing falsely, and lying, and killing, and stealing, and committing adultery, they rob, and bloods, in bloods have they touched; therefore shall the land mourn, and everyone that dwelleth therein shall languish. (호4:2-3)

 

그리고 에스겔에서, 무자비함을 말씀하시면서 And in Ezekiel, speaking of unmercifulness:

 

2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3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6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9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Wilt thou judge the city of bloods, and make known to her all her abominations, a city that sheddeth bloods in the midst of it? Thou art become guilty through thy blood that thou hast shed. (겔22:2-4, 6, 9)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The land is full of the judgment of bloods, and the city is full of violence. (겔7:23)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에서 And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For the sins of the prophets of Jerusalem, and the iniquities of her priests, that have shed the blood of the righteous in the midst of her, they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with blood. (애4:13-14)

 

이사야에서 In Isaiah: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When the Lord sha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purged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with the spirit of judgment, and with the spirit of burning. (사4:4)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Your palms are defiled in blood, and your fingers in iniquity. (사59:3)

 

에스겔에서, ‘’라 하는, 예루살렘의 혐오스러운 것들을 말씀하시면서 In Ezekiel, speaking of the abominations of Jerusalem, which are called “bloods:

 

6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22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I passed by thee, and saw thee trampled in thine own bloods, and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yea,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겔16:6, 22)

 

[3]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증오 또한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 “blood” in the Revelation (16:3, 4).

 

3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계16:3, 4)

 

’는 영어로 ‘bloods’라 하여 복수로 언급되는데요, 모든 불공정하고 혐오스러운 일들이 증오로부터 솟구쳐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선하고 거룩한 일들이 사랑으로부터 그렇게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Bloods” 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

 

그래서 이웃을 향하여 증오를 느끼는 사람은 만일 그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이런 것이 이웃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며, 그것을 여기서 아주 적절하게 ‘핏소리’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 “voice of bloods.

 

 

375. ‘호소’에 관한 두 표현, ‘voice crying’과 ‘voice of a cry’는 말씀에 흔히 나오는 표현 형식인데요, 어떤 동요, 소란, 혼란, 또는 어떤 행복한 일의 경우 등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A “voice crying” and the “voice of a cry” are common forms of expression in the Word, and are applied to every case where there is any noise, tumult, or disturbance, and also on the occasion of any happy event (as in Exod. 32:17–18; Zeph. 1:9–10; Isa. 65:19; Jer. 48:3).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출32:17, 18)

 

9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습1:9, 10)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 (렘48:3)

 

본문에서는 고발을 가리킵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376. 이로부터 ‘피의 호소’는 유죄 고발을 상징한다 하는 것입니다.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crying of bloods” signifies the accusation of guilt;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유죄이기 때문입니다. for those who use violence are held guilty.

 

시편에서처럼 As in David: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Evil shall slay the wicked, and they that hate the righteous shall be guilty. (시34:21)

 

에스겔에서 In Ezekiel: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Thou city art become guilty by the blood which thou hast shed. (겔22:4)

 

 

377. 여기 ‘’이 종파 분립 또는 이단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 교리를 상징한다는 사실로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들을 자신의 일부로 하는 은 일종의 종파 분립입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사람 자체가 ‘’이요, 또한 ‘’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 안에서 수정(受精)되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안에서 수정되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됩니다. 선과 진리로 수정된 사람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악과 거짓으로 수정된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어떤 특별한 교리나 이단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일컬어지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이라는 용어는 종종 사람의 종파 분립이나 이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됩니다.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2021-05-28(D6)-창세기(창4,10, AC.373-377), '핏소리, 땅, 호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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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LeL3Dyd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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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이웃 사랑, 혹은 ‘아우 아벨’에 관하여 그들에게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어떤 영적 지각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신앙이 이웃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기거나 이웃 사랑에게 순종하는 걸 내켜 하지 않아, 그 결과, 이웃 사랑과 관련된 모든 걸 거부했음을 상징합니다.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그들의 교리는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371. 태고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라는 표현을 이용해서 퍼셉션을 상징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영적 지각 능력 주셨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主)가 되는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주님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그러나 사랑이 아직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은 남아 있었습니다.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태고 교회에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홍수 후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이웃 사랑이 신앙을 통해서 주어졌고,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데, 방식이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마치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양심이라는 게, 계시로 알게 하신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말씀이 말씀하시거나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언급할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372.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 유대 교회의 ‘문지기’나 ‘수위’(문지방을 지키는 자)처럼 섬기는 걸 상징합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신앙은 이웃 사랑의 ‘지키는 자’입니다. 신앙은 원래 그래야 하니까요. 그런데 ‘가인’이라고 하는 교리의 원리들, 곧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자 하는 원리들을 따랐습니다. 7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아래 인용은 '양심'에 대한 글입니다. 아직 번역을 곁들이지 못했습니다. 완성되면 곁들이겠습니다.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9. Conscience

 

133. In a true conscience is man’s spiritual life itself, for there his faith is conjoined to charity.

 

On which account to act from conscience is to them to act from their spiritual life; and to act against conscience is to them to act contrary to that life of theirs.

 

Hence it is that they are in the tranquility of peace, and in internal happiness, when they act according to conscience, and in intranquility and pain, when they act against it.

 

This pain is what is called remorse of conscience.

 

 

134. Man has a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a conscience of what is just.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is the conscience of the internal man, and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is the conscience of the external man.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consists in acting according to the precepts of faith from internal affection; but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consists in acting according to civil and moral laws from external affection.

 

They who have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have also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but they who have only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are in a faculty of receiving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they also do receive it when they are instructed.

 

 

135. Conscience, with those who are in charity toward the neighbor, is the conscience of truth, because it is formed by the faith of truth; but with those who are in love to the Lord, it is the conscience of good, because it is formed by the love of truth.

 

The conscience of these is a superior conscience, and is called the perception of truth from good.

 

They who have the conscience of truth, are of the Lord’s spiritual kingdom; but they who have the superior conscience, which is called perception, are of the Lord’s celestial kingdom.

 

2021-05-27(D5)-창세기(창4,9, AC.370-372),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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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tYn0tMfs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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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366.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시간의 경과를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가인’은 앞서 기술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이웃 사랑, 곧 신앙의 아우를 각각 상징하며, 그래서 여기서 그는 두 번 ‘아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을 상징합니다.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렸음을 상징합니다.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367.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것과, ‘’이 교리에 속한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이들 아케이나 확증을 위해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속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이 형제지간(兄弟之間)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장자권 및 그로 말미암은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창38:28-30),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창48:13-14)로도 표현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신앙과 이웃 사랑은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신앙을 일컬어 ‘남자’라 하였고, 이 장 1절에 나오는 ‘가인’을 가리켰지요, 이웃 사랑을 일컬어 ‘아우’라 불렀습니다. 사19:2, 렘13:14 및 다른 데서들도 말이지요.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신앙과 이웃 사랑 간 결합을 ‘형제의 계약’(암1:9)이라 합니다.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호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이웃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창27:40)

 

또는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한다는 말을 아주 자주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이웃 사랑으로 모두가 형제로 불렸습니다.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셨습니다.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이웃 사랑은 없는 사람들,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6)

 

 

368. ‘’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이웃 사랑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나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렘17:3)

 

이 구절에서, ‘’은 교리를,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富),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렘18:14)

 

신앙의 교리의 결핍 시,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겔17:5)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가 있는 ‘’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같은 본문에서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겔17:24)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욜1:10-12)

 

여기 ‘’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시편에서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시96:12)

 

여기서, ‘’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의 지식들 얘기인 것입니다.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렘12:4)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도,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함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면 속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사55:12)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마24:40; 눅17:36)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은 신앙의 교리, 곧 참과 거짓 둘 다를 의미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이라 합니다.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369. 이상으로부터, 그리고 다음 사실들이 이어집니다. 즉,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신앙과 이웃 사랑이 둘 다 신앙의 교리로부터 왔으면서도,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하는 신앙은 이웃 사랑을 무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그래서 결국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린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오늘날의 경우를 보면, 이웃 사랑의 행위는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으로 그들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하기를,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2021-05-26(D4)-창세기(창4,8,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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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dZzsgRVmTs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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