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산 영(living soul)짐승(beast)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이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을 확증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즉, 말과 행위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이 신앙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인도되고 형성된 사랑임을 뜻합니다. 먼저 진리가 빛으로 들어오고, 그 진리 안에서 사랑이 불붙으며, 그 둘이 함께 작동, 즉 움직일 때 비로소 참된 영적 삶이 형성됩니다. 이 점은 감정 중심의 신앙이나, 행위 중심의 도덕과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에요.

 

이 상태에서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산 영’은 더 이상 생기 없는 선이나 잠재적 생명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을 뜻합니다. 그리고 ‘짐승’은 낮고 거친 본능을 뜻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선한 애정들이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감정과 욕망 자체가 이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하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외형적인 모방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즉 함께 움직이는 구조’를 뜻합니다. 주님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이듯, 사람 안에서도 말과 행위,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는 형상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먼저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양식이 되는 것이지요. 이건 정말 중요한 변화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부터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연적 생명은 여전히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사람은 아직 세상에 살고 있고,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즐거움과 필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영적 즐거움과 자연적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삶의 중심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전 단계들에서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영적 전투입니다.

 

이 싸움은 주님이 허용하시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로 들어갈 때, 사람은 비로소 ‘천적 인간’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계산이나 갈등 속에서 선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AC.12는 거듭남의 거의 완성 단계에 해당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하고, 말과 행위는 하나가 되며, 영적 생명은 실제 양식을 얻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 속에서도 사랑이 점점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 상태는 모든 사람이 쉽게 도달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창세기 1장이 제시하는 거듭남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상태는 ‘형상’의 회복이며, 인간이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 다시 세워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3, 창1, '오늘날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6-15)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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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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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state)를 설명하면서, 이전 단계들과는 또 다른 질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합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다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이 이제 ‘말과 사고의 직접적인 근원’이 됩니다. 즉, 사람은 더 이상 외적 규범이나 압박, 혹은 막연한 경건 감정에 의해 말하지 않고, 신앙 그 자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고를 이끄는 살아 있는 원리가 되었음을 뜻하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신앙으로 말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사람이 진리를 말할 때 그것이 외부에서 빌려 온 언어가 아니라, 내면에서 확신한 이해에서 흘러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와 선을 삶 속에서 점점 더 확증하게 되는데, 여기서 ‘확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이제 머릿속의 동의가 아니라, 살아 보면서 검증되는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앉은뱅이 신앙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신앙이 되는 것이지요.

 

이 단계에서 중요한 변화는,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 곧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가진 것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선한 행위와 진리의 말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직 생명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주님의 생명이 신앙과 함께 작용, 그 말과 행위에 실제적인 영적 생명력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신앙은 이제 살아 있으며, 그가 말하는 진리와 행하는 선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생기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는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바다’는 지식과 기억의 차원을 가리키며, 그 안의 ‘물고기’는 지식적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리들을 뜻합니다. 이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지식들을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들’은 더 높은 차원의 이해, 곧 사고와 사유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진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신앙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통찰과 분별의 차원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상징은 다섯 번째 상태가 단지 지식이 늘어나는 단계가 아니라, ‘지식과 이해가 함께 살아 움직이는 단계’임을 분명히 합니다. 물고기와 새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지만,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기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단계의 사람은 외적 지식과 내적 이해를 모두 갖추고, 그것들을 신앙 안에서 질서 있게 사용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신앙의 책임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을 확증하기 시작하면, 그는 더 이상 무지나 미숙함을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제 삶을 이끄는 원리이므로, 말과 행동이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다섯 번째 상태는 자유와 책임이 함께 커지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 역시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신앙이 살아 있고, 진리와 선이 생기를 갖고 작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에는 신앙이 있으며, 사랑과 완전한 결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 단계, 곧 여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동시에 작용하며 하나로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그 결합을 위한 성숙 단계로서, 신앙이 충분히 살아 있고 견고해져야만 사랑이 전면적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11에서 말하는 다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살아 움직입니다. 물고기와 새가 생명력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채우듯, 이 단계의 신앙은 사람의 지식과 이해 전반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는 이후에 올 더 깊은 변화, 곧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을 위한 필수적 성숙 단계입니다.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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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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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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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네 번째 상태(state)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 마음에도 없이 하는, 그러니까 별로 기쁘지도 않은데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internal man) 안에서 불붙게 되었으며, 이것들을 가리켜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state)를 이전 단계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전환점으로 제시합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회개하며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외적 압박과 내적 곤경 속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선을 행했으나 그것을 기뻐서 행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있었고, 그 결과로 경건과 선행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선은 아직 자유롭고 자발적인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 들어서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선을 ‘행해야 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감동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감정적 흥분이나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애정이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동시에 그는 신앙의 ‘빛을 받는데’, 이는 진리가 더 이상 외부에서 들려오는 규범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해되고 인식되는 빛이 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불붙게 되었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신앙의 지식과 선한 행위는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마치 꺼져 있는 숯처럼 잠재된 상태였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주님의 역사로 그것들이 실제로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서 생명력 있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불붙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주시는 은혜이며, 이전의 모든 준비 단계가 이 시점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해와 달이 창조되는 장면과 직접 연결됩니다. 해는 사랑, 특히 체어리티를 상징하고, 달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하늘에 놓여 낮과 밤을 다스리듯, 이 단계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의 내적 삶을 다스리는 중심 원리가 됩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욕망과 두려움이 삶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는 사랑과 빛나는 신앙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신이 행하는 선과 이해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완전히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선을 자기 공로로 붙잡지는 않게 됩니다. 이는 이후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에서 말하고, 진리와 선을 더 깊이 확증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결국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내적 빛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빛이 되고, 체어리티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이 상태가 없이는 이후의 모든 생기 있는 영적 활동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며, 주님이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실제로 거처를 마련하시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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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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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세 번째 상태(state)는 회개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선들을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 하고, 나중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state)를 ‘회개의 상태’로 규정하며, 인간의 내적 변화가 처음으로 의식적 삶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단계를 설명합니다. 앞선 두 상태에서 사람은 아직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고,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거나,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삶과 말, 행동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며, 이것이 회개라는 이름으로 드러납니다.

 

이 회개는 겉 사람의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속 사람(internal man)에서 비롯된 반응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며,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한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거듭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이며, 신앙이 단지 생각이나 감정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을 ‘생기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여전히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결심,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이 단계의 선은 참된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하며, 아직은 자연적 차원의 선에 머뭅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아니라,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11절의 식물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먼저 ‘(tender grass)입니다. 이 풀은 막 돋아난 초기의 선을 가리키며, 매우 연약하고 쉽게 상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회개 초기에 나타나는 선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는 이 선 안에 진리의 씨앗이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아직 생기는 없지만, 이후에 성장할 가능성과 번식의 능력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는 이 초기적 선이 장차 성숙하여 지속적이고 안정된 선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회개의 상태가 단번에 완성되는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회개를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참된 영적 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 단계에서 나타나는 미숙한 선조차도 소중히 여기시며,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단락은 인간의 협력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며, 말과 행동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직 선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으며, 이 오해가 바로 다음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위험을 내포한 단계입니다. 사람이 이 선을 자기 의로 고착시키면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인도에 따라 이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배우게 되면, 이후의 깊은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AC.9에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최초로 인간의 삶이 눈에 띄게 변하는 시점이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단계입니다. 이 상태의 선은 생기가 없으나, 성장할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연한 풀을 자라게 하시고, 씨를 맺게 하시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나무로 이끄시기 위해 다음 단계들을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상태는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단계이자, 주님의 더 깊은 역사가 이어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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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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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두 번째 상태(state)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하며, 그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state)를 첫 번째 상태와 분명히 구별합니다. 첫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는 준비 단계였다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안에서 ‘구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이 구별이란 선과 악의 윤리적 분별 이전에,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인식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구별 없이는 거듭남은 결코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로 착각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축적한 종교 지식이나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기초적 지식들, 선한 감정의 흔적들, 순수한 애정, 주님을 향한 어린 마음의 인상들이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리메인스가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오직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이 작동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 상태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시험, 불행, 슬픔과 함께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이 고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지 않고서는 속 사람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욕망과 판단은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여, 속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섭리 안에서 외적 삶이 흔들리거나 제한되는 상황을 허용하시는데, 이로 인해 겉 사람의 활동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이 과정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초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것들이 약화되고 무력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존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깨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겪는 슬픔이나 시험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결과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입니다. 이는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사고와 욕망이 인간 전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속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속 사람 안에 바로 리메인스가 있으며, 그것들은 주님께서 오랫동안 이 시점을 위해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신 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인간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현실성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신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로 외적 습관이나 전통, 혹은 지적 동의에 머물렀지만, 이제 신앙은 내면에서 삶과 연결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의 시작일 뿐입니다.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자기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이 구별은 이후의 모든 상태를 관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AC.8은 거듭남이 감정적 각성이나 도덕적 결심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먼저 ‘구별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며, 이 구별은 종종 고통과 침묵, 상실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주님의 섭리가 있으며,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하시려는 오랜 준비가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는 그래서 고통의 단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오랜 인내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거룩한 전환의 단계입니다.

 

 

 

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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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첫 번째 상태' (AC.6-15)

AC.7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 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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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state)를 정의하면서, 인간의 영적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매우 솔직하고도 철저하게 드러냅니다. 이 첫 상태는 거듭남 이후의 어떤 성취나 빛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포괄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에는 유아기의 상태와, 성인이 되어 거듭남 직전에 이르는 상태가 함께 포함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아기를 무죄의 상태로 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미 거듭난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유아기는 악을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지만, 동시에 선과 진리를 의식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아기와 거듭남 직전의 상태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아직 영적 생명이 실제로 형성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첫 상태로 묶입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라 하는 이유는, 사람 안에 아직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심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돈’은 선의 부재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가리킵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평가라기보다, 영적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온 것들이며, 주님의 선과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도 합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무지나 지식 부족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주님과 천적, 영적 삶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핵심은 인간의 상태를 어둡게 묘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첫 번째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선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보호하고 품으며 생명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어미 새가 알 위에 머물며 그 안에서 생명이 형성되도록 따뜻함을 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 곧 ‘물들의 얼굴’입니다. 이 ‘물들’은 이후에 밝혀지듯이,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remains), 곧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는 완전히 공허하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주님이 유아기부터 보존해 오신 선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첫 상태에서 사람은 이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거듭남의 가능성을 준비합니다. 이 점에서 첫 상태는 절망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창조 사역이 막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거듭남이 인간의 결단이나 종교적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첫 상태에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은 시작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 상태는 인간 쪽에서 보면 수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이지만, 주님 쪽에서 보면 가장 적극적인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AC.7은 거듭남의 출발을 인간의 빛이나 선에서 찾지 않고, 철저히 주님의 자비에서 찾도록 시선을 돌려줍니다. 인간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흑암’에서 시작되지만, 그 어둠 위로 주님의 영이 먼저 운행하십니다. 이 질서는 이후의 모든 상태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래서 첫 상태는 단지 과거의 한 단계가 아니라, 사람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마다 다시 경험하게 되는 근원적 상태이며, 주님의 자비가 언제나 먼저이고 인간의 응답은 그 다음이라는 영적 질서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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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창1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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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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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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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보통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풀어낸 책’으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목적을 가진 저작입니다. 이 책은 성경의 문장을 하나하나 해석하는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성경이 어떤 책인지, 왜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불리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인간의 삶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체계적인 신학서입니다. 저자인 스베덴보리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언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칩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성경에는 문자로 보이는 의미 너머에 속뜻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역사 이야기, 도덕 교훈, 종교 규범의 모음으로 읽습니다. 물론 그런 읽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성경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자에 드러난 이야기들은 겉모습일 뿐이며, 그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 신앙의 성장 과정,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숨겨진 차원을 그는 ‘아르카나’, 곧 ‘비밀’이라고 부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과거의 사건으로만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무질서한 상태에서 질서를 회복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빛과 어둠의 분리, 물과 땅의 구분, 생명의 점진적 등장 등은 모두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됩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은 ‘상응’입니다. 상응이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연결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은 단순한 물리적 빛이 아니라 진리를, ‘’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의 거의 모든 사물과 사건은 영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상응의 법칙을 통해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읽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익숙한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단순한 최초의 남녀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뱀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상징합니다. 이런 해석은 처음에는 낯설고 심지어 거부감을 줄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임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이 단순한 상징 해설서와 다른 점은, 모든 해석이 결국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 따르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성경이 살아 있는 이유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구절이든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문자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또한 인간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드러내는 생각과 행동의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 배후에 있는 사랑과 의도의 차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성경 이야기가 바로 이 속 사람의 변화와 회복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성경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책이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삶과 분리된 개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과 행동으로 드러나며,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매우 실천적인 책이기도 합니다.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눈을 열어 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본문이 살아 움직이며, 반복되는 이야기와 긴 족보, 복잡한 율법들조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성경이 갑자기 ‘지루한 책’에서 ‘끝없이 깊어지는 책’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으며, 단번에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원래 그런 책이라고 말합니다. 천국과 연결된 책이기에, 한 번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독자에게 어떤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믿어라’라고 명령하기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주님과의 더 깊은 만남, 그리고 삶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교리를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삶,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 아래 링크는 그 첫 번째 글인 AC.1번 글로 이어지는, AC를 시작하는 링크입니다. 라틴어 원본 대신 Potts 영역(1888-1902)으로 대신하였으며, 각 글 하단에 이해를 돕기 위해 원본에는 없는 해설들을 제가 달아 나가고 있으니, 읽어 보시고 도움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혹시 특정 번호의 글을 검색하실 때에는 글 목록 우측 상단 돋보기를 클릭, 왼쪽 목록에서 '태그'를 선택하신 후, 'AC 3' 형식으로 찾으시거나 '제목'에서 특정 키워드로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AC 3'처럼 가운데 한 칸 띄는 이유는 이 검색기가 특수 문자 사용을 불허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처음부터 태그 입력을 저런 형태로 해놓았습니다.

 

 

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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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인 여섯 (days), 곧 여섯 시기(periods),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이 문장은 ‘Arcana Coelestia’ 전체의 해석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선언으로서,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days)을 시간의 흐름이나 물리적 우주 창조의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로 정의합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이라는 표현에 곧바로 ‘시기(periods)라는 설명을 덧붙이는데, 이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시간표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기록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창세기 1장을 역사서나 자연과학적 기원 서술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관한 계시로 읽도록 방향을 전환시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연속적인(successive)이라는 표현입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순서에 따라 사람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각 ‘(days), 각 ‘시기(periods)는 서로 분리된 독립적 단계가 아니라, 앞선 상태에 기초하여 다음 상태가 열리는 필연적 연속을 이룹니다. 이 질서는 영적 생명이 형성되는 데 본질적인 구조로, 어떤 단계를 건너뛰거나 임의로 재배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의 순서는 곧 거듭남의 질서이며, 이는 주님의 신적 질서 자체를 반영합니다.

 

이 문장은 또한 ‘창조’와 ‘거듭남’을 동일한 틀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창조는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우주적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실제로 ‘새로 창조’되며, 그래서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장은 인류 최초의 사건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마다, 그 사람 안에서 창세기 1장의 여섯 ‘(days), 여섯 ‘시기(periods)가 다시 전개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여섯 상태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days)을 인간의 자기 수련 단계나 심리적 성장 도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주님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상태들이며, 사람은 이 과정에서 협력할 수 있을 뿐, 그 질서와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여섯 시기는 인간 중심적 영성의 단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진리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보여 주는 신적 사역의 단계들입니다.

 

문장 속 ‘전반적으로(in general)라는 표현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여섯 ‘(days)의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말하면서도, 각 개인의 삶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어떤 이는 특정 단계에 오래 머물고, 어떤 이는 중간 단계까지만 이르며, 또 어떤 이는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기본 구조와 순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거듭남의 틀을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이후에 이어질 모든 세부 해설의 문지방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 이어서 빛의 창조, 궁창의 분리, 식물의 발아, 광명체의 배치, 생물의 생성, 사람의 창조를 차례로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이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6은 단순한 개요 문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을 ‘거듭남의 지도’로 읽게 하는 해석의 출발점이며,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 주는 대서사의 첫 문장입니다.

 

 

 

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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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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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의 관념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다른 삶, 곧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곧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곧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온 하늘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Arcana Coelestia’ 서문에서 가장 조심스럽고도 가장 오해받기 쉬운 단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해석의 근거를, 단순한 학문적 연구나 전통적 주석 방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허락받은 독특한 경험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고, 동시에 무엇을 주장하지 않고 있는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단락의 첫 문장은 매우 절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이 특별히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지식의 출처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속뜻의 실재성은 인간 이성이나 상상력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계시의 영역에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먼저 고백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어조입니다. 그는 과장하거나 흥분하지 않으며, 기적담을 늘어놓듯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허락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시며, 자신은 수동적으로 허락을 받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 표현은 이후 AC 전반에서 반복되며, 스베덴보리 자신이 계시의 주인이 아님을 일관되게 드러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함께 지냈다’는 말은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는 이를 신비 체험의 자랑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경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듣고’, ‘보고’,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 황홀경이나 종교적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객관적 질서와 교리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그의 경험은 예언자적 환상이나 신비주의적 도취와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열거하는 가르침의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영들, 사후 영혼의 상태, 지옥과 천국을 말하지만, 이를 선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지옥은 ‘신앙 없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로, 천국은 ‘신앙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 정도로 정의됩니다. 이는 장소나 형벌의 묘사가 아니라,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과 지옥은 외적 공간이 아니라, 속 사람의 상태가 드러난 결과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언급되는 ‘온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신앙 이해가 개인적 통찰이나 특정 집단의 교리가 아니라, 천국 전체에서 공유되고 승인되는 질서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후 AC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준이며, 어떤 교리가 참된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됩니다. 참된 교리는 천국과 일치하며, 거짓된 교리는 그와 어긋납니다.

 

이 단락은 독자에게 신중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경험을 그대로 믿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글 전체를 어떤 전제 위에서 읽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만일 이 단락을 무시한다면, AC 전체는 근거 없는 알레고리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락을 받아들인다면, AC는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스스로 해명하신 기록’이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갖게 됩니다.

 

목회적 차원에서 AC.5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를 말하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영적 세계를 말하지만, 그 목적은 언제나 교회와 신앙,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있습니다. 그는 독자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고, 주님께로 향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라는 표현 아래 두어, 인간의 공로나 자격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결국 AC.5는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자, 동시에 그 해석이 어디까지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할 뿐이며, 판단과 믿음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이 절제된 태도야말로, 이 단락을 읽을 때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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