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았다’고 했습니다.그렇다면 곧이어 등장하는 아다와 씰라,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이후의AC를 읽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악과 거짓만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인계열은이미라멕에서끝난것같은데왜그뒤에유용해보이는것들이다시나타나는가?’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내적인교회의생명이소멸되었다’는 것과‘그계열에서모든외적인것까지즉시쓸모없어졌다’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예배와 교리의 외적 형식 가운데 후대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와 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후대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이후 야발,유발,두발가인을 설명하는AC에서는 천적인 것,영적인 것,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여러 외적 형식과 기능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유용한외적인것이나타났다’는 사실과‘가인으로시작된교회적상태가다시본래의생명을회복했다’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라멕에서 신앙의 내적 생명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그대로 유지됩니다.그 이후에 유용한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내적인 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뒤에도 외적인 지식과 기술,형식은 한동안 남을 수 있고 오히려 크게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그것들은 나중에 올바른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교회의종말’도 모든 외적 종교 활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교회의 본질적인 생명인 선과 진리,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더 이상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그러나 예배 형식과 교리적 지식과 여러 유용한 외적 요소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창4와 창5를 읽을 때에도‘가인계열은악한사람들,셋계열은선한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두 혈통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의 중심 관심은 각각의 계보가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와 그 변화에 있습니다.창5의 계보 역시 언제까지나 동일하게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태고교회 전체는 결국 쇠퇴하고 종말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홍수 역시 단순히‘악한가인혈통은멸망하고선한셋혈통은살아남았다’는 구조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맞지 않습니다.노아는 단순한‘셋계열의착한생존자’라기보다 새로운 교회적 상태,곧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거듭나는 영적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후속AC전체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깊이 부패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됩니다.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이해와 진리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며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십니다.노아는 바로 그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에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한 교회적 상태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하시고,후대의 교회와 인간 사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쓰임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따라서 이 심화가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는‘종말가운데서의보존’입니다.내적 생명이 쇠퇴해도 모든 외적인 유용성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쇠퇴한 것 가운데서조차 후대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건져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만나면서 우리는‘가인계열이다시살아났구나’라고 보기보다, ‘내적인교회적생명이종말을향하는가운데서도주님께서는어떤외적인것들을보존하여이후의쓰임을준비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그 이유도 분명했습니다.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불과 두 번호 뒤인AC.332에서는 라멕에 이르러‘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았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결국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먼저‘가인의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장하신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330에서 보존된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상태 자체가 아닙니다.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는 데 필요할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따라서‘보존’은‘강제’와 다릅니다.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강제하신 것은 아닙니다.인간은 자유 가운데 그 진리를 받아들여 선과 결합할 수도 있고,계속 분리하고 왜곡하여 마침내 그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그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입니다.가인에게는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지만,그 상태가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여러 형태로 변질되면서 라멕에서는‘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은’상태에 이릅니다.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AC.330과AC.332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시지만 인간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수단은 마련하시되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라멕의 상태를 인류 전체의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AC.332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종말입니다.라멕 안에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창4와 창5,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후속AC전체를 보면 주님의 섭리는 훨씬 더 긴 시야에서 움직입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마침내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그 새로운 영적 교회에서는 이전의 천적 인간과 달리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더 넓은 문맥에서 보면AC.330의‘체어리티가신앙을통하여심어지게될것’이라는 말은 가인 계열 하나의 미래만을 말하는 것으로 좁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의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한 특정 계열이 그 가능성을 잃어버려도 주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질서가 함께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가인의표’와‘라멕에서신앙이남지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하나는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여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섭리를 보여 주고,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그 보존된 것을 끝까지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주님의 섭리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교회적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구원의 길 자체는 계속 보존하십니다.어떤 교회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멕은 주님의 계획의 실패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 주어진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 거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반대로 이후 노아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은 인간의 실패보다 더 넓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한 계열에서 신앙마저 사라질 수 있지만,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갈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게’됩니다.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무엇을믿는가’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인간의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처음에는‘신앙이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이어 교리가 왜곡되고,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신앙을버린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그래서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나는신앙을얼마나강하게붙들고있는가?’만이 아니라‘내신앙은무엇과결합되어있는가?’입니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창4:18)
AC.332
이하나의이단에서생겨난여러이단들역시각각그이름들로불렸으며,그마지막이‘라멕’(Lamech)인데,그안에는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았습니다.(18절)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이단의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이하나의이단에서생겨난여러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낳고,낳고,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이단들이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표’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그마지막이라멕인데,그안에는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았습니다.’ 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인류전체에서신앙이완전히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의 ‘가인의표’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한이단이여러이단으로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붙들고있는신앙은무엇과결합되어있는가?’ 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창4에도‘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창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창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하나님과동행하더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시므로세상에있지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은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이이단의확장을에녹이라합니다.’여기서‘이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이름은언제나하나의뜻’, ‘성은언제나하나의뜻’, ‘물은언제나하나의뜻’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창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창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누가누구와정확히같은시대에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그러므로‘두계열이같은태고교회시대의서로다른흐름을보여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창4의 에녹은‘분리된신앙의교리가더확장된상태’를 나타냅니다.반면 창5의 에녹은‘태고교회의퍼셉션으로알려진것들을수집하여교리적으로보존하는상태’를 나타냅니다.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교리적인것’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창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창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문제는‘교리가있는가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창4:17)
AC.331
이이단의확장을‘에녹’(Enoch)이라합니다.(17절)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 “Enoch.” (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창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창4:17에는 ‘가인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임신하여에녹을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에녹’을 앞에서 ‘가인’이라 한 이단이 더 확장된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AC.331은 단순히 ‘에녹은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이후 어떻게 더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계보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이이단’은 앞의 AC.324-325에서 이미 설명된 것입니다. AC.324에서는 창4에서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룬다고 했고, AC.32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AC.331의 ‘이이단의확장’은 새로운 종류의 이단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더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이러한 ‘낳음’과 계승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적 상태로부터 또 하나의 발전된 상태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다만 ‘확장’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사람을 많이 모으고 조직을 넓혔다는 뜻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AC.331자체는 그런 외적 조직 확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상태의 전개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그대로 머물지 않고 더 펼쳐지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에녹’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25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AC.327에서는 그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AC.329에서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AC.330에서는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지만,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AC.331에서는 그 보존된 신앙이 당시의 분리된 상태 그대로 여러 형태로 더 전개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보존’과 ‘승인’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0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된 신앙은 곧바로 본래의 질서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창4의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러 교리적 상태로 더 전개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에녹입니다.
따라서 AC.331의 ‘에녹’은 가인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가인 안에 있던 원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이 창4의 계보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도 각각 앞선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5에도 에녹이 등장하지만 그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과 계열 안에서 설명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에녹= 언제나이것’이라는 고정된 암호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이름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1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확장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첫 상태를 ‘에녹’이라 합니다. 창4의 계보는 이제부터 바로 그 분리된 신앙이 이후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게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에도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어떤 잘못된 분리는 작은 생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면 점차 설명과 논리를 얻고 하나의 확고한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여전히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결합 안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가인의표’입니다.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그 결과 교리는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셨을까요?
AC.330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후체어리티가신앙을통하여심어지게될것이었기때문’입니다.따라서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니고,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에 속한 것이 장차 인간의 거듭남에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보존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가인의표’를 단순히‘살인자에게도자비를베푸시는하나님’이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AC.330이 말하는 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물론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보호라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납니다.그러나 속뜻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신앙의보존’입니다.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라 하더라도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을까요?여기에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이후 인간의 상태 사이의 변화가 배경에 있습니다.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천적 상태가 상실되어 가면서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되는 길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만AC.330한 번호만으로 이 이후의 거듭남 질서 전체가 완성되어 설명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여기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은‘체어리티가이후신앙을통하여심어질것이므로신앙이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천적 인간과 이후 영적 인간의 차이는 뒤의AC에서 더욱 상세하게 전개됩니다.AC.330은 그 큰 전환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신앙은침해받지않도록보존되었다’는 말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신앙은 장차 체어리티로 이끄는 기능 때문에 보호받았습니다.신앙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AC.328과AC.330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높이려 한 데 있었습니다.그런데 인간이 결국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신앙을 보존하여 장차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서 창3마지막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잘못된 상태에서 취하여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이 보호되었습니다.AC.330의 가인의 표와 동일한 상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두 장면 모두 인간의 타락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인간이 자신의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맞추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특히‘아벨은죽었지만가인은보존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그러나 이것을‘체어리티가없어도신앙만남으면된다’는 뜻으로 읽으면AC.330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가인이 보존된 이유는 아벨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다시 아벨에 해당하는 체어리티가 인간에게 심어질 길을 남겨 두기 위해서입니다.신앙의 보존은 체어리티의 포기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미래를 위한 보존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연구하며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그러나 그 모든 신앙과 지식의 목적은 결국 삶입니다.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는다면 신앙이 보존된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특히 아르카나를 공부하는 우리에게‘가인의표’는 의미심장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는 일은 귀하지만,그 지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주님께서 진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까닭은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체어리티가 우리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AC.325부터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가인의표’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이것이 가인의 표에 담긴 섭리입니다.신앙은 신앙 자체를 위해 보존된 것이 아니라,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 보존되었습니다.그러므로AC.330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인간의 타락보다 한 걸음 앞서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주님의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창4:10-16)
AC.330
‘핏소리’(voiceofbloods)는소멸된체어리티를(10절),‘땅에서저주를받으리니’(cursefromtheground)는왜곡된교리를(11절),‘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fugitiveandwandererintheearth)는거기에서비롯된거짓과악을(12절)각각의미합니다.그리고그들은주님에게서자신을돌이켰기때문에영원한죽음에처할위험에놓였습니다.(13-14절)그러나이후체어리티가신앙을통하여심어지게될것이었으므로,신앙은침해받지않도록보존되었으며,이것이‘가인에게표를주신것’(marksetuponCain)으로의미됩니다.(15절)‘가인이에덴동쪽에거주한것’(CaindwellingtowardtheeastofEden)은신앙이이전의위치에서옮겨진것을나타냅니다.(16절)Charity extinguished is called the “voiceofbloods.” (verse 10); perverted doctrine, the “cursefromtheground.” (verse 11); the falsity and evil originating thence, the “fugitiveandwandererintheearth.” (verse 12)And as they had averted themselves from the Lord, they were in danger of eternal death. (verses 13–14)But as it was through faith that charity would afterwards be implanted, faith was made inviolable, and this is signified by the “marksetuponCain.” (verse 15)And its removal from its former position is denoted by “CaindwellingtowardtheeastofEden.” (verse 16)
해설
AC.330은 창4:10-16전체의 속뜻을 한꺼번에 압축하여 보여 주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앞의 AC.325-329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로 시작된 과정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AC.330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멸된 체어리티는 ‘핏소리’로, 왜곡된 교리는 ‘땅에서저주를받으리니’로,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은 ‘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끝까지 진행되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뜻밖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핏소리’는 소멸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창4:10의 개역개정은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원문의 복수형을 살려 ‘voiceofbloods’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피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앞의 AC.329에서 아벨의 죽음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입니다. 따라서 ‘핏소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땅에서저주를받으리니’는 왜곡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과 교리에 속한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진리가 선과의 결합을 잃으면 교리 역시 본래의 질서를 잃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단순히 ‘체어리티없는신앙’이라는 정지된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분리가 계속되면서 교리가 왜곡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 결과가 ‘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로 묘사되는 거짓과 악입니다. AC.330은 이 거짓과 악이 왜곡된 교리에서 비롯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만, 교리가 왜곡되면 생각과 삶 역시 그 왜곡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피하며유리하는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가인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왜곡된 교리에서 생겨나는 거짓과 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상태는 더욱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AC.330은 ‘그들은주님에게서자신을돌이켰기때문에영원한죽음에처할위험에놓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주님에게서자신을돌이켰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죽음의위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변덕스러운 심판이라기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간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AC.330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생각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후체어리티가신앙을통하여심어지게될것이었기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330전체의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가인의 상태가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승인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장차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신앙이 그 통로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표’는 분리된 신앙에 대한 승인의 표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은 앞의 AC.328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간 편에서는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신앙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장차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에는 태고교회 이후의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도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되어 감에 따라 이후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길이 중요해집니다. AC.330은 아직 그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체어리티가신앙을통하여심어지게될것’이라는 말로 그 이후의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신앙은침해받지않도록보존되었다’는 말을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이 보존된 이유는 신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가 보존되는 이유는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이고, 신앙이 보존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인이에덴동쪽에거주하였다’는 것은 신앙이 ‘이전의위치에서옮겨진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도 AC.330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의 분리 이후에는 그 이전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보존되지만 그 위치와 기능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AC.330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흐름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의소멸→교리의왜곡→거짓과악→주님에게서돌아섬→영원한죽음의위험’이라는 하강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 편에서는 바로 그 무너진 상태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신앙마저 미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0은 단순한 심판의 개요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타락보다 더 깊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인의표’가 가진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죽이니라.’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체어리티가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아벨의죽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이 질문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살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에서‘사랑’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체어리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사랑과 봉사와 구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들을 교회의 중심적인 영적 생명과는 별개의 부수적인 활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입술로 체어리티를 말하는 것과 신앙이 실제로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리가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교리는 필요합니다.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사람은 자기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정확한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쓰임입니다.문제는 교리가 선과 삶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가‘무엇을믿어야하는가?’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그진리에따라어떻게살아야하는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교리적으로 정확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은 신앙의 결과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취급될 수 있습니다.이런 질서가 굳어질수록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면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해결은 아닙니다. ‘사랑만있으면무엇을믿든상관없다’고 한다면 선과 진리의 또 다른 분리가 일어납니다.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진리는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무엇이 이웃의 참된 유익인지,어떤 악을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를 이루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 공동체의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교리적 차이를 다룰 때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이웃으로 보는 일을 잃어버리고,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진리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정죄하고,그의 말을 공정하게 들으려 하지 않으며,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리적 비판이나 분별을 체어리티의 결핍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해로운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은 때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동의나 무분별한 관용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무엇을말하는가?’와 함께‘어떤사랑에서그것을말하는가?’입니다.진리를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참된 유익을 구할 수 있고,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말씀을 많이 읽고 교리를 깊이 공부하며 신앙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는데,이상하게도 가족에게는 더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더 예민해지며 자신의 잘못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그런 경우 문제는 진리를 너무 많이 배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배운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위험이 있습니다.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문자적 의미만 아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많이 아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인 삶을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자신의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께 의지하며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아벨이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이교회가얼마나사랑을많이말하는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진리가 실제로 사람의 삶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말씀을 배운 사람이 악을 더 분명히 보고 피하려 하는가,자기 맡은 일을 더욱 정직하고 충실하게 감당하는가,약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가,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실제 쓰임을 행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따라서‘저교회는아벨을죽였다’, ‘저사람에게는체어리티가없다’고 쉽게 선언하는 것은 이 심화의 목적이 아닙니다.오히려‘우리안에서아벨이죽어가고있지는않은가?’라고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희망도 있습니다.창4의 이야기는 아벨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갔지만,주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이후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보게 됩니다.인간이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에서‘아벨을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과 봉사 프로그램을 더 많이 만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신앙과 체어리티,진리와 선,교리와 삶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고,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지혜로운 사랑과 실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AC.329의 짧은 한 문장은 그래서 교회에 매우 무거운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에게가인은살아있는데아벨은죽어있지않은가?’교리와 신앙 고백과 예배의 외형은 풍성한데 체어리티가 그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형제로 함께 있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창4:8-9)
AC.329
체어리티가소멸된것은‘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죽인것’(CainslayinghisbrotherAbel)으로묘사됩니다.(8절)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CainslayinghisbrotherAbel.”(verses 8–9)
해설
AC.329는 매우 짧지만 창4의 속뜻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체어리티가소멸된것은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죽인것으로묘사됩니다.’ 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살해한 사건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교회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결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C.325부터 하나의 과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그럼에도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으려 했고, 이제 AC.329에서 그 과정이 끝까지 진행되어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사랑과 신앙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나 긴장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결합을 거부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가인이아벨을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체어리티를 표상하기 때문에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인’이 단순히 신앙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AC.325에서부터 가인은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를 나타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과 AC.329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는신앙과함께있기를원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마침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체어리티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주님께서 더 이상 체어리티를 주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9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그시대의모든인간에게체어리티가사라졌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선과 체어리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이나 셋과 에노스의 계열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특정한 교회적 계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벨을죽인다’는 것을 특정 교파나 특정 사람에게 붙여 ‘저사람에게는체어리티가없다’고 판정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반드시 사람이 모든 선행을 즉시 중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 활동과 도덕적인 행동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도 이미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리가 삶의 선과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종교성은 남아 있으면서도 내적인 질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의 심각성입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AC.329는 무거운 경고가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성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진리의 목적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목적 역시 속뜻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보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29의 한 문장은 창4전체에서 매우 무겁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끝에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긴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제 창4의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을 완전히 없애시는가, 아니면 그 안에 아직 보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인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에게 ‘표’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AC.329의 체어리티 소멸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그처럼 무너진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