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8(D1)-주일예배(2530, 눅16,26-31),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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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2)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26-31)

 

 

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뿐만 아니라 그것을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악을 끊기 전에는 천국의 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 9346, 이순철 역) ...those who are in evils not only do not receive the goods which continually flow into everyone from the Lord; but also absolutely turn them away. And therefore a man cannot possibly receive the good of heaven until he abstains from evils. (AC.9346)

 

 

여러 해 전에 우울증을 앓던 어떤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라며 음성파일이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습니다.

 

※ 지난 2008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배우 최진실씨 말씀인 듯합니다. 저 역시 이 음성파일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성파일 속에서 그 배우는 지옥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곳이며,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 생명을 소중히 여겨 지옥에 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녹음파일은 의도를 가지고 조작한 것이 분명합니다.

 

※ 아니면, 누군가 무슨 집회 중에 잠시 그 배우의 영에 빙의(憑依)되어 부르짖는 걸 녹음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그때 들으며,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빙의는 일종의 신접(神接)으로, 주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금하셨어도 사람들 중에는 기어코 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천국이나 지옥은 주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니면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녹음기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 일로 충격을 받았고, 그러나 잠시 그때뿐, 그리고는 곧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혔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의하면,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영들은 그들의 생각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을 수는 있지만 직접 말을 걸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을 조작해 퍼뜨렸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영들로부터 사후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에 사는 동안 좀 더 진지하게 사후의 삶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겠지요. 오늘 말씀에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형제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2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주님께서 부자가 있는 지옥과 거지가 있는 천국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다고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큰 구렁텅이란 어떤 것일까요? 천국이나 지옥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인데 두 사랑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천사들의 사랑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또는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반대로 지옥 악마들의 사랑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며, 또는 악과 거짓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반대로 자아는 미워하지만, 지옥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자아를 사랑하는 대신 주님을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천국과 지옥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은 정반대여서 영원히 상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입니다. 그런가 하면 “큰 구렁텅이”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사후에 잠시 머문다는, 이른바 ‘영들의 세계’라고도 하는 ‘중간 영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중간 영계에 머물던 사람이 그곳을 떠나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면 그 후에는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간 영계, 또는 영들의 세계에 대해 “천국과 지옥” 421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인들의 세계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며, 둘 사이의 중간 지역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사람이 사후에 처음 들어가는 곳이고, 그 후 때가 되면 세상에서의 삶에 따라 그곳으로부터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거나 또는 지옥으로 던져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순철 역) The world of spirits is not heaven, nor is it hell, but it is the intermediate place or state between the two; for it is the place that man first enters after death; and from which after a suitable time he is either raised up into heaven or cast down into hell in accord with his life in the world. (HH.421)

 

주님께서 부자에게 천국과 지옥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영원히 오고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부자가 절망하며 말합니다.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세상 살 때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자부했지만,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다. 말씀에서 ‘부자’의 속뜻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아마 지옥의 실상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위선자로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상황을 세상의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계신 주님께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증언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서 내 아버지의 집은 세상에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형제는 누굴까요? ‘형제’는 보통 말씀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부자와 같은 교회 안의 사람들, 즉 말씀에 대해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형제가 다섯이라고 할 때 ‘다섯’ 역시 보통은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 다섯에게 증언하게 하라는 것은 교회 안의 모든 위선자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그대로 알려달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말씀에서 ‘모세’는 좁은 의미로는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말씀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의 모든 역사적인 말씀을 뜻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하시는 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굳이 천국의 천사들을 보내지 않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듣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옥의 부자는 또 한 번 간청합니다.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감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기적, 즉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기적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을 그렇게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비난하고 욕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도 다 흩어져 버리고, 주님 곁에 남은 사람은 사랑하는 제자 하나와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설득력은 일시적인 것일 뿐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 134항은,

 

기적은 사람들을 설득해 일시적으로 예배 가운데로 이끌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서 합리성을 빼앗고, 악을 가두는 일을 한다. 그래서 기적의 주문이 풀리면 오히려 갇혔던 악이 튀어나와 불경한 짓을 하고, 신성을 모독한다. (이순철 역) Communication with the dead would have the same result as miracles (of which just above), namely, that a man would be influenced and driven into worship for a short time. But as this deprives a man of rationality and at the same time shuts his evils in, as was said above, the captivation or the inward bond is undone, and the imprisoned evils break out, with blasphemy and profanation; (DP.134r)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적의 설득력은 주문과 같아서 일시적으로 악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 효과가 느슨해지면 사람들을 이전보다 더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만일 죽은 자들 중에서 내 가족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는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설사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결코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적은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합리적 사고를 빼앗으며,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더 나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선택한 모든 행위는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만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 안에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을 나눴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세상에서 악을 행하면 마음속에 지옥이 생기고, 그러므로 그 사람은 가장 작은 형태의 지옥으로 변하고, 반대로 선을 행하게 되면 마음속에 천국이 생겨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천국 형상이 되기도 하고, 지옥 형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 중간 지대를 큰 구렁텅이에 비유합니다. 큰 구렁텅이는 사후에는 건널 수 없는 곳이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오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 구렁텅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아와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은 구렁텅이 위에 있는 천국의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부터 천국의 거룩한 것들이 그에게로 넘치게 흘러들어오지만, 반대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문이 닫히고 구렁텅이 아래 쪽의 지옥의 문이 열리면서 지옥의 온갖 더러운 욕망들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누적들이 사후에 우리들을 천국 또는 지옥으로 이끕니다. 주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를 두시고, 그 옆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자유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든 강요에 의한 것은 인간의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적도 일종의 강요이기 때문에 기적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각자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생각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부자는 세상에 살 때 주님이 끊임없이 초대하시는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일들에 바빴고, 그것들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후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자유를 버린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세상의 가족들에게 나사로를 보내 증언하게 해달라고 했겠습니까? 자유가 있는 동안 자유를 선용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요12:35)

 

아멘

 

원본

2021-07-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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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나오는 ‘혼자 산다(to dwell alone)의 속뜻은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만 구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셔서 가나안 모든 족속을 다 쫓아내기를 원하셨고, 발람을 통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즉, 위 창세기 말씀의 속뜻은 태고교회의 선조들(창2:1-17)과 달리 그 후손들(창2:18-25)은 슬슬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대신 자신과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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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 인사를 주님 말씀으로 올립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6:22-27)

 

위 말씀은 그 속뜻으로는 영계를 포함, 이 모든 피조세계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관한 내용인데요, 곧 주님을 구하는 것이 복이며, 다음 시편 말씀하고도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1-3)

 

주님의 이런 돌보심이 2024년 올 한 해, 생생하게 체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혹시 위 민수기 말씀의 속뜻을 좀 더 자세히 알고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민수기 6장 제사장 기도’의 속뜻 (2023/4/26)

‘민수기 6장 제사장 기도’의 속뜻 (2023/4/26)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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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D1)-주일예배(2529, 눅16,19-25),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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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1)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16:19-25)

 

하나님의 신성이 천국으로부터 선한 사람들 안으로 유입될 때는 그들의 영적 마음이 열리어 신성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영적 마음이 없는 악한 사람들 안으로 유입될 때는 악과 거짓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내면이 열리고, 그리하여 그곳의 악과 거짓들이 천국의 선을 혐오하고 진리를 증오하며, 온갖 죄의 욕망을 품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으로 떨어진다. (계시록 해설, 504:18, 이순철 역) the Divine influx out of heaven opens, in the good, the spiritual mind, and fits it to receive; but in the evil, who have no spiritual mind, it opens the interiors of their natural mind, where evils and falsities reside, and from this they then have an aversion to every good of heaven, and hatred for truths, and a lust for every crime, and in consequence they are separated from the good, and then damned. (AE.504:18)

 

 

다음은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유명한 수로보니게 여인에 관한 본문입니다.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1-28)

 

주님께서 제자들과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는 중에 한 여인이 주님을 큰 소리로 부르며, 귀신 들린 딸 고쳐주기를 청합니다. 그 여인은 동일 본문인 마가복음에 보면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 족속 사람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당시 시리아의 한 지방 이름인데요, 그러니까 그녀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데 주님께서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신 겁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6절에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하신 적이 있는데요, 여기서 개, 돼지는 믿음 없는 이방인들, 혹은 교회 내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이방인들의 경우, 차라리 진리를 모르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부지불식 중 진리를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모르는 이 이방 여인으로서는 주님이 대놓고 하시는 이 말씀은 큰 모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개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은 성내지 않았고,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면서 그의 딸이 나았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는 주님을 믿었고, 주님 앞에 자신을 낮췄습니다. 그것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믿는 것이요, 또 진리 앞에 지극히 겸손한 모습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여인과 그의 딸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와 비슷한 내용인데요, 본문 19절에는 어떤 부자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여기서 부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뜻하고, 오늘날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부자라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해 많이 알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영적으로는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옷은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을 뜻하는데, 자색 옷은 선에 관한 지식을, 고운 베옷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말씀 관련, 많은 지식을, 자랑은 하면서도 그러나 지키지는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오로지 지식만을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집 문 앞에 한 거지가 버려진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가 말씀 관련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지는 그렇지 않은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가 대문 앞에 버려졌다는 건 그가 교회에 입문할, 즉 교회의 일원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다른 종교를 믿거나, 또는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거나, 그 밖에 다른 이유로 기독교인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한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런 나사로에 대해 21절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한다는 건 거지 나사로가 앞에서 말씀드린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리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종교나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참된 진리가 나타나면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배우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면전에서 대놓고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모욕적인 말씀을 들었으나 오히려 진리 앞에 올바른 모습을 보인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했던 거지 나사로의 모습입니다.

 

※ 이는 마치 북한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여러 사정으로 탈북, 국정원과 하나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탈북하신 분들과 비슷한데요, 이분들은 아주 사소하고 지극히 작은 것 하나로도 그렇게 감격, 감사하며 사시는데, 배정받은 LH 임대아파트에 드디어 입주하시는 날, 특히 그렇습니다. 가령, 이분들은 24시간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언제나 수돗물이 나오며, 특히 온수가 늘 나온다는 사실에, 그리고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사실에, 전기밥솥에 늘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들 어리둥절해 하시며, 신기해들 하십니다. 그들은 음식점이든, 생산라인이든 수고로이 일했다고 주는 첫 일당이나 첫 월급을 받은 날, 밥 잠을 자지 못하며, 진심으로 감격해들 하시는데요. 자신들은 그렇게 온갖 일에 동원되었어도 늘 무보수였고, 그걸 또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을 살아들 오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때 개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다고 합니다. 개는 보통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교회 교인들 중 품성이 좋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품성이 좋지 않다는 건 자기는 진리를 안다 말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AC.7784) 그렇다면 개들이 거지의 상처를 핥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교회 안 사람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교회 밖 사람을 비판하고 비웃는 걸 뜻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수시로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 밖 사람이라도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인데요, 어떤 일을 몰라서 그렇게는 했지만, 양심상 왠지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을 자기는 진리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나사로의 헌데를 핥는 교회 안 개들입니다. 22, 23절에는 그런 사람들의 사후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된 후, 그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와 거지의 신세가 사후에는 뒤집힌 것입니다. 즉 진리를 안다 자부하던, 그러면서도 정작 그렇게는 안 살아온 교회 안의 사람은 지옥에 가고, 반대로 진리를 몰라 진리를 찾아 헤매던 교회 밖 사람은 사후, 천국에 계신 주님의 품으로 간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말합니다.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지옥의 불은 물질을 태우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불이며, 그러므로 진리와 선을 파괴하는 불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악마에게나 똑같이 선과 진리를 보내주십니다. 그때 천사들은 사랑과 믿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만, 지옥의 악마들은 거꾸로 뒤집어서 받아들입니다. 즉 선을 악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를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악마들이 진리와 선을 미워하고 파괴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선을 파괴할 때,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부자는 지옥의 불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왜 고통을 호소할까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 안에 영원히 있지만,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는 기쁨을 느끼지만 결국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진리를 통해 이 괴로운 욕망의 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찍은 물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부자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는 세상에 살 때 진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정작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진리를 모른다는 이유로, 교회 밖 사람들을 업신여기기도 했는데요, 그것은 개나 돼지가 진주를 짓밟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천국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이었지만, 진리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참된 진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가 배우려 했고, 진리를 통해 거듭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주님께서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 사람 몸의 심장과 폐의 역할을 세상에서는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등불인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많은 종교에도 진리가 있지만, 교회가 가진 말씀의 밝은 빛에 비하면, 그것은 희미한 등잔불 빛 같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등잔불 빛 아래에서조차도 감사하며 살다가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곳인데, 속 사람의 상태가 세상 살면서 이미 천국인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이미 천국 상태가 되려면, 그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 즉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합일되어야 하며, 이는 오직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사랑으로 신앙을 실천하며, 선으로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생전에 우리는 이 세상 대기 가운데 폐 호흡을 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듯 말이지요. 그러다가 사후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성으로 신성 호흡을 합니다. 비유하자면 말입니다. 신성 호흡이란, 이미 살아생전, 내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사후, 주님 나라에 들어가 그곳 대기를 호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 밖 이방인들을 천대하고 업신여긴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진리에 대한 자부심만 있고, 행하지는 않는 유대인들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진리를 배우고, 배운 만큼 행하기를 원하는 순진한 이방인들이 주님에게는 더 귀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들과 자주 식사를 하시기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와 거지가 그들입니다. 부자는 주님 당시 유대인들을 뜻하고, 거지 나사로는 진리에 목마른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꼭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부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있고, 심지어 새 교회인들 중에도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용하지 않거나 악용하는 사람은 모두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진리를 안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이라고 해서 모두 지옥에 가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까요? 진리를 알기 전이나 안 다음에나 한결같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일은 고난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행하려고 할 때 시험이 오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고통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위한 싸움은 피하고, 대신 쉽고 편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지옥 불의 고통이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 항상 겸손하고 진리를 위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

 

아멘

 

원본

2021-07-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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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창2:17)의 속뜻

 

먼저 여러 필요한 사전 배경이 되는 말씀들을 좀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선 위 제목에서 ‘열매’ 부분을 괄호 처리한 것은, 이 부분은 원문에는 없는, 우리말 번역자들이 적당히 의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지만, 그렇게 되면, ‘나무를 먹지 말라’가 되어 너무 이상해 보이는 번역이 될 것 같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는 말씀을 겉뜻, 겉 글자로만 읽었기 때문인데요, 말씀은 사람과 같아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영과 육, 즉 속뜻과 겉뜻으로 되어 있음을 저들 번역가들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겉, 즉 외적(外的, external) 존재로 물질계인 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고로 말씀을 겉뜻으로 읽지만, 천사들은 속, 즉 내적(內的, internal) 존재로 영계에 존재하기에 말씀을 속뜻으로 읽으며, 또한 말씀은 오직 천국과의 상응으로만 기록, 그 일점일획이 모두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천사들처럼 속뜻으로 읽어야 비로소 모든 게, 소위 무슨 난해구절이니 하는 거 없이, 온전히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통해 주님과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그래서 그 안에 이런 속뜻이 있는 성경이라야 ‘말씀(The Word)이라 할 수 있으며, 말씀 안에 들어있는 이런 천국의 비밀을 가리켜 ‘아르카나(라틴, arcana, 秘義)라 합니다. 이 아르카나를 주님의 생명으로 이해하셔도 되지 않을까 하며, 그러므로, 어떤 글이 ‘말씀’이 되려면,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 곧 생명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성경 66권 중 어떤 성경이 진정한 ‘말씀’인지는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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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아브라함 등장 전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닌, 인류의 유구, 장구한 역사를 크게 두 교회 시대로 나누어 매우 높은 수준의 스토리 텔링처럼 엮은, 그러나 그 안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그런 기록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건,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AC.66, 창1 뒤,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AC.66, 창1 뒤,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66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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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지구 나이에 대하여 지질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즉, 45, 6억 년 정도로 본다는 말이지요. 그 가운데 인류의 등장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 아 참, 그렇다고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건 절대 아닙니다. 살짝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진화론은 오늘 본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과 연결됩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등장을 학자들은 대략 기원전 최대 1900년 정도로 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이전의 세월, 즉 창세기 1장 1절부터 아브라함의 등장 전까지의 역사, 그 장구한 세월은 감히 상상이 안 될 정도로 까마득합니다. 이 장구한 세월을 주님은 고작 창세기 앞부분 열한 장으로 요약, 정리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의 구원과 관련된 아르카나를 담아놓으신 거지요.

 

※ 이걸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3:16)가 되겠습니다.

 

학자들은 무슨 좀 자세한 다큐가 필요하겠지만, 주님은 오직 사람의 생명, 곧 구원에 필요한 것 중심으로 그 일점일획에 초정밀, 고밀도 압축을 해 놓으셨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를 통해 자세히, 정말 자세히 딕테이션(dictation, 받아적기)하게 하셨지요.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8년에 걸쳐 상술한 ‘Arcana Coelestia’(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이며,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 주석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 관련해서는 아래 글들을 참고하세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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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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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저 유구, 장구한 세월을 그 시대 일어났던 두 교회 시대를 중심으로 기술하셨다 하였는데,

 

※ 사실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 어쩌고 하지만, 이 역시 영원하신 주님께는 한 순간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상태변화의 나라입니다.

 

그게 바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와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입니다. 이 구분은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노아의 홍수’로 알고 있는 어떤 상황이지만, 내면적, 내적(內的, internal)으로는 ‘퍼셉션(perception, 知覺)이라고 하는, 주님이 태고교회에게 부여하신 어떤 선천적, 태생적 능력의 유무였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자신, 설명하기가 참 쉽지 않은 거라 하였는데, 그러니까 천국 천사들의 어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무엇으로 학습하여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닌,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 곧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통찰력입니다. 이 퍼셉션이 있는 사람 또는 천사는 어떤 것의 성질, 곧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인지를 즉시, 그리고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에 비해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걸 잘 몰라 늘 주님의 뜻 알기 위해 참 다양한 애들을 쓰고 있지요. 태고교회가 누렸던 이 ‘퍼셉션’이 우리한테는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는 늘 뿌연 상태, 흐리멍덩한 상태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천지창조의 첫 육 일간 기록으로 알고 있는 창세기 1장은 사실은 쌩 무지렁이였던, 즉 완전히 자연적, 감각적, 세속적이기만 했던 인간이 주님의 자비로 빛을 받아 밟게 되는 거듭남의 대략 여섯 단계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기간을 그는 ‘영적 인간(靈的, a spiritual man)으로 지내다가 그 마지막 단계, 그러니까 창세기 2장부터는 안식 상태인 ‘천적 인간(天的, a celestial man)이 됩니다. 즉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 2장은 천적 인간의 장이지요. 재미있는 건, 창세기 1장에서는 주님의 칭호가 오직 ‘하나님’으로만 나오는데,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네, 이런 차이가 이 ‘영적, 천적’이라는 거에 있는데요, 이는 굉장히 근원적이고, 태생적인 차이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건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천적 나라(天的, the celestial kingdom), 영적 나라(靈的, the spiritual kingdom)' (렘31:33-34, HH.1.4.20-28) (2022/8

https://bygrace.kr/1134 주보, 주일예배(8/28, 렘31:33-34, HH.20-28), '천적 나라(天的, the celestial kingdom), 영적 나라(靈的, the spir 1. 주보 2. 설교 원고 및 유튜브 https://youtu.be/M3ZG38BUuFU 3. 축도 원고 및 유튜브 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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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영적 인간은 위 ‘퍼셉션’이 없습니다. ‘퍼셉션’은 오직 천적 인간한테만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이 나오며, 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여, 여러 나무들이 나오는데요, 이 나무들이 바로 퍼셉션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AC.102,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AC.102-106)

※ AC.102,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AC.102-106)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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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금까지 길었습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바로 위 링크의 글에도 나오지만, 오늘 본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 즉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을 말합니다. 여기서 ‘기억-지식’이란 세상에서 학습을 통해 얻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 말씀,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저 말씀은, 주님 신앙의 신비, 주님의 신성에 속한 걸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이 아닌, 그저 이 육에 속한 오감(五感,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세상에서 학습하여 습득한 걸 가지고 접근했다가는,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태도로 접근했다가는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아, 그리고 또한 이 말씀은 아래와 같은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19:23-24)

 

하는 주님 말씀하고도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 아주 짙게 침투해 있는데요, 아래는 창세기 1장 27절의 속뜻 주석인 AC.54번 글에 나오는 그 몇 가지 예입니다.

 

...이는 참 부러운 특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외적(external)이요, 겉, 감각의 사람들이어서 영적, 천적인 주의 말씀들도 오로지 감각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가령, 신령한 사람은 방언도 유창하고 세련되게 해야 하며, 안수기도를 하면 바로 눈앞에서 병이 척척 낫고, 각종 장애도 바로 나아야 하며, 예언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 받기를 참 좋아하며, ‘’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무지하며, 내적(internal)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예 이해조차 못 하면서도 자기는 믿는 사람이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자기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므로 죽으면 천당 간다고 믿는 그런 현실입니다...

 

위 내용은 다음 글에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AC.54,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AC.53-54)

※ AC.54,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AC.53-54)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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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창세기 1장 30절 말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속뜻 역시 그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갈 때, 그는 끊임없이 영적 전투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엔 탐욕(cupidities)이 지배적(the dominion)이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자체가(the whole man) 그저 탐욕과 탐욕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composed of)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간적으로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the whole man) 파괴되기 때문인데요,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has acquired)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일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되는데요,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계속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이런 탐욕의 추구에도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지게 마련이며, 그 결과, 결국엔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러면 이제 이 사람에게는 개혁될 나름의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섬세하시며, 사람 일생의 모든 악과 거짓조차 이런 섭리 가운데 허락하심을 볼 수 있지요. 우리 주님의 이런 모습은 현재 거듭남의 과정 중인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자녀, 성도는 물론, 기타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우리가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 하는 근본적인 방향과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다음과 같은 주님 말씀이 생각나는데요,

 

1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18-20)

 

그러므로 우리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주님의 성품, 곧 사랑과 온유, 겸손이라는 안전하고 온전한 울타리 안에서 행해야 하겠습니다.

 

가령 아이 훈육의 경우, 이렇습니다. 아, 그전에 먼저 천국 천사들 중 어린아이를 훈육하는 천사들은 어떤 태도와 자세로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천사들의 훈육을 보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지상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지 하는 귀한 통찰력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죽으면 바로 내세에서 깨어나고(부활하고), 깨어나자마자 천국으로 인도되며, 육신을 입고 살 때, 아이들을 인자하게 사랑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 여성 천사들에게 맡겨진다. 그 천사들은 세상에 살 때, 모든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맡겨진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여기고, 어머니의 인자함으로 받아들이며, 아이들도 타고난 성향에 의해 그 천사들을 자기 어머니처럼 사랑한다. 그 천사들은 영적 모성애로 원하는 만큼 아이들을 돌본다. 이 천국은 천사들의 이마 앞쪽, 그들이 주를 바라보는 일직선 상에 있다. 모든 아이들이 주의 직접적인 보호의 눈길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위치하는 것이다. 순진함의 천국, 즉 삼층천이 그들에게 유입된다...

 

...아이들은 주로 그들의 특성에 알맞는 표상으로 교육을 받는다. 그 표상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내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지혜로 가득하다. 선함을 본질로 하는 지성이 이런 방법을 통해 아이들에게 점진적으로 심어진다. 이제 내가 허락하심 하에 보게 된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이로써 나머지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과 동시에 주의 인성과 신성이 합일되는 것을 표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은 사람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순진함에 맞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떤 무덤이라는 개념이 연출되고 나서 그 안에 주님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는데, 아주 멀리서 보는 것처럼 어렴풋하게 표현하여 전혀 주님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덤이라는 개념에는 뭔가 죽음이란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고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다음 어떤 공기 같은 것, 아주 옅은 액체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적절한 거리에서 보면 이것은 세례가 상징하는 영적 삶을 표상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결박된 자들'에게 내려가시고, 그들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표상이 보였는데, 그 장면은 극도의 조심성과 경의로 연출되었다. 또 아이들 마음의 수준에 맞추어 거의 안 보이는 가느다란 실들이 내려와 승천하시는 주님을 지극히 부드럽고 섬세하게 거들어드리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혹시라도 영적이지 않거나 천국적이지 않은 것에 그 표상들이 닿지 않게 하려는 경건한 두려움 속에 진행되었다. 거기 다른 표상들도 연출되었다. 아이들 마음에 적합한 놀이들을 통해 아이들은 진리를 알게 되고, 선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나는 아이들의 사고가 얼마나 부드러운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을 때, 그들의 사고가 내 사고의 개념들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흐름은 거의 애정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온화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들의 사고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마치 그들을 그냥 통과해 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주께서는 가장 내적 차원에서 어린아이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하시는데,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처럼 생각을 닫아버리고, 진리를 이해하는 길을 막아버리는, 그릇된 가치관이나, 선을 받고 그에 따라 지혜를 받는 길을 막아버리는 악한 생활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이들이 죽은 후, 바로 천사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알아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천국의 모든 질서에 따라서 천사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아이들의 특성을 낱낱이 아시며, 따라서 그들 성향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맞추어 선의 진리와 진리의 선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들은 아이들에게 일체의 영적이지 않거나 천국적이지 않은 것들이 닿지 못하도록, 즉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극도로 조심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네,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아이를 훈육하면서 아이를 주님께 맡긴다는 건, 아이에게 무슨 예외를 허용했다가 아이에게 그동안 기울인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계속 강행, ‘맞을래?’ 하며 아이를 위협, 끝까지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혹시 그럴지라도, 즉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아이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을 의지, 주님의 사랑과 온유하심으로 아이를 훈육하는 것이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방법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영적으로 악한 기운이 아이와 엄마를 삼키지 못하도록 시급히 그 기운을 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들과 악령들이 둘씩 와 있다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 사람의 연령대에 따라 그에 맞는 영들로 임무 체인지가 되는데요, 대략 영유아들에게는 삼층천 천사들이, 초중고에겐 일층천 천사들이, 청장년에겐 이층천 천사들, 그리고 다시 노년에겐 삼층천 천사들이 오며, 이에 대응하는 악한 영들 또한 그렇게 임무 교대합니다.

 

이런 아르카나(arcana, 秘義)에 관한 지식은 지금 훈육 중인 어린아이 앞에서도 무척 유용합니다. 이때 영안이 열려 아이 안에 와있는 악령들이 보이면 더 좋겠지만, 비록 안 보이더라도 부모가 깨어 있어 그 영적 기운, 아우라의 변화, 그 영적 감각을 느낄 수 있었으면 참 다행스럽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아, 지금 아이 안에서 악령, 이 경우는 어린 악령이겠지요, 악령이 활동하며, 내가 화를 내고, 아이를 위협할수록 더욱 사실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내 안에서도...’ 간파하고, 즉시 영적 기운을 변화시키기 위해, 즉 아이 안에 역시 와있는 삼층천 천사들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나의 인간적인 훈육을 중단, 천사들을 통해 주님께 맡기는 물러남이 필요합니다.

 

이 물러남은 뭐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대체로 바로 회개 기도를 하며,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게 좋겠습니다. 상황 전개에 대한 주도권을 천사들에게, 곧 그렇게 해서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영유아 아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윽박지르고, 사납게 대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하여 어찌하든지 지금까지 활활 타오르던 악한 기운을 시급히 끄는 게 중요합니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절대 수치스러운 게 아니며, 우리가 즉시 이런 조치를 취하면 오히려 상황의 중대성을 감안, 삼층천 천사들이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상황을 수습하실 겁니다.

 

이 지경까지 안 가도록 그냥 삼층천 천사들이 바로 개입하시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주님은 절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침해하시지 않으며, 그래서 이럴 경우, 즉 끝까지 쌩고생을 하면서도 회개하지도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경우, 삼층천 천사들은 그냥 안타까워하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시고, 그저 저만치 물러나 그 상황에서 하실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하실 뿐입니다.

 

두 가지, 곧 사람의 안에 있는 악한 생명조차 주님은 함부로 건드리시지 않는다는 사실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사랑으로 온유하게 대처하신다는 거!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여 아이 훈육을 비롯, 모든 상황에서 대처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어떤 걸 이루시기 위해 악한 기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교육 및 훈육 방식이 무조건 나쁘다, 악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크게 유용하지요. 하지만 그조차도 주님의 성품, 주님의 사랑과 온유하심 가운데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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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38MB
축도.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21MB
성찬.pdf
0.14MB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눅16:14-18)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교리 156) And if uses are not done perpetually there is an interruption, and in this interval he may turn aside into all loves and the concupiscences therefrom, and so not only intermit his charity, but even depart from good works. Charity thus perishes from its opposites, and the man serves two lords. (C.156)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The Doctrine of Charity’(1766) 중 여섯 번째 소주제인, ‘Man is born that he may become charity’(126-157)에 나오는 글이며,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인간이 체어리티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멈추면, 그 결과, 어떻게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지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 삶에 있어서는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 재물을 더 믿거나, 또는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기 전 신앙인들은 보통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가 사후, 영계에 가면 감춰진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는데요, 그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어떤 주인을 섬기며 살았는지를 알게 되지요.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람 같은데 의외로 주님과 이웃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뭘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사람마다 주도적인 사랑, 우세한 사랑(dominant love)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애정, 또는 사랑이 있는데, 그것을 크게 나누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고,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이 두 가지 큰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주도적 사랑이란 뭘까요? 각 사람에게 있는 수많은 사랑 중에 으뜸이 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도적 사랑이 무엇이냐에 따라 개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천국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자아와 세상을 좇는 지옥적인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시는 것은 주도적 사랑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주된 사랑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 사랑은 보조적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반대가 된다면, 그 사랑의 끝에는 세상의 온갖 탐심과 정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 가르침 “인애의 교리” 156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삶, 체어리티의 삶을 그치는 순간 주도적인 사랑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잠시도 체어리티의 삶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도적 사랑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미워하고,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리새인이야말로 두 주인을 섬기는 자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의 말로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50절에서 51절까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엄히 때린다 했는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원문에는 ‘그를 갈라놓는다(divide)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위선자들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는 이유는 그대로 두면 선과 진리를 더럽힐 것이고,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를 알면서 더럽힐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하나도 없고, 악과 거짓만 남아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는 없고, 오로지 자기만 아는 사람, 어떻게 해서든지 이웃을 짓밟고 올라서기를 바라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위선자들이 받을 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비웃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들은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를 모르고 오히려 높아지기를 바라고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또 자기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비웃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천국의 비밀” 9264번 글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적 진리와 선이 부인될 때, 이 선은 파괴되며, 그 경우, 사람 안에 있는 것 역시 끝나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비롯되는 분이십니다. and this good is destroyed when the Divine truth and good which are from the Lord are denied, in which case this is extinguished in the man, and consequently so is the Lord himself, from whom proceed all good which is good and all truth which is truth.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웃을 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인 선을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끝냈다, 더 이상 주님이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부인하고 비웃는 그 말씀이 바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말씀을 의미하고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새로운 천국과 새로운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직접 전하신 말씀은 지상에 세워질 마지막 교회를 위한 말씀이며, 또한 그 교회를 바탕으로 하늘에 세워질 새로운 천국을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신 것은 요한의 때까지의 말씀, 즉 구약의 말씀들이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면, 그 후의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영원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 신성한 말씀을 비웃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주님은 인간이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되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지성에 비춰 어떤 말씀은 임의로 버리고, 어떤 말씀은 왜곡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세워지는 교회는 신성하고 완전한 말씀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천지는 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 말씀을 왜곡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말씀보다 더 높였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이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고,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상기시키신 후,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는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왜 이 시점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말씀에서 결혼은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전체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요,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의 결합입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아니며, 그러므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간음의 영적인 의미는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임의로 왜곡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중요하고, 삶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말씀을 임의로 왜곡,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 희생시킴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 24장 47절에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라고 말합니다. 또 마가복음 1장 15절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이나 애정을 면밀히 살펴 악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빼고,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칩니다. 이런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에다가 거짓을 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각자에게 맞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처럼 모든 진리와 선은 각기 맞는 진리와 선을 만나 결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부모 자식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같은 것 같지만 이렇게 모두 다릅니다. 쓰임새가 다르고 형태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쪽의 진리가 저쪽에서는 거짓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외적이고 내적인 의미들을 통해 우리는 그런 지혜를 깨우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각자의 삶 속에서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이 일어나고 천국의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 체어리티의 행위를 멈추지 말고, 꾸준히 계속하라고 하십니다. 멈추는 순간, 불순한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바다로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잊을 정도로 과도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아멘

 

원본

2021-06-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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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AC.34번 글 가운데 특별히 '휴거' 본문이 나와 따로 올리는 글입니다.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the 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 휴거는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그런데 AC.4060번 글을 통해 그 속뜻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그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이름으로 일컬었던 그 시대 신앙이나 교리, 혹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위 '노아'는 우리가 아는 노아라는 한 개인이 아닌, 그 시대 저런 순결한 신앙을 고집했던 극소수 교회를 가리켜 '노아'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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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8(D1)-주일예배(2527, 눅16,9-13),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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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 속뜻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9-13)

 

 

오늘날 다들 믿기를, 체어리티라는 건 단순히 선을 행하는 거고, 그러고 나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 결과, 체어리티의 처음은 선행이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나중이라고들 믿습니다만, 그러나 이는 완전히 정반대로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처음은 악을 치워버리는(to put away)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참된 기독교 437) At the present day it is believed that charity is simply doing good, and that then one does not do evil; consequently that the first thing of charity is to do good, and the second not to do evil. But it is wholly the reverse; the first thing of charity is to put away evil, and the second to do good; (TCR.437)

 

 

요즘 시대는 각종 지식과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서점에는 매일 같이 수많은 책이 새로 나오고, 컴퓨터를 켜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 학생들이 전문가를 뺨치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경험이나 지혜보다는 기억력과 지식이 힘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정당에서 당 대표를 선출하는데 다선 의원들을 제치고 의원 경험이 없는 30대 젊은이가 대표로 뽑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지난 2021년 6월, 국민의힘 당 대표로 이준석 후보가 당선된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설교의 원본은 지난 2021년 6월 13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의 주일 설교입니다.

 

※ 설교 중 이 ‘※’는 원본에는 없는, 이 원본을 조금 다듬어 설교하는 저의 보충 설명입니다.

 

이런 현상 역시 기억력과 지식과 언변이 무엇보다 힘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인간의 머릿속에 든 지식은 가장 차원이 낮은 진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고요, 더 높은 진리인 영적 진리를 얻기 위한 도구이며, 나아가서는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려는 것도 바로 그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먼저 본문 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주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의 기억 속에 쌓인 지식들이 불의의 재물입니다. 왜 그 지식들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셨을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부와 명예를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우님들은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싶으십니까? 저는 힘들고 외로울 때 자기 일처럼 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또는 인생의 위기에서 저를 구해 주고 기꺼이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과연 그런 친구가 있겠습니까? 아마 주님만이 그런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친구란 바로 주님, 또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것은 세상 지식을 가지고 영적 진리를 사귀라는 것이고요,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귀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식은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고, 주님과 결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0절, 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지극히 작은 것은 무엇이고, 큰 것은 뭘까요? 또 그것에 충성하는 것은 무슨 뜻이고, 불의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은 낮은 차원의 진리, 즉 기억에 속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 이 ‘기억에 속한 진리’라는 것은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들을 가지고 알게 된 진리를 말합니다. ‘영적 진리’라는 표현이 있으니까 ‘자연적 진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큰 것은 그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 즉 영적인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충성한다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불의하다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하시는 것은,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영적인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가지고도 주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는 것은 세상 지식이나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지 않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은 더 높은 영적 진리가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기만 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 갑자기 많은 수의 영 능력자들이 떠오릅니다. 각종 병 고침, 신유, 치유, 예언, 안수, 방언, 영계 체험, 그리고 집회 인도자들, 주 강사들이 말입니다. 그 가운데 정말 드물게 주께 순수한 쓰임새로 섬기는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잘 포장된 생업 수단으로, 그리고 자기를 높이고 주목받고자 하는 숨은 동기로 그러고들 있으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저부터도 우선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 역시도 누가 저를 무시하고 그러면 발끈하거든요... 성 프란치스코는, 스베덴보리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인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언제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세상의 부와 명예인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오직 부와 명예만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삶을 분리,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해 불의하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앞에서는 남의 것, 뒤에서는 너희의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이는 모두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러면 진리를 남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거나 진리를 마음대로 왜곡하는 것은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를 대하는 바른 태도는 진리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의 것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에서는 왜 너희의 것이라고 했을까요? 진리를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진리에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그들의 생명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가지고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그들의 사랑, 또는 의지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의 생명인 의지와 사랑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살지 않거나, 혹은 못 하거나 시험에서 넘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아직 우리의 생명인 사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그러면 그때는 뭐가 사랑이며, 뭐가 생명일까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주님을 의지, 진리에 따라 세상 욕망을 이긴다면, 그때부터 그 진리는 주님에 의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진리를 너희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 물론, 경험에 의하면, 이후에도 계속 넘어집니다만,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일어나 회복,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넘어질 때마다 마음이 참 힘들지만, 그러면서 더욱 자신에 대해서는 낮아지고 겸손하여지며, 부인하며 내려놓게 됩니다.

 

다음 13절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신앙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에 있어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생각하면서 행동은 진리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와 관련해서 계시록 해설 409번 글의 7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속 사람이 열리고, 그때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섬긴다. 겉 사람은 섬기기 때문에 종이라 부르고, 속 사람은 자기 의지대로 하기 때문에 주인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속 사람이 닫히고, 겉 사람이 열린다. 겉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이 닫힐 때, 사람은 하나의 주인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고, 다른 주인 즉 주님과 천국을 미워한다.” With those who love the Lord and heaven cove all things,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is open, and the external or natural man serves it; then the latter is a servant because it serves, and the former is a master because it exercises its will; but with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is closed, and the external or natural man is open; and when the latter is open and the former closed, the man loves the one master, namely, himself and the world, and hates the other, namely, the Lord and heaven. (AE.409:7)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이 열린다는 것은 겉 사람이 세상 또는 지옥을 향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멀리할 때는 주님을 향한 마음인 속 사람이 열리고요, 주님을 멀리할 때는 겉 사람이 세상과 지옥을 향해 열립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동시에 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계에 밸브가 달린 것처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밸브가 하나 있고, 겉 사람과 지옥 사이에도 또 하나의 밸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열리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닫히고, 다른 하나가 열리면 다른 하나는 닫히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고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신앙인들이 한 손으로는 선을 행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악을 가까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차지도 덥지도 않다 하시고 토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인애를 베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점검해서 모든 종류의 악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주님 한 분만 섬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애굽인들로부터 금은 대접들과 옷가지를 빼앗아 가지고 나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민수기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족과 싸워 이겼을 때 그들의 부녀와 가축과 재물들을 모두 탈취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애굽인이나 미디안족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마음이 애굽인이며, 미디안족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극복할 때, 그동안 세상을 섬겼던 모든 지식들이 오직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이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애굽의 재물과 미디안의 재물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을 세상을 섬기는데 쓰지 말고, 진정한 친구인 진리와 주님을 사귀는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아멘

 

 

원본

2021-06-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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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AE.763),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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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1-21(D1)-주일예배(2526, 눅16,1-8), ‘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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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 쓰라, 팔십이라 쓰라’의 속뜻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16:1-8)

 

 

신구약 말씀에서 ‘’과 ‘행위’, 그리고 ‘행함’과 ‘사랑’이란 말이 그렇게나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일이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도,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신앙으로부터 분리해 온 이래, 지금은 또 이 둘을 교묘하게 신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해설 763:2) But inasmuch as they find in the Word of both testaments “works” and “deeds,” as well as “doing” and “loving,” so frequently mentioned, they can do no otherwise than affirm that one ought to live well; but since they have separated works or deeds from faith as not justifying and saving, they craftily join these and faith together, (AE.763:2)

 

 

오늘 말씀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있고, 인애(仁愛, 체어리티charity)의 삶은 없는 교회, 또는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 오늘 설교를 처음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달리 개신교 장로교 통합 가정에서 태어나 침례교인이 된 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순수하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된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개신교인들은 사실 겉으로 봐서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만, 그러나 제가 속했던 교회들이 대체로 괜찮은 교회였을 수도 있고, 또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인 1700년대 중반 유럽 기독교회 때와는 또 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주님 보시기에는 그나마 한국 기독교회가 좀 나을 뿐, 세상이, 곧 교회가 종말을 향해 점점, 더욱 아주 심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청지기가 외적인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이 세상 청지기는 대개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할뿐, 주인 입장에서 정성껏 일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쌓아 두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거나, 사용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이 청지기에게 더 이상 청지기의 직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에서 내쫓거나 직분을 빼앗으시지는 않으시는데요, 그러면 이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신 건 무슨 뜻일까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내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나마 있던 외적인 신앙마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외적인 신앙으로 시작합니다. 외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믿음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도 나오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교리대로 살지는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외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외적인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점진적으로 내적인 신앙, 즉 삶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로만 주님을 믿고, 실제 삶은 그 반대가 될 수 있으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나중에는 신앙의 진리마저 부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존재했던 많은 교회들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외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중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진리도 부인하는 상태에 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청지기가 직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지요. 3절에서는 주님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린 신앙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직분을 빼앗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외적 신앙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았던, 내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종국에 가서는 그 신앙, 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의 순수함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내가 하나님도 잘 믿고, 이웃을 섬기려는 마음도 있었지 하는 감상에 빠지거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있어 순수했던 때로 돌아가려 해도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땅을 파는 것은 샘(fountain)을 얻기 위한 노력을 뜻하고, 샘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 신앙 안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믿음에 반하는 삶을 살았다가는 어느 순간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때부터는 말씀을 읽어도 더 이상 진리를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 했습니다. 이 비는 것(begging)은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어먹자니 부끄럽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앞에 겸손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청지기가 마침내 무서운 결심을 합니다.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말씀의 선과 진리를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빚진 자가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졌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선한 일을 통해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백 말의 백(100)이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청지기는 증서에 오십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오십(50)은 보통 작은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백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증서에다 오십이라 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채무가 모두 변제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믿음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외적 교회들이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7절에 청지기가 밀 백 석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 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밀은 기름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하고, 팔십(80)은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의미로 일곱째 날(7일), 즉 안식일은 거듭난 상태를 의미하고, 그다음 날인 여덟째 날(8일)은 천국에서 새로운 시작, 즉 구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밀 백 석을 빚진 사람에게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갚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청지기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했다고 합니다. 교회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잘못 가르칠 때 주님께서 과연 칭찬하실까요? 주님은 그런 교회나 사람들을 칭찬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칭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의 교활하고 영악함에 감탄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교활한 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교묘한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빛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해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빛의 아들보다는 감각적이고 추론, 논리, 말재주에 능한 사람, 교활한 사람들이 권세도 얻고, 부도 얻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7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정한 청지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부정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지는 않는 교회와 그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이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롯의 아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면 나중에는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사람이 되고, 종래에는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 주류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 재물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인간의 지식을 더 믿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외적으로만 경건하고, 내적으로는 공허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부정한 청지기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그들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청지기는 자신이 영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주님 앞에 겸손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왜곡, 다른 사람의 구원마저 가로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621번 글 6번 항에는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날 때부터 갖고 있던 유전 악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있게 됩니다. 회개는 사람이 악을 행하고자 마음먹는 걸 그만두는 것, 그건 하나님께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 앞에 고백, 도와주시기를 구하며, 악을 삼가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수록, 그리고 주님을 믿을수록 그의 죄는 용서되지요. (참된 기독교 621:6) [6] The angels said further, “Man must repent of his sins in order to be saved, and unless he repents he remains in the sins into which he was born; and repentance consists in man’s ceasing to will evils because they are contrary to God, searching himself once or twice a year, seeing his evils, confessing them before the Lord, praying for help, refraining from evils, and beginning a new life; and so far as he does this, and believes in the Lord, his sins are forgiven.” (TCR.621:6)

 

주님께 도움을 구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했고,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매일 살피시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 모든 종류의 악에서 벗어나시기를, 물러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29, 30)

 

아멘

 

 

원본

2021-05-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1-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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