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심지어‘엄청난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AC.337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반면 스베덴보리는‘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르다’고 하며,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나는내아이를사랑한다’는 것과‘나는내아이가소중하다고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아이를사랑하는지는중요하지않다.그아이가소중하다는사실을정확하게믿기만하면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사랑을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신앙이앞선다’는 것은‘신앙이더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주님을 의지하게 하며,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태고교회에서는신앙고백이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신앙을고백하고있는가?’가 아닙니다.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내가고백하는신앙은어디로나를이끌고있는가?’입니다.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장은태고교회의퇴보,곧그교리의왜곡과,그결과생겨난이단들과분파들을가인과그의후손들의이름아래다루고있으므로,여기서한가지주의해야할것이있습니다.참된교회가어떠했는지를올바르게이해하지않고서는그교리가어떻게왜곡되었는지,또한그교회의이단들과분파들이어떤성격의것이었는지를이해할수없다는것입니다.태고교회에관해서는위에서충분히설명했습니다.곧태고교회는천적인간이었으며,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았다는것,그들은이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신앙,곧신앙에속한모든것에대한퍼셉션을가지고있었다는것,그리고이러한이유로신앙이사랑에서분리될까하여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것을위에서설명했습니다.(AC.200,203)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인간은이와같으며,시편에서도표상을통하여이와같이묘사됩니다.거기서는주님을‘왕’으로,천적인간을‘왕의아들’로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3] 태고교회와그교리는이와같았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지금은신앙이체어리티에앞서지만,그럼에도주님께서는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를주시며,그때체어리티가가장중요한것이됩니다.이로부터태고시대에사람들이신앙을따로고백하여그것을사랑에서분리했을때교리가왜곡되었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이와같이교리를왜곡한사람들,곧신앙을사랑에서분리하거나신앙만을따로고백한사람들을당시에‘가인’(Cain)이라불렀으며,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왜곡되었는지를알려면먼저왜곡되기전의참된모습이무엇이었는지를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의 ‘그들은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따로말하고고백하는것이왜그렇게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신앙의하나됨’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과 ‘작은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다할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사랑이될것이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 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중요한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신앙’, 에노스는 ‘그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의 ‘오늘날에는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먼저오는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사랑이생긴다음에야진리를배워야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신앙이체어리티보다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믿었는가?’만이 아니라 ‘그신앙이사랑과어떤관계에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은 ‘신앙보다사랑이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anotherman[homo]’,곧‘또하나의사람’일 것입니다.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에노스는새로운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또하나의사람’이라고 했을까요?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사람’이라는 말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 초기의 속뜻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의 외적 형체를 가진 존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인간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며,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은 영적인 의미에서 더욱 참된 사람이 됩니다.따라서‘사람’이라는 표현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와 에노스의 상태가 대조됩니다.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그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지면서 교회적 생명도 무너졌고,그 분리는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 자체의 변질로 이어졌습니다.
반면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그 새로운 신앙이 셋이며,이제AC.336에서는 그렇게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합니다.그리고 바로 그 에노스를‘또하나의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면서 하나의 교회적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신앙만 따로 존재하거나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온전하지 않지만,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또하나의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에노스라는 개인에게 붙여진 별명이 아닙니다.AC.336은 바로 이어서‘이것이그교회의이름’이라고 말합니다.에노스는 한 개인의 이름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그 상태를 가진 교회의 이름입니다.다시 말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심으로써 교회가 다시‘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됨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인간이 스스로 신앙과 체어리티를 만들어 결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새로운 신앙도 주님께서 주셨고,체어리티 역시 주님께서 심으십니다.인간이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사람’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영적 존엄과 함께 인간의 전적인 의존도 담겨 있습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proprium으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사람다운 생명을 갖게 됩니다.교회 역시 조직이나 이름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참된 교회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그래서 외적으로는 신앙에 관한 교리와 예배가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점차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반면 에노스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고,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또하나의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교회의 인간다운 형상을 이루는 데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또하나의사람’을 최초의 태고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의 회복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에노스 역시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앞선 상태와 동일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anotherman’,곧‘또하나의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가리킵니다.그 구체적인 성격과 변화는 이어지는AC의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의 관계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옮겨 놓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진리를배우고신앙으로행하다가나중에체어리티가생긴다’는 식의 단계는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AC.336의 에노스는 아직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이라고 하며,그들에게는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신앙,곧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아는 퍼셉션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AC.336에서는 우선‘주님께서주신새로운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심어졌고,그체어리티와교회가에노스,곧또하나의사람이라불렸다’는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원리를 우리의 거듭남에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그러나‘내안에서셋단계가지나면에노스단계가온다’는 식의 고정된 시간표로 적용하기보다,참된 인간의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나타난다는 영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교회가 교리를 정확히 가지고 있고 많은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사람’이라 불릴 만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그 진리가 실제로 선과 결합되고,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들의 삶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고 해서 진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올바른 질서가 아닙니다.에노스는 셋을 없앤 뒤 나타난 것이 아니라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제거하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주님께서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 안에서 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AC.336의‘또하나의사람’이라는 짧은 표현은 참된 인간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참된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자기 선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둘이 결합된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공동체 안에 이루어질 때 그 교회 역시 하나의‘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셋과 에노스에서 다시 나타납니다.그러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계십니다.새로운 신앙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바로 그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교회가‘에노스’,곧‘또하나의사람’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창4:26)
AC.336
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를‘에노스’(Enosh),곧또하나의‘사람’(man,homo)이라하는데,이것이그교회의이름입니다.(26절)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Enosh,”or another“man”[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한 문장처럼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입니다. 이제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이며, 동시에 그 상태로 형성된 교회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바로 앞 AC.335에서도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의해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의 질서와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셋, 아벨과 에노스의 대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결국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 역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셋의 신앙에서는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대조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으로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사실상 퍼셉션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36의 ‘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를 ‘먼저진리를배우고나중에체어리티가생기는후대영적인간의일반적인거듭남단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AC.336이 직접 말하는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그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했고, 그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태고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또하나의사람’(anotherman, homo)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교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고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 그 상태가 참된 의미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를 ‘또하나의사람’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짐으로써 다시 교회라 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졌지만, 셋과 에노스에서는 그 둘이 다시 교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질서가 마련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에노스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교회의이름’이 됩니다.
다만 ‘또하나의사람’이라는 말을 곧바로 ‘최초의태고교회와똑같은상태가완전히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하나의사람’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다시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 상태가 최초의 태고교회와 어느 점에서 같고 어느 점에서 달랐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336한 문장만으로 그 차이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블로그 해설에는 최초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가졌고, 에노스 교회는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대비가 들어 있습니다. 큰 방향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것을 ‘최초의퍼셉션은이미사라졌고이제신앙을먼저배우는새로운방식이시작되었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하면 너무 앞서갑니다. 이어지는 AC.337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참된 상태를 사랑에서 오는 퍼셉션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초상태와완전히동일하지않은새로운교회적상태’라는 정도로 두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AC.336의 마지막 표현인 ‘이것이그교회의이름입니다’는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셋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이름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 하나의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에서 인물들의 이름은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창4:25-26은 창4전체의 긴 흐름을 매우 압축해서 마무리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은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그 분리는 여러 파생 상태를 거쳐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셋과 에노스는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가 단순히 체어리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심어진 하나의 교회적 상태 전체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참된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룰 때 교회가 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 셋, 에노스의 역사적 표상과 개인의 거듭남을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살아 있게 하시는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교회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때 ‘에노스’, 곧 ‘또하나의사람’이 나타난다는 AC.336의 짧은 말은 참된 교회와 참된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가인도‘신앙’을 의미하고 셋도‘신앙’을 의미한다면,무엇이 한 신앙을 가인으로 만들고 다른 신앙을 셋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의 질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에게도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주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고,그 분리된 상태는 점차 왜곡되어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은‘주님께서주신새로운신앙’이며,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특징은 신앙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주님께서 그 신앙을 사용하여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형성하실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AC.328에서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그곳에서는‘신앙의질은체어리티로부터알수있다’고 했습니다.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얼마나 정확한 신조를 고백하는지,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내적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그 신앙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삶을 낳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만 이 원리를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정하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우리는 한 사람의 외적 행동 몇 가지를 보고 그의 신앙 전체가 참인지 거짓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AC.328의 원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믿는진리가실제로나를어디로이끌고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앞세우게 하고,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합니다.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히 외적인 선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내적 사랑이며,외적인 행위는 그 사랑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교리를가진신앙’과‘교리가없는사랑’의 차이가 아닙니다.셋 역시 신앙입니다.신앙과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문제는 그 진리가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진리가 선을 향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성을 향할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점에서‘신앙이체어리티를섬긴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더 정확하게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며,신앙의 진리는 주님께서 그 선을 인간 안에 형성하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셋의 신앙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AC.335는‘새로운신앙이주님에의해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가인의 실패 이후 인간이 스스로 더 나은 종교 체계를 만들어 셋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목적도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고,악을 보게 하며,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으로 이끄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사람을 더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게 하며,자기 옳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면 그 방향을 경계해야 합니다.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신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며,이웃의 유익을 더 지혜롭게 구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속뜻과 상응을 많이 안다는 사실 자체가 셋의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그 지식이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키우면 가인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고,반대로 그 진리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셋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내안의가인,내안의셋’이라는 표현을 너무 문자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가인과 셋은 본래 태고교회 안의 서로 다른 교리적,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역사적 표상과 개인적 적용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셋의 새로운 신앙을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신앙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따라서 여기서는 우선‘주님께서새로운신앙을주셨고,그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를심으셨다’는AC.335의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AC.336에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에노스’라고 불립니다.이것은 셋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셋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셋의 목적은 에노스,곧 체어리티가 심어진 새로운 교회적 상태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무엇이신앙을참된신앙답게하는가?’라는 질문에AC.335는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크게 주장하는가가 아니라,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얼마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둘 다‘신앙’이지만 그 생명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수 있도록 올바른 질서 안에 놓이는 데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창4:25)
AC.335
이주제의요약이제시됩니다.‘가인’(Cain)이의미하는신앙이체어리티를소멸시킨후,주님께서새로운신앙을주셨고,그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심어졌습니다.이신앙을‘셋’(Seth)이라합니다.(25절)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Cain,”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Seth.”(verse 25)
해설
AC.335는 창4전체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의 이야기와 셋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신앙을 서로 맞대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 분리된 상태는 여러 교리적 형태로 파생되었고,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는 그 모든 흐름을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새로운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인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 안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AC.335의 핵심 표현은 ‘그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심어졌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와 신앙을 주시는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가 형성되고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신앙입니다.
이 점은 AC.328의 원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질은체어리티로부터알수있다’고 했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셋은 가인의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그 길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교리적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35의 ‘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심어졌다’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나타나는 거듭남의 질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으며, 이어지는 AC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성격을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과 연결하여 계속 설명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신앙’은 이미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고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AC.335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신앙의 더 구체적인 성격과 그로부터 형성된 교회는 바로 다음 AC.336과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표’와 AC.335의 ‘셋’은 매우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5에서는 실제로 ‘새로운신앙’이 주님께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수단을 구원의 질서 안에서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와 셋 사이에는 깊은 섭리적 연속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신앙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신앙을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왜곡한 것을 그대로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라멕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특정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계열에서 신앙이 소멸되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류 가운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실 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AC.335의 셋은 바로 그 점을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는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섭리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창4:25의 ‘하나님이내게가인이죽인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는 말씀도 이 속뜻을 매우 아름답게 담고 있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가인은 그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씨’를 주십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이 ‘씨’는 새로운 신앙과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소멸된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형성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의 씨를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셋을 단순히 ‘죽은아벨대신태어난좋은아들’로만 읽으면 창4의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셋은 아벨과 똑같은 것을 직접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였고, 셋은 그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바로 다음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창4:25-26은 ‘새로운신앙인셋→그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인에노스’라는 연결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벨을 단순히 되살려 원상복구하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되돌리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이미 어떤 상태를 지나온 뒤에는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의 거듭남 질서와 동일시하기보다, 우선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마련하셨다는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역사적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자에서는 가인의 여러 후손과 라멕의 이야기가 진행된 뒤 마지막에 셋의 출생이 기록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계열의모든세대가역사적으로다끝난뒤에야셋이태어났다’는 식의 연대표를 AC.335의 속뜻에서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후 창5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은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의 계승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 계열에서도 퍼셉션의 상태가 점차 변화하고 쇠퇴해 가며, 마침내 홍수에 이르는 큰 흐름이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셋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으로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35의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가인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고, 셋은 주님께서 다시 신앙을 체어리티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세우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여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줍니다.
그러므로 AC.335는 신앙을 낮추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참된 존엄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의 존엄은 체어리티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살아 있는 수단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을 의미하지만, 하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 차이가 바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AC.334의‘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이소멸되고,그것들에폭력이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들에게‘폭력’을 가할 수 있을까요?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더 심각합니다.어떤 사람이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추어 왜곡하는 것은 다릅니다.또한 체어리티를 충분히 행하지 못하는 것과 체어리티 자체를 자기 욕망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기며 배척하는 것도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을 보면 이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가인의 처음 문제는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AC.330에서는 그것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이제AC.334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폭력이가해졌다’고 합니다.단순한 상실에서 적극적인 훼손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이웃을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의 진리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해치고,더 나아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비틀어‘이것이오히려주님의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태가 달라집니다.이제 진리는 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거꾸로 사용됩니다.
신앙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짓에 봉사하게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말씀의 진리를 자기 권력과 명예,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를 본래의 목적과 반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폭력’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질서의 전도입니다.본래 진리는 인간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그런데 인간의 악이 오히려 진리를 붙잡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같습니다.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로 인도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 합니다.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면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의 왜곡,그리고 마침내 선과 진리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창4:23의 라멕의 말은 바로 이러한 종말의 상태를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상처로말미암아내가사람을죽였고나의상함으로말미암아소년을죽였도다.’AC.334의 개요에서는 사람과 소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미리 모두 확정하기보다,이 말씀이 교회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와 관련된다는 큰 그림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를‘극도의모독’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모독은 단순히 거룩한 것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고,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주님으로부터 온 것이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교회 차원에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체어리티가 약한 것과 체어리티를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특히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돌이키게 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본래 기능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화를 다른 교회나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사람은진리에폭력을가한다’고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정하기보다,먼저 내 안에서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나는 진리를 통하여 나 자신을 고치고 있는가,아니면 진리를 이용하여 나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특히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경고입니다.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그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다른사람보다깊이안다’는 우월감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목적이 조금씩 뒤집히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개인적 적용을 곧바로AC.334가 말하는‘극도의모독’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AC.334는 라멕으로 표상되는 매우 깊은 종말의 상태를 말합니다.우리는 그 원리를 통하여 자기 안에서 같은 방향의 작은 시작을 미리 살피고 피할 수 있습니다.작은 자기 합리화 하나가 곧 라멕의 극단적 상태라는 뜻이 아니라,질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데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압축하면‘분리에서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습니다.그러나 그 분리를 계속 허용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었으며,마침내 신앙에 속한 것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AC.334의 경고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진리를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알고 있는 진리를 자기 악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주님께서 주신 진리는 우리의proprium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이소멸되고’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왜 새로운 교회는 이렇게 이전 상태의 가장 어두운 종말과 맞닿아 나타날까요?
먼저 이것을 주님께서 이전 교회를 일부러 타락시키신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타락과 왜곡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proprium을 따르는 데서 생깁니다.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적 상태 안에 아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것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이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며,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까지 가하는 상태에 이르면 그 교회적 상태는 더 이상 본래의 교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새로운교회가일어난다’는 것은 실패한 상태를 강제로 수리하여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과는 다릅니다.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십니다.인간의 한 상태가 끝나는 것과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끝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에서AC.330의 가인의 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가인에게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을 때,그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그러나 그 보존은 가인에서 이어지는 모든 상태가 반드시 올바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이 아니었습니다.실제로 라멕에 이르러 그 계열은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고,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납니다.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특정한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에 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한 상태가 자유의 오용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구원의 길 자체까지 인간이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사실 때문에‘그렇다면새교회가라멕의악에서생겨난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가족과 계보는 속뜻에서 교회와 교리의 상태 관계를 표상합니다.따라서 라멕의 악이 변하여 새 교회가 되었다고 읽기보다,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말씀의 계보 안에서 함께 묘사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새로운 교회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노아의 교회는 이후 태고교회의 종말과 더 큰 거듭남 질서의 전환 속에서 다루어집니다.그러므로‘새로운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역사적 교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굳이 가장 어두운 종말과 함께 묘사할까요?그것은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인간 편에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고 모독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가장어두워져야주님이역사하신다’는 법칙을 만들자는 뜻도 아닙니다.주님께서는 언제나 역사하십니다.오히려 인간이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한 상태가 끝에 이르렀을 때,주님의 섭리가 그 종말 너머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가 뒤늦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AC.334의‘가장어두운때’는 절망의 증거라기보다 인간의 종말이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 모두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에서도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인간에게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이것이AC.334가 교회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품고 있는 이유입니다.이전 교회의 내적 생명은 끝날 수 있지만,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인간이 만든 가장 깊은 어둠보다 주님의 구원의 뜻이 더 멀리 갑니다.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창4:23-24)
AC.334
이교회는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이소멸되고,그것들에폭력이가해졌을때일어났으며,이는극도의모독이었습니다.(23-24절)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해설
AC.334는 바로 앞 AC.333의 ‘그때새로운교회가일어났다’는 말에서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를 밝혀 줍니다. AC.333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은 야발, 영적인 것들은 유발, 자연적인 것들은 두발가인으로 의미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4는 이 새로운 교회가 이전 상태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32와 직접 이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상태에는 처음에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어도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된 상태가 계속 파생되고 변질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AC.334는 그 종말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이가해졌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부족해졌다는 뜻보다 훨씬 강합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이미 알려진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AC.334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에 속한 것을 단순히 잃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슬러 파괴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극도의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거룩한 것에 속한 것을 알고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거나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심각한 영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AC.334는 아직 모독의 전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번호는 아니지만,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이 단순한 무지나 결핍보다 훨씬 깊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창4:23의 라멕의 말도 이 종말을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상처로말미암아내가사람을죽였고나의상함으로말미암아소년을죽였도다.’ 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각 표현의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풀기보다, 이 말씀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각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이어지는 ‘가인을위하여는벌이칠배일진대라멕을위하여는벌이칠십칠배이리로다’ 역시 가인에서 라멕으로 갈수록 상태가 얼마나 더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AC.334자체는 ‘칠십칠배’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라멕의 상태가 가인의 처음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종말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흐름을 보면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이단적 상태들이 생겨났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모독까지 묘사됩니다.
그런데 AC.334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말 자체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입니다. ‘이교회는…일어났다.’ 곧 바로 이러한 종말의 때에 AC.333에서 말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가 인간 편에서는 완전한 끝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는 그것이 교회의 모든 가능성의 끝은 아닙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라멕의 타락이 개선되어 생긴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이충분히발전하면선으로바뀐다’는 구조가 아닙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때,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 상태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구별하면서도 둘이 같은 시점에 말씀 안에서 나란히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후 AC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라는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뜻과 섭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인류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것을 ‘이전교회가타락하면주님께서곧바로다른조직이나교단을세우신다’는 식으로 외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핵심은 조직의 이름보다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교회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교회가일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334는 그래서 매우 어두우면서 동시에 희망적인 글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심지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종말이 주님의 섭리의 종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적 생명을 일으키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3과 AC.334를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서가 보입니다. ‘새로운교회가일어났다’는 밝은 선언 뒤에는 이전 상태의 극심한 종말이 있었고, 그 종말 뒤에는 다시 주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에 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았다’고 했습니다.그렇다면 바로 다음AC.333에서‘그때새로운교회가일어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한 교회적 상태에서 신앙마저 완전히 소멸되었다면,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한교리적계열이종말에이르렀다’는 것과‘주님의교회전체가끝났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AC.332가 말하는 라멕의 상태는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마지막을 나타냅니다.그 안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더 이상 남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께서 더 이상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33은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른‘그때’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습니다.아다와 씰라는 그 새로운 교회를 표상하고,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그 교회의 천적,영적,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라멕이좋아져서다시교회가되었다’는 것이 아니라,하나의 상태가 끝난 자리에서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 여부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어떤 상태가 자유의 오용과 왜곡 때문에 종말에 이를 수는 있지만,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그 상태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인간이 하나의 길을 막더라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이 점에서AC.330의‘가인의표’와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당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 보존이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리적 상태가 반드시 끝까지 살아 있는 신앙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아니었습니다.라멕에서 그 한 계열은 결국 신앙마저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AC.333은 오히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즉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하나의 계열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한 상태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 자체가 소멸되지 않도록 계속 역사하십니다.
여기서‘새로운교회’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이것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반면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곳에서‘새로운교회’라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인류 역사의 새로운 대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앞의 상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형성이 일어났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AC.333의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지 않는 데도 중요합니다.라멕,아다와 씰라,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단순히‘나쁜아버지와좋은자녀들’처럼 읽으면 속뜻의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중심은 개별 인물의 도덕적 성격이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끝나고 새롭게 형성되는가에 있습니다.
AC.333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새로운 교회의 성격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된다는 점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들이 각각 교회의 천적인 것들,영적인 것들,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이것은 종말 가운데서 새로 일어난 교회에도 다시 교회에 속한 여러 차원의 것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태고교회 최초의 순수한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같은‘천적인것’, ‘영적인것’, ‘자연적인것’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이어지는AC에서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AC.333은 우선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는 큰 틀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라멕과 아다와 씰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종말과새시작’입니다.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끝을 나타내고,아다와 씰라는 그 끝의 자리에서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나타냅니다.인간의 한 상태는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끝을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제도가 쇠퇴한다고 해서 곧 주님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반대로 외적인 조직이 계속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살아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주님의 교회는 선과 진리,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는 곳에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AC.333은 라멕의 종말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인간 편에서는 한 계열이 신앙에 속한 것까지 잃었지만,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인간이 종말을 만들 수는 있어도 주님의 섭리 자체를 종말시키지는 못합니다.이것이AC.332에서AC.333으로 넘어갈 때 가장 깊이 붙들어야 할 아르카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