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6:1-8은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인류 첫 교회 시대인 태고교회 시대, 곧 첫 교회인 아담에서 마지막 교회인 라멕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교회의 상태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은 신앙에 관한 교리적인 것(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즉 신앙에 관한 가르침(the teachings of faith)을 말합니다. 원래 태고교회는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여서 이런 표현,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첫 모습은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딸들’(the daughters of man)은 갈망(yearnings, cravings), 즉 간절히 원하되 눈이 돌아갈 정도로 원하는 걸 말합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고교회는 완전한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보통 진리, 교리, 가르침 같은 건 이해(understanding)를 거쳐 의지(will)로 들어옵니다. 이 둘 사이에는 합리(rational, 이성, 추론)가 다리 역할을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홍수 직전 사람들의 상태는 갈 데까지 간 상태여서 중간에 필요한 합리와 이성을 생략, 바로 신앙의 신비로 직행하고자 했습니다.
그 최종 상태가 바로 ‘네피림’(Nephilim)입니다. 자신의 교만과 탁월함에 맛이 간 나머지 모든 거룩하고 참된 것을 가볍게 여긴 자들, 곧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생각한 자들이지요. 이런 일은 사람들 속에, 교회 안에 ‘리메인스’(remains)가 완전히 고갈될 때 일어납니다.
사람, 곧 교회가 이 상태, 이 지경이 되면 주님은 기존 교회를 닫으시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이때 각 교회 시대마다 주님이 남겨두시는 ‘남은 자’, 곧‘리메인스’의 역할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데리고 여십니다.이때는 바로 ‘노아’(Noah)라는 사람들이 이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창1:20-23) 20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Gen. 1:20-23)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다섯 번째 시간, 곧 다섯째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절로는 20절로 23절입니다.
20절(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는데요,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마13:37)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2]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걸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to believe),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to perceive)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곧 못 움직이는 것(inanimate)에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vivified)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먼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좀 살펴보면, ‘하나님’은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도 않았거나 거듭나는 중인 사람이 주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창세기1장은 그 최종 목표가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 곧 여섯째 날 상태가 되는 것이므로1장 내내 주님은 ‘하나님’으로만 나오십니다. 반면, ‘여호와’는 거듭남이 완료된 상태, 곧 일곱째 날 안식일 상태가 된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주님을 부르는 호칭이며, 그래서 창세기2장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여호와’와 ‘하나님’은 둘 다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대한 호칭이지만, 전자는 신성에 대한 천적 호칭, 후자는 영적 호칭입니다.
참고로,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에 대한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도, ‘예수’는 주님의 신적 인성에 대한 천적 호칭이고, ‘그리스도’는 영적 호칭입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love), 선(good), 해(sun)등이고, 영적인 것들은 신앙(faith), 진리(truth), 달(moon)등입니다. 가장 내적 천국인 삼층천은 천적 천국인 반면, 중간 천국인 이층천은 영적 천국입니다. 일층천은 자연적 천국입니다. 천적 천국은 주님의 신성 중 선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천사들로 구성되는 반면, 영적 천국은 진리를 더 많이 받아들이는 천사들로 구성됩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보통 개신교 주일예배 마칠 때 하는 축도를 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13장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서 시작된 기도문인데요, 저는 이 표현이 어쩐지 삼신 사상을 부채질하는 것 같아 다음과 같이 수정해서 사용합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이지요. 이 표현 안에 구주 되신 한 분 주님, 그리고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은 어디 계시냐 하시겠지만 다음은 이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True Christian Religion’(1771)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기술 일부 인용인데요,
All those of the clerical order who have cherished any right idea of the Lord our savior, when they enter the spiritual world (which generally takes place on the third day after death), receive instruction at first about the Divine trinity, and particularly about the Holy Spirit, that it is not a God by itself, but that the Divine operation proceeding from the one and omnipresent God is what is meant in the Word by the Holy Spirit.(TCR.138)
번역하자면,
우리 구주이신 주님에 관한 올바른 생각을 그동안 품어온 모든 성직자는 그들의 사후, 영계에 들어올 때, 이는 보통 사후3일 차 때 일어나는데요, 먼저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 특히 성령(the Holy Spirit)에 대한 소개를 받습니다. 즉 성령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 편재하시는 하나님(the one and omnipresent God)으로부터 나와 진행하는 신적 활동(the Divine operation)이며,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성령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과 육이 있고, 또 활동이 있듯이, 주님도 영 또는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 육 또는 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활동이신 성령으로 되어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자기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신 창조주이시니 사람을 보면 주님을 아실 수 있게 말입니다.
아, 그리고 우리가 그러나 분명히 성령을 통해 어떤 인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주님의 어떤 활동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새들’(birds)은 보통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rational and intellectual)것들을 의미하는데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수중 생물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이나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 3)
[2]계속해서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 즉 일반적으로 하나의 새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겔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 인간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3]‘새’(birds)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렘4:25)
에스겔에서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겔17:22, 23)
그리고 호세아에서 새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여기 ‘들짐승’(wild beast)은 정말 들짐승을, ‘새’(bird)도 그냥 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make a new covenant) 하시기 때문입니다.
41
사람한테나 어울리는(proper to man)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제법 메인으로 보일지라도 천사들이 볼 때는 무슨 딱딱한 뼈나 까만 덩어리로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볼 수 있도록 재현될 때는 휴먼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된 사실은 천사 같은 영(an angelic spirit)의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지극히 사소한 생각까지도 살아 있는(alive)상태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조각들 안에도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생물’(living soul)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이걸 여기서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기는 것’(creeps)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들 진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나 깊은 비밀들(deep secrets)임에도 살짝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에 ‘생물’(living soul), ‘스스로 움직이는 것’(thing moving itself)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천사에 대한 세 가지 다른 표현이 가끔 나오는데요, 각각 ‘영’, ‘천사 같은 영’, ‘천사’입니다. 이는 각각 일층천, 이층천 및 삼층천에 상응합니다. 아마 처음 천적 천국밖에 없던 시절을 염두에 둔, 그래서 진정한 천사는 천적 천사들뿐이라는 생각으로 사용하던 표현 같습니다.
윗글은 ‘그게 무엇이든’,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모든 지극히 사소한’, ‘가장 작은 조각들’ 등 뭔가 가장 작은 걸 표현하려고 애쓰는 걸 봅니다. 아마 ‘분자’, ‘원자’ 단위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은데, 이 ‘분자’라는 개념은 찾아보니 1811년에 처음 시작되었더군요. 스베덴보리는 1772년에 별세하였으므로 그때까지는 없었던 개념이었고, 그래서 이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근접한 성경 표현으로는 ‘일점일획’이 있겠습니다.
21절(AC.42)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2
‘물고기들’(Fishes)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된,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말합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 생물들)은 그들, 즉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their general principles)을 말하는데, 이들은 세부 원리들이 이들과 종속 관계에 놓이거나(in subordination to) 말미암는(from) 그런 것들입니다. 이 우주에서는 존재(exist) 및 존속(subsist)을 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이 되는 그런 더 일반적인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래들’(Whales), ‘큰 바다짐승들’(great fishes)이 선지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거기서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 29장 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great whale)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큰 악어’는 인간의 지혜, 지성, 즉 일반적으로 지식[scientia]을 말하는 것이지요.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겔29:3)
[2]그리고 다른 데서도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겔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사야에서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렘51:34)
이는 큰 물고기가 요나에게 한 것처럼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고 한 신앙의 지식들을 그가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whale)은 신앙 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생물 분류 용어로는 일반적으로 ‘계’(界, Kingdom), ‘문’(門, Phylum 동물, Division 식물), ‘강’(綱, Class), ‘목’(目, Order), ‘과’(科, Family), ‘속’(屬, Genus), ‘종’(種, Species)이 있습니다. 이중 스베덴보리와 교류가 있었던 린네 때는 ‘속’과 ‘종’, 두 가지 분류만 있었고, 그래서 스베덴보리도 이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위 42번 글은 이런 분류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식물계, 동물계, 광물계가 있고, 식물계 아래 또 수많은 분류가 있으며, 맨 아래 ‘속’ 아래 수많은 ‘종’이, ‘종’ 아래 또 수많은 개체가 있듯, 기억-지식을 포함, 주님의 수많은 선과 진리 역시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정리, 정돈되다는 말이지요.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근원, 단 하나의 뿌리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습니다. 모든 분류의 정점에 홀로 주님이 계십니다.
22-23절(AC.43)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43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어마어마하게 결실하며 번성하는데요(fructifies and multiplies), 몸 안에 사는 이생뿐 아니라 사후 저세상에서는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be fruitful)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multiply)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서술입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번성합니다.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두,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이 세상도 이 정도인데 사후 저 천국은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로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복’(福,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의미하는데요,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복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는 상태이며, 피조물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문제이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의 속뜻이며, 다음은 그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처럼 큰 그림을 보자는 겁니다.
이 창세기 1장, 거듭남의 여섯 단계, 즉 상태는 대략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각 단계와 단계 사이 그 사이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태들이 있지만, 큰 틀에서 큼직큼직 주님은 이렇게 보신다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각 단계별 의도하시는 주님의 목표일 수도 있겠어요. 이런 큰 목표, 큰 그림들을 붙들고 가는 것의 유익은, 그래야 사이사이 자잘한 것들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데요,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보면, 사이사이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는데, 그 하나하나에 너무 진지하다 보면 금방금방 실망하고 낙심하고, 그래서 그만 마음이 쉬 식기 때문입니다. 오래 가려면 멀리, 큰 그림을 보며 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억-지식, 곧 세상 지식도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속뜻 얘기를 하다 보면 살짝 속과 관련된 것만 중요하고, 겉 관련된 건 모두 별 무가치한 듯한 착각을 할 수도 있는데요, 그게 절대 아닌 것은, 겉이 결국 속의 완성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영이 중요하다고 영, 영만 하면, 결국 사람에 대한 이상한 이해를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영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육이라는 옷을 입어야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 중요하긴 하지만, 아직 이 세상 삶에서는 겉이라는 옷을 입어야 하며, 그래서 그 겉의 일부인 이 세상 지식, 곧 기억-지식 역시 기회 있을 때, 부지런히 습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셔도 우리 안에 뭔가 기초가 있어야 그걸 일종의 불쏘시개 삼아 불을 피우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세상 지식은 어디까지나 쓰임새, 곧 주님께 쓰임을 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식조차도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세상 지식은 그걸 소유한 사람을 얼마나 망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네,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 다섯째 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틈틈이 복습하셔서 창세기 1장부터 다들 전문가가 되시길, 그래서 그 기초를 아주 튼튼히 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모르면서 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르지만 착한 사람들입니다. 겸손하고 순진하며, 주위를 환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들한테서는 좋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반면, 모르면서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르는데다 나쁘기까지 합니다. 교만하고 약삭빠르며, 주위를 어둡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한테서는 나쁜 기운이 느껴집니다. 같이 있고 싶지 않고, 마음이 불편하며 싫습니다.
이런 건 종교, 학력, 소유, 정치 이념하고도 별로 상관없는 거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니 안 다니니, 대학을 나왔니 안 나왔니, 부자니 가난하니,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니 사회, 공산 민주주의니 하고도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아, 이 정치 이념은 좀... 다른가요?
자칭 기독교인이다, 나는 교회 다닌다 하여도 악인이 있는가 하면, 타 종교인이어도 선한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또 대학을 나왔어도 악인이 있는가 하면, 안 나왔어도 선인이 있는 걸 보면, 그리고 부자이면서도 선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면서도 악한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소위 좌파라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정치 이념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네, 이 경우는 좀... 뭘 모르고 좌파하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알고 하는 사람들은... 그냥 악과 거짓의 화신들인 것 같아요. 이들은 살아생전 이미 지옥에 속한, 자기에게 맞는 지옥 특정 사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건 자기 사랑, 자아 사랑(the love of self)의 사람, 그러니까 잘난 체하는 사람, 곧 주님의 자리에 자기가 올라서고자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결정 나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종교, 정치 이념, 학력, 소유 등을 전부 자기를 사랑하는 용도로 그럴듯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과 천국, 영계, 속 사람, 내면세계 등 앞으로 우리가 가게 될 ‘속’에 속한 나라에 대해 거의 모르면서도 ‘겉’이 아닌 ‘속’ 얘기를 하면 화를 내고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속’을 통해서 ‘겉’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도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건, 모르면서 선해도, 그러니까 선해 보여도 그 뿌리가 ‘주님 사랑’(the love of Lord)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겉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선해야 합니다. 천국은 속 사람이 선한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창1:14-19) 14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Gen. 1:14-1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네 번째 시간, 곧 넷째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쯤에서 1장 전체 개요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 진도 나가겠습니다. 아래는 개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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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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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상태는, 유아기 상태와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선행 상태입니다. 이것을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움직임이, 곧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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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남은 자)라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들, 그러니까 유아기 때부터 배워 온,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신앙 지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이 상태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이런 일시적인 것들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인생의 큰 시험이나 불행, 혹은 큰 슬픔을 만나면 그제서야 그런 삶이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멈추고,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이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즉 일시적인 것,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이지요. 이 속 사람 안에 앞서 말한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상태 때 쓰시려고 그의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하신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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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charity,이웃 사랑)같은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걸 자기가 하는 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지요. 이런 선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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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스럽고 애정 어린 사람이 되고, 신앙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 실제로 경건한 담론도 하고, 선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수고한, 즉 자초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이지, 신앙과 체어리티로 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의 애정으로, 그리고 빛을 받은 신앙으로 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는 그의 속 사람 안에서 활활 불타오르는데, 이를 두 ‘광명체’(two luminaries)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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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담론을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데, 이를 일컬어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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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삶(생활, 생명)은 신앙에 속한 지식과 체어리티에 속한 행위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며, 또 유지됩니다. 이런 지식과 행위를 일컬어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삶은 몸과 몸의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고 유지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主,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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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few)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scarcely)없습니다.
이상의 개요를 머릿속에 사진처럼 기억하신 후, 이제 오늘 본문에 대한 절 별 속뜻 들어갑니다. 개요가 중요한 것은 개요는 일종의 길잡이요 가이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속뜻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번도 안 가 본 길이기 때문이지요.
14-17절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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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는 먼저 신앙의 본질(the essence of faith)과, 그리고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그 진행 과정을 알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은 한 분 주님뿐이신데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2]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들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데요, 먼저는 기억 신앙(faith of the memory)입니다. 일종의 지식일 뿐인 신앙(a faith of mere knowledge[fides scientifica])이지요. 다음은 머리 신앙(faith in the understanding)으로, 일종의 지적 신앙(an intellectual faith)입니다. 끝으로 가슴 신앙(faith in the heart)입니다. 사랑 신앙(the faith of love), 구원 신앙(saving faith)이라고도 하지요. 앞 첫 두 종류의 신앙을 3절로 13절에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사랑으로 활기찬 신앙을 20절로 25절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여기서 먼저 다루는 것이며, 이르시기를 ‘광명체들’(luminaries)이라 하시고, 이때 사랑을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단수로 언급됩니다.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luminaries)의 be 동사의 라틴어 표현을 보면 sit입니다. 복수 표현인 sint가 아니지요.
[3]속 사람의 사랑과 신앙은 육체를 가진 겉 사람에게 있어서는 열과 빛 같은 건데요, 이런 이유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되며, 이것이 광명체들을 일컬어 ‘하늘의 궁창에 있다’(set in the expanse of heaven), 즉 속 사람 안에 있다 하는 이유입니다. 큰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의지(will)에, 작은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에 말입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 빛의 수용체가 있어야만 볼 수 있듯 이들은 의지와 이해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그리고 이해를 진리, 즉 신앙으로 표현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 ‘의지를 사랑으로 표현한다’(affects the will with love)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을 보면 그의 의지, 곧 그가 어떤 마음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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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하며, ‘해, 달, 별들’(sun, moon, and stars)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은 에스겔 같은 선지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7, 8)
이 구절에 나오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말씀에서 그저 감각이요, 지식일 뿐인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감각과 지식일 뿐인 것들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끝나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사13:9, 10)
다시, 요엘에서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욜2:1-2, 10)
[2]다시 이사야에서, 주님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과 이방인들,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이지요,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받아 거듭나고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밝아짐에 관해 말하면서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60:1-3, 20)
그래서 시편에서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8:3, 4)
[3]이들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임없이 등불이 타오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 곧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상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규례가 주님에 관한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었기 때문인데요, 이 등불(luminary, 광명체)에 대하여 기록된 바로는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27:20, 21)
이런 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 곧 주께서 거기에 불을 붙이셔서 먼저 속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렇게 속 사람을 통해서 이번에는 겉 사람을 비추시는 이런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대해서 앞으로 해당 말씀에서 보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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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고 하시다가, 그다음엔 사랑은 ‘큰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은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라 하시고, 계속해서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주관하라’(rule by day),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주관하라’(rule by night)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감추어진, 특히 종말의 때(end of days)인 이때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 단수 arcanum, 秘義)인데, 이들에 대한 설명이 지금 이렇게 허락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인함입니다. 이들 아르카나가 종말인 이때 특히 더 봉인된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 곧 사랑이라는 게 아주 희귀하고, 그 결과 신앙이라는 것 또한 아주 희귀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 친히 복음서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24:29)
여기서 ‘해’(sun)는 사랑을 의미하는데 어두워지며, ‘달’(moon)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빛을 내지 않습니다. ‘별들’(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인데 하늘에서 떨어지며, 이들이 곧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2]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사랑 그 자체 말고는 무슨 다른 신앙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天的, The celestial angels) 또한 사랑의 신앙 말고는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천국 전체가 일종의 사랑의 천국인데요, 천국에서는 사랑의 생명 말고 무슨 다른 생명이라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의 모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단 한 번도 그 설명이 허락된 적도, 심지어 인류 그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그래서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선언하고지각하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모든 사랑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생명은, 이 생명은 오직 사랑에만 속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모든 행복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며, 자기들한테서는 그 어떤 사랑이나 생명, 행복도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은 또한 기록된 대로 주님의 변모, 변형(變形, transfiguration) 관련, 큰 광명체, 즉 ‘해’(sun)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내면 가장 깊은 것들이 얼굴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은 옷으로 상징되는데요, 그래서 주님의 신성(神性, the Lord’s Divine)이 ‘해’(sun), 즉 사랑으로, 주님의 인성(人性, his human)은 ‘빛’(light), 즉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상징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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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사랑이라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고서는 기쁨(joy)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지요. 사랑, 생명, 기쁨이란 이런 것, 곧 이렇게 서로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한테서 사랑을, 같은 말이지만 무언가 그가 간절히 원하는 걸 제거한다면 그 순간 그는 그 즉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며, 놀랍게도 무슨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제가 영계, 특히 천국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처럼 말입니다. 자기 사랑(the loves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the world) 안에도 생명이나 기쁨하고 뭔가 닮은 게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참된 사랑하고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움(hatreds)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그에 비례해서 이웃을, 그리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 사랑과, 그리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이웃 사랑은 바로 이 참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까닭에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요,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단 하나만 있을 수 있으며 참된 생명 역시 그런데요, 이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참된 행복(felicities)이 흘러나오지요. 천국에 있는 천사들에게 속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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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신앙은 분리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하나를 이루며 같은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명체들’(luminaries)이 처음 언급될 때 그들은 하나로 여겨졌으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하신 것입니다.
※ 라틴어 단수 표현 [sit]에 주목하세요.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Writings)은 라틴어로 저술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다음의 정말 놀라운 세부 내용들을 이런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천적 사랑(the celestial love)에 힘입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사랑 안에 있는데요, 신앙 관련 모든 지식에 있어 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어떤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앙의 교리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러나 사랑은 없는 그런 영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 마당의 첫 번째 문턱조차 접근은 고사하고 도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냉기 어린 삶이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그분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1, 22, 끝까지)
[2]그래서 분명한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안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또한 천국의 삶 가운데 있는 반면, 말로는 자기들은 신앙 안에 있다 하면서, 그러나 실제 사랑의 삶 가운데 있지는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볕(열) 없는 빛과도 같습니다. 겨울철에도 물론 햇빛은 있지만 그 빛 안에 열이 없어 결국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고 만물이 죽은 듯 무기력해지는 그런 계절처럼 말입니다. 반면, 사랑을 동반한 신앙은 봄철 햇빛과도 같아서 열매 맺게 하는 햇볕 아래 만물이 자라고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영적 천적인 것과 관련하여 아주 흡사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보통 지상에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영적 천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시대의 끝, 종말을 예언하실 때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겨울’(winter)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입니다.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 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결정적일 때 쓰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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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능력(faculties)이 있는데, 바로 의지(意志, will), 곧 의도하는 능력과 이해(理解, understanding), 곧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해가 의지의 통치를 받을 때 이 둘은 한마음이 되며 하나의 생명을 구성합니다. 그때 사람은 마음먹고 행하는(wills and does)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하기(thinks and intends)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불일치할 때, 즉 말로는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과 모순되게 살 때, 이때는 한마음이 둘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천국을 향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고자 합니다.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행위자(doer)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완전히 지옥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일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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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해 온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어떤 사람들은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주님을 직접 향하는(directed toward the Lord) 생각이라고 합니다. 소수만이 그것은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라고 하지요.
※ ‘주님을 직접 향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왕 앞에 나아가듯 주님을 직접 알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거의 모든 신앙인이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천국에서는 근본적으로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 15번 글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HH.15) //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지식과 인정(認定, acknowledgment) 및 뿐만 아니라 특히 그 교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복종입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그리고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주된 포인트는 바로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안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신앙 안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마가복음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명료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이 둘 중 첫째를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셨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마22:37-40)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 관련, 범 우주적 교리와 말씀 전체를 말합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37
광명체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를 이루게 하라 하십니다. 이들 말씀에는 지금 단계에서 밝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 있습니다. 글자 상으로는 이런 종류의 아르카나가 전혀 보이지 않아도 말이지요.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사이에는 교대(alternations), 반복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말이지요. 날과 해의 변화와도 비교할 수 있겠네요, 네, 이런 사실을 관찰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 정오, 그렇게 저녁, 밤을 거쳐 다시 아침이지요. 해의 변화도 비슷합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렇게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이어집니다. 열과 빛의 교대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고, 땅에서 나는 소산물들도 그렇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 간의 교대를 이들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데요, 이런 교대와 다양성이 없으면 삶은 천편일률적이 되며, 그 결과, 전혀 삶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진리도 전혀 알아차리지도, 구분, 심지어 지각조차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런 교대를 선지서에서는 ‘법도’(ordinances, [statuta])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5, 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렘33:25)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장 22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AC.930-937)
18, 19절(AC.38)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38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의미하며, 그래서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19, 21)
오늘 설교 준비는 유난히 좀 힘들었는데요, 그러나 끝까지 저를 권하셔서 붙들어 주고 계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안에, 제 안에 이 사랑과 신앙의 불을 켜주신 주님, 제가 끝까지 이 불빛 아래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안에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매우 귀한 것들, 곧 전능하신 하나님의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나면서부터 그리고 우리가 이 나이 되도록,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여호와 우리 주님이 그러나 우리도 모르게 끊임없이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 것들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살면서 이것을 꺼내쓸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곧 겉 사람의 일에 사로잡혀 보내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것들은 속 사람 안에 들어있어 우리가 겉 사람에게 매여 사는 동안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 겉 사람의 시간이 끝날 때가 몇 차례 오는데 그때가 바로 ‘절망적이고 앞이 캄캄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겉 사람의 삶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은 그런 때입니다. 그럴 때, 소위 정신이 번쩍 들고, 이게 뭐라고 내가 지금까지 이 부질없는 걸 붙잡겠다고 이 ㅈㄹ하며 살아왔나 하는 때입니다.
‘절망적이고 앞이 캄캄할 때’는 겉 사람이 죽고 속 사람이 깨어나는 때입니다.
한 가지, 어떤 사람한테는 이런 일이 단 한 번으로도 족하지만, 보통은 두세 번은 옵니다. 저 같은 ㄴ은 서너 번 왔지만 말입니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3그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11-24)
지옥은 우리를 흔들어 신앙에서 떠나 아무렇게나 살다 죽어 지옥 가기를, 지옥에 쉽게 데려갈 수 있기를 끊임없이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가성비 좋은 방법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 못 차리는 상태가 되니까요! 돈, 즉 소유든 가족이든, 아니면 자존심이든 편안하고 편리한 삶이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늘 주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주님이면, 그리고 그것이 여러 시험을 통해 확인이 되면, 그때는 지옥은 우리를 포기하고 물러납니다. 시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이 상태가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 곧 일곱째 날 상태인 것입니다. 안식일의 상태이며,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수도사들, 수도 영성 하시는 분들은 이 상태를 가리켜 합일(合一), 득의(得意), 완덕(完德)의 상태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신 것입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그러므로 주님 아닌 다른 것들은 지옥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무심한 듯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이 어려우면, 그것들을 사랑하되 주님을 통해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전혀 새로운 관점, 시야가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 주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8-23)
보통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은 에이, 설마 내 마음 밭이 길가나 돌밭, 가시떨기에 해당할까 하시지만, 의외로 실제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지옥이 그냥 툭하고 쳐보기만 해도 그냥 그 실상이 다 탄로 납니다. 착각들을 하며 사시는 겁니다.
어제는 월초 첫 주라 예배 때 성찬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저희가 성찬 때 늘 나누는 메시지입니다.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26-28)
주님이 생전에 남기신 두 가지 예전은 침례(세례)와 성찬입니다. 주님의 모든 활동은 세 가지, 곧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며,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이 두 예전은 바로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침례가 그 첫 번째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성찬은 그 두 번째, 천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대기(大氣)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입니다. 생전에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 있어야 사후 우리는 천국의 대기를 호흡할 수 있어 천국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평소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 형성하는 걸 ‘주님을 닮는다’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주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떡으로는 주님의 선을, 잔으로는 주님의 진리를 각각 상징하였고, 또한 각각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 이 맨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에 대한 언급이 좀 있었대서 이 글로 정리합니다.
그 전에 잠깐 주님에 관한 호칭들을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주님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하나 되신 신(神)이시며, 또한 선과 진리의 속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선은 천적(天的, celestial), 진리는 영적(靈的, spiritual)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 호칭이며, 이때 ‘여호와’는 선, 곧 천적 호칭, ‘하나님’은 진리, 곧 영적 호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인성, 곧 신적 인성 호칭이며, 이때 ‘예수’는 선, 곧 천적 호칭, ‘그리스도’는 진리, 곧 영적 호칭입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은 이 모든 호칭을 하나의 호칭인 ‘주님’으로 정하셨습니다. 주님의 인성이 주님의 신성과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여기서 질문!
주님은 왜 그냥 본 모습이신 여호와로 직접 오셔서 상황을 정리하시지 않고, 번거롭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간 과정을 밟으셔야만 하셨나?
답은, 여호와는 영계, 자연계를 포함한 이 피조세계 전체조차 감당할 수 없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우리가 저 하늘의 해를 육안으로 직접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가 뜨거운 용광로 곁을 맨몸으로 다가가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가 발전소 전기를 일반 가정집에서 직접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오감, 곧 청각, 시각, 후각, 미각, 촉각이 중간에서 그 역할을 대행하는 중간 매체 없이는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감각할 수 없는 것처럼, 즉 귀라는 대행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소리를 듣겠으며, 눈이라는 대행체 없이 어떻게 사물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호와로 직접 이 피조세계를 방문하시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리고 이 세상이든 소멸하고 말기 때문에, 사랑 그 자체이신 여호와께서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우리의 인지 능력 아득히 저 너머에 계신 신이십니다.
이렇게 피조세계가 여호와를 접촉하여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조물에게 맞춤된 중간 매체, 중간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셔서 당시 급했던 영계의 균형을 바로잡으시고, 모든, 우리는 아무도 몰랐던 이 피조세계 전체의 질서를 회복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저 성찬 메시지 맨 마지막 문장,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을 나타내셨습니다’로 요약한 것이지요. 이런 엄청난, 어마어마한 일을 하시기 위해 주님은 반드시 마리아로 유전한 유전 악을 극복, 벗어버리심으로써 자신의 인성을 신성으로 회복하셔야만 했고, 우리는 그것을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9-13) 9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Gen. 1:9-13)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세 번째 시간, 곧 셋째 날에 관한 내용(9-13절)입니다. 역시1장 전체에 대한 개요는 지난(7/20) 원고를 참고하시고요, 오늘 본문 바로 들어갑니다.
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7
두 가지,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진리와 선이라는 게 먼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으로, 그리고는 속 사람으로부터, 즉 속 사람을 통해서 이번엔 겉 사람으로 흘러든다는 이런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면비록 겉보기에는 그리 보이지 않을지라도저들 진리와 선, 곧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그의 기억 안에 쌓이며그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사이로 분류됩니다.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밀어 넣어지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게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아니면 천적이든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이라는 형태로 거기 머물며, 그 후 주님에 의해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부르기를 ‘바다’(seas)라고 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 자체는 ‘뭍’(dry [land])이라 하며, 지금은 이어지는 10절에서처럼 ‘땅’(earth)이라고 합니다.
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8
‘물’(waters)을 가지고는 지식들(knowledges, 체험적 지식 및 학문적 지식,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그리고 그 결과, ‘바다’(seas)를 가지고는 그런 지식들을 한데 모아놓은 걸 의미하는 것이 말씀에서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이사야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그리고 이사야 다른 데서는 지식들의 결핍(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을 다루면서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6-7)
그리고 스가랴에서는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과 관련하여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7-8)
시편 또한 지금은 황폐한 상태이나 앞으로는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시69:33, 34)
스가랴를 보면 ‘땅’은 일종의 리시피언트(recipient, 그릇, 用器)로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슥12:1)
11-13절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29
‘땅’(earth), 즉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천적(天的, celestial)인 씨앗을 받아 뭔가 선하고 참된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면이제 주님은 먼저 무슨 부드러운 것, 곧 ‘풀’(tender herb)을, 그리고 뭔가 좀 더 유용한, 그 안에 씨를 맺을 수 있는 것, 곧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를, 그리고 끝으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는 어떤 선한 것, 곧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를 각기 종류대로 나게 하십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처음 상태, 퀄러티(quality)는 다음과 같은데요,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압니다.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건데도 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선과 진리가 자기로 말미암는 줄로 아는 한 그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the life of true faith) 가운데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는 나중에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이런 게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아직은 믿을 수 없는, 그는 이제 겨우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단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여기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걸로,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상태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주님이 복음서 여러 본문에서 마지못해 친히 언급하신 것처럼, 주님은 씨 뿌리는 농부요, ‘씨’(seed)는 그분의 말씀이고, ‘땅’(earth)은 사람입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마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1-15)
같은 취지로, 주님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태셨습니다.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일반적으로는 천국 전체(the universal heaven)를, 그보다 덜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the true church)를, 그리고 특별히는 참된 신앙(true faith)의 사람, 즉 신앙생활을 통해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또한 ‘천국’(heaven)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인데요, 주님이 친히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21)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 연속 단계 중 세 번째 상태인데요, 이 상태는 뉘우침(repentance, 회개)의 상태, 곧 그늘에서 빛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하는 상태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주석은 여기까지이며, 오늘은 특별히 맨 끝에 언급한 ‘회개’(repentance)에 대해서만 살피고, 이어서 성찬을 진행하겠습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must confess) 회개해야(must do repentance) 합니다.(AC.8387)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to become acquainted with),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to see) 시인(to acknowledge),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to regard) 후,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는(to condemn)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AC.8388)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has made supplication for),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to desist from)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to lead a new life)입니다.(AC.8389)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자신을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살피지는(examine)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AC.8390)
신앙생활을 하는(leads a life of faith)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reflects upon), 시인 및 대적(guards against),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supplicates for)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어 끊임없이 넘어지는 자들 또한 주님은 끊임없이 일으키시지만, 그러나 이 경우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일 뿐인데요,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만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부드러운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AC.8391)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AC.8392)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 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AC.8393)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must remain constant in)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AC.8394)
※ 이 말씀에서 더러운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는 이유는, ‘물’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즉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음에도 비어 있다는 것은, 수고롭게 청소하고 수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채워넣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주님이 보실 때, 당시 유대인들의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부지런히 제사 관련, 온갖 제의를 부지런히, 그리고 정말 고집스럽게 행했지만, 정작 그런 제의에 담긴 속뜻은 전혀 모른 채, 그러니까 그런 제의가 정작 표상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전혀 모른 채, 겉으로만, 즉 겉으로 드리는 예배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 속이 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셋째 날, 곧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 한 이유를 회개에 대한 위와 같은 설명을 통해 생각해 보면, 이 세 번째 상태, 곧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는 상태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아는’ 상태, 주님이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손주들을 보면 다들 제 잘난 맛에 살지만, 그러나 우리는 아, 이쁘다, 이쁘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상태를 지나면서 사람은 저런 ‘회개’를 하게 되기 때문됩니다. 즉 철이 드는 것이지요.
이 거듭남의 상태들을 잘 살피면 현재 나는 어느 단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디 다들 바른 판단들을 하셔서 인생을 너무 돌아가지 않으시기를, 가급적 지름길로들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He who wishes to be saved must confess his sins and do repentance.
(AC.8387)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 시인,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 후,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To confess sins is to become thoroughly acquainted with evils, to see them in oneself, to acknowledge them, to regard oneself as guilty, and to condemn oneself on account of them. When this is done before God, it is to confess sins.
(AC.8388)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To do repentance is after one has thus confessed his sins and from a humble heart has made supplication for their forgiveness, to desist from them and to lead a new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AC.8389)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스스로를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조사하지는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He who merely acknowledges that he is a sinner like all others, and who regards himself as guilty of all evils, and does not examine himself—that is, see his sins—does indeed make confession, but not the confession of repentance, for he lives afterward as he had done before.
(AC.8390)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 시인 및 대적,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넘어지나 주님은 이 또한 끊임없이 이들을 일으키시는데요, 그러나 이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일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온화한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He who leads a life of faith does repentance daily; for he reflects upon the evils that are in him, acknowledges them, guards himself against them, and supplicates the Lord for aid. For from himself man is continually falling, but is continually being raised up by the Lord. He falls from himself when he thinks what is evil with desire; and he is raised up by the Lord when he resists evil, and consequently does not do it. Such is the state with all who are in good; but they who are in evil are continually falling, and also are continually being uplifted by the Lord; but this to prevent them from falling into the most grievous hell of all, whither from themselves they incline with all their might; thus in truth uplifting them into a milder hell.
(AC.8391)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The repentance that is done in a state of freedom avails; but that which is done in a state of compulsion avails not. A state of compulsion is a state of sickness, a state of dejection of mind from misfortune, a state of imminent death; in a word, every state of fear which takes away the use of sound reason. When an evil man who in a state of compulsion promises repentance and also does what is good, comes into a state of freedom, he returns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The case is otherwise with a good man, such states being to him states of temptation in which he conquers.
(AC.8392)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 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Repentance of the mouth and not of the life is not repentance. Sins are not forgiven through repentance of the mouth, but through repentance of the life. Sins are continually being forgiven man by the Lord, for He is mercy itself; but sins adhere to the man, however much he may suppose that they have been forgiven, nor are they removed from him except through a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So far as he lives according to these commands, so far his sins are removed; and so far as they are removed, so far they have been forgiven. For by the Lord man is withheld from evil, and is held in good; and he is so far able to be withheld from evil in the other life,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resisted evil; and he is so far able to be held in good then,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done what is good from affection. This shows what the forgiveness of sins is, and whence it is. He who believes that sins are forgiven in any other way, is much mistaken.
(AC.8393)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After a man has examined himself, and has acknowledged his sins, and has done repentance, he must remain constant in good up to the end of life. If however he afterward falls back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and embraces it, he commits profanation, for he then conjoins evil with good, and consequently his latter state becomes worse than his former 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When the unclean spirit goeth out of a man he walketh through dry places, seeking rest, but findeth none; then he saith, I will return into my house whence I came out; and when he is come, and findeth it empty, and swept, and garnished for him, then goeth he, and joineth to himself seven other spirits worse than himself, and having entered in they dwell there; and the last things of the man become worse than the first (Matt. 12:4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