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6(D1)-주일예배(2516, 눅14,15-24),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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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SMx16Q-jKo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15-24)

 

 

만찬에서의 떡은 사랑의 선으로서 주님을 뜻하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로서 주님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10149)

 

 

※ 오늘 본문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23절 말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교회들, 특히 본당이 큼지막하게 있는 교회들마다 대형 세로 표어에 써서 특히 전도와 선교,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을, 그러나 여전히 그 속뜻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우리는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들 너무 바빠 남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만찬을 베풀려거든 가까운 사람을 부르지 말고, 대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를 먼저 부르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 속뜻이 숨겨져 있는데요, 먼저 15절로 17절부터 보겠습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잔치를 베푸는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고요. 교회와 천국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와 선을 먹고 마셔야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과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요,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밭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글 성경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round’로 되어 있습니다. ground는 밭으로도, ‘’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교회라는 밭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ground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을 뜻하며, 그래서 밭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높은 것은 천국에 속한 것이고, 낮은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뜻,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것만을 좇는,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그는 잔치에 갈 수 없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소의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의 겨리가 뭘까요? 겨리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들인데, 예를 들면 쟁기나 멍에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는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욕망을 뜻합니다. 욕망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욕망은 사람을 가두고 속박하는 감옥이며 멍에입니다. 한편, 주님이 지워주시는 진리의 멍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에 매인 사람을 구원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소의 멍에를 산 사람이나 앞에서 땅을 산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이지요. 즉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 물론 밭을 샀기 때문에 보러 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는 일이 무조건 악한 일은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굳이 이 큰 잔치에 특별히 초대받은 날에 하고자 하는 걸로 보아, 그리고 미리 선 초청을 한 상태로 일정 조정할 여유가 이미 충분히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러는 것은 이들은 그냥 가기가 싫었던 것이며, 이 큰 잔치를 베푼 주인과 평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했나요? 장가를 가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는 것은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 즐거움하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 역시 거 참 이유치고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의 욕망에 빠져 삽니다. 그것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홍수는 아담교회(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인 노아교회(고대교회)가 세워질 때의 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아담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화를 냈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 또는 구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몸 불편한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선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요,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행해야 하고, 진리 또한 그 바탕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이들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이 종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앞 절에서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더니, 여기서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길과 산울타리 가’, 곧 길에서 만난 자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을 올바르게 행할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고,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 거짓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는 거짓과 맞서 싸우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한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절대로 진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속뜻은 이렇습니다.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은 마치 길에 나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극히 적고, 교세 또한 빈약합니다. 누구나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교회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주님께서 이 교회를 급하게 부흥시키실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 새 교회인들이 ‘주님, 불과 몇 평도 안 되는 이 교회에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습니까...’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급하게 사람들을 모아 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데리고 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24절에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전에 청하였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인데, 특별히 그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르며, 저들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이 따로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외적인 것, 곧 겉에 관한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내적인 것, 곧 속에 관한 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일에는 시력이 2.0, 3.0, 4.0에 가까웠으나 천국의 일에는 아주 깜깜, 장님이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는 그들을 땅을 산 사람, 소의 겨리를 장만한 사람, 장가를 간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를 헤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국의 진리와 선으로 먹이고 입히시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기꺼이 항상 응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이 베푸신 밥상과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된 말씀이 계시록 3장 15절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의 상태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믿고, 인애,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눈길 한번 주는 수준입니다. 우리 새 교회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아는데 행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매 순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그간 경험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집요한, 매 순간의 시험들을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매일 같이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아멘

 

원본

2021-03-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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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D1)-주일예배(2515, 눅14,7-14),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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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J4ABNVwJLA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눅14:7-14)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 또 그런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를 일에 돌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고 또한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된 기독교 440)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어떤 집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초대를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절로 9절의 말씀입니다.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의 속뜻은 선과 결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속뜻, 곧 영적인 의미로 남녀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신앙과 신앙에 따른 삶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서 혼인 잔치가 열리는 곳은 어디일까요? 첫 번째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인애(仁愛), 이웃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직장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직장에서 맡은 일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체어리티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거나 병든 사람을 보살피는 것, 교회와 자선단체에 큰돈을 기부하는 것도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 교리에 의하면 그것은 체어리티의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이웃을 열심히 구제하면서도 직업과 관련된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매일 같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께서는 항상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도록 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혼인 잔치 집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를테면 어디서나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궂은일, 힘든 일, 표 안 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편한 일, 돋보이는 일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일 자체에는 뜻이 없고, 오직 대우만 바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늘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콧대만 높은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며, 그러다 보면 중요한 일에서 제외되고 계속 사소한 일만 합니다. 집주인에 의해 끝자리로 보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말씀에는 청한 사람에 의해 결국 끝자리로 보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 스스로 기회를 계속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다음 10절,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일을 통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선으로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신 이유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디 앉았는지 무슨 음식을 먹는지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 앉아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나 직장에서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면 됩니다. 궂은일이나 단순한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것이 끝자리에 앉아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담임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에 지하실 식당에 습기가 많아 의자에 온통 곰팡이가 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우 한 분이 평일에 교회에 오셔서 집사람과 함께 그것을 닦았던 일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곰팡이 입자들이 많이 날아다녔을 것입니다. 또 곰팡이 제거액 때문에 약품 냄새도 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의자들을 모두 닦고 깨끗이 말렸습니다. 나중에 제습기를 비치해서 곰팡이가 모두 사라졌지만, 그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저도 비슷한 일이 하나 생각나 나눕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제게 맡겨진 여러 사역 중 하나가 미디어여서 그날도, 그날은 평일이었는데, 오전에 이쪽 주일학교 교육관 건물, 마침 3층에 있던 때였습니다. 무심코 창밖을 보니 오전이었는데, 어느 할머니께서 호미를 하나 들고 오시더니 도로변 화단에 들어가 흙을 깊이 긁어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시력도 좀 그렇고, 거리도 좀 되어 뉘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제법 긴 그 화단을 꾸역꾸역 다 마치 소 쟁기질하듯 그렇게 뒤엎으시고는 조용히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교회 마당에 인적도 거의 없어 아마도 그걸 본 사람은 제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봄이 시작되어 겨우내 얼어 단단해졌던 화단 흙을 그렇게 부드럽게 하신 건데, 저는 보는 내내 마음이 참 좋아 마침 들고 있던 캠코더로 그걸 조금 담아놓았습니다. 아마 하늘의 하나님도 지상을 두루 감찰하실 때, 마음이 그러시겠다 싶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 미디어실 자료를 찾아보면 아마 그 영상이 어디 있을 겁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스스로 끝자리에 앉는 것은 어쩌면 그런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대가 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낮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맡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어느 날 오셔서 벗이여 올라와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그는 모든 사람 앞에 영광된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때가 되면 높이 들어 쓰십니다. 그래서 본문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이웃을 초대해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 때는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점심이나 저녁을 베푸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벗이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은 누굴까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이 곧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절)

 

또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친구와 형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할 만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그들의 말투나 행동, 그리고 물질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친구나 형제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과 사귀는 것은 다릅니다. 속뜻으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며, 그럼에도 진리를 알기 원하는 진실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 그들에게 먼저 사랑을 베풀고, 그들이 원하는 진리를 가르쳐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과 맹인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베푸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그동안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들과 새 교회 교리에 대해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친절하게 대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진리를 배우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편견을 버려야 하는데 그분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만났던 분들, 즉 진리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논쟁을 걸어왔던 분들이 사실은 가난한 자요 몸이 불편한 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 위 사례는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 사례이지만, 제게도 남의 얘기가 아닌 듯하여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상대가 진리를 원해야 하고, 또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상을 바라지 않고, 맹인과 저는 자에게 인애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할 때 복이 있다 하시고, 의인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이란 세상 살 때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후에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습니다. 그 상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영적 총명함, 그리고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와 총명함에서 나오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그 지혜에서 비롯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는 세상 살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 그 어떤 재물이나 명예 따위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스스로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때가 되면 주님께서 높이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의인의 부활 시에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거 없는 자부심이나 교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귀어도 힘 있는 사람, 아는 게 많은 사람, 부유한 사람하고만 사귀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도와줄 테니 그 모든 것을 이겨내라 하십니다. 교만함과 보상을 바라는 마음, 육신의 정욕과 복수심이 없어지려면 죽을 것 같은 영혼의 고통과 십자가 시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험 가운데서 우리의 자아가 마치 죽은 자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의인의 부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교만한 마음,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온갖 정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주님께서 함께하셔야만 합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를 택해 앉으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은혜가 서울 새 교회와 한결같은 교회의 모든 성도,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눅6:35)

 

아멘

 

 

원본

2021-02-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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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2(D1)-주일예배(2514, 눅14,1-6),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pdf
0.41MB
2023-11-12(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https://youtu.be/-s9KrXJTXEo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14:1-6)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表象)이 끝났을 때, 안식일은 신성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그러므로 일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 구원과 영생에 대해 묵상하는 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오늘부터 누가복음 14장을 들어갑니다. 원래 11월 첫 주인 지난주부터였는데 지난주는 저의 장인, 장모 이장(移葬) 날짜가 갑자기 주일로 앞당겨 잡히는 바람에 주일예배를 이장 예배로 대신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장 예배는 개장(開葬), 화장(火葬) 및 납골(納骨), 이렇게 세 번의 예배로 드렸는데, 모두 교회 유튜브와 블로그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OVID-19이 지속되던 시절, 코로나가 가져온 많은 변화 중 가장 두드러졌던 한 가지는 바로 많은 일들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요,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인터넷으로, 사람들끼리의 모임도 인터넷 공간에서 말이지요. 심지어 예배도 각자의 집에서 인터넷으로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었지요. 세월이 그렇다 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비대면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우려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가장 작은 천국이나 교회는 개인의 마음속에 있다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꼭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시죠? 그러나 ‘천국의 비밀’ 3147번 글의 10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 예배 의식에 묶어두시는 이유는 그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배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 내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예배 의식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주님 친히 침례 요한에게 받으셨던 침례 의식이라든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손수 포도주를 따라 주시고,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라 하신 성찬 의식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외적 예배를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하십니다. 주님은 또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하셨는데요, 여기서 ‘두세 사람’은 사람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란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곳, 즉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예배를 드릴 때, 영적으로 더 많은 성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선과 진리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면 직접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십니다. 본문 1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자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라 하셨는데요, 외식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행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고,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 위선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중 많은 분이 진실한 삶,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여기서는 그러나 그 가운데 그렇지 못한 분들, 위선의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 교회인들의 위선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말하면서 정작 행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바로 그런 새 교회인들을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차원의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위선 중에서도 아주 큰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교회 사람들의 위선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밤, 아내의 부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한 봉지 버리러 날이 꽤 춥지만 내려갔습니다. 우리 208동은 가장 산 쪽이라 특히나 더 바람이 불고 춥습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여는데 세상에! 그 안에 커다랗고 하얀 비닐봉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꺼내는데 잘 들리질 않아요. 봤더니 아이고, 그 안에 종류별로 담아 묶은 작은 여러 봉지가 예닐곱 개 정도 들어있어 무거워서 그랬던 거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툭 던져버리고 가면 어쩌라고... 어찌어찌 쏟아 큰 비닐은 꺼내 저쪽 비닐들만 넣는 통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 쏟아진 작은 비닐들은... 아... 어찌해야 하나, 이미 음식물에서 흘러나온 액체들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하나 뒤적이며 그 짜맨 걸 풀어 비닐들만 따로 버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옷도 가볍게 입고 나와 벌써 굉장히 춥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러다가 에이, 뭐 나중에 저쪽 검사 과정에서 걸러지겠지 하고는 내가 들고 간 것만 한쪽에 쏟아버리고는 돌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찝찝합니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양심의 소리! 그래도 애써 무시하고 그냥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런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음, 이런 게 한두 번 반복되다가 그만 딱딱해지고 익숙해질 텐데... 큰일났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제 일상이 이렇게 큰 구멍이 쑹쑹 나고 있어서인지 제 삶에 능력이 사라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이렇게 비겁한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이니 아르카나니 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저는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아니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도 더 비겁하고 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주님이 위선자의 마음속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떡을 잡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위선자에게 선한 애정을 심어주시고, 그 애정을 통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위선자와 함께 떡을 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떡은 선, 또는 선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는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그럼에도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위선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가 있었고, 그와 함께 떡을 드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위선자의 내면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시험에서 넘어져 주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데 문득 주님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지 지켜 보자.’라는 마음이 듭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엿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그런데 그때 주님 앞에 수종(水腫)병 걸린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수종병은 혈액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붓는 질병입니다. 속뜻으로는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질병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집에서 수종병 든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위선자에게 진리를 왜곡하는 버릇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 진리를 왜곡할까요? 진리를 이용해 거짓된 생각을 관철하려고 할 때이거나, 또는 자아로부터 오는 악한 욕망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입니다. 예를 들면, 대면 예배보다 비대면 예배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성도들끼리의 만남이나 예배 의식으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왜곡,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릇된 지식이나 신념들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그 지식이나 신념에 맞지 않는 진리는 버리고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진리를 왜곡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낡은 지식을 가지고는 새로운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왜곡하는 병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결국 진리 앞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넘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행동은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결국 위선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여기서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누굴까요? 그들 역시 위선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인데, 이를테면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따라 진리 앞에 굴복하는지, 굴복하지 않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그동안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없습니다. 그가 진리이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십계명에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되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은 일하고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내적 싸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7일째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거듭난 다음의 상태, 즉 내적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내적 싸움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때에는 말로는 주님을 의지한다 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신앙의 진리라든가 선한 애정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거듭나기 전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올 때, 마치 빛이 매질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처럼 굴절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선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 능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영들이 아직 거듭나기 전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들의 순수하지 않은 진리와 선으로는 지옥을 압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다음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지옥이 감히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다음에는 싸움이 없고 항상 평화롭습니다.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 물으시자 본문에는 그들이 아주 잠잠했다고 말합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그들이 계속해서 평화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평화는 속뜻으로는 순진함(이노센스, innocence)에서 오는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면 순진함은 뭘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잠잠했다는 것은 그 위선자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순진하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수종병 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5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이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아들이라 하지 않고 나귀라고 했고요, 우물이라 하지 않고 구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서 나귀는 겉 사람의 진리를 뜻하고, 소는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겉 사람의 진리는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겉 사람의 선은 그러한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선한 애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나귀와 소가 구덩이에 빠졌다 했습니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진리와 선이 왜곡되거나 더럽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이 자아의 욕망에 빠져있을 때는 진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진리에 반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진리를 더럽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은 왜곡되거나 더럽혀진 진리와 선을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일을 안식일에 하시는 것은 안식일은 완전한 진리와 선을 통해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완전히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자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안식일은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님의 진리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믿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믿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자아와 세상의 유혹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시험에서 넘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들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그렇게 자주 넘어지고 실패가 반복될 때, 그는 점점 위선자가 됩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안식일에 찾아가신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어쩌면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왕래하는 위선적인 새 교회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인들은 누구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여러모로 서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바리새인의 위선이 영적인 수종병에서 온다 진단을 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시려고 합니다. 영적 수종병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진리를 왜곡하는 병입니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밀어내며, 또 어떤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고치면서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병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순한 욕망들을 버리고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안식일의 주인인 나를 믿느냐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네, 주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 진정성이 담길 때, 주님은 우리의 영적 수종병을 고쳐 주시고요, 나아가서 위선의 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면서 나는 어느 때 주님을 믿지 않는지, 어느 때 주님 앞에 꼿꼿이 머리를 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병을 아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수종병과 위선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겔20:12)

 

아멘

 

 

원본

2021-02-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3-11-05(D1)-주일예배(2513, 마7,24-27), '납골(納骨) 예배'.pdf
0.31MB

 

https://youtu.be/fj86WPkVc_E

 

시작

 

故 권성조와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마지막 세 번째 예배인 납골(納骨)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235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1절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원에 살겠네

 

2절

앞서간 우리의 친구들

광명한 그 집에 올라가

거룩한 주님의 보좌 앞

찬미로 영원히 즐기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찬미로 영원히 즐기네

 

 

설교

 

이곳은 이제 두 분을 새롭게 모실 새로운 곳입니다. 저쪽 포천 황동묘원 때와는 달리 이곳은 이제 언제든지 자유롭게 오실 수 있는 곳이어서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 그래도 수도권에 사시며, 가까이들 사시니까요. 두 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사랑, 함께함이 생각나실 때마다 오시기 바랍니다. 오셔서 바쁘고 복잡한 세상일에서 잠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영원과 사후세계를 생각하시는 시간들 가지시기를 권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러나 사후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곳은 천국이며, 그래서 지상에 남기고 가는 이 유골은 지상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자손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이미 천국에 들어가신 분들에게는 전혀라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조상이 후손에게 무슨 복을 주고 그러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이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그래서 이런 말씀이 살짝 좀 불편하시고 이상하시더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즉 세상 떠나신 고인들의 경우, 기억하는 것은 우리이지, 그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아니 못하신다 말씀드리는 이유는, 사람이 사후 육체를 떠나 천국에 들어간다는 건 뭐랄까... 일종의 초기화, 리셋(reset) 된다고나 할까요? 생전의 모든 자연적 기억과 경험들이 모두 휴면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다시 꺼내어져 재생되지만 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영뿐이며, 이 영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저 세상 살면서 학습을 통해 지식으로 습득하기만 한 걸로는, 그래서 그걸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지역 사회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 및 나라와 민족, 인류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지는 않았던, 즉 그걸 통해 창조주가 원하셨던 무슨 쓰임새의 삶을 살지는 않았던 사람들, 그 지식과 경험, 환경 가지고 그저 자기만 사랑하고, 세상 사랑하는 데만 전념했던 사람들은, 사후에는 자기가 그동안 생전에 그렇게 애써 익혔던, 그리고 성취했던 모든 지식과 경험이 자기 것, 곧 영이 되어 있지를 않아, 미안하지만 자신과 분리가 되어 모두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는 가지고 가실 수 없는 상태가 되며, 그래서 당연히 이런 사람의 영은 함량 미달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실상은 들여보내 줘도 본인이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 건데요, 마치 글로벌 초우량 기업에 낙하산으로 입사한들 실제 본인의 업무역량이 안 받쳐주면 못 견디고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 놀라운 얘기이지요? 보통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 천국 갈 수 있다 가르치고 그렇게 배우기 때문인데요, 물론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절반만 맞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러면서 또한 ‘듣고 행하는’ 삶이 뒤따라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사람의 영, 천국에 들어가는 영은 ‘듣고 행할’ 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건, 그냥 글자 형태로만 있으면 그냥 ‘진리’일 뿐이지만, 그 진리가 실천되는 순간, ‘’이 됩니다.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 때, 그 사람의 영은 천국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나며, 천국은 이런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이런 걸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7:24-27)

 

이 말씀 자체가 한 편의 설교, 정수(精髓)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사람의 임종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사람이 천국 또는 지옥에 가는 그 과정과 절차는 어떤지, 더 나아가 천국은 어떤 곳이며, 지옥은 어떤 곳인지 등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려 드릴 수 있으나 오늘은 시간 관계상 어렵고, 다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리고 두 분의 이장 관련 예배이니만큼 절제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천국은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 영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천국 가기를 원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영 준비’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자신의 영을 준비한다’는 것은, 일단 천국은 영의 나라요, 육신은 이 세상에 벗어버리고 가기 때문이고요, 영이란 ‘듣고 행한’ 걸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자신의 영을 천국을 위해 잘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며, 주님은 사랑이셔서 그 기간을 넉넉히, 아주 충분히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입니다. 사람의 영은 천국에서 가장 젊을 때의 상태로 지내게 되는데요, 수백, 수천 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젊어진다고 합니다. 그 모습 또한 가히 지상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는데요, 두 분은 각각 91세, 79세의 노인으로 생을 마감하셨으나 지금 계신 곳에서는 눈이 부시다 못해 도저히 뜨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우신 모습들이실 줄 믿습니다. 두 분 생전에 옷처럼 입고 지내신 육신은 지금 이렇게 뼛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모셔져 있지요. 즉 살아생전 건강에 신경 쓰시는 것도 좋지만, 너무, 잠시 후 벗어버리고 갈 육체에 너무 그러지 마시고, 더욱 중요한 게 무엇일지, 곧 자신의 영인데요, 이 영 준비에 가급적 올인하시라는 말씀입니다.

 

부디 남은 삶, 자신의 영, 자신의 속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그래서 나중에 천국에서 두 분, 영광 가운데 큰 기쁨으로 재회할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3절

우리를 구하신 주님도

거룩한 그 집에 계시니

우리도 이 세상 떠날 때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4절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두 분 고 권성조, 고 김정자의 이장에 참여, 두 분을 기억하며, 주신 세 번의 말씀 마음으로 받아 새 힘, 새 결심하고 떠나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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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D1)-주일예배(2512, 겔37,1-14), '화장(火葬)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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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dH-lYlZnds

 

시작

 

故 권성조와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두 번째 예배인 화장(火葬)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1절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믿음만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2절

찬란한 주의 빛 있으니

거기는 어두움 없도다

우리들 거기서 만날 때

기쁜 낯 서로가 대하리

 

후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설교

 

애석하게도 성경에는 오늘날의 이런 화장처럼 고인의 유골을 납골을 위해 불로 태워 빻아 가루로 만드는 예가 없습니다. 무엇을 태워 빻아 가루로 만드는 예를 굳이 찾자면 아래와 같은 경우인데요,

 

4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왕하23:4-6)

 

이처럼 우상과 제단, 그리고 우상숭배 때 사용된 모든 제기(祭器)라면 몰라도 사람의 유골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런 새로운 화장 및 납골 문화는 매장지가 부족한 오늘날 현실적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므로 굳이 무슨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 싶고, 그래서 이 시간엔 특별히 ‘’에 대하여 아래 에스겔 본문을 가지고 살피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7:1-14)

 

마른 뼈’(the dry bones) 본문으로 유명한 이 본문은 사실은 사람의 거듭남을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이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한평생 천국 생활에 합당하게 잘 준비되어 사후(死後), 천국에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실은 생전 그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상태여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이미 그 상태가 지옥인 사람이 가는 곳이고요.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곳들은 사실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입니다. 상태란 천국과 지옥 등 영계 전체와 이 자연계를 모두 다스리시는 만유의 대 주재이신 주님께 대한 상태를 말합니다. 한평생 살면서 그 주님을 얼마나 닮은 상태인가에 따라 사후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지요. 영계라는 곳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어지는 곳인데요, 그래서 주님을 닮은 사람, 주님과 비슷한 사람은 천국, 즉 천국 상태에 있게 되고, 주님을 안 닮은 사람, 주님과 비슷한 점이 없는 사람은 정반대인 지옥, 즉 지옥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 에스겔 본문에서 말하는 ‘생기’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이며, 14절,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에 나오는 ‘’과 같은 말입니다. 영어로는 같은 ‘spirit’인데 한글 번역을 이렇게 다르게 했네요. ‘’란 이 생명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 태어날 때, 바로 이 ‘’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렇게 태어나 누구는 일찍 하나님을 만나고, 누구는 한평생 하나님을 못 만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 곧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생명을 받아 위 본문의 뼈들처럼 마침내 ‘살아나는’ 것을 말하지요. 그것이 다른 말로는 ‘거듭남’(regeneration)이며, 이 상태가 바로 천국을 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상태인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가 모두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갈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치고 처음부터 지옥 가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한테서 비롯되는데요, 즉 모든 영혼의 근원은 주님이신데, 그래서 주님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부디 비록 뼈 상태로 출발은 하여도 하늘 아버지 되어 우리네 인생 끝까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동행하시며 보살피시는 주님을 붙드시고, 인생 마칠 때 영광의 하늘나라에 무사히 들어가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찬송

 

3절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

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이별의 눈물이 없겠네

 

4절

광명한 하늘에 계신 주

우리도 모시고 살겠네

성도들 즐거운 노래로

영광을 주 앞에 돌리리

 

후렴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아멘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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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D1)-주일예배(2511, 창50,25-26), '개장(開葬) 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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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JYaOyLF6ic

 

 

 

시작

 

우리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셨던 故 권성조와 어머니요 할머니셨던 故 김정자, 두 분의 이장(移葬) 관련, 그 첫 번째 시작 예배인 개장(開葬)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두 분의 자손들이 이렇게 모여 모실 곳을 새롭게 천묘(遷墓)코자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예를 갖추고자 하오니 이 예배를 도우시며, 또한 받으시고, 오늘 하루 모든 일정을 순적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8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1절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님 

성 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2절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보좌 앞에 

모든 성도 면류관을 벗어 드리네

천군 천사 모두 주께 굴복하니 

영원히 위에 계신 주로다

 

 

설교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50:25-26)

 

 

두 분의 생(生), 졸(卒) 및 그 열매를 짧게 말씀드리면, 고 권성조는 1923년 생, 2015년 졸, 만 91세를, 고 김정자는 1926년 생, 2005년 졸, 만 79세를 각각 향(享)하시는 동안, 슬하에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및 친, 외 모든 손주와, 손주사위, 며느리, 그리고 증손들 포함 총 26명을 남기셨습니다.

 

두 분의 평생, 고요하고 은은한, 온유하고 성실, 진실하셨던 사랑 덕분에 이렇게 그 자손 된 저희 모두 그 복을 누리며 사는 줄 믿고, 오늘 두 분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모시고자 모인 것입니다.

 

장인, 장모 되시는 두 분의 지난날 장례를 모두 집례했던 제가 이렇게 이제 이장까지 집례하면서 이장 관련해서는 성경에 무슨 예가 있나 찾아보니 그 첫 번째가 바로 오늘 본문, 창세기 그 유명한 요셉의 예였습니다.

 

다들 아시듯 요셉은 부유한 가나안 족장이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가문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첫째 아들로, 그러나 라헬이 둘째를 낳다 죽어, 어린 시절, 아버지의 특별한 편애를 받으며 자라다가, 다른 모든 배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아버지 모르게 애굽으로 팔려 갔던, 그리고 그곳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 졸지에 노예의 삶을 살게 되었던, 그리고 외모가 준수하고 용모가 아름다워 안주인의 유혹이 거듭되던 중 결국 그걸 거절하는 바람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혀야 했던, 그리고 그곳에서 왕의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한 일로 나중에 애굽 왕 바로의 꿈도 해석, 그 일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곧 시작되는 일곱 해 풍년과 이어질 일곱 해 흉년을 지혜롭게 대비, 애굽은 물론, 당시 근방 모든 나라를 살린 전천후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이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表象, representative)입니다. 표상이란, 역할 대행을 말합니다. 무대 위에 올라 맡은 역을 연기하는 배우들 같은 것이지요. 인류의 죄 문제, 정확히는 지옥의 광기와 그로 인한 피조 세계 전체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친히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하신 주님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그 요셉이 백십 세를 살고 숨을 거두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언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즉,

 

너희가 지금은 사정상 이렇게 타국살이를 하고 있으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너희를 다시 고국 고토(故土),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때 너희가 이곳을 나갈 때 반드시 나의 유골 또한 챙겨 그곳에 이장하도록 하라

 

고 말이지요.

 

이 가나안 땅과 시온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게 있어 주님의 나라(The Lord’s Kingdom), 천국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가나안 땅, 가나안 땅 했던 것이며, 조금 확장하면,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 전쟁도 그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은 단지 영적인 의미, 표상, 상징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바람에 시작된, 그리고 지난 2천 년 동안 주인 없는 땅에 들어와 살았던 중동 유목민 족속 팔레스타인 간 비극인 것이지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요셉의 이장은 기억된 바 되었다가 430년 후, 모세의 출애굽 때 시행되었고, 이후 광야 생활 40년을 비롯, 여호수아 가나안 정복기 말미에 비로소 요셉의 유골을 가나안 땅 세겜에 장사함으로써 이 대략 5백 년 걸린 유언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수24:32)

 

오늘 두 분의 이장은 이런 성경적 의미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스라엘과 달라 어떤 특정 장소가 천국을 상징하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두 분의 이장으로 모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분의 유골은 세상에 남기고 가신 유일한 흔적이기 때문이며, 이 흔적으로 우리는 두 분과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부모,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의 대행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과 돌봄 가운데 사실은 온 인류의 영적 아버지이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 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모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그대로 주님에 대한 태도로 이해하십니다. 물론 부모들 중에는 전혀 주님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에 한참 역량 미달이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 대한 건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자녀 된 도리만 다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주님을 성경 말씀으로 알지 못했던 우리의 조상들은 이를 ‘’(孝)로 표현했습니다. 부모는 그 영적 실상으로는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대할 때, 부모님의 모습에서 하늘의 하나님, 곧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의 인생은 크게 형통할 것입니다.

 

그 생생한 예가 여기 계신, 장녀 선자와 큰아들 내외이신 용진, 혜경 부부입니다. 여기 장녀 선자께서는 출가 전, 두 분 제과점과 가게로 바쁘시던 시절, 동생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건사, 집안일 일체를 돌보셨으며, 여기 형님, 형수님은 두 어른 살아생전 참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효성으로 어머님 땐 어머님을, 아버님 땐 아버님을, 그 모든 병수발과 대소변을, 그것도 집에서 직접 시중드셨고, 그걸 또 여기 있는 세 자녀 소현, 도윤, 그리고 막내 상윤이 생생하게 곁에서 보면서 자랐는데요, 그러니 그 복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른 자녀들과 그 자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어머님 김정자의 모습으로, 아버님 권성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그 모든 섬김을 받으셨으며, 그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복을 그 자손 천 대까지 베푸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시며 약속하시기를,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하셨는데요, 어떤 일을 할 때, 잔머리 굴리지 않고,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십계명을 비롯, 성경 말씀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고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정직하고 의롭기 때문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고로, ‘천 대’란 ‘very much’를 말하며,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할 땐 ‘forever’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이장 예배를 통해 오직 주님과의 결합, 그 연결 고리를 확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죽으나 나중에 반드시 가나안 땅에 묻혀 끝까지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려고 몸부림을 쳤던 요셉처럼 말입니다. 아멘

 

 

찬송

 

3절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빛난 영광 

모든 죄인 눈 어두워 볼 수 없도다

거룩하신 이가 주님밖에 없네 

온전히 전능하신 주로다

 

4절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천지 만물 모두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성 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광고

 

 

마침 기도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신 말씀대로 우리도 주님과 늘 연결되어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후 개장과 화장 및 납골에 이르기까지 애쓰시는 업체분들에게 빛을 비춰주시고, 순적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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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스베덴보리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에 한 분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게 됐는데,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여기 이런 경우, 즉 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고,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하는 경우는, 적어도 제 경험에 의하면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나마 읽어보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천 명 중 한 명꼴일까요? 거의 99.9%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거나, 읽으면서 자기가 아는 교리와 달라 속에서 불이 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괜히 속에서 화가 난다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천국 이야기를 하는데 왜 화가 날까요? 주님 식사 준비를 하면서 동생 마리아 때문에 힘들어 하던 마르다가 생각납니다. 하나 더 있다면, 이 책을 그저 새로운 지식 습득으로만 읽으시는 경우입니다. 위 여러 사례는 참 안타까운 경우들인데요, 만일 돌이키지 않으실 경우, 이런 분들의 사후, 어떤 운명이 이 분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저는 이 책을 읽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지난 일지를 보니, 5년 전인 2018년 10월에 저는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고, 충주봉쇄수도원 수도사 공부를 하면서 특히 성 프란체스코, 성 분도 요셉 라브르,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등 수많은 수도사들과, 이영환 목사의 40일 금식 훈련,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및 시흥영성수련원 공용복 선생의 핵심진리, 정원 목사의 저서들 등에 몰두하던 때였지요. 즉 천국과 지옥에 관한 수많은 견해와 체험, 간증 등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책을 접하면서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견해의 등장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난생처음 접하는 내용에, 처음엔 당혹해 하며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아, 맞다.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뭔가 뿌옇던 시야가 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확 맑아지는 그런 느낌, 백두산 천지가 구름과 안개로 안 보이다가 바람에 걷히더니 갑자기 확 드러날 때의 그 숨 막힐 듯한 위용과 장관처럼 말이지요!
 
저는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을 비롯, 특히 스베덴보리의 수년간의 역작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를 통해서 천국을 비롯, 그동안 석연찮던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들과 영적 이슈들이 거의 다 설명된다는 것이었는데요, 적어도 당시 제 수준과 역량에서는 말이지요,설명이 된다’는 게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기 전, 특별히 물리학 등 순수 과학에 끌렸던 제게 이런 접근은 의미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과거 천동설이 지동설로 갈아타던 과정처럼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던 어떤 현상이나 증거를 새로운 이론으로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비록 당시엔 당혹스럽고 힘들더라도 후자를 새로운 정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학문적으로도 옳다 저는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설명하실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이 저는 평소 좀  납득이 잘 안 되었었습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입장과 견해가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그 흔적이 교묘히 숨어있을 텐데, 추호도, 그리고 지난 5년간 저는 이 책 말고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번역을 해오고 있는데요, 그 10,837개나 되는 글 어디에서도 스베덴보리는 그 흔한 이단 사설들에서 볼 수 있는 더러운 사사로움 없이 오직 주님만 높이며, 또 주님이 허락하신 것만 밝히고 있는 걸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새로운 계시이며,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흔히들 인터넷 검색을 통한 다른 사람들의 글만 읽고는 스베덴보리는 이단이래 하면서 물러나시는데요, 그보다는 본인이 직접 스베덴보리를 읽고 판단하시기를 권합니다. 본인이 참으로 반듯하고 정직하다면 분명 그 영이 꿈틀하며 어떤 유의미한 반응을 할 것입니다. 주님의 빛, 천국 빛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것이지요.
 
끝으로, 저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이 새로운 계시를 통해 참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나아가 어떤 신(神, The Divine)이신지를 점점 또렷이 알아가고 있으며, 그래서 참된 평화 가운데 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천국에 주목할수록,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참으로 '말씀'(The Word)이란 무엇이며, 구원이란 무엇인가?  타종교 등 교회 밖의 사람들은? 타교단, 교리가 다른 사람들은? 등, 사람의 사후 전개될 양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자 그동안 잘 몰라서 붙들고 추구했던 것들로부터 물러나 보다 더 자유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고백은 다른 말로 하면, 어느 순간부터 저는 천국 관점, 곧 천사들의 관점에서 지상의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후 바울서신에 뿌리를 둔 현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의 많은 근본적인 오류에서 물러나되 마치 지상에서 발사된 로켓이 죽을힘을 다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 궤도 위에 안착하듯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남은 생애를 오직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Writings)을 번역,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 아래는 혹시 도움되실까 제가 읽었던 번역인 김은경 역을 공유합니다. 이 말고도 여러 번역이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그리고 가능하면 영역본으로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라틴 원본으로 읽으실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요. 저는 라틴을 몰라 못 읽고 있지만 말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영역본도 아래 공유합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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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29(D1)-주일예배(2510, 눅13,31-35),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삼일'.pdf
0.44MB
2023-10-29(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https://youtu.be/x_MKK8PXysU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3:31-35)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새 교회 이야기입니다.

 

새 교회(new church)는 특히 시험이 많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스베덴보리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에 한 분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게 됐는데,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 여기서 잠깐, 이런 경우, 즉 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나마 읽어보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천 명 중 한 명꼴일까요? 거의 99.99%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 하거나 읽으면서 자기가 아는 교리와 달라 속에서 불이 난다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괜히 속에서 화가 난다 하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지난 일지를 보니, 5년 전인 2018년 10월에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새 교회’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수도원 수도사 공부, 한밭제일교회 이영환 목사의 40일 금식 훈련,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및 공영복 선생의 핵심진리 등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지요. 즉 천국과 지옥에 관한 수많은 견해와 입장, 간증, 풀이 등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래서 책을 접하면서도 무슨 또 하나의 입장이 등장함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난생처음 접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아, 맞다. 바로 이것이다! 싶었습니다. 뭔가 뿌옇던 시야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밝아지는 그런 느낌, 백두산 천지가 구름과 안개로 안 보이다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드러날 때의 그 숨이 막힐 듯한 위용과 장관같이 말이지요! 저는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의 풀이를 가지고는 그동안 석연찮던 거의 모든 신학적 궁금점들이 거의 다, 적어도 제 수준에서는 말이지요, 설명이 된다는 것이었고, 둘째,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입장과 견해가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그 흔적이 교묘히 숨어있을 텐데도 추호도, 그리고 지난 5년간 저는 이 책 말고도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번역을 해오고 있는데요, 그 10,837개나 되는 글 어디에도 스베덴보리는 오직 주님만 높이며, 허락하신 것만 밝히고 있는 걸 볼 때, 이는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셋째는, 이 새로운 계시를 통해 저는 참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나아가 어떤 신(神, The Divine)이신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었으며,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바울 서신에 뿌리를 둔 현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의 입장에서 물러나되 마치 지상에서 발사된 로켓이 죽을힘을 다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 궤도 위에 안착하듯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남은 생애를 오직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번역,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 잠깐 제 얘기였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이순철 목사님 얘깁니다.

 

처음 세례를 받고 한동안은 아내와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말씀에 따라 생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시험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목회를 하게 되고, 교인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대개 말씀을 읽는 중에, 또는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진리의 영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각자 삶으로 돌아가 진리를 실천하게 되는데, 그러나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고요, 그래서 고쳐야 할 점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고쳐야 할 점이 뭔지는 아는데, 의지가 약해서 고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의 나라에 둬야 하는데,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결국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영적인 시험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시험을 통해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요, 믿음과 사랑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시험이 없으면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새 교회인들에게 특히 시험이 많은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거듭나지만, 주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과정과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을 대비해 볼 수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께 헤롯이 죽이려고 하니 이곳을 떠나시라고 말합니다. 헤롯은 주님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 분봉왕으로,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 헤롯은 이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유대교회의 거짓 교리가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는 영적으로 교회를 뜻하고, 왕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왜 그렇게 진리를 미워할까요? 그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 3장 20절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이렇게 말합니다. 악하고 거짓된 자들은 진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밝은 빛 아래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헤롯은 주님만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안에도 진리를 위협하는 헤롯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불순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입니다. 진리 때문에 욕망을 눌러야 할 때, 또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왔는데도 질병이나 시험이 그치지 않을 때, 그때 진리가 불편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새 교회 말고도 진실한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가 헤롯과 바리새인이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죽이려고 하는 때입니다. 바리새인의 그와 같은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주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이유는 헤롯으로 표상되는 거짓 진리나 지옥의 거짓 영들의 교활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짐승은 우리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내는데, 특히 여우나 뱀은 교활한 애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거짓 영들은 다양한 욕망과 거짓말로 신앙인들을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진리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 동안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은 한편으로는 주님의 인간성이 거룩해지는 과정을 나타내며, 또 한편으로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완전해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단계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귀신(demon)이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해 거짓으로 만들게 하는 영을 말합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악과 거짓이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온전한 거울 역할을 할 진실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자주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늘 하실 일은 귀신을 쫓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는 뭘까요? 주님에 의해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악을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에 걸려 있을 때는 몸이 마치 족쇄에 매여 있는 것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을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병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삼 일째, 즉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는 비로소 완전하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악과 거짓을 단계적으로 극복하셔야 했고, 사흘째 되는 날 지옥을 완전히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주님께서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신앙인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 언젠가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귀신에게 사로잡혀 꼼짝 못 하게 되고, 병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명예나 재물을 얻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총명을 앞세워 진리를 마음대로 왜곡,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들을 바벨론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안의 바벨론에 의해 진리가 변질, 파괴되는 모습을 말씀에는 유대교회가 선지자를 죽이고,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선지자는 진리를 뜻하고, 가장 높은 의미로는 주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하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은 진리를 파괴할 수 없고, 오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진리를 파괴하고 죽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욕심 때문에 거룩한 진리를 파괴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암탉이 새끼를 품듯 교회의 진리로 믿는 자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담교회(태고교회)를 통해 지켜주셨고요, 아담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노아교회(고대교회)를 통해 지켜주셨습니다. 노아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히브리교회와 유대교회(모세교회, 표상교회)를 통해 인류를 지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때마다 주님의 보호를 내팽개쳤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더럽히고 파괴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입니다. 돌은 본래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생각으로 조작, 손을 댄 거짓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35절에서,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교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작은 교회가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황폐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집이 황폐하다는 것은 교회, 또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파괴해 버렸으며, 또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가 겉으로 드러나신 모습이며, 그러므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서 ‘이름’은 그 사람, 또는 사물의 퀄리티(quality),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말합니다.

 

그러면 찬송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는 진정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속으로는 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이란 진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구원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작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고, 크게는 그들이 모인 외부의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회들은 말씀의 진리를 끊임없이 파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을 죽이려는 헤롯과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는 바리새인은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진리이며, 동시에 지옥의 거짓 영들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을 이용해 오랫동안 그렇게 말씀의 진리를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유대인들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술수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과 그들을 사주하는 지옥의 거짓 영들을 향해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하십니다. 선지자, 즉 진리를 죽인 자들은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벨론, 즉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경계하라 하십니다. 그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 앞에서 낮아지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오늘과 내일의 일을 하시고, 삼 일째 되는 날 그들과 함께 완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얼마나 시험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진리가 완전해지는 만큼 시련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며 절망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험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시험을 꼭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견뎌내시는 모든 성도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오늘로 누가복음 13장을 마치고, 11월 첫 주인 다음 주부터는 14장을 들어갑니다.

 

 

16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17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사14:16-17)

 

아멘

 

원본

2021-01-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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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1979) 사태, 올해로 44주기를 맞이하며’ (2023/10/27)

 

44년 전인 지난 1979년 10월 27일 오늘, 지금의 대전 전민동 사시는 형님(일오, 53생)과 수원 한일합섬 옆 송죽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당시 수원 유신고 2학년이었던 나는 아침 기상 전, 이른 아침 이 작은 동네에 웬 갑자기 난데없는 호외 소리에, 형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간밤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아니, 육영수 여사,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 총탄에 역시 갑자기 돌아가신 지가 이제 겨우 5년 전인데, 왜 또? 하는 어리둥절과 함께 그 어린 고등학생 마음에도 나라의 앞날이 어찌 되는가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나라의 큰 국장으로 청와대를 출발, 동작동 국립현충원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변을 가득 채운 국민은 모두 크게 울었고, 그때 영상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지금도 울게 된다...

 

이후 일어난 군부 쿠데타와 이듬해 광주 5.18 사태, 그리고 그해 가을,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사별, 그리고 아주대 전자공학 입학, 남성합창단 Glee의 추억, 서울침례교회 대학부에서 엄마를 만나 교제, 22사 군 입대, 전역 후 복학하면서 학교 앞 아파트에서 네비게이토식 홈 생활 시작, 계속되는 대학가 데모로 연일 최루탄으로 자욱했던 시절, 아버님 별세, 삼성 입사, 결혼(1989), 이듬해 우석, 3년 후 준석 ^^ 등...

 

참 예사롭지 않았던 이 10월 27일의 아침, 당시를 생각하니 무슨 기억의 실타래처럼 좌악 풀려나오는구나. 어찌 보면 참 격동의 세월이었다 싶다.

 

부디 너희 세대는 이런 비극 없이 평화롭고 복된 시간들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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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실천하는 사람과 결합하시는 주님' (2022/10/24)

 

※ 작년 오늘 있었던 일이 생각나 공유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와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모두, 이웃들을 선대하며, 사랑으로 공손, 겸손히 선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함이란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함이란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확장하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깃든 주님의 신성을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오후 동네 한 바퀴 산책 직전, 영감(靈感) 있어 그 자리에서 바로 윗글을 어느 카톡 방에서 나눈 후, 산책 마치고 우리 아파트 라인 현관으로 들어오는데...

 

웬 살짝 허름한 잠바 차림의 다소 작은 키, 오동통한 마스크 차림 아가씨가 저 앞에서 급히 제게 다가오며 묻습니다.

 

“여기가 택배인가요?”

 

말도 좀 어눌한데다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여 그 연유를 살피니 자기는 네팔에서 왔는데 지금 서울로 피아노를 보내야 해서 택배 보내는 데를 찾아왔다는군요!

 

연유마저 참 뚱딴지같아 할 수 없이 좀 더 자세히 보니... 보낸다는 피아노는 다름 아닌 길쭉하니 얇은 키보드였고, 그걸 박스 포장, 택배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택시 기사가 뭘 잘못 알고 우리 아파트 바로 우리 동에 내려 주고 간 모양입니다. 아이고...

 

혹시 마침 아파트 마당에 와있는 택배 차량이 있나 보니 한 대도 없고... 그렇다고 아가씨가 제시하는 ‘로젠택배 전민 지점’이라는 데로 가시라 할 수도 없고... 근처 우체국 택배 관련해서는 송강 시장 곁 간이우편취급국이 유일한데, 아가씨가 이 키보드를 들고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나는 어떤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 같은 것에 참 약한 사람이라 살짝 좀 망설여지는 순간, 아까 올린 윗글이 생각나면서 ‘아, 혹시 어쩌면 지금 주님이 이 네팔 아가씨 모습으로 내 앞에 계심인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아가씨, 여기 잠깐 있어요. 내, 얼른 가서 지하 주차장 차 꺼내 올 테니까... 내가 데려다 줄께요. 내가 지금 차 키가 없어 먼저 키 가지러 가야 해 ^^”

 

걸어가기엔 한참이지만 차로는 금방이어서 금방 도착, 주정차 금지 구역이라 양쪽 깜빡이 켜고 얼른 내려 주고 나는 출발해야 하는데, 이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실 수 있으셔요? 하는 눈치가 뭔가 고마움의 선물을 사러 가려는... 그래서 한사코 아이고, 나는 괜찮아, 아가씨, 돈 아껴야지... 하는데도 아니라고 하면서 키보드는 둔 채 얼른 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나타나서는 페레로 로체 초콜렛을 선물하며 하는 말,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마치 아버지 같으셔서고요, 마침 오늘이 저희 네팔 명절이에요, 거기다 이틀 후 저는 캐나다에 가요. 겸사겸사 고맙고 감사해서 드리니 받아주세요.” 하는 취지의 말을...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래요, 아가씨, 잘 먹을께요. 그리고 캐나다 잘 가고...”

 

“네, 감사합니다.”

 

“안녕”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

 

‘아, 이웃을 사랑함이 이런 거구나! 저 아가씨 안에 계신 주님을 정성을 다해 모신다는 게 이런 거구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아주 생생하게 경험한, 아주 따끈따끈한 일화였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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